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욥기(구속사)

욥기13장,변론과 기도

호리홀리 2016. 3. 11. 09:21

욥은 진부한 이야기를 반복하는 친구들로 인하여 괴로워하며 계속 그들을 반박하고 있다. 여기서 `눈이...보았고'는 개인적인 관찰을 통하여 아는 것이고(8:9, 16, 17), `귀가...듣고'는 현자(賢者)들이 말한 진리를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한다(12:11). 그러므로 욥이 주장하는 바는 그가 이미 조상들의 전승을 들었고 이해했다는 것이다(Hartley). 또한 이는 욥의 친구들이 현재와 과거 세대 현자들의 지혜를 피력한 반면에 욥은 그 자신의 관찰과 현자들의 지혜에 대한 자신의 평가 위에서 자신의 입장을 취하고 있음도 암시한다(Clin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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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 아는 것을...내가 아니니라 - 히브리어는 동사에 주어가 포함되어 있다. 그런데 본문은 인칭 대명사 `'(, 아니; , 아노키)를 굳이 첨가시켜욥 자신을 강조하고 있다. 본절에서 욥은 자신의 지혜가 친구들의 그것과 질적으로 동등함을 내세우면서 실제로는 자신의 통찰이 훨씬 우월하다는 뜻을 표한다(Clines). 친구들의 지식은 전통적인 것이거나 원칙론에 입각해 있었지만 욥은 자신에게 직접 부딪친 실제적인 문제들을 가지고 씨름하고 있었으며, 단순한 원칙이나 논리의 이면에 있는 하나님의 깊고 오묘하신 뜻에 대한 물음으로 번민하고 있었다. 이제 욥은 3개의 사이클 중 처음사이클의 맨 마지막 답변에서 전환을 이룬다.친구들과의 변론에서 하나님과의 변론이다.변론은 호소,탄원이다. 사람에게 하는 것은 유익이 없다는 것을 이제야 깨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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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으로 나는...말씀하려 하며 - 친구들은 진정한 대화의 상대자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알고서, 욥은 이제 자신의 답답한 마음을 하나님께 토로하고자 한다.

 

 변론하려 하노라(, 호케아흐 에흐파츠) - 히브리 언어를 직역하면 `나는 변론하기를 열망하고 있다'이다. 이와같이 욥의 소원을 `하파츠'라는 동사를 사용하여 강하게 표현하고 있다. 또한 `변론하다'(, 야카흐)라는 단어는 `논쟁하다', `논하다', `꾸짖다'의 뜻을 지닌 사법적인 용어이다(Pope). 그러나 이 동사가 꾸짖음이나 논쟁에서의 승리 외에 오해를 풂으로써 화해에 이르게한다는 의미로도 사용되며(1:18) 본문도 이러한 용례에 해당한다(Anderson). 그리고 욥은 그의 고통의 이유가 하나님과의 관계 때문이며 하나님의 진실하심과 공의로우심을 믿기 때문에 하나님과의 직접적인 대면이 그의 문제를 해결해 주리라 소망한다(Hartle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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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짓말을 지어내는 자 - 히브리어 원문대로 직역하면 `거짓을 회칠하는 자들'이다. 욥이 친구들에 대해서 이렇게 부른 의미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측면에서 이해될 수 있다. (1) 119:69`거짓을 지어 나를 치려 하였사오나'와의 유비 관계를 고려하여 단순히 `친구들이 거짓으로 그의 죄를 고발하고 있다'는 뜻으로 볼 수 있다(Clines). (2) 13:10-12 내용과의 연관성을 고려해 볼 때, 그 이미지는 잘못 지어진 벽을 회칠함으로써 강하고 안전하게 보이도록 하듯이, 친구들은 진실을 거짓으로 회칠하고 있다는 뜻이다. 결국 이는 진부한 신학적 내용을 반복함으로써 스스로 현자인 체하며 욥을 책망한 친구들에 대한 신랄한 비난인 셈이다.

