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에스라(구속사적해석)

에스라서5장,돌아보시는 하나님

호리홀리 2016. 1. 7. 12:49

이 예언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성전 재건을 게을리하는데 대한 질책성의 선포였다. 그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사마리아 사람들의 훼방으로인하여(4:4, 5) 성전 재건을 중단한 후 대적들의 방해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여러 가지 핑계를 대며 그 고귀한 사업을 재개하지 않았었다(1:2). 그러나 이 예언 중에는 소망의 메시지가 포함되어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2:9; 1:17; 2:12; 3:3). 한편 학 1:15 과 슥 8:9에 따르면 성전 재건 사업이 재개된 때는 다리오 왕 2(B.C. 520) 624일이다

 

 `학개'라는 이름은 `축제의'라는 뜻을 가진다. 추측컨대이 이름은 `여호와의 축제'를 뜻하는 `학기야'(, 대상 6:30) 의 축약형인 듯하다(IDB). 한편 이 사람의 개인적 배경에 대해서는 별반 알려진 것이 없다. 우리들은 그가 B.C. 520년 경에 활동한 선지자였으며(1:1), 솔로몬의 성전을 목격했었을 것이며(2:3) 따라서 그만큼 활동 당시 매우 연로했었던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스가랴'라는 이름은 `여호와께서 기억하셨다'의 의미이다. 이 사람 또한 학개처럼 B.C. 520년 경에(1:1) 활동한 선지자로서 스가랴서의 저자이다. 추측컨대 그는 제사장 가문의 후손이었던 것 같다(12:16). 그런데 그는 `잇도'의 손자가 아닌 그의 먼 후손일 것이다. 그 이유는 `손자'(, 바르)`아들'의 의미뿐만 아니라 `자손' `후손'의 뜻도 갖고 있기 때문이다(12:16; NIV). 그렇다면 `잇도'는 분열 왕국 초기의 선지자였을 것으로 추측 될 수 있다(대하 9:29; 12:15; 13:22).

 

 이스라엘 하나님의 이름을 받들어 - `이스라엘 하나님'은 언약 공동체를 위해 베푸시는 하나님의 인자와 긍휼을 강조하는 호칭(3:11)이며 `이름을 받들어'`이름으로'의 의미를 가진다. 이것은 선지자의 메시지가 신적 기왼을 갖고 있음을 시사하는 문구이다. 구체적으로는 `나 여호와가 말하노니'하셨느니라'(1:13; 1:1, 2)의 형태이다.

 

 유다와 예루살렘에 거하는 유다 사람 - 유다 지파뿐만 아니라 다른 지파의 사람들까지를 모두 포함한 모든 이스라엘 귀환민들을 가리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서의 저자가 여기서 `유다 사람'만을 언급한 까닭은, 그들이 포로 귀환 후의 이스라엘 역사의 주역이며 또한 그들의 숫자가 제일 많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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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어나(, ) - 이것은 문자적 의미의 기립(起立)을 가리키지 않는다. 다만 어떤 중대한 일의 본격적 수행에 앞서 이뤄지는 마음의 결단을 뜻한다(삼상 16:12; 44:26; 60:1). 백성들이 이 같은 마음의 결단을 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께서 선지자들의 메시지를 도구삼아서 그들을 감동시키셨기 때문이다(1:14).

 

 예루살렘 하나님의 전 - 이것은 `하나님'`예루살렘' 에만 계시는 분임을 시사하는 문구가 결코 아니다. 왜냐하면 여기의 `예루살렘'은 문자적으로 `예루살렘에 있는'의 뜻으로서 `'(殿)을 수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시작하매 - 이것은 `일어나'의 구체적이며 적극적인 측면이다. 이 같은 성전 재건사업의 재개는 학개가 예언 활동을 한 때부터 약 8일 만이었다(1:1, 14, 15). 또한 이것은 사마리아 사람들의 훼방으로 중단된지 약 16년 만이었다.

 

 하나님의 선지자들 - 이 말은 선지자들이 하나님께로부터 소명과 감동을 받아 하나님으로부터 계시된 메시지를 전한다는 사실을 시사한다.

