구약/욥기(구속사)

욥기6장,언약적자비(헤세드)를 호소하는 욥

호리홀리 2016. 3. 1. 09:28

7장까지 엘리바스의 변론(4,5)에 대한 욥의 첫번 답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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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에서 엘리바스는 `분노가 미련한 자를 죽인다'고 함으로써 욥을 은근히 질책한바 있는데, 본문은 그것에 대한 욥의 반박이다. 즉 고통에 처한 자가 그 고통을 토로한다고 무조건 질책만 할 것이 아니라, 먼저 그 고통이 얼마나 심각한지를 참작해 보아야 한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본문은 욥의 상황을 고려하지 않고 자신의 인과 응보적인 변론만을 전개한 엘리바스의 태도에 대한 욥의 반박이라 하겠다. 나아가 이 말속에는 욥의 자기 변호의 의도도 내포되어 있다. , 그가 당하는 고통은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극심하며, 다라서 죽음을 갈망하는 자신의 행위와 말(3)이 자연스럽게 나올수 밖에 없었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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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다 모래보다도 무거울 것이라 - `바다 모래'는 성경에서 대부분 셀 수 없는 많은 수를 상징하기 위해 사용되었다(22:1; 32:12; 41:49; 11:4; 7:12; 삼상 13:5). 그런데 여기서는 잠 27:3과 마찬가지로 `무거움'을 상징하기 위해 사용되었다(H-artley). 고대 히브리인들은 `'(27:3)과 마찬가지로 허다한 모래 또한 무거움의 대명사 격으로 표현하였다.

 

 나의 말이 경솔하였구나 - 본문은 다음과 같이 두 가지로 해석된다. (1) 죄의 시인: 욥은 3장에서 자신의 잉태와 탄생을 저주(3:1, 3-11)하며 죽음을 갈망하였다. 따라서 본절에서 욥은 그것이 비신앙적 행위였음을 시인하고 그 죄를 고백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별 타당성이 없다. 왜냐하면 본장에서도 욥은 3장에서와동일한 태도를 취하고 있기 때문이다. 오해려 보다 더 적극적으로 죽음을 갈구하고 있다(9-11). 만일 욥이 3장에서 나타난 자신의 행위를 부당한 것으로 여기고 회개했다면 여기서 동일한 행위를 반복할 이유가 전혀 없다. (2) 자기 변호:욥의 고난은 측량할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하다(2). 그것은 바다의 모래보다도 무거우며(본절 상반절), 따라서 그의 현재의 말과 행동이 정당하다는 뜻이다. , 3장에 나타난 그의 말이 그의 고난에 비추어 볼 때 정당하다는 의미이다. 도리어 그를 은연중 `미련한 자'(5:2)로 매도하려 한 엘리바스가 경솔한 자였다고 본다. 이 해석은 전후 구절들을 참고해 볼 때 타당하다 하겠다. 왜냐하면 2절에서 자기 고통의 심각성을 토로한 욥이 4-6절에서는 그 고통으로 인한 자신의 토로가 정당한 행위임을 거듭 주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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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능자의 살이 내 몸에 박히매 - 여기서는 하나님의 징계, 보다 직접적으로는 욥에게 주어진 일련의 재앙을 가리킨다(1:13-19; 2:7,8). 이처럼 하나님을 `용사'(勇士) 또는 `궁수'(弓手), 그의 진노(징계)를 그분이 쏘는 화살로 각각 비유하는 것은 성경에서 흔하게 발견된다(32:23, 42; 7:13; 21:12; 45:5; 3:13, 14 ). 여기에서 보듯 일단 욥은 자신에게 주어진 재앙을 하나님께서 주신 것으로 인정한다. 그러나 `'(why) 그것을 주셨는가에 대한 대답을 얻지 못한고로 그의 갈등은 지속된다.(7:20; 16:12, 13 ).

 

 나의 영이 그 독을 마셨나니 - 이 말은 `그 독이 내 영혼을 삼켰다'(KJV, thepoi-son whereof drinketh up my spirit)로 해석하면 쉽게 이해된다. 여기서 `그 독'이라 함은 앞절에 나온 `화살의 독'(NIV, RSV, their poison)을 가리킨다(pope,Dahood). 고대인들은 사냥을 할 때 화살의 끝에 독을 묻혀 쏘곤 했는데, 욥은 이러한 비유를 사용함으로써 마치 독화살을 맞은 짐승이 그 독성이 온몸에 퍼짐으로 인해 차츰 죽어가듯, 하나님의 진노(화살)를 받은 자신이 점점 더 깊은 절망과 회의의 늪으로 빠져 들어가는 상태를 나타내고 있다. 특히 본절 상 반절에서는 `화살'`'에 박혔다고 했으나 하반절에서는 그 `화살의 독'`그의 영'을 삼킨다고 표현함으로써 `신체'에서 `영혼'으로까지 이행(移行)되어 가는 그의 고통을 강조하고 있다.

