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욥기(구속사)

욥기9장,중보자를 사모하며

호리홀리 2016. 3. 6. 16:41

 10:22까지는 빌닷의 변론(8)에 대한 욥의 첫 번째 응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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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빌닷은 악인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과 의인에 대한 하나님의 보호(8:20)를 역설한 바 있는데, 이것은 욥 자신도 인정하는 내용이었다.

 

 인생이 어찌 하나님 앞에 의로우랴 - 본문은 4:17에 나타난 엘리바스의 말과 일맥상통하는 것으로서 다음 두 가지 의미를 지닌다. 첫째, 인간이 하나님의 의()의 수준에 결코 다다를 수 없다는 것이다. , 욥은 인간과 하나님 사이에는 본질상 뛰어넘을 수 없는 벽이 있음을 직시하고 있었다. 둘째, 인간은 하나님과 견주어 볼 때 의로울 수 없다는 것이다. 욥의 이러한 신()이해, 내지는 인간 이해는 계시가 발달하지 않은 당시의 시대 상황에 비추어 볼 때는 분명 탁월한 것이었음에 분명하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교제, 다시 말하자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미천한 인간과 교체하시는 `임마누엘의 하나님'에 대한 인식을 갖지는 못했다. 뿐만 아니라 인간이그 자신의 행실로는 결코 의에 도달할 수는 없으되,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에 의지하여 의롭다 칭함을 받는다는 사실을 깨닫지는 못했다. 이런 측면에서 볼 때 욥은 동방의 의인이라 불리웠으되(1:1) 복음의 경륜이 개화(開花)하지 못한 율법 시대에 속한 사람이었다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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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쟁변하려 할지라도 - `경쟁하려 할지라도'(Pulpit Commentary), `다툴지라도'(Lange)등으로 해석된다. 그런데 여기서 주의할 것은 이 용어가 법률적인 용어라는 사실이다. 여기서 원고와 피고가 각각 누구를 지칭하는가에 대해서 원문상 정확하지 않다. 그러나 어느 것을 취하든간에 하나님은 사람과 쟁변(다툼, 경쟁)의 대상자가 될 수 없으며, 또한 그분은 사람과 더불어 쟁변하시지도 않는다는 의미이다. 한편 하나님께서 사람과 쟁변하시지 않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인간과 하나님 사이의 존재론적 차이때문이다. , 인간은 유한하고 죄성을 가진 존재이나 하나님께서는 전지 전능한 분으로가 완전한 의에 거하시기 때문이다. 이렇듯 욥이 인간과 하나님과의 `차이'를 철저히 인식한 것은 자신에게 닥친 시련으로 인해 하나님과의 단절감과 괴리감을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 둘째, 하나님의 판단 기준과 인간의 그것이 상이(相異)하기 때문이다. ,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절대적으로 의로운 것처럼 인간에게도 온전한 성결과 의를 요구하신다. 만약 이 요구를 온전히 충족시키지 못할 경우에는 그에 합당한 희생을 요구하신다. 구약 시대의 희생제가 바로 그것이다. 신약 시대에 이르러서도 하나님의 이러한 기준은 변개(變改)되지 않았다. ,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 까지 이르리니'(4:13)라는 말이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벧전1:16),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5:20)는 말 들이 모두 이런 측면에서 주어진 것이다. 그런데 인간의 기준은 이러한 하나님의 기준에 다다르지 못하며, 결코 다다를 수도 없다. , 인간은 자력으로는 하나님의 절대적 의와 성결에 부합될 수 없으며 오직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신령한 은혜로 말미암아 이 기준에 다다를 수 있다. 이러한 복음의 비밀에 접해 보지 못한 욥으로서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넘을 수 없는 차이를 더 더욱 절감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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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님은 마음이 지혜로우시고 힘이 강하시니 - 욥의 신() 이해, 곧 여호와께 대한 인식이 잘 드러나는 구절이다. 지금껏 욥은 인간으로서 감내하기 힘든 모진 시련을 겪어왔고, 또 현재 겪고 있다. 이러한 와중에서도 본절과 같은 신앙 고백을 할 수 있다는 것은 하나님께 대한 그의 신앙의 근저가 아직도 든든하다는 사실을 암시해 준다. 요컨대 그는 뼈아픈 고난 중에 격한 감정을 토로하며, 때로 하나님께 대한 불평불만을 쏟아 놓았으나, 하나님 존재 자체를 거부하거나 그분의 품성을 왜곡하는 등의 비신앙적 형태로까지 나아가지는 않았던 것이다. 바로 이러한 점에서 비범한 신앙 인격자로서의 욥의 위대성이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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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가 진노하심으로 산을 무너뜨리시며 옮기실지라도 - 본문은 다음과 같은 자연 현상을 묘사한 것으로 추측된다. (1) 지진에 의해 산이 갈라지거나 암석 등이 아래로 굴로 떨어지는 모습, (2) 폭풍우에 의해 산이 깎여 내리는 모습, (3) 급류에 의해 산이 깎이고 주변의 암반이 무너져 내리는 모습등이다. 상기(上記)의 현상들은 고대 팔레스틴 지역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것인 바, 본문은 이 세 가지 중 어느 하나를 가리킨것으로 추측된다. 한편 본문을 통해서 욥은 자연을 지배하시는 하나님의 주권과 전능성을 드러내고 그러한 하나님에 비견해 볼 때 미천하기 그지 없는 자신, 특히 현재 극심한 고난 중에 처해 있는 자신의 나약한 심경을 대비하여 드러내고자 한다.

