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에스라(구속사적해석)

에스라6장,저희로 기도하게 하라

호리홀리 2016. 1. 8. 10:01

다리오 왕이, 페르시아 제국 여러곳에 흩어져 있던 문서 보관소 중 '바벨론'에 있던 것부터 찾아보도록 명령했었음을 가리킨다. 페르시아 왕들의 '명령문'이 여러 곳에 나뉘어져 보관되었던 가장 큰 이유 중의 하나는, 그들의 역대 왕들이 계절이 바뀔 때마다 기후 조건이 적절한 지역으로 옮겨다니면서 통치를 한 때문이었다. , 페르시아 왕들은 겨울에는 '바벨론', 봄에는 페르시아의 수산 궁(1:1), 여름에는 메대의 '악메다'에서 정사(政事)를 처리했다(Fensham). 따라서 만일 다리오 왕의 조서가 바벨론에서 내려졌다면, 그 조서는 겨울에 내려진 것이라는 조심스런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그러나 그 조서는 바벨론이 아닌다른 곳에서 발견되었다.

) --> 

2절은  고레스의 조서(1:1)B.C. 538년 여름에 내려졌음을 깨닫게 해주는 중요한 단서이다(Fensham). 왜냐하면 '악메다'는 페르시아 왕들의 여름 휴양지였기 때문이다(1절 주석 참조). 한편 '악메다'는 아람어이며, 그것의 헬라어 형태는 '에크바타나', 그리고 페르시아어로는 '하그마타나'이다.이 도시는 원래 메대 제국의 수도였고, 고레스에 의해서 B.C. 550년에 정복되었다. 한편 여기의 ''(, 비르타)'요새'의 의미가 있는 아카디아어 '비르툼'에서 온 단어로서, '악메다'가 요새화된 도시였음을 잘 보여준다(Fensham). 이와같은 도시 '악메다'는 메대 왕국의 창건자 데이오세스에 의해서 건설되었으며, 특히 왕이 살던 궁전은 7중의 원형벽으로 둘러싸여져 있었다고 한다(Herodotus).

 

'두루마리'(, 메길라)'토판'(土板)이나 '가죽' 혹은 여기에 쓰여진 '두루마리' 모두를 의미할 수 있다. 그러나 고대 중근동국가 중에서 애굽인들은 파피루스라는 종이를, 바벨론 사람들은 토판을, 그리고 페르시아 사람들은 동물의 가죽을 사용했었다는 점에서 볼 때, 본절의 '두루마리'는 가죽으로 된 두루마리로 봐야 할 것이다(Rawlinson, Williamson).

 

 거기 기록하였으되 - 이 문구 뒤에는 '비망록' 혹은 '의정서'(議政書)라는 의미의 단어 '디크로나'가 독립적으로 나온다(De Vaux). 3절에서 5절까지의 내용과 1:2 이하의 조서 내용은 대체로 독립적인 두 기록이라고 여겨진다(E.J.Bickerman). 후자는 왕의 선포를 전령이 전달한 내용인 반면, 전자는 왕의 결정을 행정적으로 이행하기 위해 상세하게 작성된 공적 문서 내용일 것이다(Kidner).

) --> 

 고레스 왕 원년 - 고레스는 바벨론을 멸망시킨 B.C. 539년을 기점으로 자신의 즉위 년도를 계산하였다. 그렇다고 할지라도, B.C. 538년이 그의 즉위 원년인 까닭은 첫 번째로 맞이하는 니산월(정월)이 속하는 해()를 즉위 첫해로 삼는 것이 바벨론의 계산 방식이었기 때문이다.

 

 예루살렘 하나님의 전... - 이는 고레스가 여러 민족들의 신당 재건도 허락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면 쉽게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하나님의 전', 고레스의 입장에서 본다면 여러 민족들에 의해서 숭배되던 많은 신들의 신당 중의 하나였다. 따라서 고레스는 그러한 많은 신당들과 구별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전' 앞에 '예루살렘'이라는 지명을 덧붙였던 것이다(Galling).