 

 하나님의 두려움이 나를 엄습하여 치는구나 - 욥이 당하는 고뇌의 핵심을 가장 정확하게 표현해 주는 구절이다. 욥은 자기에게 연속적으로 주어진 일련의 재앙의 주체를 하나님으로 인식하고 있었다(4a). 그런데 그가 하나님으로부터 그러한 재앙을 받았다는 것은 그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진노의 대상(형벌의 대상)으로 여겨졌음을 의미한다고 생각했다. 바로 이것이야 말로 욥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이었다. 재산, 자손, 건강을 상실하는 것보다도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 그와의 관계가 단절되는 것이 그에게는 가장 참을 수 없는 형벌이었다. 점점 가중되는 하나님의 재앙 속에서 그는 자신과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는 전조(前兆)를 예감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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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절에서 욥은 팔레스틴에서 흔히 발견될 수 있는 일상적 소재를 사용하여 자신의 주장을 `수사 의문문'의 형식으로 표현하고 있다. `나귀'(KJV, RSV, wild ass)와 소는 먹을 풀이 풍족히 있으면 결코 울지 않는다. 이와 마찬가지로 욥 자신도 정상적인 환경이라면 결코 비탄과 불평(3)을 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의미이다. , 욥이 불평하는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는 자기 변호의 말인 것이다. 특히 `나귀'`'의 울음에 자신의 비탄(불평)을 비유한 것은 마치 먹을 것이 없을 때 그것들이 우는 것이 자연적이며 본능적이듯, 그의 현재의 불평도 그와 같은 성질의 것임을 사실적으로 나타내기 위해서이다. 따라서 이 말 속에는 욥의 불평을 미련한 것이요 시기하는 것(5:2)이라고 은근히 꼬집은 엘리바스에 대한 책망도 숨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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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절은 다음과 같이 두 가지 측면에서 해석될 수 있다. (1) 엘리바스에 책망 : 엘리바스의 변론(4, 5)은 욥의 고난의 본질과는 동떨어져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욥이 `' 고난받는가 하는 질문에도 해답을 제시해 주지 못했다. 도리어 엘리바스는 자기 변증적인 일반론으로 변론을 일관함으로써 욥의 심중에 고통을 가중시켰다. 이런 측면에서 볼 때 그의 변론은 마치 소금을 치지 않아 간이 맞지 않은 음식, 그래서 사람의 입맛에 구역질을 일으키게 하는 음식처럼 욥에게 무미 건조하고 아무 의미가 없었던 것이다. 또한 그것은 달걀의 흰자위처럼 핵심에서 이탈해 있었다(Anderson, Habel).(2) 욥의 자기 변호 : 일반적으로 간이 맞지 않는 음식은 거부감을 일으킨다. 그것을 먹는 것은 고역스런 일 중의 하나이다. 그리고 사람들은 달걀의 흰자위를 그 노른자 위에 비해 맛없는(영양가 없는)것으로 여긴다. 따라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러한 것(싱거운 음식, 달걀의 흰자위)을 싫어한다. 욥에게 있어서 그의 고난이 바로 이 같은 성격의 것이었다. , 그것은 지극히 싫어하는 음식과 같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먹어야만 하는, 즉 하나님께서 주신 고난을 인내해야만 하는 데에 그의 고통이 있었던 것이다. 이 두 가지 해석이 모두 가능하겠으나 전자의 해석이 좀더 타당하므로 여기서는 그것을 취하기로 한다.

 