 

 다 쓸데 없는 의원이니라 - 어려운 문제에 직면하게 될 때, 우리는 종종 그 어려움을 정직하게 받아들이는 대신에, 관념적인 설명으로 그것을 덮어두려고 시도한다. 이것은 욥의 친구들의 태도이기도 하다. 그들은 마치 속으로 곪은 상처를 보지 못하고 표피의 상처만 문제시하는 무능력한 의사와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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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너희가 잠잠하고...지혜일 것이니라 - `잠잠하다'라는 뜻의 본 동사 `타하리슐' 이외에 부정사 절대형 `하하레쉬'를 첨가하여 히브리어 특유의 강조 용법을 구사하고 있다. 욥의 잘못된 신학을 바로 잡아 주는 해결책으로 생각했던 친구들의 말이 욥의 눈에는 매우 어리석게 보였기 때문에 욥은 차라리 그들이 침묵하는 편이 훨씬 낫다고 여긴 것이다(Clines). 한편 본문은 `미련한 자라도 잠잠하면 지혜로운 자로 여기우고...'라는 잠언 17:28의 말씀을 연상시킨다(Pope, Clin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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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들으며 - 히브리어 원문에는 간청을 나타내는 기본 불변사 `'(*)가 첨가되어 있다. 그래서 다시 번역하면 `(너희는) 제발 들으라'이다.

 

 변명 - 히브리어 `'은 생활속에서 일어난 싸움(21:18), 분쟁 당사자간에 교환하는 논쟁(31:36) 혹은 피고와 원고가 재판장 앞에서 논쟁하는 소송 그 자체(Clines)등을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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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너희가 하나님을...말하려느냐 - 7절부터 11절까지에서, 욥은 논재의 전형적 특색을 보여주는 일련의 질문들을 던지고 있다. 본절에서 욥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친구들이 욥을 정죄하고 하나님의 공의를 변호한다는 명목으로 진실을 왜곡시키고 있다는 것이다(Hartle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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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너희가 하나님의 낯을 쫓으려느냐 - 문자적으로 `너희가 그의 얼굴을 들려고 하느냐?'이다(Anderson). 다시 말하면, `왜 편파적으로 하나님 편만 드느냐'라는 뜻이다. 이 말속에는, 욥 자신에게 닥친 재난의 부당성으로 인해 하나님께 원망하는 의미도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 보다는 자칭 하나님 편에 선다고 하면서 일방적으로 욥을 공박하는 친구들의 매정함을 나무라는 뜻이 강하게 내포되어 있다(Hartle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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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님이 너희를 감찰하시면 좋겠느냐 - `감찰하시면'의 히브리어 `하카르'`꿰뚫다', `자세히 조사하다'(NIV, examin), `찾아내다'(KJV, RSV, search out)등의 뜻으로서, 단순히 바라보거나 살피는 것의 의미를 넘어 자세히 헤아려 감추어진 것을 찾아낸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본문은, 하나님께서 지금 욥을 정죄하고 있는 친구들을 주시하시어 그들의 잘못과 어리석음을 찾아내시게 되면 어떻게 하려느냐는 뜻이다. 친구들은 욥을 고발함으로써 하나님께로부터 칭찬과 상을 받으리라고 기대했을지도 모르나 도리어 하나님 앞에 심문 당하게 되리라는 것이 욥의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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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일 가만히 낯을 좇을진대...책망하시리니 - `낯을 좇을진대'란 문자적으로는 `얼굴을 올리다', `얼굴을 높이다'의 뜻으로서, 어떤 사람이 어느 쪽에 편파적으로 편드는 것을 암시하는 히브리적 관용 어구이다(8). 여기서 욥은 친구들이 자신들의 인위적인 뜻과 주장에 따라 비진리와 불의 가운데서 무조건 하나님의 편을 든다고 하면서 말하는 것을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고 책망하시리라고 지적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진리'이시며 불의를 배척하시는 거룩하신 분이기 때문이다(11:44, 45; 14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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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존귀가 너희를 두렵게 하지 않겠으며 - `존귀'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세에트'`높음', `위엄', `존영' 등의 뜻이며, 31:23 에서는 `위엄'으로, 49:3에서는 `위광'으로 번역되었다. 특히 여기서는 하나님의 탁월하심, 즉 불의나 비진리등과는 전혀 상관 없으신 하나님의 의와 거룩, 영광 등의 높으심과 탁월하심을 의미한다. 따라서 본문은, 하나님의 존영 앞에서 친구들의 거짓과 불의를 드러나게 마련이며 이때 그들은 두려워 떨 수밖에 없으리라는 의미이다. 실제로 하나님의 두렵고 크신 위엄과 권능이 패역한 성읍이나 국가에 징벌로서 임했을 때, 사람들이 두려움 가운데 하나님의 백성들에 대한 적대 행위를 중지했던 사례가 많다(15:16; 105:38; 2:10, 19, 21). 한편

