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욥기(구속사)

욥기15장,정죄받는 욥

호리홀리 2016. 3. 14. 20:21

4:1에 이어 엘리바스가 두 번째로 변론하는 장면이다. 첫 번째 변론과 비교해 볼 때 엘리바스는 한 차례 변론이 진행되는 동안 욥에 대해 매우 적대적인 감정을 갖게 되었음을 본장의 내용을 통해 알 수 있다. , 첫번째 변론 때에는 엘리바스가 욥의 특정한 범죄를 염두에 두고는 있었으나 위로와 동정 어린 어투로 권면하였다(4:7; 5:17). 그러나 본장에서는 욥의 재난에 대해 단순한 인과 응보적 시각만 강력히 피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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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혜로운 자가 어찌 헛된 지식으로 대답하겠느냐 - 이는 욥이 자신을 그의 친구들보다 지혜로운 자라고 말한 사실을 염두에 둔 질책이다(12:3; 13:2). '헛된 지식'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다아트 루아흐'는 문자적으로 '바람의 지식'을 뜻한다. 이것은 욥의 지식이 바람처럼 헛되이 날아가는, 가볍고 공허한 것임을 가리킨다.

 

 어찌 동풍으로 그 품에 채우겠느냐 - 여기서 '동풍'이란 시리아나 북아라비아 지방에서 팔레스틴 지역으로 불어오는 열풍으로서 특히 봄철에 많이 불며 농작물에 커다란 피해를 준다(27:21; 41:6, 23; 18:17; 17: 10; 13:15; 4:8). 따라서 본문은 헛되고 오히려 해로운 것을 그 품에 채워 간직하겠느냐란 뜻이다. 이는 욥이 내세우는 논리가 헛되고 무익한 것임을 지적하는 엘리바스의 경멸섞인 표현이다. 한편 ''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베텐''' 특히 '아랫배'를 가리킨다(J.E.Hartley, 5:21, 22, 27). 히브리인들은 이곳을 생각과 감정의 가장 깊은 좌소(坐所)로 생각한 듯하다(18:8; 20:27, 30; 2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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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절은 2절 내용을 부연하여 강조하는 내용이다. 여기서 '유조치'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사칸''유익하다'의 뜻으로서(22:2;35:3), '우조치 아니한'이란 앞에서 주장한 욥의 말이 전혀 무익하고 가치가 없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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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으로 네가...그치게 하는구나 - 개역 성경의 번역은 욥의 악하고 어리석은 말이 다른 사람의 신앙에 타격을 준다는 의미를 시사한다. 영역 성경 TEV(Today's EnglishVersion)도 이러한 의미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러나 문맥의 흐름으로 볼 때 본절의 초점은 오히려 욥 자신이 신앙적 마모에 놓여져 있다고 봄이 더 자연스럽다(Anderson,Hartle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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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네 죄악이 네 입을 가르치나니 - 여기에서 욥이 친구들의 권면을 한사코 거부하고 도리어 자기를 변호하기에 급급한 것은 근본적으로 욥이 죄악 가운데서 바른 판단력을 상실했기 때문이라는 의미이다. 이는 욥의 재난을 철저히 범죄와 연결시켜 온 다른 친구들의 관점과 맥을 같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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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너를 정죄한 것은 내가 아니요...증거 하느니라 - 이는 욥의 변론, 특히 그 자신은 의롭고 하나님께서 의로운 자신을 고난당하게 한다 하는 하나님께 대한 항변(12:4;13:3, 18, 20-14:22)이 그 자체로서 하나님 앞에 죄악되며, 욥 자신을 정죄하는 것이라는 뜻이다(M.H. Pope, J.E. Hartle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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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네가 제일 처음 난 사람이냐...