 닭의 알 흰자위 - 이것에 대해서는 의견이 구구한데 그 대표적인 것을 들면 다음과 같다. (1) 멀건 흰죽(공동 번역) : 일반적으로 죽에는 소금을 넣지 않아 그 맛이 없다. 마찬가지로 엘리바스의 변론도 그것처럼 아무런 맛과 효과를 내지 못했다는 것이다. , 이 해석은 `닭의 알 흰자위'를 앞절에 나온 `싱거운 것'과 동일시하고 있다.(2) 쇠비름의 즙액(Anderson, Harthey, Keil and Delitzsch) : 쇠비름(purslane)은 팔레스틴의 길가나 밭 같은 데서 흔히 발견할 수 있는 1년생 풀로서 그 즙액에서 아무 맛도 없다. 엘리바스의 변론도 이와 대동 소이(大同小異)했다. 따라서 이 해석 역시 (1) 과 마찬가지로 상반절의 내용을 반복, 강조하고 있는 것으로 보는 셈이다. (3) 꿈결에 흘린 침(Tur Sinai) : 이는 `'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할라무드 를 꿈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헬렘'에서 파생한 것으로 보아, `'으로 번역하는 데에서 기인한다. 그리고 달걀의 `흰자위'`'으로 보는 이유는 삶지 않은 달걀의 흰자위가 끈적끈적한 것처럼 잠결에 흘린 침 역시 그러한 성질을 갖고 있다는 데에 있다. 이 해석법을 따를 경우 엘리바스의 변론에 대한 욥의 반응은 더욱 신랄한 것으로 된다. , 꿈결에 흘리는 침이 그 끈적거림과 악취로 인해 구역질 나게 하듯, 엘리바스의 변론 역시 욥의 기분을 몹시 상하게 하였다는 것이다. (4) 닭 알의 흰자위(개역 성경 탈굼역). 이중 어떤 해석법을 취하든 본문이 엘리바스에 대한 욥의 질책, 또는 욥의 현재 고난에 대한 자기 변호를 담고 있다는 데에는 변함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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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은 엘리바스의 변론을 먹기 싫어하는 음식에 비유한 데 이어(6), 여기서는 그것을 만지기 조차 싫어하는 음식에 비유함으로써 그의 주장을 일고의 가치도 없는 것으로 단정해 버린다. 이는 욥이 감정적으로 격앙되어 있었음을 보여준다.

 

 못된 식물 - `나를 아프게 하는 음식'(NIV, food makes me ill), `나를 짜증나게 하는 음식'(RSV, food that is loathsome to me)' `몸이 아플 때에나 먹는 것'(공동번역), `나의 슬픈 음식'(KJV, my sorrowful meat)등 다양하게 번역된다. 이러한 번역들이 가능한 것은 개역 성경에서 `못된'으로 번역된 히브리어 `데와이'`(병이 들어)쇠약해지는', `혐오하는', `슬퍼하는'등의 다양한 뜻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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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8,9