 

 함께 하여 돕더니 - 학개와 스가랴의 예언 활동이 성전 재건이 재개된 후에도 계속됐다는 점에서 볼 때 (2:1, 10; 1:1, 7; 7:1), 두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한 독려로써 성전 재건 사업에 일조(一助)를 한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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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 서편 총독 닷드내 - 예루살렘 성전이 재건되던 당시의 유프라테스 강 서쪽을 통할했던 `총독'`우쉬타니'였다는 역사적 기록들이 남아 있다(Williamson, Fensham).B.C. 521년경에 바벨론인들의 반란이 진압된 바 있으며, 바사 제국은 이 진압이 있은 직후인 B.C. 520년에 바벨론 지역과 메소포타미아 서편 지역을 관활할 새 총독 우쉬타니를 임명하였다는 것이다(J.M. Myer). 바벨론인들의 반란이 있었던 직후에 바사 황제는 그 속령들의 제반 움직임에 대해 신경을 곤두세우고 각 관할 총독들로 하여금 지역민들의 동태를 면밀히 파악해 보도록 지시를 내렸을 것이고, 따라서 본문에 나오는닷드내 일행의 팔레스틴 방문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될수 있다. 따라서 여기의 `총독 닷드내'`우쉬타니' 밑에서 일하던 고위 관리였던 것 같다. 더구나 여기의 `총독'(, 파하트)은 구약성경 내에서 `장관'(왕상 20:24), `방백'(8:9; 9:3;3:2, 3) 등의 의미로 번역되는 단어로서 스룹바벨의 직함과 동일하며(6:7; 1:1,14), 강 서편의 광활한 지역을 다스리던 총독이 팔레스틴까지 직접 올 수는 없었을 것이라는 사실은 위와 같은 견해를 뒷받침해준다.

 

 스달보스내와 그 동료 - `스달보스내'`왕국을 구원하는'의 의미인 듯하다. 추측컨대 이 사람은 `닷드내'의 부하로 `서기관' 정도의 직책을 가진 사람이었을 것이다(4:8). `그 동료' 또한 분명한 것은 아니지만 `닷드내'의 부하들로 짐작된다.

 

 나아와(, 아타) - 이것은 단순히 `오다'의 의미를 갖는 동사로서, 성전 재건을 중단시키는 공작을 했던 사마리아 사람들에게 적용되었던 4:2`나아와'와는 다르다. 본절에 나오는 `닷드내'와 그 일행은 성전 재건에 대해서 사마리아 사람들과는 달리 부정적 시각을 갖지는 않았었던 것 같다. 사실 본절부터 6:13 까지를 자세히 살펴보더라도, 닷드내 등이 이스라엘 백성에 대해서 나쁜 감정을 품고 있었다는 증거는 거의 발견되지 않는다(Williamson). 그러므로 `닷드내'가 예루살렘에 온 까닭은, 사마리아 사람들의 불평에 대해서 실상을 파악하려는 의도 때문이었다고 봄이 무난하겠다(Fensham).

 

 누가 너희를 명하여 - 이것은 `누가 너희에게 명령을 주었느냐' 혹은 `누가 너희에게 권위를 주었느냐'(Williamson, NIV)로 번역함이 보다 적절하다.

 

 성곽(城郭)을 마치게 하였느냐 - 여기서 `성곽'(, 우솨르나) 은 파피루스에 기록된 고대 아람어 문서에서는 많이 발견되지만 그 의미만은 분명히 밝혀지지 않고 있다. 그러나 여러 학자들은 `목재로 된 구조물', `건축물을 장식하기 위해 외부에 붙여지는 판자'를 의미한다고 주장한다(Kraeling, Tuland, Mowinckel). 바로 이같은 주장을 근거로 해서 루돌프(Rudolph)`닷드내'등의 페르시아 관리들이 예루살렘에 온 것은 성건 재건 작업이 재개된 이후 그 공사가 상당히 진척된 시점이었을것이라고 추정한다. 한편, `마치게 하였느냐'(레쉬클랄라)4:13`마치면'과 동일한 단어로 현재 진행의 의미로서 이해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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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가...고하였으나(, 아마르나) - 여기의 `1인칭 복수'는 본 문맥의 흐름과는 잘 어울리지 않는다는 점에서 필사자의 실수에 따라 `3인칭 복수'`아마루'가 잘못 옮겨졌다고 본다(NIV, RSV). 이 경우, 원문에 충실하게 옮기면 `그래서 그들은 이런 식으로 물었다 : 이 건축에 종사하는 자의 이름들이 무엇이냐 ?'로 될 것이다. 당시에 실제로 성전 재건을 주도하던 인물은 `스룹바벨'`예수아'였다. 그런데 닷드내 일행이 다리오 왕에게 올린 상소 내용에는 `세스바살'이라는 이름만 나온다(14, 16). 따라서 우리는 이 세스바살과 스룹바벨이 동일인이라는 단서를 여기서도 발견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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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님이...돌아 보셨으므로 - 이는 문자적으로 `하나님의 눈이 ~ 의 위에 있었다'는 의미를 갖는다. 유다 백성을 하나님이 특별한 관심과 애정을 가지고 보살피셨음을 가리킨다.