 

 산이 깨닫지 못하며 - 본문은 산이 지진, 폭풍우, 급류 등에 의해 옮겨질 때(16: 32; 왕상19;11; 104:32; 1:1; 14:4, 5; 24:7), 그 과정이 매우 급속히 전개된다는 뜻이다. 의인법이 사용된 구절이다(35:8; 5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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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절은 지진 현상을 가리키는 것 같다. 고대 근동 지역, 특히 시리아와 팔레스틴에 인접한 나라에 있어서 지진은 그렇게 드문 현싱이 아니었다(104:32). 성경에도 지진에 관한 언급이 여러 번 나타나는데(16:32; 왕상 19:11; 1:1; 14:4, 5) 대부분 초월적인 하나님의 능력을 묘사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그 기둥 - 이 용어는 고대인들의 우주관에 비추어 해석되어야 한다. 그들은 지구()가 커다란 기둥들(pillars)에 의해 떠받쳐져 있는 것으로 생각하였다(38:6; 삼상2:8; 104:5). 또한 그들은 하늘을 떠받치고 있는 기둥이 산이라고 보았다(26:11). , 땅에서 우뚝 솟아난 거대한 산이 하늘을 지탱하고 있는 것으로 보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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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를 명하여 뜨지 못하게 하시며 - 이것은 다음과 같은 자연 현상을 염두에 두고한 표현인 듯하다. (1) 일식(日蝕) : 주기적으로 찾아오는 일식은 천지를 순식간에 어둡게 한다. (2) 자연현상에 의한 해 가림 : 갑자기 찾아오는 먹구름, 모래를 동반한 폭풍 등은 하늘을 짙게 가려 해를 보지 못하게 한다. 이러한 현상은 대부분 모래 사막과 건조한 기후로 이루어진 팔레스틴 지역에서 흔히 발견 할 수 있는 것이었다. (3)지진 : 지진이 일어나면 건물이 무너지며, 산과 계곡의 암석과 나무들이 쏟아짐으로 인해 먼지가 발생한다. 이로 인해 사람의 시야가 가려 햇빛을 보지 못한다. (4) 화산폭발 : 화산 폭발로 인한 화산 재와 연기는 햇빛을 가려 시야를 어둡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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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가 홀로 하늘을 펴시며 - 고대 히브리인들은 하늘에 대량의 물이 축적되어 있는 것으로 생각했다. 따라서 이 물을 지탱하기 위해서 하늘은 단단한 판으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믿었다. , 궁창은 단단하고 고정되어 있는 땅의 천장 혹은 지붕(8;27)으로 이해되었다. 한편 이러한 하늘을 펼쳐 편다는 것은 창조자의 능력을 가장 강력하게 증거해 주는 증거로 인식되었다. 성경에서도 이러한 일을 하나님의 전능성을 나타내주는 독특한 증거로 보고 있다(42:5; 45:12; 51:13; 10:12). 한편 본문에서 `홀로'(, 레바도)라는 말은 욥의 신() 인식, 곧 여호와 하나님을 유일신 하나님으로 인식했음을 잘 드러내 준다. 많은 학자들은 욥기에 신화적인 요소가 농후하며 따라서 욥 역시 이러한 요소의 영향을 받아 하나님을 다신론적(多神論的) 견지에서이해했다고 주장한다(Pope, p, 70). 그러나 본문은 그가 창조의 주체는 오직 하나님한 분이시며, 그만이 참된 능력을 지닌 하나님임을 확신했음을 잘 증거해 준다.

