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에스라(구속사적해석)

에스라서9장,영적부흥운동

호리홀리 2016. 1. 13. 10:49

에스라가 결심하지 않았더라면(7:10), 이는 상상 할 수 없는 일이다. 포로후 역사서의 대부분이 그에 의해서 기록되었기에 더욱 그렇다.우리의 결심을 통해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구원계획을 살펴보자.

1절의 '이 일'(1) 에스라가 바벨론에서 가져온 예물들을 성전의 제사장에게 바친 일 및 제사를 드린 일(8:33-35), (2) 에스라가 왕의 조서를 총독에게 보내어 큰 도움을 받은 일(8:36) 등 모두를 가리킬 것이다. 한편, 에스라를 위시한 귀환민들이 예루살렘에 도착한 때가 5월이었고(7:9) 에스라가 이스라엘 백성을 그 해 920일에 모으는 사건이 있었다는 사실로 미루어 볼 때, 그 시간적 공백이 에스라 도착 후 4개월을 넘지 못할것이다.

 

 떠나지 아니하고 - 여기서 '떠나지',( 니브델루)'나누다' 혹은'분리하다'의 뜻을 갖는 동사 '바달'의 단순 재귀형으로서, 기존의 것으로부터의 완전한 절교 및 단절 행위를 나타낼 때 사용하는 단어(대상 23:13 ; 10:28)이다.

 

 가증한 일 -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케토아보테이헴'은 우상 숭배와 같이 하나님의 노여움을 살 만한 범죄 행위를 가리킬 때 주로 사용되는(7:26 ; 왕상 21:26 ;14:1 ; 53:1) 동사 '타아브'의 파생형이다. 본문의 '가증한 일'은 구체적으로 이방인들과의 통혼(通婚)을 가리킨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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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들의 딸을 취하여 - 이것은 문자적으로 받아들여서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방 여자들만 데려온 것으로 봐서는 안된다(6:2). , 그들은 자신의 딸들을 이방인 남자에게 시집을 보내기도 했던 것이다(12). 그러나 여자가 이방인에게 시집가는 것은 이스라엘 공동체의 순수성을 깨뜨릴 염려가 없다는 점에서 크게 거론되지 않고 있을 뿐이다. 아무튼 이 같은 일은 율법에서 엄격히 금지되고 있는 것들이다(34:16 ; 7:3).

 

거룩한 자손으로...섞이게 하는데 - 여기의 '거룩한 자손'은 문자적으로 '거룩한 씨'를 가리킨다. 그런데 여기의 '거룩한 씨'는 단순히 인종적 차별, 혹은 편견을 배경으로 하는 말이 아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1) 하나님에 의해서 선택되었으며(19:6). (2)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계시를 바탕으로 이방인들에 대한 빛의 사명을 부여받았다는(42:6) 점 때문에 '거룩한 씨'인 것이다(Fensham). 한편, '섞이게 하는데'(, 히트아레부)'보증하다' 혹은 '혼합하다', '사귀다' 등의 뜻을 갖는 동사 '아라브'의 재귀적 사역형으로서, 자신의 유익만을 좇아사귀지 말아야 될 사악한 대상과 깊은 교제 관계를 유지하는 것을 가리킬 때 사용되는 말이다(106:35 ; 24:21).

 

 방백들과 두목들 - 여기의 '방백들'(, 하사림)에는 앞에 ''를 뜻하는 정관사(, )가 있다. 바로 이것은 '방백' 모두가 이방인과 통혼하는죄 중에 있지 않았음을 시사해준다(Fensham). '방백' 중 일부는 다른 방백들의 범죄 사실을 에스라에게 고소하러 올 정도였다(1). 한편 '두목'(,하스가님)'관리'를 뜻하는 아카디아어 '사크누'에서 온 말로서 꽤 넓은 의미로서의 '지도자'를 뜻한다(Williamson). 그렇다면 우리는 이 단어가 '방백' 다음에 나온다는 점을 근거로 하여 '방백'보다 한 단계 아래의 지도자라고 단정할 수 있을 것이다(Williamson). 어떤 학자는 이 '두목', 백성들에 의해서 선출되어 어떤 공회와 같은 것을 구성했던 직분자들로 본다(Widengren). 아무튼 여기서 위의 두 단어가 나란히 언급된 것은 지도층 인사들을 포함하여 백성들의 타락이 보편적이었음을 강조하려는 저자의 의도와 밀접한 관계가 있을 것이다(Williamson).