 

 저희가...역사를 폐하게 못하고 - 문자적으로 `그들이 그들을 중지시키지 않았다'는 뜻이다. 이렇게 된 것은 닷드내가 왕의 하달을 받을 때까지 객관적인 입장에서 스스로의 판단을 유보한 때문이기도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도우시는 손길이 결정적 역할을 하였다(34:15).

 

 이 일을 다리오에게 고하고 - 6-17절은 이러한 `닷드내'의 보고가 이스라엘 백성들의 성전 건축사업이 합법적인 것인지의 여부를 알려는 목적에 따른 것이었음을 말해준다.

 

 답조(答詔)가 오기를 기다렸더라 - 문자적으로는 `이에 관해 쓰여진 답서가 올 때까지'이다. 따라서 여기의 `기다렸더라'는 원문에는 없는 것으로서, 페르시아 관원들이 성전 재건을 중단시키는 일을 유보했었던 사실을 강조적으로 드러내기 위한 의도적 번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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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바삭 사람 - 이 단어는 애굽 땅의 엘레판틴에서 발굴된 파피루스 문서에서 유사한 형태로서 발견되며, 그 의미는 `고하는 자'(Fensham) 혹은 `조사하는 자'(Meyer) 등일 것이다. 따라서 여기의 `아바삭 사람'은 페르시아 관원들의 구체적 직함이지 어떤 부족의 이름이 아니다(4:9 주석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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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글 - 이스라엘 사람들의 성전 건축이 합법적인 것인지의 여부를 질문하기 위한 보고서를 가리킨다. 그런 이 원문에는 본 문구 뒤에 `그들이 보낸'이라는 말이 있다.

 

 만안(萬安) 하옵소서 (쉘라마 콜라) - 문자적으로 `모든 평화' 란 뜻으로, 예컨대 `하나님께서 당신의(왕의) 주권을 언제나 지켜주시길 기원합니다'와 같은 인사말의 약자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Joseph Blenkinsopp). 아무튼 이와 같은 평강을 기원하는 인사법은 고대 중근동 사회에서는 지극히 보편적인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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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시게(, 예다) - 이것은 체험적이리만치 확실한 `인식' 혹은 `인지'를 뜻하는 동사이다(6:3 주제 강해, `야다의 개념' 참조).

 

 우리가...가서 - 이것은 사마리아 사람들의 유다 사람들에 대한 불평과 관련하여 관리로서의 공무 집행을 위한 것이었다.

 

 지극히 크신 하나님의 전 - 이에 관해서는 두 가지의 해석이 가능하다.

(1) `지극히 크신'을 예루살렘 성전의 엄청난 규모를 형용하는 것으로 보고 `하나님의 지극히 큰 전'으로 해석해야 한다는 견해(Fensham). (2) `지극히 크신'을 여호와 하나님을 높이려는 것으로 보고 한글 개역처럼 해석해야 한다는 견해(Williamson,Kidner, Schultz) 등 두 가지이다. 그러나 첫째, 피정복국의 종교를 존중하는 것이 페르시아 정부의 일관된 식민지 정책이었으며 둘째, 원문상 형용사 `지극히 크신'이 단어 `하나님' 바로 뒤에 있으며 셋째, 건축 중이던 성전이 그 규모에 있어서 그리 대단하지 못했다(3:12)는 점 등에서 볼 때, 위의 두 견해 중 (2)의 것이 보다 더 타당성이 있다.