 

 바다 물결을 밟으시며 - 격랑에 의해 마치 산더미처럼 높이 솟아오른 파도를 하나님께서 밝고 계신다는 표현은 피조물에 대한 당신의 철저한 주권을 의미한다. , 하나님은 자신이 창조한 자연계를 지배하고 계신다는 뜻이다. 한편, 이러한 표현은 하나님을 `땅의 높은 데(, )를 밝는 자'로 묘사한 아모스(4:13), 미가(1:3)의 표현과 매우 유사한 일면을 지닌다(33;29; 18:33; 58:14; 3:1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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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두성 - 히브리어 `아쉬'(, 38:32)로서 오늘날의 `큰 곰자리로'로 이해된다.

 삼성 - 히브리 원어로는 `키실'로서 `오만한'의 뜻이며 오리온(Orion)별자리를 가리킨다. 그런데 `삼성'이란 별자리 명칭은 그리스인들에 의해 붙여진 것으로 추측된다.

 묘성 - 히브리어로 `키마'로서 `더미', `'라는 뜻이며 `시리우스'를포함한 일군(一群)의 별자리를 가리키는 것으로 짐작된다.

 남방의 밀실 - 갈대아인들은 12궁의 별자리를 이렇게 표현했다. 그러나 욥은 남쪽 지평선 위에 떠있는 무수한 별자리를 두고 이러한 표현을 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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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절은 5:9에 나타난 엘리바스의 말을 그대로 인용한 것처럼 보인다(5:9 주석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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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절은 4:15, 16에 나타난 엘리바스의 경험과 유사한 일면을 지닌다. 그러나 엘리바스는 하나님의 현존을 의식하고 체득했다. 그러나 욥은 그것을 체험하지 못했다. 바로 여기에 욥의 고난의 심각성에 있었던 것이다. , 욥은 가중되어가는 고난과, 하나님의 공의에 대한 신앙적 회의에 대한 질문을 쏟아놓으면서 하나님과 대면하기를 간구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은 계속 주어지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과의 대면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욥의 문제의 핵심은 친구들과의 갈등도, 육체적 질병도 아니었다. 그는 오직 하나님과의 관계에 주 관심이 있었는 바, 그것은 하나님과의 만남을 통해서만 해결될 수 있는 성질이었다. 그러나 42:5에서 보듯 결국 욥은 하나님과 만나게 됨으로써 자신의 신앙적 회의를 청산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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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님이 빼앗으시면 누가 막을 수 있으며 - 아마도 욥은 자신의 자녀와 소유를 잃은 것(1:13-19)을 염두에 두고 이런 표현을 한 것 같다. 그런데 본문은 1:21에 나타난 욥의 신앙 고백, ,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라고 고백과 같은 측면에서 이해될 수 있다. 즉 욥은 재산과 자녀를 잃은 직후에 여호와의 주권(sovereignty)을 고백했는 바, 그 사건 이후 얼마간의 세월이 지난 현시점에서 그같은 신앙을 재삼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45:9; 18:6). 그러므로 욥은 자신에게 재난을 주신 하나님의 주권을 회의하지는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다만 그 고난을 주시는 하나님의 목적이 어디에 있는가, 그리고 `'(why) 자신이 그러한 고난을 받아야 하는가하는 데에 그의 고뇌가 있었던 것이다.

