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욥기(구속사)

욥기10장,언약적자비를 호소하는 욥

호리홀리 2016. 3. 7. 20:25

 욥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대상을 하나님께로 전환하기에 앞서 욥 자신이 갖고 있는 암울한 심경을 반복적으로 표현한다. 욥이 세번에 걸쳐 이러한 반복 형식을 취한 것을 보면, 세 친구의 반응을 짐작할수 있다. , 친구들은 욥의 변증에 대해 냉소적인 태도를 보였던 것 같다.

 

 발설하고 -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에에즈바 알라이'를 직역하면 `나로 하여금 나에 대하여 말하게 하라'는 뜻이 된다(M. H. Pope). 따라서 욥은 자기 자신의 결백함을 떳떳하게 말하고자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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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를 정죄하지 마옵시고 - 욥이 대화의 상대자를 하나님께로 전환하면서 발설하는 첫마디이다. 이것은 욥 자신이 갖고 있는 괴로운 심경을 토로하기 전에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고 있는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이처럼 하나님의 은혜와 주권이 절대적이라는 사상은 본장 전체에 걸쳐 면면히 흐르고 있다(9, 12,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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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 - 전후 문맥상 본절은 욥 자신이 받는 고난을 염두에 둔 것이므로 이는 일반적인 창조물을 가리키기에 앞서 욥 자신을 지시한다고 볼 수 있다. 본 구절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예기아 카페카'인데 직역하면 `당신 손바닥의 역작'이라고 할 수있다. 일반적으로는 `마아세야데카', `당신 손의 작품'(the work of your hands)이라는 표현이 쓰인다(14:15; 34:19; 138:8). 혹자는 `예기아'가 하나님께서 수고로이 만드신 작품이라는 의미로 사용된 것이라고 제안한다(Hartley). 따라서 욥은 자신을 표현함에 있어서 이처럼 독특한 용어를 사용함으로써 하나님과의 특별한 관계를 나타내고자 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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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의 눈이 육신의 눈이니이까 - `육신'에 해당하는 `바사르'는 문맥에따라 `'(2:5; 6:12; 7:5), `'(4:15), `인생'(12:10)등으로 번역된다. 그런데, 이말은 하나님께서 만드신 피조물이라는 의미에서의 육신, 즉 제한성을 가졌다는 측면에서 `사람'을 주로 지칭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창조주로서 상대적인 분이 아니시고, 절대자이신 것을 강조하며 상기 시키려는 의도가 이 말속에 내포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예수께서 `너희는 육체를 따라 판단한다'(8:15)는 말씀에 비추어 볼때 더욱 분명해진다. 하나님의 독특한 속성 가운데 하나는 육체의 방법을 따라 판단하지 않으신다는 것이다. 이는 또한 하나님께서는 육체를 주관하시며(31:3), 중심을 보시는 분이시라(삼상 16:7)는 사상과도 연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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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절은 세 번째로 하나님을 향해 자신의 주장을 강력하게 피력하는 내용이다. 