 

 이 죄에 더욱 으뜸이 되었다 - 여기서 ''(, 마알)'은밀하게 가리우다', '죄를 범하다'의 뜻이 있는 동사 '마알'에서 온 명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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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듣고(케삼이) - 이것은 '듣고 있을 때에' 혹은 '듣고 있으면서'(NIV, williamson)로 번역되어도 무방하다. 이것은 에스라가 자신에게 고소하던 방백(1)의 말을 듣고 있는 도중에 다음과 같은 반응을 보였음을 가리킨다. 이 같은 사실은 지도자들의 타락이 에스라에게 너무나도 충격적으로 들렸음을 의미한다.

 

 속옷과 겉옷을 찢고 - 이것은 에스라가 극도의 슬픔에 빠졌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행동이다(Schultz, Fensham, 37:29, 34 ; 삼하 13:19 ; 1:20). 에스라가 이런 반응을 보인 것은 (1) 지도자들을 필두로 해서 백성들이 중죄를 범했다는 사실 자체와, (2) 이방인과의 통혼에 따라 이스라엘 공동체가 신앙적인 순수성을 상실하게 될염려 때문이었다. 사실상 이러한 범죄가 에스라 도착 전에 이미 이뤄졌기 때문에 에스라와는 상관이 없음에도 그가 이 같은 반응을 보인 것은, 에스라가 이스라엘 백성에 대해서 철저한 연대 의식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었다(Fensham).

 

 머리털과 수염을 뜯으며 - 이는 분노와 불쾌감을 표출하는 상징적 행동이다(Schultz, 13:25 ; 50:6). 이것은, 흔적이 남음으로 에스라가 공개석상에 나타날 경우 백성들에 의해서 목격될 것이라는 점에서, 에스라 자신의 의도적 행동이라고도 할 수가 있을 것이다(Fensham, Joseph Blenkinsopp).

 

 기가 막혀 앉으니 - 여기서 '기가 막혀'(, 메쇼멤)'놀라다'의 뜻을 갖는 동사 '솨맘'에서 파생된 단어로서, 어떤 충격적 사실로 인하여 넋을 잃는 듯한 심리적 상태에 빠지는 것을 가리킨다(4:19 ; 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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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스라엘 하나님 - 이것은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에 언약이 맺어졌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하나님의 호칭이다.

 

 말씀을 인하여 떠는 자 - 이런 표현은 율법을 철저히 준수하고자 했던 자들을 지칭하는 말로 여러 차례 사용된 바 있다(10:3 ; 66:2, 5). 이는 구체적으로 백성들의 타락상을 에스라에게 보고하러 왔던 방백들을(1) 가리킨다고 본다. 이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죄악에 빠져있는 사실(2)로 인하여 두려움을 갖고 있었다. 이들이 이런 두려움을 갖고 있는 까닭은, 이전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는 등 멸망한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범함으로 인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징계의 결과였음(대하 36:12-16)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한편 '떠는'(, 하레드)은 어떤 상서롭지 못한 돌발적 상황이 벌어진 즈음에, 그것으로 인한 좋지 못한 결과를 예상함으로써 두려움을 느끼는 것을 가리키는 동사 '하라드'에서 파생된 단어(7:3 ; 삼상 4:13)이다.

 

 다 내게로 모여 오더라 - 이것은 에스라가 방백들(1)의 보고를 접한 후 보인 부정적 반응(3)에 대한 또 다른 반응이다. , '말씀을 인하여 떠는 자'들은 에스라의 심정적 반응에 동조하며, 그 대책을 논의하기 위하여 이같이 하였을 것이다.