 

 무엇을 하시나이까 누가 물을 수 있으랴 - 앞 부분의 내용과 마찬가지로 본문은 인간(또는 넓게는 전 피조물)에 대한 하나님의 전적인 주권성을 드러내 주는 표현이다. 만물의 완성자이신 하나님은 그것에 대한 소유권을 가지실 뿐 아니라 그것을 자신의 기쁘신 뜻대로 사용, 통제하실 권리도 갖고 계심을 뜻한다. 그러므로 인간은 자신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역사(works)에 대해 철저히 순종할 수밖에 없음을 본문은 암시하고있다. 이러한 표현은 토기장이 비유에 나타나는 토기장이(하나님)와 토기(인간)의 그것과 내용상 동일하다(4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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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님이 진노를 돌이키지 아니하시나니 - 여기서 `하나님'으로 번역된 히브리어 `엘로하'는 욥기에서만 42회 쓰인 말로서 욥이 참된 하나님을 지칭할 때 사용한 것이다. 한편 본문은 하나님께서는 한번 작정하신 일은 결코 변개시키지 않으신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처럼 하나님의 작정과 계획은 유동적이지 않고 결정적이다. 특히 악인에게 임하는 심판과 징계는 더욱 그러하다.

 

 라합을 돕는 자 - `라합'은 원어상 `교만', `강팍함', `완악'등을 뜻한다(3:5;14:4). 고대 히브리인들은 이것을 `바다의 괴물'(7:12; 51:9)로 여겼다. 성경에 따르면 이것은 야훼 하나님에 의해 정복되어 쫓겨난 것으로 나타난다(26:12; 89:10;51:9). 그러나 본문에서는 사단을 상징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좋다(12: 3-12). 그러므로 `라합을 돕는 자'는 사단에 동조하여 하나님의 뜻을 거스리는 무리 일체를 가리킨다. 따라서 본절은 하나님께서 인간만이 아니라 사단을 추종하는 모든 악의 세력도 굴복시킬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계신다는 사실을 고백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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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절,여기서 `대답하다', `변론하다'에 해당하는 용어는 공히 법적 용어이다(3절 주석참조). 그러므로 욥은 여기서 하나님을 재판관, 자신을 재판을 받는 자로 보고 있다하겠다. 이러한 비유를 간접적으로 사용함으로써 욥을 시험하고 심판하는 권능이 오직 하나님께만 있으며 욥 자신은 그것에 대해 하등 항변할 권리를 가지지 못함을 나타내준다. 또한 지금껏 하나님께 탄원과 질문을 쏟아 부었으나 아무런 해답을 얻지 못한 욥이 자기 자신의 처지에 대한 한탄을 토로한 것으로도 볼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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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절에서 욥은 인간의 근원적인 죄성과 하나님의 절대적인 의를 통절히 고백한다. 즉 인간이 아무리 의로울지라도 오직 하나님 앞에서는 자기 의를 내세울 수 없는 죄인이며, 오직 하나님만이 공의로우신 전능자임을 토로한다. 이러한 욥의 자세는 지금껏 보여준 욥의 태도와 상충되는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친구와의 변론 과정에서 욥은 여러차례 자기 의(self - righteousness)를 피력하였기 때문이다(6:24, 30). 그러나 욥의 자기 의에 대한 주장은 행동으로 드러나는 구체적인 측면에서 그 자신이 범과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그리고 본절의 내용은 인간의 근원적인 죄성을 피력한 것으로서 욥자신도 그러한 죄에서 예외일 수 없다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재판장 앞에서 정당한 권리를 요구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며 다만 그분의 은혜만을 간구할 수 있을 뿐이라는 의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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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르므로 - 여기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카라'는 단순한 부름이 아니라 법적인 소환(a legal summon)을 가리키는 데 사용되는 용어이다(59:4). 전절(15)에 비추어 볼 때 본문은 욥이 하나님을 심판자로, 그 자신은 그분의 공평한 판결을 촉구하는 재판받는 자로 보고 있다.