 

 고는 육십 규빗...광도 육십 규빗 - 열왕기상 저자가 말하는 솔로몬 성전의 규모의 두 배 이상이다(왕상 6:2). 고레스는 피정복민 이스라엘 백성의 환심을 사기 위해서, 솔로몬 성전보다 더 큰 규모의 성전을 짓도록 명령을 한 듯하다. 그러나 실제로 이와같은 치수대로 건축되지 못한 까닭은, 페르시아 왕실이 약속했던 건축비를 부담하지 못한 때문이었을 것이다.

) --> 

큰 돌 새 켜 - ''(, 니드바크)''을 의미하는 듯하다. , 이 문구는 성전의 삼 면() ''을 돌로 쌓으라는 의미로 이해된다(Schultz). 한편 '큰돌'은 건축 재료로서 바로 쓰일 수 있는 다듬은 돌을 가리킨다(5:8). 반면 '큰 돌 새켜'에 대한 또 다른 해석도 있다. , ''''으로 보는 견해이다. 이 경우 성전의 3층까지는 돌로, 마지막 4층은 나무로 이뤄져 있는 셈이 된다(LXX). 혹은 개역성경의 번역처럼 '', 곧 포개어 놓은 물건의 하나하나의 층을 가리킨다고 이해하는 학자들도 많다. 하지만 이러한 건축 양식은 고대 중근동 어디에서도 없었다는 점에서, 이들 견해는 별 타당성이 없다.

 

 새 나무 한 켜 - 이것은 돌로 구성된 세 면 이외의 또 다른 벽, 즉 성전 출입문이있는 벽을 가리킨다. 따라서 성전 출입문이 있는 벽은 목재로 건축되게 되는 셈이다.

 

 경비는 다 왕실에서 내리라 - 이것은 왕실이 직접적으로 소유하고 있는 재산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준다는 뜻이 아니다. 다만 왕실로 마땅히 돌아가게 될(4:13), 강서편에서 거둬지는 세금 중 일부를 성전 재건 비용으로 주라는 뜻이다(8). 그러나 이같은 약속은 실제로 이행되지 못했다.

) --> 

6절부터는 다리오 왕의 명령이다.

 닷드내...아바삭 사람들 - 이들에 대해서는 5:3 주석을 참조하라. 한편 본문의 기자는 다리오 왕의 조서(詔書) 내용 중 중요한 사항만 발췌하여 기록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왜냐하면 왕의 조서의 서두가 이처럼 허술하게 시작되지는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곳을 멀리하여 - 이를 문자적 의미로 이해하기 보다는 '성전 재건을 방해하거나 간섭하지 말라'는 뜻(Williamson) 내지는 '고소를 기각한다'는 의미로(Rundgren,Fensham) 이해하는 것이 더 무난하리라 본다. 특히 후자의 뜻으로 해석할 경우에는, 사마리아인들 중 어떤 이들이 예루살렘 땅에 관한 소유권을 주장하고서 법적 고소를 정식으로 닷드내 일행에게 올렸다는 추측을 해볼 수 있다(Williamson).

) --> 

 너희 - 닷드내 등의 페르시아 관리들(6)을 말한다. 세금(, 미다트). 4:13, 20에서는 '조공'으로 번역된 단어로서 돈으로 바치는 세금을 말한다.

 

 경비를...신속히 주어 - '경비'(, 네크세이)'재물'을 의미하며, '신속히'(, 아스파르나)는 여기서는 '충분히'로 번역됨이 보다 자연스럽다(Williamson, NIV).

) --> 

앞절에 이어 9절, 다리오 왕이 관대하면서도 자상한 인물로 묘사되고 있다. 다리오가 이 같은 태도를 견지하게 된 까닭은, 특정한 신의 진노를 면하기 위해서는 희생 제사가 정확한 절차에 따라 드려져야 한다고 봤던 고대 중근동의 인식 때문이었을 것이다(Fensham). 그러나 여기에는 궁극적으로 다리오를 통해 그 뜻을 이루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간섭이 게재되어 있었다.

 

 수용물(, 마 하쉬한) - 문자적으로 '필요한 것은 무엇이든지'의 의미를 가진다.