 

 전을 큰 돌로 세우며 - 여기의 `큰 돌'(, 에벤 겔랄)에 대해서는 (1)`'이라는 형용사를 `구르다'의 의미가 있는 어근 `갈랄'에서 파생된 것으로 보고 굴려야만 성전 재건 공사장으로 옮길 수 있을 정도의 `무거운 돌'이라고 하는 견해(Grosheide, Davidson), (2) `'이라는 형용사를 아카디아어 `갈랄루'에서 파생된 `겔랄'과 관련있는 것으로 보고 원초적인 건축이 아닌, 재건에 유용한 `조그만 돌' 혹은 `자갈'이라고 하는 견해(Fensham), (3) 형용사 `'을 어근 `갈랄'에서 온 것으로 보고 또한 문맥적 상황을 감안하여 `잘 다어진 돌'이라고 하는 견해(Williamson)등 세가지 해석이 제시되고 있다. 그렇다면 첫째, 옛 솔로몬 성전을 목격했던 노인들이 실망을 할만큼 새 성전의 규모는 작았으며(3:12) 둘째, 비록 재건(再建)이기는 하지만 조그만 돌만이 필요한 것은 아니며 셋째, 본 문구 뒤에 나오는 `나무'가 완전히 가공된 재료임을 가리키는 등, 본 문맥상의 흐름에서 볼 때 위의 견해들 중 세 번째의 것이 가장 적절한 듯하다. 한편 `세우며'2절의 `건축하기를'과 동일한 단어로서, 다만 `집을 짓다'를 의미하는 일반적 건축 용어이다.

 

 벽에 나무를 얹고 - 이것은 대개의 경우 (1) 건축물의 내외벽에 미장용 판자를 붙이는 것(Rudolph). (2) 지진 등으로부터 건물을 보호할 목적으로 벽과 벽 중간 중간에 나무를 대는 것(Thompson, Kidner, Schultz, Williamson)등으로 이해되어 왔다. 그러나 위의 것들 중 두 번째 견해가, 고대 중근동에서 위와 같은 건축 방식이 지극히 보편적이었다는 사실에 근거하여 보다 타당성이 있는 것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

) -->  천지의 하나님의 종 -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나님을 `천지의 하나님'이라고 칭한 것은 페르시아 왕 다리오에게는 친근감 있게 들렸을 것이다(Fensham). 왜냐하면 페르시아의 황실은 `하늘의 신' 또는 `하늘과 땅을 창조한 신'으로 여겨지는 `오르무즈드'(Ormuzd)를 섬겼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이 이러한 칭호를 사용한 것은 타협적 의미이기 보다는 오히려 도전적 의미로 이해되어야 할 것 같다. 12절을 통해 미루어 보더라도, 유대인들의 바벨론, 포로 사건은 하나님의 무력(無力)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 도리어 불신의 백성들에 대한 하나님의 권능 행사로 말미암은 것으로 이해되기 때문이다(Kidner). 따라서 `천지의 하나님의 종'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성전 재건 사업은 다른 어떤 사람들에 의해서 방해를 받거나 중지되서는 안됨을 강력히 시사해주는 말이라고 할 수 있다(Schultz).

 

 오랜 옛적에 건축되었던 - 솔로몬 성전은 B.C. 966년에 착공되어(왕상 6:1) 7년 후인 B.C. 959년 가을에 완성되었었다(왕상 6:38). 따라서 제 2 성전이 건축되던 그 시기를 약 B.C. 518년 경으로 본다면 솔로몬 성전이 완공된 것은 그때부터 약 20여 년전이 되는 셈이다.

 

 이스라엘의 큰 왕 - 이것은 말할 나위없이 예루살렘 성전을 건축했던 솔로몬을 가리킨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솔로몬의 탁월한 업적 때문에 그에게 `'(, 라브)이라는 수식어를 사용했음이 분명하다(4:10).

 

 완전히(, 쉬클레) - 원문에는 본절의 맨 뒷부분에 놓여 있으며, 이는 문자적으로 `마쳤다'의 뜻을 가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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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늘에 계신 하나님 - 여기의 이 문구는 1:2에서 고레스가 여호와를 지칭키 위해서 사용했던 `하늘의 신'과 동일하다. 다만 1:2의 것은 히브리어로 본절의 것은 아람어로 기록됐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같이 하나님을 지칭한 것은 11절에서 `천지의 하나님'이라고 한 까닭과 동일하다(11절 주석참조).