 

 내 음성을 들으셨다고는 내가 믿지 아니하리라 - 아마 욥은 자신의 고통스런 절규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구원)이 속히 주어지지 않자 이러한 표현을 한 듯하다. 따라서 본문은 구원을 속히, 그리고 간절히 촉구하는 욥의 애절한 심경의 토로로 해석되어야지, 하나님과의 관계를 부정하는 비신앙적 행태로 여겨져서는 안된다.

) --> 17절에 비추어 볼 때 욥은 아직까지 자신이 까닭없이 하나님께로부터 고난을 받고 있다고 생각했음을 알 수 있다. 사실 이것은 욥이 재난을 처음 당했을 때부터 줄곧 그의 신앙 의식을 괴롭혀온 난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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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숨을 쉬지 못하게 하시며 - 연속되는 수난에 대한 과장법적 표현이다. 가중되는 재난으로 말미암아 욥은 자신의 존재 자체를 계속되는 불행의 연속(7:3-6; 13-19)으로 보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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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가 그를 호출하겠느냐 - 2, 14절과 마찬가지로 본문에도 법정적 분위기가 강하게 배어 있다. 즉 하나님께서는 심판의 전권(全權)을 소유하고 계시는 심판자이시며, 인간은 그의 재판을 받아야 하는 피고 내지는 원고일 따름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그의 재판을 번복할 권능도 없을 뿐 아니라 심지어 그를 법정에 불러낼 권한, 곧 소환권 조차도 없다. 따라서 본문은 하나님과 인간과의 본질적인 차이를 나타낸다. 아마 욥은 지극한 고난을 체험하는 기간 동안에, 자신은 단지 미천한 존재이며, 하나님의 재난앞에 어찌할 도리가 없는 무력한 존재임을 철저히 느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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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은 절대적, 존재론적 측면에서는 자신도 여느 인간과 다를 바 없은 죄인임을 고백했었다(2). 그러나 그는 사실적.구체적 측면에서는 특정한 범죄를 범하지 않았다고 고백해 왔다. 그러나 이러한 욥의 자기 확신도 고통의 나날이 지속되면서부터는 흐려져간 것 같다. , 욥은 재난을 받기 이전까지는 늘 하나님을 찬양하며 자신 또한 경건한 의인으로 자부할 수 있었다. 그러나 막상 고난의 강도가 심해지고 그것이 장기화될 조짐을 보이자 하나님을 원망하게 되었으며, 이로 인해 하나님의 질책을 예감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던 것이다. 이렇듯 욥은 고통의 나날(1:21; 2:10)속에서 때로는 구원을 갈망하고, 또 때로는 불평과 원망을 토로하는, 이른바 신앙적 `씨름'(32:24)을 통해서 자신의 존재와 신앙을 확인시켜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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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나를 돌아보지 아니하고 - 회복의 가능성이 없는 자신의 병세에 회의를 느끼고 체념적으로 한 말이다.

 내 생명을 천히 여기는 구나 - 7:16 주석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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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이 다 일반이라(, -하트 히이) - 문자적인 의미는 `그게 모두 동일하다'(It is all the same)이다. 이는 선악이 공히 똑같이 대우받는다는 의미이다. 나름대로 경건에 대해 누구보다 자신 있었던 욥 자신이 재난을 받자 이러한 생각을 하였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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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홀연히 재앙이 내려 도륙될 때 - 이는 욥이 그의 가축과 자녀를 창졸간에 잃어버린 사건(1:13-19)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이다.