여기서는 원문상 동의어를 다양하게 사용하는 시적 기교를 사용한다. , (1) `인생'에 해당하는 단어를 앞에서는 `에노쉬', 다음에는 `가베르'를 사용하며(한글 개역 성경에서는 동일하게 `인생'이라고 번역함), (2) `(원문 : `당신')의 날'(, 야메이카)`주의 해'(, 쉐노테카)로 대치하여사용한다. 본 구절은 앞절(3, 4)에서 언급된 두 가지 질문과 연결되어 욥이 인식하고 있던 하나님의 근본적인 속성을 표현한다(Lange). , 앞의 두 질문에서는 하나님의 자존성(自存性)(3)과 전지성(全知性)(4)을 타나내었으며 본절에서는 시간적으로 초월해 계셔서 영원하신 하나님의 속성을 드러낸다. 하나님의 연대는 무궁하셔서(102:24) 시간적으로 한계지을 수 없다. 그리고 이는 하나님이 인간의 유한성과 유약성을 초월해 계신 분임을 의미한다(Rawlins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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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의 죄를 사실하시나이까 - 본문을 내 죄를 꼬치꼬치 밝혀내시려고 하십니까?'라고 번역할 수도 있다(새번역). 2-5절에서 이미 제기했던 하나님의 속성들에 비추어 볼때, 이 질문은 욥에게 있어서는 지극히 타당성이 있고 자연스러운 귀결이다. , 하나님은 피조물자다. 인간을 이미 알고 계시며(3), 본래부터 근본까지도 꿰뚫어 보시는 분이시다(5). 이러한 본절을 통해서 하나님은 세상 지배자들과 같이 어떤 죄를 들추어 내려고 극심한 고문을 하거나(Keil & Delitzsch), 유도 신문을 하지 않으신다는 것이 욥의 생각이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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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심문 방식에 대해 강한 의문을 제기한 6절에 이어 본절에서 욥은 하나님 앞에서 흠없이 살았다는 것을 자신있게 주장하고 있다. 욥은 나름대로 하나님 앞에서 누구보다도 최선의 삶을 살았다고 자부할 수 있었기에 현재 당하고 있는 고통은 더욱 이해하기 어려웠던 것이다(Keil & Delitzsch). 한편 비평 학자들은 본절의 두 행에서 각기 다른 두 가지 심상을 표현하고 형식도 서로 어울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들어, 약간의 수정을 가할 필요가 있다고 제안한다. 그리하여 `왜냐하면 내가 내 자신을 구원할수도 없고, 아무도 당신의 손에서 구출해 낼 자도 없다는 것을 당신께서 아시기 때문입니다'라는 식으로 해석한다(Driver, Gray). 그러나 이러한 제안대로 고친다면 나름대로 일관된 문맥이 제시될 수는 있지만 오해려 욥이 표현하고자 하는 의도는 축소된다. 왜냐하면 본절에서 욥은 자신이 악하지 않다고 주장하는(본절 상반절) 근거를 자신이 `주의 손'에 있다는 사실(본절 하반절)에 두고 있기 때문이다. 즉 누구라도 주의 손에서 욥을 벗어나게 할 자가 없다는 진술(본절 하반절)은 바로 욥이 악하지 않다는 사실을 뒷받침해 주는 것이며, 또한 누구라도 하나님을 벗어나면, 벗어나는 순간 범죄에 빠지게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욥 자신이 하나님에게서 결코 벗어나지 않았을 뿐 아니라, 누구라도 자신을 하나님에게서 벗어나도록 하지 못한다는 확신에 근거하여 ,자신이 악하지 않다고 강력하게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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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절로부터 12절까지는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보다 구체적인 설명을 보여준다. 그중 본절은 마치 새로운 장면이 도입되면서 제시되는 막간과도 같다. 왜냐하면, 앞에서 제기되었던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3)`주의 손으로 나를 만드사'로 상기시키고, 아울러 9절부터 전개될 내용을 개괄적으로 서술하기 때문이다. 또한 상반되는 두개념, 즉 지으심과 멸하심을 대치시켜 앞 구절의 부정적인 세 질문들(3-6)을 단정적으로 요약하여 듣는 자로 하여금 진퇴양난에 빠지게 하는 논법으로 이끌어 가기 때문이다.