 

 위엄 - 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파하드'`놀람', `두려움'(KJV, dread)등의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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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속담 - 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마솰'은 잠 1:1 처럼 비유나 유사한 사실들을 들어 교훈해 주는 말을 의미한다. 따라서 본문에서 욥의 친구들의 `격언'()`재 같은' 속담이라는 것은 그들의 말이 `생명력이 없는', `전혀 무가치한'(30:19; 18:27; 44:20) 교훈임을 암시한다.

 

 너희의 방어하는 것은 토성이니라 - `토성'(, 호메르)이란 문자적으로 `진흙'(30:19; 38:14; 11:3)을 의미한다. 이는 쉽게 무너지고 부숴지기 쉬운 것을 비유적으로 지칭한다. 따라서 본문은, 욥의 친구들의 변론 특히 욥의 주장에 대한 반증이 허술하고 빈약하며 사실에 맞지 않아서 쉽게 반박될 수 있는 것임을 시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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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너희는 잠잠하고 - 문자적으로 `나에게서 잠잠하라'란 뜻이다. 이는 욥이 말할 수있도록 그의 친구들이 잠잠하기를 요청하는 말이다.

 

 그리고 무슨 일이 임하든지 내가 당하리라 - 는 말은 욥이 그의 뜻과 생각을 말함으로 인해 빚어지는 어떠한 일이든지 기꺼이 당할 각오가 되어 있음을 나타낸다(Hartley). 이는 하나님만 바라보고 또한 모든 문제의 해결이 하나님께 있음을 알고 하나님 안에서 처신되어지기를 바라는 욥의 신앙의 일단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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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살을 내 이로 물고 - 이는 뜻이 분명하지 않은 구절이나, 대략 다음 두 가지로 해석될 수 있다. (1) 고통을 참기 위해 혹은 끝내 침묵을 지키기 위해 자기 살을 깨무는 것으로 보는 견해이다(Rashi). 그렇다면 본 구절은 13절과 자연스럽게 연결되어 어떠한 위험을 감수하고서라도 하고 싶은 말을 해보고자 하는 굳은 결심을 시사한다. (2) `'을 짐승의 `먹이'로 보고서, 본문을 먹이를 물고 가는 짐승이 그것을 빼앗으려는 짐승을 만난다면 계속 먹이를 물고 있겠느냐는 의미로 이해하는 견해이다. 이경우 역시, 자신의 처지가 너무도 위급하므로 하나님께 그 고통을 아뢰지 않을 수 없음을 가리킨다하겠다.

 

 내 생명을 내 손에 두겠느냐 - 자신의 생명을 보물처럼 애지중지 주의하며 보존하겠느냐란 뜻으로서 생명을 돌보지 않고 어떠한 위험도 무릅쓰겠다는 뜻을 암시한다(D-elitzs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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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나를 죽이시리니 내가 소망이 없노라 - 본문의 단어를 어떤 의미로 보느냐에 따라 해석이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1) 본문의 서두에 있는 `'`보라'(behold)는 뜻으로 이해하고 `없노라'`'`아니다'(not), `없음'(no)의 의미로 보는 경우 : 본문의 의미는 `보라 그가 나를 죽이시리니 내가 소망이 없노라'( RSV, Behold, he will slay me, I have no hope; 한글 개역 성경)가 된다. (2)`'을 양보를 나타내는 `...일지라도(though)'라는 뜻으로 보고 `'`그에게'란 뜻의 `'로 보는 경우 : 이때 본문의 의미는 `그가 나를 죽이실지라도 나는 그를 의뢰할(소망할)것이다'(KJV, AV, Though he slay me, yet will Itrust in him; NIV, Though he slay me, yet will I hope in him)이다. 이에 대해 로울리(Rowley) 같은 주석가는, 본문에서 욥이 하나님께 신뢰하는 마음보다는 궁금한 내막을 알고자 하는 도전적인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이유를 내세워 (2)를 도외시한다.그러나 고대 역본들 중 시리아 역본, 탈굼역 등은 (2)를 지지한다. 그리고 라쉬(Ras-hi)등 여러 학자들도 (2)를 따른다.