 

 저녁 제사 드릴 때 - 이것은 오후 3시의 기도하는 시간이다(3:1). 한편 본절의 '저녁 제사'는 여기의 '제사'(, 민하)가 주로 '피없는 제물'을 가리킨다(Davidson)는 사실로 미루어 볼 때, 저녁에 정례적으로 드려지던 소제였음이 분명하다(Kapelru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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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근심 중에 일어나서 - 여기의 '근심'(, 타아니트)'자기를 낮추다', '자책하다' 등의 뜻을 지닌 동사 '아나'에서 파생된 것으로서 어떤 외적 사건에 대해 연대감을 느끼면서 깊이 고민하는 것을 가리키는 말이다(16:29, 31 ; 119:107 ; 53:7). 후기 유대교 문헌에서 이 말은 금식을 뜻하는 말로도 사용되었다. 이 기간에도 에스라는 금식을 했을 것으로 보이나, 8:21이나 10:6에서와는 달리 여기서는 금식을 강조하지는 않은 듯하다. 한편, 여기서 '일어나서'(, )는 문자적 의미의 '일어남'보다는 어떤 결정적 행동을 하기에 앞서 이뤄지는 의지적 결단을 강조하는 단어이다(1:5).

 

 무릎을 꿇고 - 보통 이스라엘 사람이 서서 기도한 것과 비교한다면, 이러한 자세의 기도는 자신의 겸손과 고통을 특별히 표시하는 것임이 분명하다(Williamson).

 

 손을 들고 - 이것은 기도할 때 흔히 사용했던 상징적 자세이다(9:29 ; 왕상8:22 ; 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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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끄러워 낯이 뜨뜻하여 - 여기의 '부끄러워'(, 보쉬터)(실패로 인하여 스스로) '부끄러워하다', 혹은 (신뢰의 대상에)'실망하다', '당하다'의 뜻을 갖는 동사 '보쉬'의 파생형으로서(42:17 ; 22:22 ; 10:6), (1)백성들의 지도자로 세워졌으나 그 사명을 제대로 감당치 못했다는 자책감과 실망감, 그리고 (2) 범죄하여 하나님으로부터 징벌을 받게 된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해 에스라가 느끼는 신앙적 연대감 등을 아울러 보여주는 단어이다(Fensham). 한편 '뜨뜻하여'(, 니크람티)'부끄럽게 하다'의 뜻을 갖는 동사 '칼람'의 수동형으로서, 앞의 '부끄러워'와 거의 동일한 의미를 지니며 때로는 함께 언급되기도 한다(35:4 ; 45:16 ; 31:19). 에스라는 이러한 동의어의 반복 사용을 통하여 자신의 심정을 강렬하게 표출하고 있다.

 

 죄악이 많아 -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에서 돌아온 이후의 금번 범죄(1,2)는 물론이고 포로로 끌려가기 전부터의 모든 범죄를 포함한다(7).

 

 정수리에 넘치고...하늘에 미침이니이다 - 범죄의 심각성을 강조하는 두 가지 은유적 표현을 대구법적으로 연결시킴으로써 그 의미를 보다 강화시킨다. 특히 우리는 본절 전반절에서 1인칭 단수로, 후반절에서는 1인칭 복수로 표현되고 있음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3-5절에서도 드러나듯이 에스라는 자신이 속한 공동체와 더 나아가서는 조상들의 죄악에까지 깊은 공범 의식을 표출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자기 백성을 위해 중보 역할을 할 뿐만 아니라 스스로를 그들과 동일시하기까지 했다. 그는 그럼으로써 타락한 무리들을 회개에로 인도하고자 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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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열조 때로부터 오늘까지 - 아브라함 시대 혹은 출애굽 직후(7:39)에서 에스라 당시까지의 이스라엘의 전() 역사를 가리킨다(9:6-35).