본문은 3장에 이미 나타난 욥의 간구를 재확인하고 있다. 3장에서 욥은 자신의 죽음을 갈구하였던 바, 여기서 그것을 다시 반복하여 피력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 보아야 할 사항은 다음과 같다. (1) 죽음에 대한 욥의 갈구 : 3장에서 욥은 자신의 죽음을 강하게 나타낸 바 있다. , 그는 () 차라리 잉태되지 말았으면(3:3-10), () 탄생하지 말았으면(3:3-10), () 탄생하였으되 일찍 죽었음다(3:11-19)하고 소망하였다. 그런데 여기서는 이러한 소망의 연장선상에서 () 지금이라도 죽었으면 하고 갈구한다. 이처럼 욥은 죽음의 가능성을 여러 가지로 설정하고 그 가능성들이 한 가지씩 실패로 돌아가자 또 다른 가능성을 모색한다. 이렇듯 집요하게 죽음에 집착하는 1차적 이유는 욥이 당한 고난의 심각성에 있다. 그러나 보다 궁극적인 이유는 풀길 없는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욥이 신앙적 혼란에 빠졌으며, 더 이상 현생(現生)에대한 소망을 둘 여지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2) 엘리바스의 변론에 대한 정면 거부 :엘리바스는 그의 변론에서 죽음은 악인에게 임하는 하나님의 최종적 형벌이요 심판임을 강하게 설파하였었다(4:9). 그리고 욥에게 고난 중에 하나님께 기도할 것을 권면하였다(5:1,8). 그러나 여기서 욥은 도리어 죽음을 강하게 염원함으로써 이 같은 엘리바스의 권면을 정면으로 거부한다. 향후 전개될 욥과 그의 친구들간의 변론에서 긴장과반목이 야기되는바, 이 같은 욥의 태도도 그 원인이 되었을 것이다. (3) 욥의 신앙 :욥은 여전히 죽음을 갈망하는 가운데에서 그 죽음의 주권자가 하나님이심을 명백히 고백하고 있다. , 인간의 생사(生死)를 좌우할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뿐이심을 그는 철저히 인식했다. 이러한 인식이 없었더라면 아마 그는 인내의 한계에 봉착하여 자살을 도모했을런지도 모른다. 피할 수 없는 고난 중에서도 그 고난의 조성자가 하나님이시며(4), 자신은 그 고난을 회피하기 위해 죽음을 갈구할 수는있을지언정 그것을 도모할 수는 없다는 것이 욥의 믿음이었다. 바로 이런 점에서 욥은 세속적 염세주의자(pessimisti), 또는 현실의 한계 상황을 회피하기 위해 자살을 정당시한 후기 스토아주의자(Later Stoic)들과 명백히 대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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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거룩하신 이의 말씀을 거역지 아니하였음이니라 - 본문은 한편으로, 하나님 앞에서 끝까지 신앙 절개를 지켜 왔노라고 하는 욥의 신앙 고백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고백 속에는 자신의 허물을 책망하려 들었던 엘리바스에 대한 반발과 변호의 심리가 다분히 내포되어 있다. 욥은 하나님으로부터 두 번씩이나 인정을 받은(1:1, 8; 2:3) 거룩한 자였다. 그러나 엘리바스로부터 직접적이진 않지만 간접적으로 그 자신의 의를 의심받고, 죄를 추궁당했다(4:6-11; 5:2-7). 아마 이에 대한 반작용으로 욥은 자신의 의를 내세우고 있는 듯하며 29절에 가서는 그 강도를 더욱 높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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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바스는 욥에게 하나님의 징계를 받는 자가 누릴 축복에 대해 약속한 바 있다(5:17-27). 그러나 욥의 현재 상황은 그 같은 약속과 너무나 동떨어져 있었다. , 엘리바스는 소유(5:24)와 자손(5:25)의 축복을 약속했으나 욥에게 있어서 그것은 한낱 공허한 언설(言說)에 불과했다. 더욱이 잃어버린 건강(2:8, 9)을 다시 회복한다는 것(5:18, 19)은 사실상 불가능한 것처럼 보였다. 이러한 욥의 현 상황은 절망의 연속이며, 어떤 측면에서 절망 그 자체였다. 따라서 그는 참고 인내하여 회복될 미래를 소망하기 보다는 차라리 현재에서 죽음을 요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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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절은 신앙의 위인인 욥 자신도 여느 인간과 마찬가지로 유한한 능력을 지닌 존재일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이 토로되어 있다. , 상반절은 정신력(기력)의 한계를 후반절은 육체()의 한계를 나타낸다 하겠다. 여기서 정신력이라함은 고난 중에서도 하나님께 대한 신뢰를 상실하지 않는 신앙 의지를, 그리고 육체라 함은 고난, 특히 전신에 퍼진 피부병(2:8, 9)을 인내하는 육체적 능력을 각각 가리킨다. 요컨대 욥은 그 정신력과 육체에 있어서 한계 상황에 다다랐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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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의 지혜가 내게서 쫓겨 나지 아니하였느냐 - 불의의 재난을 당한 욥은 그것을 타개하기 위해 나름대로의 노력을 경주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 같은 재난을 주신 하나님의 의도가 어디에 있는지에 대해서도 진지하게 물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만족할 만한 결과를 가져오지 못했다. 따라서 본절은 욥이 삶의 위기를 해소할 능력(RSV, any resource)이 전혀 없음을 토로한 것이다. 한편, 본문의 `지혜'`생명의실제'(Lange), `구원'(Noyes), `회복'(Conat)등으로도 해석된다. 만약 이 해석법을 따를 경우 본절은 구원과 회복(건강 회복, 자손과 소유의 번성 등)의 가능성이 전무(全無)한 욥의 절망감을 토로한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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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절은 다음과 같이 해석되어야 그 뜻이 통한다. `절망한 자는 그의 친구들의 헌신(동정)을 받아야 한다. 심지어 하나님께 대한 두려움을 포기한 자라 할지라도 그리하여야 한다'(NIV, A despairing man should have the devotion of his friends,even thougth he forsakes the fear of the Almighty). 여기서 욥은 엘리바스의 태도에 대해 직접적인 비난을 나타내고 있다. 즉 자신에게 진정으로 요구되었던 것은 온후한 동정과 사랑의 말이었으되, 엘리바스의 변론에는 그것이 결여되어 있었다. 더욱이 엘리바스가 이미 은연중 지적한 것처럼 욥이 죄를 범했다고 할지라도(4:7, 8) 엘리바스는 욥을 권고하고 동정하는 참다운 우정을 보여주었어야 했다는 사실이다(17:5; 19:21, 22). 실로 엘리바스를 비롯하여 욥의 친구들에게서 부족한 것이 있었다면 진정한 사랑에서 출발한 이해였다. 우리는 여기서 타인에 대한 권고의 말을 할때는 그 말이 지니는 논리성이나 말의 유창함이 아닌, 그 사람의 정황에 대한 전적인 이해와 사랑으로 하여야 함을 교훈 받을 수 있다. 이런 측면에서 사도 바울은 타인, 심지어 범죄한 자를 권고할 때라도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으로(6:1)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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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의 형제 - 원문상으로는 복수형(KJV, RSV, My brethren)이다. 4,5장의 변론이 엘리바스 단독으로 선포되었음에 비추어 볼 때 이러한 복수형은 모순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1) 비록 엘리바스가 4,5장의 변론을 독자적으로 설파하기는 했으나 그것은 실제적으로 엘리바스, 빌닷, 소발 등 세 친구의 공동 변론과 다름 없었다. 왜냐하면 5:27에서 엘리바스는 자신의 변론을 `우리의 연구한 바'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2) 욥과 그의 친구들과의 변론은 매우 자유스러운 대화(discussion or dialogue)의 형식이었을 것이다. , 그것은 우리가 현재 접하고 있는 것처럼 한 사람이 긴주제를 변론(또는 강연)하는 식이라기 보다는 짤막한 대화로써 구성되었을 것이다.그런것을 본서 저자가 극시(劇詩) 형태에 맞게 각 사람의 대화를 일목요연하게 재조정내지 편집했을 가능성이 높다. 이런 측면에서 볼 때 엘리바스와 함께 그의 다른 친구들이 욥에게 말했을 가능성도 있을 수 있다. 따라서 욥은 그들을 염두에 두고 `나의형제들'이라고 지칭했을 듯 싶다.

