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욥기(구속사)

욥기8장,시작은 미약 나중은 심히 창대

호리홀리 2016. 3. 3. 19:55

본절에서부터 시작되는 빌닷의 변론과 그의 태도에서 나타난 특징 몇 가지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이분법적 사고 : 일찍이 엘리바스는 악인은 징계를 받고, 의인은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다고 역설한 바 있다(4:7-11; 5:12-16). 빌닷 역시 그 같은사고 체계에 기초하여 하나님의 섭리를 파악하였다. 그러나 그의 사고 체계는 엘리바스의 그것보다 훨씬 단순하고 경직되어 있었다. 왜냐하면 엘리바스는 `의인=축복, 악인=징계(멸망)'라는 근본 원리를 고수하기는 하였으나, 종종 의인도 징계를 받는다는(5:17-27)사실을 인식하고 있었던 반면, 빌닷은 현실의 제반사가 `순전한 사람' (의인;20)`사곡한 자'(악인;13) 등 두 부류로 분류되며, 전자는 흥함(축복)을 받고 후자는 재난(멸망)을 받는다는 단순한 논리를 가지고 있었다. 요컨대 그는 극히 경직된 권선 징악, 또는 인과 응보적 차원에서만 하나님의 공의를 파악하고 있었던 것이다. (2) 조언자(위로자)의 자격 결여 : 악화 일로를 걷고 있는 병중에 빠진 욥에게 있어 절실히 요구되었던 것은 그의 심경을 충분히 이해해 주는 동정심과 따뜻한 위로의 말이었다. 실제 욥은 그의 친구들에게 무조건적인 동정과 이해를 피력하기도 하였다(6:14, 28). 그러나 본절에서 빌닷은 다짜고짜로 비난하는 투로 자신의 변론을 시작하고 있다. 그리고 자신의 사고체계(신앙관)에 근거하여 욥을 죄인으로 취급한다(2 -4). 이러한 그의 태도는 엘리바스의 그것보다 훨씬 더 매정하다. 그러므로 그는 참된 의미의 `상담자' , `위로자'이기 보다는 가혹한 `정죄자'(accuser)였다 하겠다. 이러한 빌닷의 태도 때문에 욥과 그의 친구들과의 반목은 더욱 심각한 양상으로 대립되어 갔던 것이다.

 

 네 입의 말이 광풍과 같겠는가 - 여기서 `광풍'이라는 것은 욥의 언설(言說)의 허탄함과 거셈을 비유한 것이다(15:2; 16:3; 왕상 19:11). 욥은 자신의 고통을 토로하는 중에 죽음을 의구(3)하고 친구들의 무정함을 신랄하게 질책(6:14-25)한 바 있는데 아마 빌닷은 이것을 염두에 둔 것 같다. 그러나 빌닷의 이 말은 위로를 바라는 욥의 심경과 까닭 모를 재난에 처한 그의 상황에는 적합지 않은 것이었다. 빌닷은 욥이 심경의 교란과 신앙의 갈등 상태에 처해 있으며, 따라서 그의 말이 때론 비이성적(비신앙적)이고 정도에 지나칠 정도로 과격할 수도 있다는 것을 참작했어야 했다. 실제 욥은 자신의 말이 `바람'(6:26)과 같이 두서없으며, 따라서 친구들에게 자신의 말을 꼬투리 잡아 책망하지 말 것을 간청한 바 있다(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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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절에 나타난 빌닷의 말은 변개(變改)할 수 없는 진리이기는 했다. 왜냐하면 공의로운 하나님은 그 심판과 해위에 있어서 왜곡되거나 그릇됨이 없기 때문이다(18:25). 그러나 그의 말이 욥의 현재 상황에 적합하지는 못했다. , 빌닷은 `순전한 자가 왜 고난에 처해야 하는가?'하는 욥의 신앙적 질문을 이해하지 못했던 것이다. 말하자면 빌닷은 지극히 전통적, 율법적인 자신의 신관(神觀)에 집착하여 욥을 반박하였던 것이다. 사실 욥 자신도 하나님은 공의로우시며 그 심판을 의롭게 하신다는 사실을 확신하고 있었다. 문제는, 이러한 그의 신앙(신관)이 현재의 자신의 상황과 모순을 일으키는데에 그의 고민이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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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바스는 욥의 자녀들이 범죄하여 재앙을 받았다는 사실을 암시적으로 언급하였다(5:4). 그러나 빌닷은 욥의 자녀들이 범죄하였다는 사실을 직접적으로 단정하고 있다 그러나 그의 주장은 정확한 상황 판단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단순히 주관적인 견해에 불과했다. 왜냐하면 욥은 그의 자녀들이 마음으로라도 범죄하지 않도록 정례적으로 성결 의식을 시행하였기 때문이다(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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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지런히 구하며 - 여기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티솨헤르'는 자신의 소원을 겸손하고 간절하게 구하는 것을 가리킨다.