 

 번제의 수송아지...기름 - 당시 중근동에는 말이나 심지어는 돼지 등으로 제물을 삼던 민족들도 있었다. 그러나 여기에 언급되고 있는 제물들은 이스라엘의 제사법에 잘 부합되는 것들이다(29:38-46 ; 2:1 ; 28:1-8). 이는 결국 다리오 왕이 이스라엘의 제사법에 대한 세세한 부분까지 고려하였다는 증거가 된다(Fensham).

 수송아지 - 이것은 속죄제 등 특별한 때에 제물로서 드려졌다(9:2, 3).

 수양 - 이것은 속건제의 제물 등으로 사용되었다(5:15 ; 6:6).

 어린 양 - 상번제의 제물로 조석으로 각기 한마리씩 드려지는 등 가장 많이 소용되던 짐승이다.

 밀과 소금과 포도주 - 이것들은 희생 제사 곧 화제(火祭)와 함께 드려지던 소제의 제물들이다(29:40, 41 ; 2:14, 15).

 

 예루살렘 제사장 - 문자적으로 '예루살렘에 있는 제사장들'을 의미한다. 이는 3절의 '예루살렘 하나님의 전'과 대응되는 문구이다.

 

 영락없이 날마다 주어 - '영락'( , 솰루)'실수', '실패', '게으름' 등을 의미한다(Davidson). 한편 '날마다 주어'는 앞에 언급된 제물들이 상번제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들임을 강력히 시사해준다. 그러나 제물들을 이스라엘의 제사장들에게 날마다 넘겨주는 세심한 조치들은 실제로 행해지지 않았음이 분명하다. 물론 어느 일순간 동안 시행됐을 것이라는 추측은 어느 정도 적절하다.

) --> 

 저희로...기도하게 하라 - 예레미야는 바벨론 땅으로 잡혀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 땅의 정치적 안정을 위하여 기도하라고 당부하였었다(29:7). 고레스 왕도 다른 민족들에게 자신과 자신의 아들들의 평안을 위하여 기도해줄 것을 요청한 일이 있었다(Pritchard). 이처럼 왕실의 안녕을 위하여 왕이 자기가 섬기던 신과 다른 신을 섬기던 사람에게까지 기도 요청을 하는 것은 고대 중근동의 보편적 관행이었다(Fensham).비록 다리오 왕이 주로 '오르무즈드'(Ormuzd)라는 페르시아 신을 섬기기는 했지만, 그는 자신의 제국 내에 있는 모든 신들로부터 은총을 받음으로써 왕실의 안녕을 도모하려고 하였다. 아무튼 다리오의 이 같은 기도 요청은 그 당시 페르시아의 정정(政情)이매우 혼란스러웠다는 사실과 결코 무관치 아니할 것이다(5:1, 2 주제강해, '성전 건축재개 당시 페르시아의 정치 형편' 참조).

 

 향기로운 -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니호힌''기쁘시게할 만한'으로 번역해도 괜찮은 단어이다(NIV, 8:21 ; 28:2 ; 2:46).

) --> 

 명령을 변개(變改)하면 - 이것은 명령의 불이행과 명령의 부분적 이행, 그리고 명령의 왜곡된 이행을 모두 포함한다. 공문서의(특히 조약이나 조서의) 끝부분에는 이러한 경고문이 관습적으로 부연되었는데, 이는 법령이나 약정사항을 사람들이 가볍게 여겨 위반하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한편 고대 바벨론 및 페르시아 등지에서는 이와같은 명령의 변개가 명령자 자신에게도 엄격한 금기 조항 중의 하나였다(4:21 ; 1:19 ; 6:15).

 

 저를 그 위에 매어 달게 하고 - '매어 달게 하고'는 문자적으로 '높이 올려지고'(, 제키프), '꿰뚫어져야만 한다'(, 이트메헤)는 뜻을 가진다. 이것은 고대 중근동에서는 매우 보편적으로 시행되었던 형벌의 형태였다. 이것은 구체적으로 들보의 한쪽을 뾰족하게 깎은 다음 그 부분으로 범죄자의 복부 등을 관통시키고, 그 들보의 뾰족한 부분을 땅에 박아 놓는 형태였다. 그 경우 범죄자는 들보에 복부가 관통된 채 그 세워진 들보의 부분에 매달려서 죽을 때까지 고통을 겪어야만 했다(Fensham). 비록 이것이 수리아역에서는 '십자가에 달다'의 의미로 번역되기는 했지만, 십자가 형과는 그 형태에 있어서 매우 달랐다. 헤로도투스(Herodotus)에 의하면, 다리오 1세는 모반을 꾀했던 바벨론인들을 무려 3000명이나 나무에 꿰뚫었다고 한다(Edwin Yamauchi). 한편 구약 성경에도 범죄자들을 매어달아 죽였던 사례가 기록되어 있다(40:22 ; 25:4). 또 범죄자를 돌로 쳐 죽인 후 나무에 매어단 경우도 있다(21:22, 23).