출생하였느냐 - 이는 해석하기 어려운 문구 중의 하나이다. 혹자는 여기서 '제일 처음 난 사람''창조 이전의 사람'(pre-creationman, Rowley), 혹은 지상의 아담의 원형으로서의 천상의 아담(Hartley) 등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다른 명백한 성경 구절을 들어 증거하기가 어렵다. 반면 이를 '아담'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하지만 아담은 '산들'이 존재한 후 창조 6일째에 창조되어졌다(1:24-31). 이 산들이 있기 전 존재했던 분은 하나님(90:2; 8:22-31)과 천사들(38:4-7) 뿐이다. 아무튼 여기서 엘리바스는 과장적인 표현으로써 욥의 자기 주장의 무모성을 힐책하고 있음에 분명하다. 이는 특히 욥이 그의친구들보다 더 지혜롭다고 말한 것에 대한 반문으로 보인다(12:2, 3;13:1,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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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님의 모의를 네가 들었느냐...홀로 가졌느냐 - 이는 앞절(7)과 연관되는 구절로서 엘리바스가 욥에게 시원적(始原的)인 존재 혹은 나아가 초월적인 존재이냐고 힐책하는 내용이다. 이스라엘 사회에서 노인들은 지혜를 많이 지닌 것으로 여겨져 존경의 대상이었다(12: 12; 19:32). 그러므로 7절이나 본절에서 언급하는 바, 욥에 대한 반어적 질문 역시 이러한 전통과 맥을 같이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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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너의 아는 것이...우리에게는 없겠느냐 - 이는 12:2, 3;13: 1, 2의 욥의 말에 대한 반박으로 보여진다. 그러나 실제로 욥은 앞에서 친구들을 무시하거나 그들을 무지한 자로 단정하지 않았다. 단지 그는 자신이 친구들 못지않게 지혜롭다고 역설하였을 뿐이다. 한편 본문의 이와 같은 언급은 친구들이 의뢰해 온 그들 자신의 경험이나 전통,정통성 또는 연배와 인생 경륜 등에 대한 자부심에서 한 말이나 실지로 그들의 지식은 원칙론적이며 피상적인 측면이 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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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중에는 머리가 세기도 하고...있느니라 - 이는 앞에서 언급되어진 것처럼(8절주석 참조) 연로한 자가 더 지혜롭다는 당시의 보편적 인식에 근거를 두고 한 말로서, 엘리바스 등 욥의 친구들이 지혜로운 자들임을 완곡하게 표현한 것이다(12:12;1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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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님의 위로와...네가 어찌 작다 하느냐 - 이것은 욥의 친구들이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통하여 욥의 잘못된 점을 지적하고 권고해 주신다고 믿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욥은 그를 충고하고 교훈하려 하는 친구들을 향해 '너희가 하나님을 위하여 불의를 말하려느냐'(13: 7)라고 말함으로 그 친구들의 교훈이 잘못되었음을 지적한 바 있다(13:7-12). 따라서 엘리바스는 이러한 욥의 태도를 마치 하나님의 위로를 거부하는 것인 양 단정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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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찌하여 네가 마음에 끌리며 - 문자적으로는 '왜 너의 마음이 너를 끌게 하느냐'(KJV, Why doth thine heart carry thee away ? ; NIV, Why has your heart carriedyou away)이다. 이것은 욥의 교만되고 자만하는 마음이 하나님을 떠나 그릇된 길로 이끌고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이전에 욥은 자신은 의로우며(12:4; 13:18)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굳이 죄를 찾아 징계하시고 계신다고 말한 적이 있다(7:12, 19,21;10:2-22). 그리고 이러한 말에 대해서 엘리바스는 욥이 헛된 지식을 갖고 있고, 동풍(헛되고 해로운 것)을 그 품에 품고 있다고 힐책한 바 있다(15:2). 