 

 그의 앞에서 내 행위를 변백하리라 - 이 말은 욥 자신은 하나님 앞에서 특정한 죄악을 범치 않았는데 그분의 징계를 받아 고통을 당하고 있다는 생각을 저변에 깔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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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곡한 자는 그의 앞에 이르지 못하나니 - `사곡한 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하네프`더러운 자', `불경건한 자'(NIV, RSV, godless man)를 뜻한다. 따라서 본문은 상대적으로 욥 자신이 의롭고, 하나님 앞에서 불경건하지 않음을 암시한다. 한편 사곡한 자가 하나님 앞에 이르지 못함은 근복적으로 하나님께서는 불의나 죄와는 상관없는 거룩하신 분이기 때문이다(11:44, 45).

 

 이것이 나의 구원이 되리라 - 원문에 의하면 본절이 16절 서두에 나타나며 전문(前文)은 그 뒤에 조건절(*, )로 뒤따른다. 여기에서 `이것'은 원어상으로 중성이 사용되었다. 이는 앞절 내용, 곧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행위에 대해서 변백하는 그의 행위의 무죄성 증명을 뜻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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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너희는 들으라...너희 귀에 담을지니라 - 이는 욥이 그를 정죄하고 책망하는 세 친구들의 말을 막고 자신의 의견을 말하고 자신이 하나님 앞에 의롭다고 피력한 것을 들으라고 권면하는 것처럼 보인다(6). 그러나 혹자는 본문에서 `'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밀라'가 신앙 고백적 `선언', `선포'를 뜻하며 `설명'도 원어상 위의 `'과 거의 동의어로 쓰인 점(Lange)을 들어, 본문의 `'20절 이하의 하나님께 대한 욥의 탄원을 가리킨다고 보기도 한다(M. H. Pop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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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라 내가 내 사정을 진술하였거니와 - `사정'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미쉬파트'는 법적인 `판결', `선언' 등의 의미를 갖는다. 이는 욥이 자신의 무죄성을 법적, 논리적으로 증거하고 변명한 사실을 뜻하는 것 같다. 그리고 `진술하였거니와'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아라크'는 제단에 나무를 쌓거나(22:9), 상에 떡을 진설하는 것(23:5)등과 같이 어떤 사물을 잘 정돈하는 것, 특히 군대를 정돈하는 것 등을 뜻하는 말이다(32:14). 본절에서는 욥이 그의 사정(변명)을 잘 정리하여 말한 것을 암시한다.

 

 내가...의로운 줄 아노라 - 욥은 자신이 당하는 고통과 그로 인한 세 친구들의 정죄와 책망 속에서도 계속 자신의 무죄성을 주장하고 있다(10:2; 12:4; 16:11; 2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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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와 변론할자가 누구이랴 - 이는 공개적인 성격의 질문으로서, 자신의 무죄성과 의로움을 주장하는 욥과 변론하여, 그의 논리를 반박하고 그의 죄악성을 드러낼 자가 아무도 없으리라는 확신을 보여주는 표현이다.