 

 백체 -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야하드 사비브'는 문자적으로`주의 모든 곳'이란 뜻이다. 그러나 70인역(LXX)에 의하면 `메타 타우타 메타발론으로 되어 있어서, `돌이킨 후에'(after you have turned)라는 전혀 다른 의미를 갖는다. KJV, NASV, 한글 개역 성경 등이 맛소라 본문을 따라 번역하였고, NIV, RSV, NEB, Vulgate(라틴역), 새번역, 공동 번역(`이제 마음을 바꾸시어')등이 70인역의 본문을 따라 번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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흙을 뭉치듯 - 이 말은 첫째로 진흙과 같이 본성상 깨어지기 쉬운 인생을 하나님이 고려해 주실 것을 의미함과 아울러, 둘째로 욥 자신이 거의 진흙 그릇이 깨어질 것과 같은 다급한 처지에 놓여 있음을 호소하는 것이다(Hartley). 한편 이 구절은 `우리는 진흙이요 주는 토기장이시니 우리는 다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이라'(64:8)는 말씀과도 연결된다. 이 구절은 창조주이신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시사하며 피조물의 존재가치는 오직 주의 손에 달려있다는 것을 나타낸다(45:9).

 

 티끌로 돌려 보내려 - `티끌'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아파르'인데, 이는 아담을 만든 재료로 사용된 `'이며(2:7), 타락한 후에 하나님께서 저주로 선언하신 결과 사람이 돌아갈 `'(3:19)을 가리키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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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엉긴 젖(치이즈;새번역) -은 태()의 상태를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다(Hartley,Dr-iver, Gray, Pope). 이스라엘 지혜자들은 태아가 자라는 것을 가장 위대한 신비로 보았는데(11:1; 마카비후 7:22ff), 욥 또한 신비로운 수태의 과정을 자신에게 적용하면서 하나님의 주권적인 섭리를 의도적으로 묘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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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태된 태아가 모태에서 형체를 이루어 가는 것을 묘사한다. 그런데 10절에서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과는 달리 본절에서는 직접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9절에서는 단순히 `흙을 뭉쳤다'라고 표현했는데, 본절에서는 더욱 섬세하고 구체적으로 `가죽', `', `', `힘줄'로 입히고 뭉쳤다는 표현을 사용한다. 따라서 3, 8, 9절에서 반복적으로 반복적으로 언급된 창조주 하나님과 피조물인 욥의 관계를 보다 구체적으로 재차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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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명과 은혜를 - 중언법(重言法 : hendiadys)을 사용한 표현으로(Anderson), 처음 목적어인 `생명'에 대하여 언급하는 것이다(Lange). 따라서, `은혜로운 생명을', 혹은 `은혜로 생명을'등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 구절에는 생명은 하나님의 은혜에 근거한다는 인식이 깔려 있고, `생명'을 언급한 것은 욥이 죽음의 위협을 직면하고 있음을 간접적으로 보여준다. 본장의 마지막 부분(21, 22)에서 이러한 죽음의 사상이 보다 극명하게 드러나며 후반부로 가면서(14, 19장 등) 사후(死後)의 부활에 관한사상이 희미하게 나타나게 된다(Anderson). 여기서 하나님의 첫째복은 생명,둘째는 은혜(헤세드),세째는 권고(끝까지 책임지시는 견인)

 

 권고하심으로 내 영을 지키셨나이다 - 욥은 전생애를 인도해 오신 주의 계속적인 배려를 시사하는 구절이다(Rawlinson). 욥은 자신의 인격이 하나님의 계속적인 권고를 통해 형성된 것이며, 따라서 욥이 가진 자기 판단과 결정은 하나님의 계시에 의존해 있었음을 보여준다. 결국 욥이 현재의 상태에 있게 된 것은 바로 그 기원에 있어서나 과정에 있어서 하나님께로부터 말미암은 것이며, 자신의 현재 상태 역시 그 자초 지종을 알 수는 없지만 하나님의 섭리의 결과임을 상기 시키는 것이다. 한편 본 구절에서는 `성도의 견인(堅忍)'을 유추할 수 있는 일말의 근거가 제시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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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인으로 인정하시고 - `인정하시고'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솨마르'12b절과 13:27에서도 사용되고 있는데, 각각 그 어의(語義)가 다르다 12b절에서는 `지키다', `보호하다'(guard)라는 의미로 사용된 반면에 13:27과 본절에서는 조그마한 죄라도 `지켜 보신다'(watch)라는 개념으로 사용되었다(Hartley). 특히 본문에서 처럼사람을 목적격으로 취했을 경우에는 `아무개를 기억하다', `아무개를 죄인으로 표하다'로 이해된다(Keil & Delitzsch). 따라서 본문은 하나님께서는 죄인의 죄악을 그대로 버려두시지 않고, 죄의 결과에 대해 책임을 물으실 뿐만 아니라, 죄의 동기에 대해서도 지적하신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매우 세부적이고 사소한 죄까지도 묵과되지 않고 정죄된다는 점을 단언하고 있다. 결국 이는 하나님의 공의로운 속성을 여실히 드러내준다. 그리고 이러한 언급을 통해 욥은 자신의 무죄함을 간접적으로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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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악하면 -14절에서 사용된 `범죄하다'(sin)보다 강한 용어인 `악하다'(wicked)라는 표현을 사용하였다(Lange). 또한 `만약'(if)에 해당하는 `'으로 시작되고 있다. 이와같이 논리의 시작과 문장 형식은 14절과 동일 하지만 의미는 보다 강화되었다. 따라서 욥의 고난이 증가하는 것을 표현하기에(17) 앞서 욥의 감정이 고조되었음을 알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앞 구절의 내용을 함축적으로 표현함으로써 새로운 생각에로의 전환을 암시한다.