따라서 본문 또한 그러한 맥락의 선상에서 이해될 수 있다. 한편 네 눈을 번쩍여 역시 하나님께 대하여 교만되고 반항하는 자세를 취하는 것을 지적한 책망조의 말로 보인다. 혹자는 이것이, 욥이 자신을 징계하시는 하나님께 대하여 분노하는 표시를 나타내는 것이라고 보기도 한다(J.E. Hartle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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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네 영으로 하나님을 반대하고...말들을 내느냐 - 엘리바스는 욥이 죄를 자백하고 회개하기는 커녕 끝내 자기(自己) ()를 고집하는 것이(6:29; 12:4; 13:18) 그의 심령에서부터 하나님을 반대하는 불의한 것임을 지적하고 있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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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이 무엇이관대...의롭겠느냐 - 이는 엘리바스를 위시한 친구들이 욥에 대하여 범죄로 말미암아 환난과 고난을 당한다고 주장한 것과 일맥 상통한 말로서(4:7-11;8:3-7, 22; 11:6), 특히 욥 자신이 의롭다고 주장한 말(6:29; 12:4; 13:18)에 대한 반박이다. 어떤 면에서 본절은 아담 이후 모든 인간이 죄인으로서 하나님 앞에 의롭지 못한 사실(5:16-21), 즉 인간의 원죄의 사실을 나름대로 묘파한 말로서 교리적으로는 옳게 보이는 듯하나 욥의 현재적 딜레마를 해결해 주는 데 도움이 되는 말은 아니었다. 따라서 훗날 이들은 하나님의 책망을 받고 욥의 중보 기도로 죄사함을 받게 된다(42:7,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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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님은 그 거룩한 자들을 믿지 아니하시나니 - '거룩한 자들'이란 일반적으로 '천사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본다(5:1). 그리고 '하늘'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솨마임'은 복수로서 물질계의 하늘(Rowlinson) 혹은 천사들이 거하는 곳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으나 여기서는 후자의 의미가 더 자연스러울 듯하다. 한편 본문은 '하나님은 그 종이라도 오히려 믿지 아니하시며 그 사자라도 미련하다 하시나니'(4:18)라는 말씀과 그 맥을 같이하는 것으로서 하나님 앞에서 인간의 부정함과 불의함을 상대적으로 더 부각시키는 말이다. 혹자는 여기에서 '하늘들'이 단순히 한 장소를 의미한다기 보다는 하늘에 거하는 존재들을 가리킬 수도 있다고 본다(J.E. Hartley). 그러나 이 주장의 근거는 명백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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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물며...사람이겠느냐 - 이는 앞절(15)의 결론적인 내용으로서 인간의 불의와 부정을 극적으로 드러내는 말이다. 또한 이는 14절의 내용처럼 이전에 욥이 자신을 의롭다고 말한 것에 대한 변론과 반박의 연장선상에서 말해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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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네게 보이리니...내가 본 것을 설명하리라 - 본장의 앞절들에서 자신의 의를 고집하여 친구들의 말을 반박했던 욥을 비판했던 엘리바스는, 본절에서부터는 이전에 주장했던 그의 논리처럼(4: 7-11) 또다시 악인은 고통과 환난을 당한다는 원칙론적 교훈을 피력하고 있다. 이중에서 17-19절은 그의 본 논지를 교훈하기에 앞서 이끄는 서언(序言)이라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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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는 곧 지혜로운 자들이...전하여 온 것이라 - 본절은 엘리바스의 교훈이 그 자신의 경험에 의한 것일 뿐만 아니라(17) 고대로부터 전해져 내려온 전통적 지혜에 입각해서 말한 것임을 시사한다. 그러나 이와 같은 전통주의에 입각한 교훈은 자칫 현실의 상황이나 보다 개혁된 또는 진보된 진리를 아랑곳하지 않는 폐쇄성에 빠질 우려와 단순히 그 전통적 교리를 고수하고 전하려는 무사고(無事故)주의 형식성에 치우칠 우려가 있다. 