 

 그러면 내가 잠잠하고 기운이 끊어지리라 - 무죄한 욥 자신의 논리를 반박하고 그의 죄악상을 누가 드러낼 수 있다면 자신은 조용히 침묵을 지키고 죽어도 좋다는 뜻으로서, 이는 어느 누구도 결코 자신의 논리를 반박할 수 없으리라는 강한 역설적 표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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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직 내게...행하지 마옵소서 - 욥이 그를 정죄하고 책망하는 친구들을 반박하며 그의 무죄성을 강력히 내세우다가 갑자기 하나님께 기도하는 장면으로 바뀐다. 이와같은 욥의 태도는 이 세상 어디에나 의뢰할 자는 아무도 없고 오직 하나님만을 의뢰하고 바라볼 뿐이며 그의 어려운 문제와 처지를 해결할 분도 오직 하나님 한 분 뿐임을 절실히 깨달았음을 시사한다. 이와 같은 기도는 본서에 여러번 나타난다(7:11-21;10;2-22; 13:20-28; 17:3, 4). 한편 `이 두가지' 21절에 나타나는 바 하나님의 징계의 손이 떠나시게 하는 것과 위엄으로 그를 두렵게 하시지 않는 것을 뜻하는 것으로 9:34에 이미 언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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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의 손을 내게 대지 마옵소며 - 문자적으로는 `당신의 손을 내게서 거두어 주옵소서'(NIV, Withdraw your hand far from me)를 뜻한다. 이는 하나님께 징계의 손을 거두어 달라고 기도하는 것이다(6:4; 7:12, 19; 10:9). 한편 성경에서 하나님의 `'은 신인동형동성(神人同形同性)론적인 표현으로서 하나님의 도움을 나타내기도 하나 때때로 하나님 당신이 징계하시는 수단으로 묘사되기도 한다(32:4; 38:2; 1:25). 욥은 자신이 당하는 고통과 환난을 하나님이 허락하신 징계로 보았다(6:4; 7:12,19; 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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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는 나를 부르소서...내게 대답하옵소서 - 이는 욥이 자신의 무죄성을 하나님 앞에서 나타내고 증명하기 위하여 하나님과 교통하기를 원한다는 말이다. 여기서 욥이 하나님께 먼저 그를 부르시도록 요청한 것은 하나님께 대한 욥의 경건한 신앙의 일단을 드러낸 것이다. 그리고 `나로 말씀하게 하옵시고'란 그의 무죄성을 증명할 수 있는 기회를 달라는 간구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욥에게 말할 수 있는 기회를 허락하신 것이 아니라 당신께서 먼저 직접 말씀하신 것으로 등장하신다(38:3). 이것은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과 위엄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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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의 불법과 죄...내게 알게 하옵소서 - 그토록 심한 고난을 당해야 할 정도로 악한 죄를 저질렀는가를 알려 주시라는 탄식이다. 혹자는 이를 욥이 하나님께 그를 고난당하게 한 기소장을 보여 달라고 요청하는 것이라고 표현한다(M. H. Pope). 한편 본문의 `불법'에 해당하는 `아온'`구부리다', `굽게 하다'에서 유래되었으며 바른 길에서 떠난 `불의'(33:9; 16:20, 22), `불법'등을 의미한다. 그리고 `'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하타트'`빗나가다'에서 유래되었으며 일반적인 `', `범법'(犯法)등을 의미한다. 그리고 `허물'에 해당하는 히브리 `페솨'`이탈하다'에서 유래되었으며 일반적으로 `반역적인 죄', 배도' 등을 의미한다. 이처럼 세 가지 표현을 함께 사용함으로써, 욥은 자신의 고난에 대한 궁금증이 해소되기를 갈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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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얼굴을 가리우시고 - `얼굴'이 다른 곳에서는 하나님의 진노를 나타내는 뜻으로 사용되기도 하였으나(34:16; 벧전 3:12), 여기서는 하나님의 은혜, 도우심의 뜻으로 사용되었다(27:9; 42:5; 105:4). 따라서 본 구절은 히브리인들에게 있어서 `비우호적인' 혹은 `적대적인' 뜻을 나타내는 관용구적 표현이다(31:7; 27:9; 30:7;54:8, M. H. Pop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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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께서 어찌하여...마른 검불을 따르시나이까 - 이는 하나님께서 어찌하여 `날리는 낙엽'과 같이 연약하고 `마른 검불'과 같이 가볍고 하찮은 자신을 그토록 징계하시느냐고 질문하는 은유적 표현이다. `날리는 낙엽'이나 `마른 검불'은 하나님의 진노와 능력 앞에 전혀 대항할 수 없는 무기력함과 연약함을 암시한다(1:4; 83:14; 64:6). 그리고 `따르시나이까'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라다프'`뒤를 쫓다'의 의미를 갖는데, 욥은 마치 사냥개가 사냥물을 쫓듯이 하나님이 연약한 자신을 너무도 집요하게 추궁하며 징게하신다고 하소연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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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괴로운 일들을 기록하시며 - `기록하시며'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케토브'는 법적인 언도나 선포, 판결 등을 기록한다는 의미를 갖는 바(31:35; 149:9; 10:1, Lange), 이는 욥이 자신의 고난이 하나님의 징계로 말미암은 것이라고 인식하기에 이르렀음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욥에게 있어 가장 궁금한 것은 구체적인 지적이라고 할 수 있다. 계시가 미진했던 당시 상황에서, 자신의 살아온 경건한 삶에 근거하여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무신론적 사고에 빠지지 않은 것만 해도 욥의 진실한 신앙을 넉넉히 엿보게 해준다 하겠다.