 

 우리 죄가 심하매 - 이것은 포로 전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가 포로 후의 백성들과 결코 무관하지 않음을 암시해 준다(Fensham). 그러나 겔 18장에 나오는 포로민들의 불평처럼 이 말이 숙명론이나 무책임주의를 조장하는 의미로 이해되어서는 안된다. 이는 다만 출 20:5 등에 나오는 말씀처럼, 아비가 지은 죄를 똑같이 범하면서도 회개하지 않는 이들에 대한 경고일 따름이다. 따라서 강조점은 오히려 회개하고 여호와의 율례를 좇은 일에 있다(18:5-9 참조).

 

 우리 왕들...제사장들을 열방 왕들의 손에 붙이사 - 남국 유다와 북국 이스라엘이 여러 차례에 걸쳐 주변 강대국에 의하여 침범을 당하여 왕이나 제사장이 죽임을 당하거나 치욕을 당한 것을 가리킨다. , ''의 경우 '므나헴'은 앗수르 왕 ''에 의해서(왕하 15:19), '베가'는 앗수르 왕 '디글랏 빌레셀'에 의해서(왕하 15:29), '호세아'는 앗수르 왕 '살만에셀'에 의해서(왕하 17:3, 6), '므낫세'는 앗수르 왕 '앗술바니팔'에 의해서(대하 33:11), 요시야는 애굽 왕 '느고'에 의해서(왕하 23:29), '여호아하스''느고'에 의해서(왕하 23:33), 여호야김과 여호야긴 및 시드기야는 바벨론왕 '느부갓네살'에 의해서(왕하 24:12 ; 25:6, 7) 치욕을 당하거나 죽임을 당했었다. '제사장'의 경우도 이런 일들이 허다했었다(왕하 25:18 ; 52:24).

 

 노략을 당하며 - 이것도 왕을 포함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방의 왕들에게 복속되었던 형태 중의 하나이다. 그 대표적인 것이 바벨론 왕이 예루살렘 성전의 기명들을 가져간 일일 것이다(왕하 25:13-17).

 

 오늘날 같으니이다 - 에스라가 귀환한 후에도 포로로 끌려갔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타국 땅에 여전히 남아 있었던 사실을 배경으로 한 말이다(Williams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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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간 은혜를 베푸사 - 하나님께서 페르시아 왕의 마음을 감동시키셔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본토로 돌아갈 수 있도록 역사하신 일을 가리킨다(1:1). 따라서 여기의 '잠간'B.C. 537년의 최초 귀환 시기부터 B.C. 458년의 제2차 귀환 시기까지의 약 80년을 가리킨다(Fensham). 이 기간은 패역함과 불순종으로 얼룩진 이스라엘의 오랜 역사와 대조된다(Fensham, Rawlinson).

 

 남겨 두어 피하게 하신 - 이것은 하나님께서 포로로 잡혀갔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멸망으로부터 보호하시고 또한 팔레스틴으로 돌아오게 하셨다는 사실을 뜻한다. 다시말해서 에스라에게 있어서는 포로지로부터 팔레스틴으로 귀환한 자들만이 '남은 자'로 인정되었다고 할 수 있다.

 

 거룩한 처소 - 이것은 (1) 성전(Schultz, Williamson), (2) 팔레스틴 땅(Fensham,Batten, 박윤선) 등 모두로 이해될 수 있다. 위의 두 가지 모두 가능한 까닭은 다음 문구의 주석 과정에서 밝혀질 것이다.

 

 박힌 못과 같게 하시고 - 이것은 문자적으로 '우리들에게 천막의 말뚝을 주셨다'는 뜻을 갖는다. 그런데 '천막의 말뚝'은 유목 생활을 통해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 유목민들이 오랜 여행을 마치고 안식을 누리기 위해서는 일정한 장소에 천막을 쳐야 한다. 그때 그들은 천막의 말뚝을 땅에 박아야 하지만, 아무 곳에나 그렇게 할 수없고 자신들이 법적으로 그렇게 할 수 있는 곳에서만 가능하다(Musil). 그렇다면 '천막의 말뚝'은 일정한 장소를 차지할, 혹은 그곳에 거주할 수 있도록 해주는 법적 권리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Fensham). 따라서 '천막 말뚝을 주셨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거룩한 땅 팔레스틴에 다시 거주할 수 있도록 해주셨음을 가리키는 셈이다(Fensham). 물론 이것은 보다 영적으로 말할 경우,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 사이의 관계가 새롭게 공고해지는 것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다(Williamson). 바로이 같은 점에서, 앞의 문구 '거룩한 처소'는 팔레스틴 땅과 성전 모두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 것이다.