 

 격노케 하였으므로(, 하르기주) - `흥분하다' 혹은 `요동하다'의 뜻이 있는 동사 `레가즈'의 사역형으로 포로기 이전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불순종함으로써 하나님의 진노를 촉발했던 사실을 가리킨다(왕하 24:20).

 

 갈대아 사람 - `갈대아' 는 남부 아라비아 와 페르시아만 사이의 황무한 지역에 살던 반() 유목민들 혹은 그 지역 그리고 그 지역을 중심으로 발흥했던 신 바벨론 제국(Neo-Babylonian Empire, B.C. 626-539)을 모두 가리킨다. 따라서 이들은 메소포타미아 지역 서북부에 살았던 아람족과는 구별된다.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 - 여기의 `바벨론'은 국가로서의 `갈대아'와 동격이다. 한편 `느부갓네살'은 바벨론의 마지막 왕조를 세웠던 `나보폴라살'(B.C. 626-605)의 아들로서, 당시 왕위에 있던 아버지를 대신하여 갈그미스에서의 애굽에 대한 결정적 승리를 쟁취함(B.C. 605)과 동시에 애굽의 영향력 아래 있었던 지중해 인근의 국가들에 대한 지배권을 확보한 장본인이었다. 그는 B.C. 605년과 598년에 유다를 공격하여 자신의 속국으로 만들었으며, B.C. 586년에는(실제 예루살렘에 대한 공격은 B.C. 588년부터 시작되었다) 완전히 멸망시켜 버렸다. 한편 그 이름의 뜻은 `나부(바벨론의 신)가 계승권을 지키신다'(Dougals)이다.

 

 손에 붙이시매 - 이것은 유다 왕국의 멸망이 철저히 하나님의 진노에 의한 결과였음을 분명히 시사해주는 말이다. 한편 `붙이시매'(, 예하브)`주다'의 뜻을 가진다.

 

 이 전을 헐며 - 이에 대해서는 왕하 25:9과 대하 36:19을 참조하라.

 

 백성을...바벨론으로 옮겼더니 - 바벨론왕은 네 번에 걸쳐서 유다 백성들을 포로로 잡아갔었다. 첫 번째로 B.C. 605년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을 포위공격하여 유다의 왕족과 귀족들의 일부를 사로잡아 갔다(1:1-5). 두 번째 바벨론 유수는 여호야긴 왕이 바벨론을 배신한 것이 핑계가 되었으며, 이때 느부갓네살은 여호야긴을 포함하여 용사 7천명 및 기술자 1천명, 그리고 다수의 귀인들을 붙잡아 갔다(왕하 24:10-17).또한 세 번째 바벨론 유수 사건은 시드기야 왕의 배신 때문에 일어났으며 이때에는 예루살렘을 완전히 함락시키고 비천한 자들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백성들을 포로로 데려갔었다(왕하 25:8). 그리고 이스마엘이 바벨론의 유다 총독 그다랴를 살해했을 때(B.C 582) 또 한차례 유다인들을 포로로 잡아갔다(5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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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벨론 왕 고레스 원년(元年) - `고레스'`바벨론 왕'이라고 한 것은, 페르시아 스스로가 자신들을 바벨론의 합법적이고, 정통적인 계승자로 자처했던 점을 감안한다면 매우 자연스럽다. 근래에 발견된 고레스의 조서는 고레스가 자신에 대해서 `나는 세상의 왕, 위대한 왕, 합법적인 왕, 바벨론의 왕, 쉐르와 아카드의 왕, (세상의) 네 가장자리의 왕 고레스이다'라고 언급했었음을 보여준다(Pritchard). 특별히 여기서 유다 사람들이 고레스를 `바벨론 왕'이라고 언급한 까닭은, 성전 재건을 허락한 고레스를 느부갓네살과 직접 연결지우려고 한 의도 때문이었다(Fensham). 이 같은 의도는 결국 느부갓네살이나 고레스 모두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도구로 쓰였으므로 성전의 파괴가 필연적이었듯이 성전의 재건도 그럴 수밖에 없었음을 강력히 암시하려는 궁극적 목표와 연결된다.