본문에서 지혜로운 자들이 그 조상들에게서 교훈을 어떤 형식으로 받았는지 정확한 근거는 없으나 아마도 구전(口傳)에 의해 전승되어진 것 같다. 그리고 렘49:7에도 데만 사람의 지혜에 대한 언급이 나타난다(19절 주석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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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땅은 그들에게만 주셨으므로...못하였었느니라 - 여기에서 ''은 엘리바스 자신이 사는 데만 사람의 땅을 뜻하는 것 같다(M.H. Pope). 그리고 본문은 데만 사람의 땅이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진 것이므로 다른 외인들은 그곳에 무력으로 침입하거나 거하지 못하게 되었다는 뜻으로, 이는 데만 땅의 지혜로운 자들에게 전승되어진 교훈 역시 다른 외부인의 영향에 의해 오염되거나 왜곡된 것이 아니라 그만큼 순수하고 진실되다는 뜻을 암시하는 것 같다(J.E. Hartle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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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말에 이르기를 악인은...작정되었으므로 - 원문에는 '그 말에 이르기를'이란 문장이 없다. 그런데 개역 성경은 17-19절의 도입부 서언에 이어 본절에서부터 엘리바스의 주 논지가 언급된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고서 이 문구를 첨가하였다. 한편 '고통'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은 해산하는 것과 같은 '고통'을 암시하기도 한다. 따라서 악인은 필경 극렬한 고통을 당하리라는 뜻이다. 엘리바스의 이 말은 '강도의 장막은 형통하고 하나님을 진노케 하는 자가 평안하니'(12:6)라는 욥의 말과 대조를 이룬다. 그리고 본문의 '강포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아리츠''압제자', '독재자'를 의미한다(Lange, J.E. Hartle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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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귀에는 놀라운 소리가 들리고 - 여기에서 '놀라운 소리'1:13-19에서 들렸던 것과 같은 '공포 또는 재난의 소식'을 의미한다(Anderson). , 악한 자에게는 항상 악재(惡材)의 소식이 뒤따라와 그를 괴롭힌다는 뜻이다.

 

 그 형통할 때에 멸망시키는 자가 그에게 임하리니 - 악인의 형통은 잠깐이고 뜻하지 않는 재난이 갑자기 들이닥침으로써 결국 파멸한다는 뜻이다. 본문의 '멸망시키는 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솨다드'는 본문 그대로 '멸망시키는 자'(KJV, thedestroyer), 또는 '약탈자'(NIV, marauders)를 의미한다. 결국 본절 전반절과 함께 본문 또한 욥의 현상황을 염두에 두고 한 말 같다(1:1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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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가 어두운 데서 나오기를 바라지 못하고 - '어두운 데'에 관해서 혹자는 '불행'을 상징적으로 암시한다고 하며(23, 30; 19:8, Lange, M.H. Pope), '음부'(10:21,22) 또는 '죽음의 징조'등을 암시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J.E. Hartley). 본문에서는 전자가 더 타당한 듯하다. , 악인들은 한번 재앙이 임하여 불행한 비극 가운데 빠지면 너무도 절망적인 상황으로 몰리는 바람에 그 속에서 다시 빠져 나오기를 바라지 못한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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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는 유리하며 식물을 구하여 - 문자적으로는 '그는 식물을 위하여 유리한다'(KJV,He wandereth abroad for bread ; RSV, He wanders abroad for bread)의 뜻이다. 따라서 본문은 악인이 먹을 식물을 찾아 이리저리 방황하면서 헤메이는 것을 암시한다. 다시 말해서 악인은 앞절에서처럼 갑작스런 재앙을 만나 먹을 것이 없어서 헤매는 비참한 처지에 빠짐을 암시한다.