 

 어렸을 때에 지은 죄를 - 이는 욥 또한 인간의 온전한 무죄성이나 완전성을 주장하지 않고 연약하여 실수하는 자임을 인정하는 말이다. 그러나 욥은 여기에서 하나님이 어릴 적 죄를 기억하사 낱낱이 징계하시는 것은 이해할 수 없다고 부르짖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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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발을 착고에 채우시며...한정하시나이다 - 이는 욥이 자유를 완전히 상실했으며 모든 길에 있어서 하나님의 간섭과 제한을 받고 있다는 말이다. 여기에서 `발을 착고에 채우시며'란 하나님이 욥을 죄인처럼 대하사 자유롭게 행하지 못하게 묶으시는 것, 즉 징계하심을 암시한다(105:18; 20;2; 16:24). 그리고 `나의 모든 길 한정하시나이다'도 하나님께서 욥의 모든 길을 면밀히 주시하시며 그의 발바닥에 표시를 두었다는 뜻으로서 이것 역시 하나님의 징계를 시사하는 말이다(7:19; 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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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에 의하면 본문의 `나는'이란 `에후아'로서 `그래서 사람은'(KJV,so man), `그리고 그는'(KJV, And he)등으로 해석된다. 따라서 M. H. Pope 등은 본문이 14:2 이후 위치하는 절로 보기도 한다. 그러나 욥이 앞절에서 하나님께 자신의 안타까운 심정을 고해도 하나님께로 부터 아무런 응답이 없자 이제는 자신의 처지를 3인칭으로 바꾸어 언급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Delitzsch). 아무튼 본문은 그가 `썩은 물가의 후패함'처럼 철저히 소모되어 쓸모없는 자가 되었으며 `좀 먹은 의복'처럼 무가치한 자가 되었음을 의미한다.

 

우리가 기도 할 때 자주 응답하시는 경우는 초신자의 단계이다. 아이가 어릴 때 부모는 아이의 요구를 다 들어준다.

두번째 단계는  연기하신다. 아이가 지금은 때가 아닌것과 같다. 만약 100만원을 달라고 떼를 쓴다면 이유도 뭇지않고 아이에게 줄 부모가 있겠는가?

세번째는 다른 것을 주신다. 아이의 생각과 부모의 생각이 다른것이다. 하나님의 생각과 우리 생각은 다른것이다.

네번째 단계는 '아니' 하신다. 바울이 육체의 가시를 위해서 세번 시간을 정해 간절히 기도했다. 그러나 응답은 '노'였다. 바울은 오히려 크게 기뻐했다. 나로 자고하지 않게하시려고....

마지막은 침묵이다. 우리의 기도에 침묵하시는 하나님 정말 답답하다. 이럴 경우 어떻게 하시겠는가?

예수님의 유언같은 십자가상에서의 기도에 하나님은 끝까지 침묵하셨다. 이는 하나님의 계획이 있으신 것이다. 예수님은 순종하셨다. 욥은 지금 그길을 향해 나아가고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욥의 고난은 십자가의 예표인 것이다. 나의 십자가는 무엇인가? 끝까지 감당하기를 소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