 

 그 집은...거름더미가 되게 하라 - 이것은 들보를 제거함으로써 필연적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는 결과이다. 이는 왕명(王命)을 거역한 자에 대한 징벌의 엄중성을 경고적으로 알리기 위한 것이었다(2:5 ; 3:29). 특히 '거름더미'는 왕명 거역자의 불명예스러운 결과를 강조한다(왕하 10:27).

) --> 

 열왕이나 백성 - 이들은 페르시아 제국의 지배 밖에 있던 민족들 및 그들의 왕들을 가리킨다. 왜냐하면 페르시아에 의해 정복된 민족들 중 자체 내에 독립적으로 왕국을 유지했던 경우는 없었기 때문이다.

 

 손을 들어 - 구약 성경에서의 ''은 여러 문맥에서 '' 혹은 '권능'을 뜻한다(11:23).

 

 예루살렘 하나님의 전 - 이에 대해서는 3절 주석을 참조하라.

 

그곳에 이름을 두신 하나님 - 이 같은 문구는, 중앙 성소의 지정에 관한 하나님의 명령이 언급된 신 12:21의 내용과 일치한다. 따라서 우리는 다리오의 본 조서가 어떤 유대인의 영향을 받아서 작성되었으리라고 짐작할 수 있다. 한편 '자기의 이름을 둔다'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로부터 경배를 받으시기 위해서 그들 중에 임재하신다는 뜻이다.

 

 저희를 멸하시기를 - 여기의 '멸하시기를'(, 메가르)'던져버리다' 혹은 '전복시키다'의 의미로서, 한 민족의 완전한 멸망을 가리킬 때 사용되는 단어이다. 참고로, 유명한 베히스툰 비문(Behistun Inscription)의 끝부분에는 그 비문을 훼파하는 자에게 오르무즈드의 엄한 징벌이 따를 것이라는 경고가 기록되어 있다.

 

 나 다리오가 조서를 내렸노니 - 다리오 자신의 명령이 일체의 오차도 없이 신속히 그대로 실행되어야 할 절대적 필요성이 있음을 강력히 암시하는 부가적 문구이다.

 신속히 - 이 단어의 일차적 의미는 '부지런히'(NIV)이지만, '정확하게'의 의미도 담겨 있다.

) --> 

 신속히 준행한지라 - 본장의 핵심 문구중 하나이다. 이는 다리오 왕의 조서가 매우 엄하고 긴박하게 하달되었음과 아울러 성전 재건 작업에 참여하는 자들이 열과 성을 다할 것임을 암시한다(14).

) --> 

 유다 사람의 장로들 - 백성들의 지도자들을 가리킨다. 물론 여기에는 '스룹바벨''예수아' 등도 포함될 것이다. '장로들'(, 시이브)은 문자적으로 '머리가 흰 사람들'을 의미한다.

 

 권면함으로 인하여(, 빈부아트) - 문자적으로는 '예언으로 말미암아'의 뜻이 있다. 성전의 완성은 B.C. 516년에 이루어졌다. 그런데 학개서는 학개선지자가 B.C. 519년까지 예언했던 바를 기록하고 있고(2:10). 스가랴서에는 B.C.518년까지의 예언이 기록되어 있다. 그렇다면 학개와 스가랴의 예언의 말씀은 B.C.518년의 어느 때부터는 더 이상 백성들에게 선포되지 않았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하지만 반드시 이러한 결론에만 집착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학개와 스가랴는 성경 기록으로는 남기지 않았지만, B.C. 519년과 518년 그 이후에도 예언을 통한 권면을 성전 완성 때까지 계속했다고도 볼 수 있겠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하나님의 명령 - 성경 안에는 성전 재건에 관한 하나님의 직접적 명령은 발견되지 않는다. 그러나 (1) 이사야 선지자의 고레스에 대한 예언(44:28). (2) 하나님의 고레스 왕에 대한 강권적 감동(1:1-3), (3) 학개와 스가랴를 통한 하나님의 성전 건축에 관한 적극적 권면 등은 하나님의 명령에 다름아니다.