 

 우리로...소성하게 하셨나이다 - 문자적으로 이는 '우리에게 생명을 주셨다'의 뜻이다. 이것은 곧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이라는 이방 땅에 포로로 끌려가 있는 동안은 하나님에 의해서 죽은 상태로 간주되었음을 시사한다. 이는 이스라엘 백성의 팔레스틴으로의 귀환을 죽은 자들이 다시 살아나는 것으로 묘사한 에스겔의 사상과 서로 상통한다(37:1-4).

 

 종 노릇 하는 중에서 - 비록 포로로 끌려갔던 백성들에게 처음에는 상당한 자유의 제약이 있었으나, 나중에는 그렇지 않았다. 그런 점에서 그들은 결코 문자적 의미에서의 '종 노릇'을 하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같은 표현을 쓴 것은, (1)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 땅에서 정치적 주권을 소유치 못했으며, (2) 하나님을 섬기는 종이 되는 것만이 참된 자유를 얻는 것임에도 불구하고(6:18, 22) 그들은 그곳 나라의 왕을 섬기는 처지에 있었기 때문이다(Williamson, Fensham).

 

 조금 - 이것은 포로로 끌려간 이스라엘 사람이나 그 후손 중, 아주 소수만 다시 본토로 돌아왔던 사실을 배경으로 하여 이해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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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예가 되었사오나 - 이것은 백성들이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갔던 사실을 가리킨다(8). 원어상 여기의 '노예'는 앞 구절의 '종 노릇하는', 그리고 이어 나오는 '복역하는'이라는 단어와 동일한 어근을 갖는다.

 

 버리지 아니하시고 - '버리지'(, 아자브)'용서하다', '돕다' 등의 뜻도 있지만 여기서는 '끊다' 혹은 '떠나다'의 의미로서, 깊은 관계 중에 있던 어떤 상대를 배신하여 기존의 관계를 청산하는 행동을 가리킨다(8:22 ; 28:20 ; 왕하 2:2; 대하 13:10).

 

 유다와 예루살렘에서...울을 주셨나이다 - 여기의 ''(, 가다르)'담벽'을 의미한다. 어떤 학자들은 본문의 ''이 예루살렘 성벽을 가리킨다고 보고,이 사실에 근거하여 에스라의 귀환이 느헤미야에 의해 주도된 성벽완공 이후에 이루어졌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1) 에스라가 팔레스틴에 왔을 때는 예루살렘 성벽이 훼파된 상태에 있었으며(1:3), (2) 이 말이 만일 예루살렘 성벽을 가리킨다면 수식구인 '유다와 예루살렘에서'라는 표현이 매우 어색하며 또한 (3) ''이라는 단어는 포도원의 담장과 같은 것을 가리키며(80:12 ; 5:1-7) 대개 '성벽''호마'라는 말로 표현된다는 점 등에서 볼 때, 문자적 의미의 예루살렘 성벽을 뜻하지 않음이 분명하다. 따라서 여기의 ''은 영적 의미의 '하나님의 보호'를 가리킨다고 봄이 무난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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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렇게 하신 후에도 - '이렇게 하신'은 하나님께서, 범죄하여 회복되기 곤란한 상태에 빠졌던(7)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특별한 은혜를 다시 허락하사 팔레스틴으로 귀환하게 하신 사실(8, 9)을 가리킨다.

 

 우리가...계명을 배반하였사오니 - '우리'는 에스라의 백성들에 대한 연대의식을 보여주는 인칭 대명사이다(3,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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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절의 초두에 관계대명사 역할을 하는 '아쉐르'가 있음을 볼 때, 본절은 10절의 '주의 계명'을 수식하는 구절로 봐야 한다(NIV, Williamson).