 

 시냇물의 마름 같고 개울의 잦음 같구나 - 팔레스틴 지역의 어디에서나 발견할 수 있는 와디(wadi)의 특성을 들어 욥은 친구의 변덕스러움과 불성실을 비난하고 있다.여기서 `시냇물'`개울'은 공히 `와디'를 가리키는데, 이것은 비가 오면 금방 물이 불어나다가도 비가 그치고 조금만 지나면 그 강바닥이 드러나 보일 정도로 메말라 버린다. 이러한 현상은 팔레스틴 지방의 지층(地層)이 물을 오래 가두어 둘 수 없는 모래와 자갈 들로 주로 형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와디는 농부와 행인(行人)에게있어서 전혀 쓸모없는 무용지물(無用之物)과 마찬가지였다. 왜냐하면 물이 절실히 필요한 건기(乾期, 5월 중순부터 10월 말까지)에는 메말라 있으며, 그 반대로 물이 필요없는 우기(雨期, 11월부터 다음해 5월 초순까지)에는 비로 인해 와디가 넘쳐 흘러 버리기 때문이다. 욥에게 있어서 그의 친구들도 이와 같았다. , 그들은 욥이 절실히 필요로 했던 따뜻한 동정과 위로는 주지 않고 자기 중심적인 변론과 주장으로 욥의 심화(心化)를 자극시켰던 것이다. 그러므로 욥은 그들에게 일종의 배신감(RSV, My bre-thren are treacherous)과 속았다는 느낌(KJV, my brethren have dealt deceitfully)을 갖게 되었으며, 이로 인해 그들을 신뢰할 수 없는 존재(NIV, my brothers are asundependable)로 여기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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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6,17