 

 화가 있을 것이오며 - 여기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알라리'는 결과를 나타내는 절에 위치하는 감탄사로 공포와 고통을 매우 강하게 표현한 말이다(7:1). 한편 본 구절이 `악하다면'으로 시작하는 것은 다음 구절 `의로울지라도'(의롭다면)와 대조를 이루면서, 후에 말하고자 하는 것을 강조시켜 준다.

 

 의로울지라도 머리를 들지 못하올 것은 - 앞 문장에서는 `악하면'으로 시작하고 있는 반면, 본 문장에서는 `의로울지라도'(개역)라고 시작하는데, `'의 결과가 `화가 있으리라'는 것이므로 `의로움'의 결과는 어떤 상급이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부정적인 결과로 연결되고 있다. 따라서, 이러한 역설적인 표현은 욥이 현재 처해 있는 암담한 상황이 자신의 논리로서는 이해할 길 없는 것임을 표출하고 있다.

 

 내 환난을 목도함이니이다 - `목도함이니이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동사 `라아'(, 보다)대신에 `라와'(, 흠뻑 젖다, 배어 들다, drowned)로 읽을 수있다(NIV, Smick, Pope). 결국 욥은 환난 속에 완전히 파묻혀 있어서 이로 인해 머리를 들 수 없을 정도의 부끄러움과 굴욕을 느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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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자처럼 - 혹자는 사자가 욥을 은유하는 것으로 간주하여, 하나님께서 사자를 사냥하듯이 욥을 사냥하신다는 해석을 한다(Gordis, Schaltens). 그러나 오히려 사자는 하나님을 지시하는 것으로 보아, 하나님께서 사자처럼 무섭게 욥을 사냥하신다고 해석하는 것이 더 낫다(31:4; 38:13; 25:38; 3:10; 5:14; 13:7).

 

 기이한 능력 -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팔라'는 형용사, 동사 그리고 명사로도 쓰이는 말로서 하나님의 창조적인 능력을 지시할 때 사용된다(28:29; 29:14). 본절에서는 욥에게 닥친 환난을 통해 보여진 하나님의 크고 두려우신 능력을 가리킨다(Driver, Gr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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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증거하는 자를 갈마들여 - `증거하는 자'는 고통이 의인화된 것이다(16:8). 고통을 `증거하는 자'로 표현한 것은 욥이 마치 법정에서 심문을 당하는 것처럼 생각했음을 의미한다. 갈수록 악화되어가는 질병과 그 외의 고통스러운 상황들이 마치 죄를 추궁하는 증인처럼 여겨졌던 것이다(Hartley, Rawlinson).

 

 군대가 갈마들어 - 앞 문장의 내용을 반복하는 비유적인 표현으로, 욥이 받고 있는 고난의 상태가 악화되고 있음과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이 지속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군대'에 해당하는 `차바'라는 단어는 일반적으로 `군대', `교전'(交戰)등을 뜻하며(Anchor), 상징적으로 `역경', `곤경'등을 의미하기도 한다. 어떤 학자들은 `차바'를 정규 부대로 `갈마들어'(번갈아, 현대인의 성경)에 해당하는 `할리포트'를 증강 부대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기도 하며(NEB, Driver, Grary), 구조 부대로 보기도 한다(Rowlery). 이 해석에 따르면 전자는 지금까지 욥이 받아왔던 고난을 말하고, 후자는 현재 당하고 있는 고난과 앞으로 닥치게 될 예측할수 없는 역경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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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에서 나오게 하셨음은 어찜이니이까 - 욥은 전형적인 애가 문체를 사용하여 질문하고 있다(Hartley). 욥의 이러한 불평 섞인 질문은 욥이 처음으로 한탄을 털어놓던 상황을 떠올리게 한다(3:11;Pope, Rawlinson, Robinson, Zuck). 끝없는 고난의 연속에 직면한 욥은 살 소망을 잃고야 말았다. 그래서 모든 문제의 근원이 자기의 태어난 것 때문이라고 비관한다. 한편 여기서도 욥은 자신의 출생은 물론이고 현재 당하고 있는 참담한 상황이 하나님께로부터 온것이라고 이해하고 있다.