 

 흑암한 날이 가까운 줄을 스스로 아느니라 - 극도로 심각한 재난을 만나 삶의 의욕마저 상실하고 오직 파멸의 시기만 기다릴 수밖에 없는 절망적 처지에 몰리게 됨을 시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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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환난과 고통이 그를 두렵게 하며...이기리니 - 악인에게 임할 비극적 결말을 의인법을 사용하여 실감나게 표현한 문구이다. 여기서도 엘리바스는 21절의 내용처럼 욥이 처한 불행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인 것 같다. 본문의 '환난'(, 차르)이란 문자적으로 '좁음', '협소함' 등을 뜻한다. 이는 재난을 당하여 안절부절 못하는 갑갑한 마음상태를 암시하는 듯하다(J.E. Hartle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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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는 그 손을 들어...배반함이니라 - 원문에 의하면 본문의 서두에는 ''(, 왜냐하면)가 있다. 이는 본문이 앞절들의 이유, 즉 악인들이 비참한 불행에 처하고 멸망당하는 이유를 나타내고 있음을 뜻한다. 하지만 욥은 극도의 재난 속에서 괴로워하며 하나님께 원망 섞인 탄식을 늘어놓은 적도 있지만 하나님을 적극적으로 대적하거나 모독한 적은 없다. 그러므로 본문은 욥에 대한 엘리바스의 편견을 엿보게 한다. 한편'그 손을 들어'란 일반적으로 하나님 또는 어떤 사람을 대적하는 것을 나타낼 때 주로 쓰이는 표현이다(삼상 26:9, 23; 왕상 11:26, 27; 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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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을 굳게 하고...달려가나니 - '목을 굳게 하고'란 일반적으로 '교만함', '완고함', '강퍅함'등을 뜻한다(31:27; 대하 36:13; 9:16, 17; 17:23; 7:51). 따라서 본문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자만심으로 가득 차 심지어 하나님마저 대적하려 드는 악인의 참람한 행태를 가리킨다. 이것 또한 엘리바스가 욥의 자기 무죄성에 대한 변론을 염두에 두고(10:2-22; 12:4; 13:13, 20-14:22) 말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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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악된 방법으로 재산을 모으고 또 온갖 탐욕과 쾌락을 충족시키는 악인의 모습을 우회적으로 표현한 구절이라 할 수 있다(32:15; 73:7; 119:70;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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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는 황무한 성읍...거하였음이니라 - 본문의 해석은 여러 가지로 나뉜다. (1) 악인들이 그들의 삶의 터전에서 쫓겨나 황폐한 곳에서 살게 될 것이다(J.E. Hartley).(2) 악인은 폐허가 된 성읍을 재건축하여 그곳에 살기 위해 황폐한 곳으로 간다(Rashi). (3) 악인들의 화려하고 좋은 성읍과 집들은 이내 사람이 살 수 없는 폐허로변해 버린다(Anderson). 그리고 영역본도 '거하였음이니라'를 서로 약간 다르게 번역하였는데, NIV'거할 것이다'(will inhabit)는 미래형으로, KJV'거한다'(dwelleth)는 현재형으로, RSV는 현재 완료형 곧 '산다'(has lived)로 번역했다. 그러나 본문은 전반적인 문맥의 흐름상 악인이 하나님의 저주와 징계를 받아 황폐한 성읍, 사람이 살지 못할 집에 거할 것이라는 의미가 가장 타당한 듯하다. 본문에서 '황무한 성읍, 사람이 살지 아니하는 집, 돌 무더기가 될 곳' 등은 하나님의 저주의 결과로 보아야 할 것이다(13:13-17; 왕상 9:8; 1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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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는 부요하지 못하고...증식하지 못 할 것이며 - 악인은 경제적으로도 그 부()와 재산을 계속 보존하지 못하고 이내 상실하게 될 것이며 다시 번창하지 못할 것이라는 뜻이다. 이 또한 21, 24절에서처럼 욥이 당한 재산상의 피해를 염두에 두고 한 말인 듯하다(1:1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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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암한 데를 떠나지 못하리니...떠나리라 - '흑암'이란 악인이 당하는 '재앙'