 무죄한 자의 고난 - 여기서 욥은 자신의 고난이 그의 범죄에 기인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도리어 그는 그것이 하나님의 주권, 곧 의인과 악인을 동일하게 취급하시는(22) 하나님의 주권에 기인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로써 그는 자신이 무죄하다는 것을 다시 한번 변호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욥의 이해는 다분히 현상적, 다면적인 경향이 짙다. 왜냐하면 제반 현실사에서 악인의 흥왕과 의인의 고난이 자주 목도되는 것이 사실이기는 하나, 그것이 의인과 악인을 동일한 수준에서 위급하시는 하나님의 섭리에 의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다만 하나님께서는 일시적으로 악인의 흥왕을 묵과, 허용하실 뿐이다. 이는 사단의 활동을 하나님께서 일시적, 제한적으로 허용하시는 것과 마찬가지이다(1:12; 2:6). 그러므로 욥의 친구들과 마찬가지로 욥 역시, 현실에 나타나는 현상에만 집착한 나머지 하나님의 숨겨진 공의를 온전하게 보지는 못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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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렇게 되게 한 이가 그가 아니시면 누구이뇨 - 22절에서 욥은 이 세상의 공의와 질서가 왜곡된 것으로 보았다. 그리고 23절에서는 의인의 고난을 기뻐하시는 하나님, 곧 냉소적이며 무자비한 분으로서의 하나님을 보았다. 이와 같은 선상에서 욥은 본문에서 더욱더 신랄하게 하나님께 대한 불평을 털어놓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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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체부 - `시종'(侍從)으로도 번역된다(Pope). 이는 중요한 소식을 전달하기 위해 조정에서 고용한 발이 빠른 자를 가리킨다(대하 30:6; 3:13; 8:10, 14). 고대 팔레스틴, 특히 애굽 지역에서는 이러한 전령자들을 많이 사용하여 군사적, 행정적 사무를 원활히 처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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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빠른 배 - 원문의 문자적 의미는 `갈대의 배'이다. 고대인들은 큰 갈대를 이용하여 배를 만들었다. 이 배들은 넓이는 좁고 길이가 긴 유선형이었기 때문에 매우 빠른 속도로 항해할 수 있었다.

 

 움킬 것에 날아 내리는 독수리와도 같구나 - 일반적으로 독수리는 창공을 배회하다가 먹이를 발견하면 전속력으로 하강하여 그것을 채어간다. 이러한 독수리의 하강 모습을 통하여 아무런 소망없이 허무하게 흘러가는 자신의 삶을 한탄하고 있다. 한편 욥은 육지(`체부', 25). 바다(`빠른 배'), 공중(`독수리')등에서 빠르다고 생각되는 것을 일일이 열거함으로써 보잘것 없고 짧은 자신의 삶을 시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한편 본문에서 욥은 단순히 세월의 빠름을 나타내려 하기 보다는 자신의 고통이 멈출 날을 기대하면서 병고 가운데 보내는 참혹한 시일들이 빨리 흘러가기를 소망하고 있다(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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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절에는 극심한 고통 중에 종잡을 수 없이 휘청거렸던 심령을 바로잡으려는 욥의 굳은 결심이 엿보인다(Hartley).

 