 

 주께서...선지자들로 명하여 이르시되 - '선지자들'은 모세 오경을 기록한 모세를 포함하여(18:15 ; 34:10 ; 12:10) 이스라엘 전 역사 기간 동안에 활동했던 모든 선지자들을 가리킴이 분명하다. 이 같은 견해는, 이어지는 내용이 여러 선지자들에 대해 예언되었던 것들을 혼합한 것이라는 점에서 그 타당성이 입증될 수 있다. 한편 여기서 '주께서'는 문자적으로 '당신께서'이다.

 

 가서 얻으려 하는 땅은 더러운 땅이니 - 이것은 레 18:25 ; 20:22 ; 4:5 ; 1:17에 있는 말씀의 종합이다. 그런데 여기서 '얻으려'(, 레리쉐타)'소유하다' 혹은 '빼앗다'의 의미를 갖는 동사 '야라쉬'의 부정사로서, 본 단어 앞의 '가서'의 목적을 보여준다. 한편 '더러운'(, 니다)은 구약성경에서 월경을 하는 여인과의 접촉(12:2) 혹은 성적 타락(20:21) 등으로 인한 의식적(儀式的) 부정(不淨)의 상태를 가리킬 때 사용된 단어로서 여기서는 우상 숭배 및 그것과 관련된 부도덕한 행위들을 뜻한다(대하 29:5 ; 1:17 ; 7:20 ; 36:17). 결국 이것은그 땅의 백성과 접촉하는 일은 자신을 부정하게 만드는 일이며, 따라서 그들과의 접촉은 금해야 함을 암시하는 말이다.

 

 이는 이방 백성들이 더럽고 가증한 일을 행하여 - 이것은 신 18:9 ; 왕하 16:3 ;21:2 ; 대하 28:3 ; 33:2 등의 말씀이 종합된 것으로서 그 ''이 왜 '더러운 땅'인지 그 이유를 말해준다. 한편, 본절에서 원용된 사항들이 대체로 신명기서의 내용이라는 점은, 에스라가 신명기서의 영향을 많이 받았음을 시사한다(Fensham). 그리고 여기서 '이방 백성들'은 가나안 원주민을 가리키며(1), '가증한 일을 행하여'(, 베토아보테이헴)'혐오하다' 혹은 '몸서리치도록 싫어하다'의 뜻을 갖는 동사 '타아브'에서 파생된 명사와 방법을 나타내는 전치사(, )가 합해져서 이루어진 단어이다. 따라서 개역 성경의 번역은 매우 적절하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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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절 또한 11절과 같이 10절의 '주의 계명'을 수식한다.

 여자들을...주지 말고 저희 딸을...데려오지 말며 - 본절은 신 7:3에서 볼 수 있다. 구약 성경에서는 여자를 데리고 오는 것에 대해서만 대부분 말하는데(2; 6:2 ; 26:34 ; 34:16 ; 3:6) 반하여, 여기서는 그 반대의 경우에 대해서도 유일하게 언급하고 있음이 독특하다. 그러나 이는 오직 에스라 시대에만 딸들을 이방인들에게 시집보냈다는 뜻이 아니다. 이방인의 딸들을 데려온 시대에는 반드시 이스라엘백성의 딸을 이방인들에게 시집보내는 일도 수반되었을 것이다. 이방인과의 통혼을 금했던 일차적 목적이 우상 숭배는 물론 그것과 관련된 타락한 이방 악습의 유입을 막기위함이었다.