 

 기운이 끊어져 -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에그와'`죽다'라는 뜻이다(6:17;20:3; 88:15). 욥은 자신의 출생, 혹은 수태가 곧 죽음으로 직결되었기를 바라는 것이다. 여기서도 욥은 태어나지 않았기를 기대하지만, 자신의 존재 여부에 대해서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뜻에 의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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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있어도 없던 것같이 - 본절 역시 18절에서와 마찬가지로 자신의 존재 자체를 비관하는 내용이다. 그러나 20-22절에 묘사된 사후(死後)의 세계가 3:17-19에서와는 달리 매우 암울한 곳으로 나타난 것은, 욥의 마음속에 생명에 대한 애착심이 역설적으로 강화되었기 때문으로 이해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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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존재에 대한 혐오감을 계속 설파하고 있는 문맥임에도, 본절에서는 하나님의 위로를 바라는 기대감으로 진전하고 있다. 이는 뒷절(21,22)에서 언급하는 암울한 음부의 밤을 염두에 둔 것인 듯하다. 다시 말해서 욥은 하나님께서 고통 주시는 일을 멈추시고 음부에 떨어지기 전에 잠시나마 기력을 회복하여 숨 쉬게 해달라는 것이다(39:13). 심각하게 급박하고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이렇듯 욥은 계속해서 하나님께 부르짖고 있으며(Wycliffe), 뒤이어 나오는 소발의 답변에서도 드러나듯이(11:4), 욥은 여전히 자신의 결백을 굳게 믿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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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절에서는 지금 살고 있는 날이 적다는 것에 초점을 맞추었고, 본문은 `가게 될땅', 즉 미래의 거처에 집중하고 있다. 여기서 욥은 죽음에 직면해 있다는 인식이 있던 것이 확실하다. 또한, 22절에서는 어두움, 죽음의 그늘이라는 개념을 반복하면서, 마치 `클로즈 업'(close-up)하는 듯한 효과를 내고 있다. , 강조하고자 하는 부분을 집중하고 확대하여 표현한 것이다. 이를 도표로 나타내면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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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여기에서 죽음의 어두움을 묘사하기 위해 5개의 히브리어를 7회에 걸쳐 사용한다. , `어두움'(, 호쉐크), `그늘진'(, 찰마웨트; 2), `어두워서'(, 에파타), `흑암'(, 오펠; 2), `구별이 없고'( 로 스다림)등이다(3:21, 22 비교).

 

 광명도 흑암 같으니이다 - 죽음 이후의 세계를 매우 강렬하게 표현하는데, 밀턴(Milton)식의 생각과 연결지어 이 구절의 의미가 `아무런 빛도 없고 다만 보이는 것이라고는 어두움 뿐이라'는 심상을 갖는다(Lange, Pope, Milton `Paradise Lost' 1p.63에서 인용). 또한 하틀리(Hartley)는 가장 밝다고 하는 어떠한 빛이라도 이 땅위에 있는 죽음 같은 어두움 보다도 더 깜깜하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제안하다. 극도의 고난 속에서 죽음을 구하는 상황에서도 오히려 사후(死後)의 세계에 더 큰 두려움을 표하는 이 역설적인 모습은, 욥 자신이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길밖에 없다는 것을 인색했기 때문인 듯하다. 그러므로 욥은 하나님의 은혜로운 사랑을 염두에 두고 호소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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