 내 원통함을 잊고 - 이는 특히 자신의 처지를 동정하기 보다는 오히려 정죄하는 태도를 보였던 친구들을 염두에 둔 말이다. 욥이 하나님께 불만을 토로하였던 것도 친구들의 비난과 조롱 탓이 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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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절(27)에서 보여주었던 욥의 굳은 결의도 극도의 고통 앞에서는 여지없이 해체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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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찌 헛되이 수고하리이까 - 이 말은 다음 두 가지 뜻을 모두 내포한다. (1) `하나님이 내리시기로 작정하신 고통을 피하려고 해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Hartley) 이는 곧, 고통의 엄연한 현존 앞에서 깊이 절망해 하는 탄식이다. (2) `하나님이 유죄로 판결하신 마당에 어찌 자신의 결백을 내세울 수 있겠는가'(Pope). 한편 `수고하리이까'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야가'는 본래 `기진맥진하다'라는 뜻으로서 고된 노역으로 말미암은 쇠약함에 강조점을 두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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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눈 녹은 물로...깨끗이 할지라도 - 여기서 욥은 자신을 정화(淨化)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을 생각하고 있다. 26:6에서 시인은 성소 제단에서 손을 씻음으로써 자신의 무죄성을 입증하려 했다. 21;1-9에는 피살된 시체를 발견할 경우 목을 꺾은 암송아지 위에 손을 씻음으로써 그 살해 사건과 무관함을 나타낸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렘 2:22에서 하나님은 `잿물로 씻으며 수다한 비누를 쓸지라도 '유대 백성의 죄가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고 경고하셨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본문에서 욥은 한편으로 자신의 무죄성을 주장하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하나님 앞에서 결국 흠많은 존재로 드러날 수밖에 없는 한계 상황을 말하고 있다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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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옷이라도 나를 싫어하리이다 - 구약 성경에서 종종 의복은 어떤 사람의 도덕적, 영적 특질과 결부되어 언급된다(8:22; 52;1; 61:10). 죄악에 대한 징계로 말미암아 황폐화된 예루살렘도 더러워진 치마를 입은 여인에 비유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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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의 두 구절에서 욥은 자신의 무죄성을 보이기 위한 최선의 방도를 강구하였거니와, 이제 그 모든 노력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기란 불가능하다는 것을 토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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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결자 -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모키아흐'`야카흐'에서 유래된 말이다(Norman C. Habel). 이 단어는 여러 문맥에서 다양한 뜻으로 사용되었다. 지혜 문학에서는 `바로잡다', `경책하다'는 뜻으로 쓰였고(5:17; 9:8) 법정적인 문맥이나 제삼자의 역할을 언급하는 문맥에서는 `판단하다' 혹은 `변론하다'라는 뜻으로 사용되었다(31:37; 2:4). 여기서는 양자(兩者) 사이에 가로 놓인 벽이나 문제 등을 해소하는 중재자들을 의미한다. 욥은 지식, 능력, 거룩성 등에 있어서 하나님과 자신 사이에 놓인 엄청난 간격을 통절히 인식하고서 그 간격을 연결시켜줄 대상을 마지막 희망으로 찾고 있는 것이다. 이는 어렴풋하게나마 중보 사상을 보여주는 말이라 하겠다(딤전 2:5). 한편 욥기서 중 신약 성경에 그대로 인용된 부분은 단 한 곳뿐이지만(5:13; 고전 3:19) 그 내용상 신약 성경과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는 절들이 더러 있다. 이를 도표로 나타내면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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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용 | 욥 기 | 신 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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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단의활동 | 1 : 7 | 벧전 5 : 8; 12 : 9, 10 |

| 공수래 공수거의 인생 | 1 : 21 | 딤전 6 : 7 |

| 인간 지혜의 한계 | 5 : 12, 13 | 고전 3 : 19 |

| 경책에 대한 자세 | 5 : 17 | 12 : 5 |

| 중재자 | 9 : 33 | 딤전 2 : 5 |

| 부활에 관하여 | 14 : 14 | 11 : 25 |

| 하늘에 계시는 증인 | 16 : 19 | 9 : 24 |

| 살아계신 구속자 | 19 : 25 | 7 : 25 |

| 부활의 몸 | 19 : 26, 27 | 3 : 20, 21; 요일 3 : 2 |

| 이기주의 | 22 : 6, 7 | 25 : 42-45 |

| 헛된 이득 | 27 : 8 | 16 : 2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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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은 현재 자신의 판단력과 삶의 의지마저 흐리게 만드는 지독한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게 되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 이러한 고통 속에 있는 한 객관적 입장에서 스스로를 볼수도 없었을 것이다.

 

 막대기(, 쉬베토) - 이는 양떼를 인도하고 보호하기 위해 목자들이 들고다녔던 지팡이와 같은 것을 의미한다. 시편 기자는 하나님의 지팡이가 주는 안위감에 대해 노래하고 있으나(23:4), 이 지팡이가 징벌의 도구로 사용되기도 하였다(21:9;10:5; 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