또는 '불행' 등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22절 주석 참조). 그리고 '불꽃'은 하나님의 진노 또는 하나님의 심판의 불꽃을 상징하는 것 같다(30:33; 12:29). 또한 일반적으로 번성한 나뭇 가지가 형통함, 번성함을 상징적으로 암시하는 바(1:3; 80:11;92:12) 본절의 '그 가지를 말릴 것이라'도 악인의 번성, 번영 등을 의미하는 것 같다. 결국 악인은 한번 재앙에 빠질 경우 그 불행한 처지에서 다시는 빠져 나오지를 못하며 그의 번성하는 사업도, 재산도 하나님의 심판에 의해 온전히 사그러지고 만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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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스스로 속아 허망한 것을 믿지 말 것은 - 문자적으로 '그로 하여금 헛된 것을 신뢰함으로 스스로 속임받지 않도록 하라'(KJV, Let not him that is decieved trustin vanity ; NIV, Let him not decieve himself by trusting what is worthless)라는 의미이다. 혹자는 본문이 앞절들(29, 30) 또는 뒷절들(32, 33)의 나무 비유들과는 조화를 이루지 않는 것으로 보기도 하나(M.H. Pope), 오히려 서로 연관된다고 봄이 더자연스럽다. , 찍힌 나무가 다시 때가 되면 소생하고 열매를 맺는 것(14:7-9)과는 달리 악인은 다시 새롭게 될 소망을 가져봐야 헛될 뿐이라는 것이다. 악인이 자랑하고 의지하는 모든 것들은 궁극적으로 공허하며 쓸모없는 것이며 따라서 자신을 기만하는 것일 뿐이다(Rawlins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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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의 날이 이르기 전에...푸르지 못하리니 - 앞절 후반부의 '그의 보응''그의 종려나무'로 보는 자들은 본문의 '이룰 것인즉''시들다'(wither)로 번역한다. 이 경우에 본문은 그의 날, 즉 종려나무의 추수 때가 이르기 전 그 나무가 시들고 가지가 죽는다는 뜻으로 풀이 된다(J.E. Hartley). 그러나 굳이 그렇게 보지 않더라도, 본문은 악인이 허망한 것을 믿어 기대하다가 도리어 때가 되기도 전에 실망케 되고 멸망케 된다는 뜻을 가리킴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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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도 열매가 익기 전에 떨어짐 같고 - 때 아닌 한파로 말미암아 포도 열매가 익기도 전에 떨어져 버리움을 당하듯이, 악인에게도 창졸간의 재난이 들이닥쳐 파멸로 이끌 것이라는 의미이다. 특히 '떨어짐'의 히브리어 '하마스''해치다', '난폭하게 빼앗다'는 뜻을 지니는 바, 악인의 파멸이 거역할 수 없는 강압적 힘에 의해 초래됨을 시사한다(J.E. Hartle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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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곡한 무리는 결실이 없고.....불 탈 것이라 - '사곡한'의 히브리어 '하네프''더럽히다', '타락하다'에서 유래된 말로 '더러운', '불경건한'의 뜻을 갖는다. 이는 곧 엘리바스가 욥을 빗대어 한 말 같다(21, 24, 29). 그리고 본절 후반절은 '강도의 장막은 형통하고 하나님을 진노케 하는 자가 평안하니'(12:6)라고 한 욥의 말을 정면으로 논박함과 아울러, 욥에게 임했던 불 재앙을(1:16) 곧바로 연상시키는 말이다. 결국 본절은 엘리바스가 욥의 위선과 부패상을 간접적 어투로 꾸짖는 내용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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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들은 악한 생각을 배고...하였느니라 - 여기서 엘리바스는 출산과 관련된 잠언투의 경구를 사용하여 자신의 입장을 최종 정리하고 있는데, 본절의 '마음'과 엘리바스의 변론 서두의 ''(2)에 해당하는 히브리어가 공히 '자궁'으로도 번역되는 '베텐'인 점에서 수미 쌍관적(首尾雙關的) 기교를 엿보게 한다. 여기에서 '악한 생각'(, 아말)이란 문자적으로 '수고', '노고'를 의미하나 본문에서는 '해악'(KJV, RSV, mischief), ''(NIV, trouble)를 암시한다. 그리고 '궤휼'의 히브리어 '마르마''속임', '사기' 등을 의미한다. 한편 혹자는 본문에서 '불의'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아웬''자기 기만' 또는 '헛됨'(KJV, vanity)의 의미로 보기도 한다(Bernhart). 아무튼 본문은 '사곡한(불경건한) 무리'는 해악을 품고서 남을 해칠 뿐 아니라 결국에는 자기 자신도 기만하여 멸망에 빠지게 되는 자들임을 예시한다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