 네 의로운 집 - `'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나웨'는 좁게는 `양 우리'를뜻하고, 넓게는 목자들의 거주지를 지칭하기도 하며, 여기서 `양 우리'란 특별히 하나님의 보호하에 있는 안락한 거주지를(3:33) 상징한다(Hartley). 한편 본문을 `너의 의로운 재물(소유)'로 보는 해석도 가능하다(your rightful estate; 5:3). 이는 욥이 소유했던 육축(1:3)을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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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은 전반부와 후반부가 대구를 이루는 형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 `시작'`나중', 그리고 `미약'`창대'가 각각 대구를 이루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전반부를 과거, 즉 욥이 재앙을 받기 이전의 상태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아서는 곤란하다. 왜냐하면 그때 욥은 막대한 부()와 번영을 구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1:2, 3). 따라서 이는 욥의 현상태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듯하다. 한편 후반부에 나타난 빌닷의 예언은 엘리바스의 그것과 일맥 상통하는 것으로(5:18-26), 그의 이러한 예언은 정확하게 적중되었다(4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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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10

여기서 빌닷은 자신의 논증의 진정성을 증명하기 위하여 고대의 지혜(the wisdom of ancient)를 들고 있다. 즉 자신의 말이 고대로부터 전승되어온 인간의 지혜와 보편적 원리에 어긋나지 않으며 따라서 욥에게 자신의 말을 받아들일 것을 은연 중 강요하고 있다. 이렇게 볼 때 빌닷의 사상 또는 신앙은 다분히 경험주의적인 요소가 농후하다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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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어제부터 있었을 뿐이라 - 본절에서 `우리'는 욥과 그의 친구들을 가리킨다. 그러나 보다 넓게는 `현세대'(現世代)로 볼 수도 있다. 그리고 `어제'는 과장법적 표현으로 짧은 시절을 가리킨다. 따라서 본절은 현세대가 그 경험과 지혜에 있어서 `옛시대', 또는 `열조'(8)와 비교될 수 없다는 말이다.

 

 세상에 있는 날이 그림자와 같으니라 - 이는 (1) 인생의 유한성과 짧음(14:2; 102:11; 40:6), 그리고 (2) 덧 없음을 나타낸 말이다. 욥도 이와 유사한 말을 하였다(7:7, 16). 그러나 양자는 서로 다른 의도에서 이런 말을 했다. , 빌닷은 인생은 그 짧음으로 인해서 스스로 어떤 중요한 지식이나 지혜를 얻을 수 없기에 과거에 경험에 의존해야 한다는 뜻에서 이 말을 하였다. 그러나 욥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된 삶 자체는 무의미하다는 뜻에서 이 말을 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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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왕골 -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고메'`마시다', `흡수하다', `빨아들이다'를 뜻하는 동사 `가마'에서 유래하였으며 파피루스를 뜻한다(2:3;18:2; 35:7). 이 식물은 고대 애굽 등지에서 많이 발견되는데 강변이나, 물이 고여있는 늪 지대에 분포해 있었다. 여기서는 `악한 자', `사곡한 자'를 상징한다.

 