 

 그들을 위하여 평강과 형통을...구하지 말라 - 이것은 신 23:6에서 모세가 모압과 암몬 족속에 대해서 언급했던 명령이다. 이처럼 '모압과 암몬'에 해당되는 특별한 명령인데도 여기서 이방인 전체 민족에 대해서 적용되고 있는 까닭은 (1) '모압과 암몬'이외의 다른 민족들도 또한 하나님의 백성과 교제를 가질 만큼의 윤리적 수준을 전혀갖고있지 못했으며(19:1-20:6 ; 23:1-18 ; 46:1-28 ; 47:1-7 ; 48:1-47 ;49:1-22), (2) 실제로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암몬 및 모압 족속과도 통혼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한편 '평강'의 문자적 의미는 '그들의 평화'로서 개인적 '건강','마음의 평화' 및 정치적 '안정'을 주로 가리킨다(왕상 4:25). 그리고 '형통'은 문자적으로 '그들의 선'을 뜻하며, 보다 내적인 의미에서의 '행복'(Fensham, Williamson)을 가리킨다. 따라서 본 문구는 '그들의 평화와 행복을 바라지 말라'라고 번역될 수있으며, 구체적으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상을 섬기는 이방인들과 평화와 행복을 공유하지 말아야 할 것, 즉 그들과 교제하지 말아야 할 것을 뜻한다(Ridderbos, 23:32 ; 3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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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죄악보다 형벌을 경하게 하시고 - 하나님께서 엄격히 공의대로 하셨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완전히 멸망될 수밖에 없었으며 바벨론 포로 사건을 끝으로 이스라엘의 역사는 그 막을 내려버렸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은 자'가 있다는 것은 곧 하나님의 형벌이 가벼웠음을 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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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절에서는, 하나님께서 범죄한 이스라엘 백성을 완전히 멸망케 하지 않으시고 일부를 남겨주셨음에도(13) 불구하고 또다시 범죄한 이상 이스라엘은 멸망될 수밖에 없는 처지에 놓였음을 말하고 있다. 물론 이 같은 에스라의 언급은 그가 이스라엘의 멸망을 바라고 있었음을 의미하지 않는다. 다만 에스라는 백성의 대표 자격으로 이스라엘의 죄를 철저히 자복하고 있을 따름이다. 그러므로 그는 하나님께 간절한 심정으로죄의 용서를 구하고 있다고 봐야 한다.

 

 주의 계명을 거역하고 - '거역하고'(, 파라르)는 원래 '파괴하다' 혹은'깨뜨리다'의 뜻을 갖는다. 이 단어가 구약 성경에서 53회 사용되는 중 23회는 직접 목적어로 '언약'이라는 단어를 취하고 있다는 사실은, 이 단어의 성격을 보다 극명하게 드러내준다(Hamilton). , 이 단어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범죄는 곧 하나님과의 언약을 깨뜨리는 행위임을 분명히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26:15 ; 17:18 ; 11:10).

 

 진노하사(아나프,  ) - 이것은 언약적 책무를 이행하지 않고 범죄에 빠진 백성들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를 가리킬 때만 사용되는 단어이다(1:37 ; 왕상8:46 ; 대하 6:36). 이 히브리어는 '진노'''라는 두 의미를 모두 지니는데 이 두말의 긴밀한 연관성에 관해서는 시 18:7, 8을 참조하라.

 

 주는 의롭도소이다 - '의롭도소이다'(, 차디크)(1) '은혜로우시다'라는 의미로 보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다시 용서하실 것임을 암시한다고 하는 견해(Rawlinson, Fensham), (2) 여기 번역 그대로 '공의로우시다'의 의미로 보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멸절시켜도 당연함을 암시한다고 하는 견해(Williamson, Keil) 등으로 그 해석이 갈라진다. 그러나 (1) 여기의 '차디크'라는 단어는 구약 성경에서 하나님의 자비로우신 측면을 나타낼 때는 사용된 일이 없으며,(2) '차디크'가 포로 후 시대에는 '은혜로움'의 의미를 내포하였다는 혹자의 주장에도 불구하고 거의 동시대, 아니 오히려 후대의 기록인 느헤미야에서도(9:33) 그런 의미의 내포 흔적은 발견되지 않으며, (3) 에스라의 기도 내용 전체의 문맥적 의미가 하나님의 공의로우심을 강조하고 있다는 점 등으로 볼 때 후자의 견해가 보다 타당성이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