 

 하나님의 이 전을 건축하게 하고 - 이것은 구체적으로 고레스 왕이 (1)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성전을 재건할수 있도록 팔레스틴으로 귀환을 허락한 것, (2) 성전 재건의 비용에 쓸 수 있도록 바벨론 사람들로 하여금 돌아가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재물을 주도록 한 것(1:4)을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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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절에서는 성전 기명이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다시 반환된 사실에 대해서 다뤄지고 있다. 이는 유다 민족의 성전 기명이 다른 민족의 신당에 보관되는 것은 유다 민족에게 있어서 엄청난 수치였으나, 이제 그 종교적 수치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까닭에 본절에서 특별히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1:7 주석 참조). 실로 이 같은 종교적 수치의 모면은 다른 나라에 강제로 끌려가서 사는 정치적 수치에서 벗어나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갖는 것이었다.

 

 본처(, 아트레) - 문자적으로 `그것의 위치'를 의미하는 본 단어는 구체적으로는 솔로몬 성전이 위치했던 바로 그 장소를 가리킨다. 아울러 이는 성소의 재건이 반드시 원래 세워졌던 장소에서 이뤄졌던 중근동의 풍습을 염두에 둔 말이다(Gall-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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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때로부터 지금까지 건축하여 오나 - 여기서 유다 사람들이 사마리아 사람들의 방해 행위로 인한 재건 사업의 중지(4:1-5)에 대해서 언급지 아니한 까닭은, 여기서는 다만 그 당시 진행 중이던 성전 재건 사업이 고레스의 허락에 의해 이뤄지고 있으며 그래서 그 허락의 연장선상에 있었던 공사는 합법적임을 부각시킬 필요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한편 `그때'`세스바살'이 고레스의 칙령에 따라 성전 지대(址臺)를 놓는등 건축 사업을 시작한 때를 말한다. 또한 `건축하여 오다'(, 미트베네)`건축하다'의 의미를 가진 동사 `베나'(의 분사형이다. 따라서 이것은 미완료적 진행형, `건축해 오고 있는 중이다'로 번역함이 좋을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16여년이라는 상당한 기간 동안 성전 재건은 중지, 방치된 상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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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왕이 선히 여기시거든 - 문자적으로는 `왕에게 좋으시거든'의 뜻이다. , `왕이 판단컨대 좋게 느껴지거든'의 의미(7:18; 1:19)를 지닌다.

 

 바벨론에서 왕의 국고에 조사하사 - `국고' (, 베이트 긴자야)`모으다', `덮다'의 의미를 갖는 동사 `게나즈'에서 파생된 단어와 `'의 의미를 갖는 단어가 합해진 말이다. 이것은 말할 나위없이 `문서 보관소'를 의미할 것이다. 그런데 페르시아 왕, 특히 고레스의 조서 사본이 바벨론에 있던 `문서 보관소'에 보관되어 있었던 까닭은, 페르시아 왕들이 바벨론 왕들의 후계자임을 자처하면서 자신들의 정통성을 내세운 것과 결코 무관치 않았을 것이다. 고레스가 다른 종교에 대해서 관용적 태도를 취했으며 그리고 다른 종교의 파괴된 신전들을 다시 짓도록 명령했던 사실들에 관해서 말하고 있는 토판이 근래에 발견된 곳도 옛 바벨론의 고토(故土) 라삽(Rassam)이었다(Fensham).

 

 기쁘신 뜻(, 레아우트) - `생각하다'의 의미를 갖는 동사 `레아'에서 파생된 명사로서 `결정' 혹은 `의향' 등의 뜻을 갖는다.

 

 보이소서(, 이쉴라흐) - `문서 혹은 사람을 보내다'의 의미를 갖는 동사 `쉘라흐'의 사역형 미완료 시제로 결국 이것은 닷드내가 자신의 직무와 관련하여 자신이 보낸 보고서에 대한 왕의 답신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음을 잘 보여준다. 여기에는 사마리아 사람들의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한 불만을 왕의 답신을 통해서 잠잠케 하려는 닷드내의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한 호의적 태도가 엿보인다.

 

도우시는 언약의 하나님 여호와 하나님은 선지자들 보내시고 관리들을 통하여 다리오를 통해서 또한 보이지 않는 사람들 즉 다니엘,환경을 통해서라도 도우시는 하나님을 잊지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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