 갈대가 물없이 자라겠느냐 - 여기서 `갈대'(*, 아후)는 전절에 언급된 파피루스의 일종으로서 `갈대', `갈대 풀'(41:2, 18)을 가리킨다. 이것 역시 앝은 강물 속에나 물이 고여 있는 늪 지대에 서식한다. 여기서는 `왕골'과 마찬가지로 `악인'을 상징한다. 한편 `'은 앞절에 나타난 `진펄'과 내용상 동의어로서 `세속의 헛된 소망' 또는 `헛된 의뢰처', `악행'(惡行)등을 상징한다. 그러므로 본절은 악인이 세속의 헛된 것 내지는 자신의 악행에 근거해 살아가므로 조만간 멸망당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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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절은 왕골과 갈대가 수분이 있을 동안에는 무성하고 신속하게 성장하나 수분이 말라버리면 곧바로 메말라 죽어버리는 것을 염두에 둔 표현이다. 이는 악인이 세상의 의지와 소망이 끊어질 때 그 존재 근거를 상실하고 멸망하게 될 것을 나타낸다. 이는 가뭄을 견디지 못하고 말라버리는 나무(1:3), 길가에 떨어진 씨(4:4), 돌밭에 떨어진 씨(4:5), 가시떨기에 떨어진 씨(4:7)의 종국과 다름없다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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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님을 잊어버리는 자의 길은 다 이와 같고 - 본문은 11, 12절에 대한 결론부라 할 수 있다. 여기서 `하나님을 잊어버리는 자'`왕골', `갈대'(11)와 더불어 `악인'또는 `사곡한 자'(13b)를 가리킨다. 악인은 마치 갈대와 왕골이 신속하고 무성하게 자라듯이, 그 행사가 번성할 수 있다. 그러나 얼마가지 않아서 그 형국이 파탄을 맞게된다(1:6; 1:19). 한편 본문에 나타난 `'(, 아르호트)`운명'(destiny, fate)으로 이해되어도 무방하다(Dhor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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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믿는 것 - `믿는 것'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키슬로'는 그 어원이 `허리'를 뜻한다. 이는 인체 구성상 허리가 힘의 근원인 것으로 여긴 고대인들의 관념에서 유래된 듯하다. 따라서 이 말은 `희망', `신뢰', `신망' 등을 상징한다(3: 4;3:26). 결국 본절은, 몸의 중심을 지탱하는 허리가 끊어지면 죽음에 이를 수밖에 없듯, 사곡한 자 역시 세속적 의지()가 끊어지면 절망에 이를 수밖에 없음을 뜻한다.

 

 거미줄 - 원문을 직역하면 `거미의 집'이다. 거미는 매우 힘을 들여, 그리고 많은 시간을 소요하여 정교하게 자기 집을 짓는다. 그러나 그줄은 매우 약하기 때문에 외부의 조그마한 충격에 의해서도 쉽게 허물어져 버린다. 이는 악한 자들의 결국에도 적용된다. , 그들은 세속적 책략과 공력(功力)에 의해 자기 행사를 도모하나 조만간 하나님의 심판의 불 앞에 전소되고 말 것이다. 이는 그들의 의지 대상 자체가 악하고 무의미학기 때문이다. , 그들의 성과는 외견상 화려하게 보이나 내실(內實)이 전무(全無)하기 때문이다. 이렇듯 악인은 거미가 허공에 거미줄을 쳐서 지은 집처럼 오래 보존되지 못하고 결국 망하게 된다. 한편 본문의 표현을 통해서 빌닷은 욥이 하나님을 의지하기 보다 세상적인 것에 의지함으로써 현재의 고난에 직면하게 되었다고 은근히 지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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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절은 악인의 번성을 나타낸 말이다. 종종 악인은 번성하되, 급작스럽게 그리고 크게 번성한다. 그것은 마치 급작스럽게 자라나는 풀, 또는 여름철에 온 뜰을 뒤덮는 무성한 잡초처럼 왕성하게 성장한다(49:22; 4:6). 그래서 외견상 생명과 기운이 넘쳐 흐르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번성은 일시적인 것이요, 영원하지는 않다. 왜냐하면 종말에 나타날 하나님의 심판의 불 앞에 악인의 헛된 영화는 소진(燒盡)될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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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력이 강한 식물은 그 뿌리를 단단한 지층에 둔다. 그 가운데 어떤 것은 돌 무더기 사이를 헤치고 뿌리를 박기도 한다. 대부분 암석과 자갈로 이루어진 팔레스틴 지방에 있어서 식물이 암석 사이에 뿌리를 내리고 성장하는 모습은 흔히 볼 수 있었다. 따라서 본문은 악인의 끈질긴 생명력을 가리킨다. 동시에 이것은 세속적 의지에 집요하게 집착하는 악인의 심성을 비유한 것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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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자리도 모르는 체하고...하리니 - 전체적으로 의인법이 쓰인 구절이다(33:29). 돌 무더기(17), 진펄, 그리고 물(11)등은 식물의 존재 기반이었다. 그러나 이제 식물이 그곳에서 뽑히게 되자 그들이 모른체 한다는 뜻이다. 이는 악인이 멸망당할때에 자신의 존재 근거로 부터도 따돌림을 당하며 모멸을 당할 것임을 비유한 것이다. 이처럼 악인은 종국의 때에 자신이 믿었던 것으로부터 버림을 당하는 비참함을 맛보아야 한다. 한편 빌닷은 악인의 급속한 번창과 비참한 최후를 식물의 빠른 성장과 순식간의 쇠퇴에 도시적으로 비유함으로써 자기 자신의 기존의 논리를 강화시키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은연중 욥을 죄인의 부류로 취급하는 잘못을 저지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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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길의 희락은 이와 같고 - 본문은 다양하게 번역된다. (1) `태양 가운데 그가 바짝 마른다'(Kaisein). (2) `확실히 그것의 생명은 소멸되어 버린다'(NIV, Surely itslife with hers away). (3) `보라 그가 자기 길을 새롭게 하리라'(Tur Sinai). 그러나 개역 성경의 번역을 그대로 취하는 것이 가장 자연스러울 것 같다. , 악인은 그의 번성으로 인해 타인으로부터 부러움과 존귀를 받기도 한다. 이로 말미암아 그는 자신의 인생 항로가 공고하며, 기쁨에 넘친 것으로 판단한다. 그러나 물을 빼앗긴 갈대가 창졸간에 시들어 버리듯(11), 돌 무더기에 뿌리를 박은 식물이 뽑힘을 당하여 완전한 멸망을 당하듯, 그의 최종 형국은 비참한 것으로 막을 내린다는 의미이다.