본절에서는 15절에서 토로된 친구에 대한 욥의 책망이 더 신랄해진다. 일반적으로 팔레스틴 고지대, 특히 길르앗(Gilead)이나 바산(Bashan)지역에는 겨우내 눈이 내린다. 기온이 더 하강하면 산의 협곡의 물들이 얼게 되며, 종종 그 얼음 위에 또다시 눈이 내려 겹겹으로 얼게 되기도 한다(16b). 그런데 봄이 되어 기온이 올라가면 이들의 녹아 흘러내리게 되는데 대개 이때에는 주변의 흙과 먼지, 얼음 조각, 자갈, 암석, 잡초덩이 등이 함께 휩쓸려 내려온다. 따라서 자연히 그 물빛은 검은 색을 띠게 된다(1 6a). 여러 지류(支流)가 합쳐진 본류(本流)에서 그 물은 넘쳐 흐르게 된다. 그러나 얼마 가지 않아 그 양은 급격히 줄어들며 정작 물이 절실히 필요한 여름철에는 아예 강바닥이 마른다(17). 욥의 친구들도 그가 절실히 필요했던 때에는 멀리 떨어져 있었던 존재들이었다. 한편 본절의 내용을 기초로 볼 때 욥의 고향은 레바논 인근 지역이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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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절은 그 주어를 무엇으로 보느냐에 따라 그 뜻이 달라진다. (1) 와디(wadi)의 수로(水路)로 볼 경우 : 와디의 수로는 그 발원지(發源地)에서는 넓고 크며, 또 거의 한갈래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나 하류로 내려올수록 그것은 여러 갈래로 나누어져(支流) 각기 다른 지역으로 흐르게 된다. 따라서 자연히 그 물의 양이 격감하게 되며 어떤 것은 사막으로 흘러들어 수로의 흔적조차 사라져 버리게 된다. 본문은 이것을 `광야로가서 죽고'로 표현하고 있다. 이러한 해석법은 델리취(Delitzsch), 데이빗슨(A. B.Davidson), 부드(K. Budde), 히찌히(F. Hitzig)등에 의해 주장되고 있다. 그러나 본절에서 `떼를 지은 객'을 지칭하는 히브리어 `아르호트'19절에서도 `'(대상)를 분명히 지칭하고 있기 때문에 이 해석은 무리가 따른다. (2) 떼를 지은 객(NIV, Caravans)을 주어로 볼 경우 : 일반적으로 여행객, 특히 장거리 여행자들은 수통(水桶)을 준비하여 그곳에 물을 채운다. 사막으로 이루어진 팔레스틴 지역에서는 더욱 그리하였을 것이다. 그런데 장거리 여행을 하는 도중 그 수통에 물이 떨어지면 그들은 시냇가를 찾는다. 이때 만약 시냇가가 말라 있으면(17) 그들은 물을 찾아 상류로 이동하게 될 것이며, 나중에는 수원지(水源池)인 협곡이나 산지까지 다다르게 된다(Driver & Gray). 그래도 찾지 못하면 그들은 광야로 나와 방황하다가 결국 갈증 때문에 죽음을 맞게 된다. 이 같은 해석은 쉴로트만(Schlottman), 히르첼(Hirzel), 에발트(Ewald), 랑게(Lange)등에 의해 주장되며 본장의 전후 문맥상 타당하다. 욥은 자신의 고난의 해결책을 찾아 방황했으나 결국 실패하고 비애감만을 맛본 자신의 심경을 물을 찾는 여행자에 비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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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데마 - 이스마엘의 후손으로서 주로 무역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었다(25:15). 그리고 이들의 거주지는 에돔 근방의 아라비아 지역으로 알려진다(21:4; 25:23) 따라서 본문의 `'라는 말은 `대상' (隊商, RSV, NIV, caravans)을 가리키는 것으로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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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절은 장거리 여행을 하는 자들이 시냇물을 찾았으나 그것이 메말라 있음을 발견한 직후의 허망한 심정을 묘사함으로써 현재 욥의 심경을 생생하게 전달해 준다. , 그들은 사막의 폭염(暴炎)아래서 갈증에 허덕이다 먼 발치에서 시내가 있음을 발견한다. 기뻐 뛰어가지만 그물이 메말라 있음을 발견하고 그들은 깊은 절망감과 당혹감에 휩싸이게 된다. 이는 마치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발견했으나 다가가 보자 그것이 신기루였음을 알아챈 직후의 심경에 비견된다 하겠다. 따라서 본문은 고난에 빠진 욥이 친구들로부터 인말의 도움을 기대했으나 오히려 냉담한 질책만 당한 자신의 참담한 심경을 토로한 것이라 하겠다(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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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너희가 두려운 일을 본즉 겁내는구나 - 여기서 욥은 자신을 위로하려 온 친구들의 이기적인 성향을 날카롭게 꿰뚫어 보고 있다. , 그의 친구들은 처음에는 욥을 동정하려는 진정 어린 충정심(衷情心)에서 찾아왔다. 그리고 욥의 고난에 동참하는 행위를 직접 보여주기도 했다(2:12, 13). 그러나 욥에게 내려진 재앙의 참혹함과 그것이 조만간 회복되어질 가능성이 희박함을 깨닫고 난 다음부터는 두려워하며 넌지시 발뺌하고자 했을 것이다. 아마 그들은 욥의 재앙을 하나님의 형벌로 생각했을 것이다. 즉 욥은죄인이요, 그 죄값으로 지금의 재앙을 겪고 있는 것으로 그들은 보았다. 따라서 그들은 본래의 태도에서(2:12, 13) 후퇴하여 욥에게 온후한 사랑과 동정의 행동( )을 나타내 주기를 주저하게 되었다. 만일 이러한 태도를 보였다가는 죄인()과 연합했다는 이유로 그들 자신들도 형벌을 받을 것으로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이러한 측면에서 그들의 신앙은 구약 초기의 `동태(同態)보복법'(talion)적 차원에 머물러 있었다(21:23-25; 24:17-21; 19:21). 그러나 14절에서 욥이 밝힌 것처럼 그 친구들이보여야 할 의당한 행위는 고난에 처한 자, 심지어 욥이 하나님을 떠난 죄인었다는 할지라도 그에게 온정과 위로를 보내는 것이었다. 예수께서는 의인뿐 아니라 창가와 세리 등을 사랑하시고(9:10; 21:31), 눌린 자에게 위로를 주심으로(4:18 ; 10:38) 이러한 모범을 몸소 보이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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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2,23