 

 고레스와 다리오와 아닥사스다의 조서 - 저자는 여기서 이와 같은 왕들이 성전 건축 사업을 완성시키는 데 결정적 기여를 했음을 말한다. 그러나 저자는 하나님의 명령보다는 왕들의 조서를 뒤에 놓음으로써, 모든 문제의 근본은 하나님이시며, 인간은 다만 그 도구로 쓰일 뿐임을 강력히 시사한다(Fensham). 그런데 여기서 '아닥사스다'는 실제적으로 성전 건축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 성전 건축이 완료된 해는 B.C. 516년이지만, 아닥사스다 왕의 재위 기간은 B.C. 464년부터 424년까지이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저자가 아닥사스다를 그 명단에 집어넣은 까닭은, (1) 그가 비록 성전 재건과는 관련이 없지만 성전에서 사용되는 물품을 지원하는 등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호의적이었으며(7:20, 27), (2) 본서의 저자가 본서 기록 당시 왕위(王位)에 올라 있었던 그에게 최대한의 감사와 예의를 표하려는 의도를 가졌기 때문이었다.

) --> 

 다리오 왕 육 년 - '다리오'B.C. 522(486년까지)에 왕위에 올랐다. 따라서 그의 즉위 '육 년'B.C. 517년이 되는 셈이다.

 

 아달월 - 유대 종교력으로는 12월이며, 태양력으로는 2, 3월이다. 따라서 태양력으로 따지면, 성전의 완공은 B.C. 516년에 이뤄진 셈이 된다. 아무튼 예루살렘 제2 성전은 B.C. 536년에 공사가 시작되었으나(3:8), 그 해에 중단되어 B.C. 516년에 완공되었다. 그렇다면 성전 공사는 중단기간을 포함하여 시공(施工) 20년 만에 완공된 것이다.이는 중단됐던 공사를 다시 시작한 지(1:15, B.C. 520) 4년 만이었다. 또한 파괴된지 약 70년 만에 다시 재건된 셈이었다. 아무튼 이 '스룹바벨' 성전은 A.D. 70년 로마의 '디도'(Titus) 장군에게 파괴되기까지 약 585년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의 종교적 중심 장소가 되었다(헤롯 왕은 이것을 보다 장엄하게 보수만 했음을 기억할 것). 최초의솔로몬 성전은 다만 373년 동안만 그 역할을 하였던 셈이다(B.C. 959-586).

) --> 

 이스라엘 자손과 - 본 문구의 마지막에 있는 접속사 ''는 탈락되어져야 한다. 아람어 원문에는 ''에 해당되는 단어가 없다. 결국 이것은 '이스라엘 자손'이 이 문구 뒤에 나오는 '제사장들...사로잡혔던 자의 자손'과 동격(同格)임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이스라엘 사람' 다음에 '' 혹은 ''이라는 부사가 삽입되면 더 부드러운 번역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한편 '이스라엘 자손'은 언약 공동체로서의 특성을 강조하는 특별한 호칭이다(Fensham). 비록 유다 및 베냐민 지파 이외에는 다른 지파의 사람들이얼마 되지 않았지만, 하나님의 언약은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와 맺어졌던 까닭에(19:1-6 ; 4:1-4 ; 왕상 18:31), 여기서 특별히 '이스라엘 자손'이라는 칭호가 사용되고 있는 것이다(17).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 - 이들도 언약 공동체로서의 이스라엘 자손인 것은 틀림없다. 그러나 이들은 이스라엘 자손들 중에서 특별히 구별된 지파에 속했었다는 점에서(32:26-29 ; 10:8), 이처럼 별도로 언급되고 있다.