 

 그 후에 다른 것이 흙에서 나리라 - 이는 식물이 자랐다가 죽은 자리에 또 다른 식물이 성장한다는 의미로서 악인이 흥망한 자리에는 또 다른 악인이 그 전철을 밟아 일어난다는 뜻을 함축하고 있다. 빌닷의 이러한 논리는 결국 (1) 현세상에는 악인이 항상 존재한다. 그리고 (2) 그 악인은 성장했다가 시드는 풀처럼 예정된 파국을 맞는다는 의미가 된다. 이 주장을 좀더 극단화시키면 악인은 반드시 징벌을 당하고 그 반대로 의인은 반드시 보응을 받는다는 논리가 성립된다. 물론 이러한 그의 논조는 원론적인 측면에서는 지극히 타당한 것으로 평가될 수 있다. 그러나 현실의 구체적인 상황에서는 이러한 원리가 엄밀하게 적용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악인에 대한 심판이 연기되기도 할 뿐더러, 종종 악인의 흥왕이 목도되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의인은 축복을 받는 대신 악인의 압박을 받거나, 이유없는 고난의 굴레를 쓰기도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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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순전한 사람을 버리지 아니하시고 - 본문 역시 지금까지 전개된 빌닷의 사고의 연장에서 이해할 수 있다. , 그는 지금가지 악인에게 임할 심판을 설파한 데이어(11-18), 여기서는 의인에게 임할 하나님의 보호를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본절의 빌닷의 논리를 극단화시킬 경우 십자가상에서 죽으신 그리스도의 희생적 죽음마저도 죄의 결과로 보는 오류에 봉착하게 된다(27:43). 그러나 또 한편으로 볼때 빌닷의 주장은 분명히 진리이다. 왜냐하면 현상계에서는 종종 의인의 수난과 핍박이 발생하난 궁극적 차원에서는 의인이 반드시 그 의로움에 대한 보응을 받기 때문이다.

 

 악한 자를 붙들어 주지 아니하신즉 - 원문을 문자적으로 번역하면 `악인의 손을 붙들어 주지 않으리라'가 된다. 여기서 `손을 붙잡다'라는 표현은 어떤 대상에 대한 하나님의 확고한 보호와 인도하심을 상징한다(43:6; 51:18). 하나님께서는 잠시 동안은 악인의 손을 붙들어 주실지 모른다. 그러나 계속적으로 그들의 손을 붙들어 주시지는 않으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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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절에 나타난 히브리 원문의 접속사 `아드'를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본문의 내용이 달라진다. (1) `그리고'(and)로 볼 경우(Pope) : 이렇게 될 때 본절의 내용이 20절 하반부의 내용과 어울리지 않는다. 따라서 이 해석은 적당치 않다. (2) `그러므로'(Pulpit Commentary)로 볼 경우 : 본문이 20절의 사상을 요약하는 결구(結句)가 된다. 그러나 전체의 결구는 22절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하므로 이 해석 역시 타당성이 별로 없다. (3) `게다가'(Umbreit)로 볼 경우 : 이것 역시 (1)의 해석과 흡사한 것으로서 무리가 따른다. (4) `그러나'로 볼 경우 : 에발트(Ewald), 딜만(Dilmann), 슈티겔(Stickel), 뵈쳐(Bottcher)등이 주장하는 견해이다. 이 해석은 시 42:6 을근거로 하여 본 구절을 앞 절의 내용과 상반되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5) `동안에'(during)로 볼 경우 : 델리취(Delitzsch), 랑게(Lange)등이 주장하는 견해이다. 이 주장을 따를 경우 본문은 `(그가)네 입에 웃음으로 채우실 동안에 네 입술은 즐거움으로 채우시리라'(Lange Commentary)로 해석된다. 전후 문맥상 (4)(5)의 견해가 가장 무난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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