본문에 나타난 4가지 질문을 통해 욥은 그의 친구들에게 진심으로 기대했던 바가 무엇이었는지를 분명히 밝히고 있다. 그것은 예물이나 용맹스런 행위(23)가 아니라 14절에서 분명히 지적하고 있듯, 진퇴양난의 고통 중에 처한 욥에 대한 사랑(, 헤세드)이었다. 한편 23절에 나타난 `대적', `포악한 자'는 욥의 소유물을 약탈하고 종들을 죽인 스바인(1:15)과 갈대아인(1:17)으로 볼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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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욥은 직유법과 반어법을 사용하여 그의 친구들의 무정(無情)한 행위를 비난하였다. 그런데 여기서는 그 같은 문학적 기교를 전혀 사용하지 않고 직접적으로 그들에게 질책을 가한다. 따라서 본문의 전체적 분위기는 다분히 공격적이며 격앙(激昻)되어 있다. , 욥은 자신의 죄가 무엇인지 분명히 지적하라고 요구하고 있다.이 말 속에는 (1) 은연중 자신을 죄인의 동류(同流)로 취급한 엘리바스에 대한 강한 불쾌감과, (2) 자신은 그러한 비난을 받을 만한 범죄를 결코 자행하지 않았다는, 소위 자기 의에 대한 항변(10, 29), 그리고 (3) 만일 엘리바스가 욥의 범죄를 확신하고 있다면 암시적으로 언급하지 말고 직접적으로 얘기하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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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옳은 말은 어찌 그리 유력한지 - 문자적으로 번역하면 `정직한 말은 어찌 그리 힘이있는지'(KJV, RSV, How forcible are right words)이다. 그런데 NIV 와 포우프(M.H. Pope)`정직한 말은 어찌 그리 고역(비탄)스러운지'(NIV, How painful are honest words)로 번역하고 있다. 히브리 원어상 이 두 가지 번역이 다 가능하다. 왜냐하면 개역 성경에서 `유력한'으로 번역된 히브리어 `마라츠'`힘있는', `효과적인', `설득력있는', `기분좋은'등의 뜻을 가질 뿐 아니라(119;103), `비탄에 젖은', `고역스러운'등의 뜻도 함축하고 있기 때문이다(왕상 2:8; 14:17 ). 어떤 해석을 취하든 본문의 뜻은 변함이 없다. 즉 욥은 엘리바스의 변론이 부정직하며, 따라서 그 자신은 그 변론에 순복할 수 없다는 입장을 밝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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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망이 끊어진 자의 말은 바람 같으니라 - 본문은 다음과 같이 두 가지 측면에서 이해될 수 있다. (1) 욥의 자기 변호 : 일반적으로 격심한 고난에 처한 자는 이성과 논리를 떠나 자기 감정을 무자비하게 토해낸다. 마치 그것은 바람처럼 실체가 없는 허망한 것일 수 있다. 3장에 나타난 욥의 변론 역시 이러한 성향이 없지 않다. , 그는 가중되는 고난의 압박감과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의혹에 못이겨 가히 이성적으로 도저히 납득하지 못할 일들을 소원하는 말을 토해내었던 바, 이러한 것은 그의 고난의 와중에서 나온 것이므로 결코 이성적 판단 대상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고난으로 모든 소망이 상실된 상태에서 발설된 욥의 말을 책망하거나 비난하는 것은아무 필요도, 소용도 없다는 의미이다. (2) 친구들에 대한 비난 : 욥은 고난 중에 발설된 자신의 말이 그 친구들에 의해 정당히 받아들여 평가되기를 소망했을 것이다. 그러나 친구들은 그것을 마치 지나가는 바람처럼 별 가치없이 받아들였다. 아마 욥은 자신의 정황과 내적 고뇌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일방적으로 주어진 자기 변증적인 엘리바스의 변론 속에서 이러한 느낌을 받았을 것이다. 따라서 본문은 자신의 말을 사려깊고 분별력있게 받아주지 못한 그의 친구들에 대한 욥의 실망과 질책의 뜻이다. 대부분의 영역 성경은 `너는 절망한 자의 말을 바람처럼 취급하려는가?'(NIV, KJV, RS V,Do you treat the words of a despairing man as wind?)로 번역함으로써 이 같은 해석을 지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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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아를 제비뽑으며 - 앞에서 친구들의 부정직과 이기심을 비난(21, 25)한 욥은 여기서 그들의 무자비함을 책망하고 있다. 고대 히브리 관습에 비추어 볼 때 고아와 과부는 사회의 최하류 계층으로서 특별한 보호의 대상이었다(22:22; 14:29; 16:14; 27:19; 10:2).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종 사악한 자들은 채무 능력이 없는 과부의 자녀(개역 성경은 이것을 `고아'로 번역하고 있으나 원어상 `아버지가 없는 자'가정확함)를 놓고 제비뽑기를 하였다. , 돈을 지불받지 못한 데 대한 대가로 과부의 자녀들을 제비뽑아 노예로 삼거나 노예 시장에 팔았다(왕하 4:1; 5:5; 3:3; 1; 3:10). 이러한 무자비한 행위를 예로 들어서 욥은 친구들의 동정없음을 질책한다.