 

 봉헌식(, 하누카) - '헌신하다'의 의미를 갖는 '헤나크'에서 파생된 명사이다. 이 단어는 수리아의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에 의해서 더럽혀졌다가 다시 청결하게 된 후에 시행된 성전 재봉헌을 기념한 축제의 이름이 되었다. 그러나 원래 이 단어는 제단이나 집(20:5) 혹은 성벽(12:27) 등이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새로 건립되었을 때에도 적용되었다(Kidner).

) --> 

17절에서의 제사의 규모는 솔로몬 성전 봉헌식 때의 풍부했던 규모와 뚜렷하게 대조된다. 솔로몬의 성전 봉헌식 때는 무려 소 22,000마리, 120,000마리를 제물로 사용하였기 때문이다(왕상 8:63 ; 대하 7:5). 따라서 이렇듯 빈약한 제물의 규모는 그당시 이스라엘 공동체가 대단히 빈곤한 상태에 있었음(1:9)을 반영해준다(Fensham).

 

 수염소 열 둘로...속죄제를 드리고 - 여기의 '속죄제'(6:24-30)는 대속죄일에 드려지던 '속죄제'(16)와는 구별되며 민수기 7장에서처럼 하나님께 성막을 봉헌하는 의식 중의 한 절차로서 이해되어져야 할 것이다. , 먼저 하나님께 성막 봉헌을하기에 앞서 죄사함을 받는 절차가 필요했음을 가리킨다. 이러한 '속죄제'는 번제와 함께 드려졌다(28:22 ; 대하 29:24).

 

스라엘 전체를 위하여 - 포로에서의 귀환자들이 이처럼 열 두 지파를 위하여 속죄제를 드린 까닭은, 반드시 귀환자 중에 모든 지파들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 아니었다. 다만 하나님의 언약이 이스라엘 열 두 지파와 맺어졌기 때문이었다.

) --> 

18절은, 성전이 완공됨으로써 희생제물 드리는 일이 본 궤도에 올랐음을 말해주고 있다.

 제사장을 그 분반(分班)대로 - 대상 24:1-19에 의하면, 제사장들은 24분반으로 나뉘어져서 성전 봉사를 하였다. 각 분반은 차례에 따라 돌아가면서 일 주일씩 희생 제사의 직무를 담당하였다(왕하 11:9 ; 대하 23:4 ; 1:5, 8). 추측컨대 한 '분반'에 속했던 제사장의 숫자는 포로기 이전보다 훨씬 적었을 것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제사장 숫자 자체가 그때보다 현저히 적었기 때문이다(2:36-39). 한편 여기의 '분반'(, 펠루가트혼)'나누다'의 의미가 있는 '펠라그'에서 파생된 명사형이다. 아무튼 이와 같은 '분반'을 둔 목적은 (1) 공평하게 일을 분담시킴으로써 하등의 불평이 없도록 하며, (2) 성전 제사가 효율적이고도 원활히 드려지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레위 사람을 그 반차대로 - 레위 사람들도 제사장들처럼 24'반차'로 구분되어 성전봉사를 했던 것 같다(대상 25:9-31). 한편 여기의 '반차'(, 마헬레카트혼)'나누다' 혹은 '분배하다'의 의미를 갖는 동사 '헬라크'에서 파생된 명사로서 '' 혹은 '배당'의 뜻이 있다.

 

 예루살렘에서 하나님을 섬기게 하되 - 여기의 '예루살렘'은 예루살렘 성전을 가리킨다. 한편 이들은 이 같은 성전 봉사가 없을 때에는 자신들의 향리에서 생활하였다(11:20).

 

 모세의 책에 기록된 대로 하게 - '모세의 책'은 모세 오경 중 제사장 및 레위인들의 직무에 관한 전반적 규정들을 다루고 있는 출애굽기 29, 레위기 8장 그리고 민수기 3장 부분 등을 가리킨다(Fensham). 한편 '기록된 대로 하게'는 서기관 에스라가 돌아오기 이전에도 이스라엘 공동체는 율법 규정을 알았으며 또한 그것을 실행하려고 노력했음을 분명히 보여준다(Kidner).