 

 너희 벗을 매매할 자로구나 - 본문은 다음과 같이 두 가지로 번역된다. (1) KJV의번역 : `너희 벗을 위해 구덩이를 팔 자로구나'(ye dig a pit for your friend). 이들은 개역 성경에서 `매매하다'로 번역된 히브리 동사 `카라'`파다'로 번역하고 있다. 그리고 히브리 원문에 나타나지 않는 `솨하트'(, 구덩이)를 보충하고 있다. 전후 문맥상 충분히 이 같은 번역이 가능하다. 왜냐하면 요셉의 예에서 보듯(37:24, 28) 고대인들은 자신의 대적자를 처치하기 위해 구덩이를 파고 그를버렸기 때문이다. (2) NIV, LB, ICC(Driver & Gray), 공동 번역, 랑게(Lange)번역 :이들은 개역 성경의 번역과 비슷하게 `너희의 친구들을 팔아넘길 자들이로다'(barteraway your friend)로 옮긴다. 절친한 친구를 상품으로 팔아넘긴다는 이러한 표현속에서 이미 욥과 그의 친구들간의 불신과 갈등의 벽이 깊게 자리잡고 있음을 감지할 수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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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제 너희가...원하노라 - 이 구절 앞에 반대 접속사인 `그러나'(NIV, RSV, But)를 첨가하면 뜻이 더욱 잘 살아난다. 지금까지의 경직된 질책의 어투가 변하여 온화한 간청조로 전환됨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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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는 돌이키라 - 이 말 속에는 두가지 요청이 함축되어 있다. (1) 나를 죄인으로 가정하는 일을 즉시 중단하라. (2) 나의 입장에서 보라. 욥의 현재 정황을 정확히 파악하지 못한채 주어진 친구들의 변론은 욥의 감정만 자극시켰다. 따라서 욥은 여기서 그들에게 기존의 입장에서 탈피하여 욥 자신의 위치에 서서 한 번쯤 다시 생각해보라고 권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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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혀에 어찌 불의한 것이 있으랴 - 여기서 다시 한번 욥은 지금까지 한 말 속에 잘못이 없음을 강조하고 있다(3절 주석 참조).

 

 내 미각이 어찌 궤휼을 분변치 못하랴- `궤휼'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본절은 다음과 같이 두가지로 해석된다. (1) `재난'(RSV, calamity)으로 볼 경우 : 이는 욥이 자신에게 임한 재난이 자신의 범죄에 대한 하나님의 징벌인지 아닌지를 분별할 수 있는 판단 능력을 충분히 가지고 있다는 의미이다. 욥의 재난의 성격을 규명함에 있어서 욥의 친구들은 은연중 그것을 욥의 범죄에 대한 하나님의 형벌로 보았다. 그러나 적어도 욥은 그 재난이 자신의 범죄에서 기인하지 않은 것만은 확신하고 있다. 요컨대 욥은 자신이 재난을 받을 만한 인물인지 아닌지를 분별할 수 있는 판단력과 이해력을 소유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해석은 `궤휼'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하와'2; 30:13에서 `재앙'으로 번역되어있음에 비추어 볼 때 가능한 시도이다(Schlottmann, Dillmann). (2) `'(KJV,perverse things ; NIV, malice)으로 볼 경우 : 이는 욥이 선악과 옳고 그름을 분별할수 있는 능력을 소유하고 있다는 의미가 된다. 즉 자신은 아직까지 도덕적. 지적 능력을 갖고 있으며, 따라서 어떤 문제가 논란이 될 때 그것을 충분히 분별할 수 있다는뜻이다(12:2, 3). 위의 두 가지 해석 중 어느 것을 취하든간에 본문은 공히 욥의 도덕적 판단 능력(또는 이해력)에 대한 자기 변호의 뜻을 내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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