) --> 

4:8에서 6:18까지는 아람어로 기록되었으나 본절부터는 다시 히브리어로 기록된다.

 사로잡혔던 자...유월절을 지키되 - 구속사적으로 대단한 의미를 갖고 있는, 출애굽 사건을 기념하는(12:24-27) 유월절 행사에 바벨론에서 귀환한 자들이 참여했음을 보여준다. 이는 본서가 출애굽의 모티프의 일단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본서의 저자는 바벨론으로부터의 귀환을 제2의 출애굽 사건으로 보고 있는 듯하다(K. Koch). 한편 그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 절기를 지킨 것은 결코 그들의 국수주의적 태도 때문이 아니라 다만 자신들의 신앙적 순수성을 지키기 위한 의지 때문이었다. 출애굽으로 시작된 유월절은 이스라엘 역사상 획기적인 종교 개혁이 있을 때마다 재삼 깊은 의미로 치뤄졌다. B.C. 726년 히스기야 왕이 베푼 유월절 잔치(대하 30),B.C. 624년 요시야 왕에 의한 유월절 잔치(대하 35) 등이 그러했다. 이 두 경우 모두 오랜 타락을 청산하고 성전 예배를 회복하는 것을 그 골자로 삼았다.

 

 정월 십 사 일 - 이것은 구약시대에 유월절 어린 양이 드려지던 날짜이다(12:623:5). 이 다음 날부터 7일간은 무교절 행사가 지켜졌다(12:15-20 ; 23:15).

) --> 

 제사장들...정결하매 - 본문은 히스기야와 요시야 때에 지켜졌던 유월절의 상황과 유사한 내용이다(대하 30, 35). 그러나 차이점은, 그 당시에는 '레위인의 성결케 함이 제사장들보다 성심이 있었던' 반면에(대하 29:34), 본문에서는 레위인과 마찬가지로 제사장들도 제대로 준비를 갖추고 있었음이 강조된 점이다(Williamson). 한편 제사장과 레위인들이 자신을 정결케 하기 위해서는 시체를 만지지 아니하며(21:1),

 자신의 몸을 깨끗한 물로 씻는 등(30:18, 19 ; 8:6 ; 22:4-9)의 노력을 해야했다.

 

 자기를 위하여...양을 잡으니 - 여기의 '자기'는 레위 사람들을 가리킨다. 원래 유월절 양을 잡는 일은 한 가정의 가장에 의해서 실시되었었다(Fensham, 대하 30:17). 그러나 히스기야 시절에 백성들의 부정으로 인하여 레위인들이 그들을 대신하여 양을 잡은 이후로는(대하 30:16, 17), 레위인들이 유월절 양을 잡는 것이 하나의 관례가 된듯하다(대하 35:10-12, Schultz). 한편 '잡으니'(, 쉬하트)는 주로 희생제사와 관련있는 동물의 도살 행위를 가리킬 때 사용된다(34:25 ; 4:24 ; 삼상1:25).

) --> 

21절은 유월절 절기에 두 종류의 사람들이 참여하였음을 말하고 있다.

 

 이스라엘 자손 - 2장의 귀환자 명단에 포함된 자들과 팔레스틴에서 그후에 새로이 태어난 자손들을 가리킨다.

 구별하여...여호와를 구하는 자 - 이들에 대해서는 (1) 유다 자손과 함께 귀환한 북쪽 이스라엘에 속했던 열 지파 백성들이라는 견해(J.S. Wright), 남쪽의 두지파에 속했으나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가지 아니했던 백성들이라는 견해(Keil, Schultz), (3)원래는 이방 민족이었으나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에서 귀환한 후에 개종한 자들이라는 견해(Williamson, Fensham, Kidner, Meyer) 등의 다양한 해석이 제시되었다. 그러나 첫째, 유다 지파와 함께 귀환했던 북쪽 지파 사람들은 이미 이스라엘 공동체의 구성원으로서 인정된 바 있으며(17), 둘째, 포로로 끌려가지 않고 팔레스틴에 계속 남아 있었다고 하여 언약 백성의 자태를 잘 보존하였으리라고는 보기 힘들며, 셋째, 이스라엘이라는 언약 공동체는 이방인이 개종하여 들어옴을 환영하였음(12:44, 48)을 볼 때, 위의 세 가지 해석 중 세번째 것이 가장 타당성이 있는 듯하다. 한편 '구별하여'(*, 니브달)'나누다' 혹은 '분리하다'의 뜻을 갖는 동사 '바달의 수동형으로서, 기존의 것으로부터의 완전한 절교 및 단절 행위를 나타낼 때 사용하는 단어(대상 23:13 ; 10:28)이다. 그리고 '구하는'(,다라쉬)은 원래 '찾다' 혹은 '구걸하다'의 의미로서, 경배할 혹은 교제할 대상으로 삼고 간절히 사모하는 행위를 가리키는 단어이다(77:2 ; 109:10 ; 9:13).

 

 더러운 것을 버리고 - 이것은 앞에 나오는 '스스로 구별하여'의 구체적 방법이다. 이방인들은 이러한 절차를 필히 거친 후 할례를 받고서야 이스라엘 공동체의 회원이 될 수 있었다(12:44, 48). '더러운 것'이란 주로 '의식적(儀式的) 부정'을 표현하는 단어로서 이 단어 혹은 그 파생어들이 구약 성경에 279회 정도 나오며, 그중 64%가량은 레위기와 민수기에 그리고 15%정도는 에스겔서에 등장한다. 본문에서 이는 구체적으로 우상 숭배(2:23 ; 36:18) 및 그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 성적(性的) 타락(9:11)을 주로 말할 것이다.

 이스라엘 무리에게 속하여(, 알레헴) - 문자적으로 이는 다만 '그들을 향하여'의 의미를 가진다. 이는 참 하나님 여호와를 사모하던 이방인들이 그 하나님과 언약 관계에 있는 공동체 이스라엘에 가입하려는 열망을 강력히 시사한다.

 

 이스라엘 하나님 - 이것은 하나님의 언약적 측면, 즉 언약을 주도적으로 맺으시며 또한 그것을 신실히 이행하심을 강조하는 호칭이다. 이와 같은 호칭은 이방 개종자들이 이스라엘 공동체에 들어오려는 열망을 보여주는 본 문맥에 잘 부합된다.

 다 먹고 - 이것은 유월절 양을 이스라엘 귀환자들과 이방인 개종자들이 함께 먹었음을 가리킨다. 유월절 양을 먹는 일은 유월절 행사의 절정이라고 할 수 있다.

) --> 

 즐거우므로(, 베시미하) - 문자적으로 이는 '즐거움 안에서'의 의미를 가진다. 이들의 즐거움은 단순한 정치적 축하연이나 오랜만에 고향을 찾은 이들의 잔치에서 얻는 기쁨 이상의 것이었다. 이 기쁨은 깊은 종교적 의의를 지닌 것인바, 왜냐하면 주께서 친히 그들의 심령속에 기쁨을 불어 넣어주셨기 때문이다(EdwinYamauchi).

 

 칠 일 동안 무교절(無酵節)을 지켰으니 - '무교절'은 하루 동안의 유월절 그 다음날부터 이어졌다(12:15-20 ; 23:15). '칠 일 동안'은 정월 15일부터 21일까지를 가리킨다.

 

 이는 여호와께서...즐겁게 하시고 - 이것은 하나님께서 고레스의 마음을 감동시킨 것(1:1)부터 시작하여 성전 재건 사업이 마쳐지기까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공동체에 은혜를 베푸셨던 전체 사실을 가리킨다. 바로 이 사실 자체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즐겁게 하였다. 한편 여기의 '즐겁게 하시고'(, 사마흐)는 절기의 준수와 관련하여 하나님의 구원과 보호를 찬양하는 문맥에서 주로 사용되는 단어이다(대하 20:27; 5:11 ; 9:2 ; 16:9 ; 32:11).

 앗수르 왕의 마음을...돌이켜 - 여기의 ''(, 멜렉)은 단수로 쓰였으므로 이 ''은 성전의 완성에 적잖은 도움을 준 페르시아의 '다리오'를 가리킴이 분명하다. 그런데 여기서 저자가 '다리오''앗수르 왕'으로 표현한 까닭은, (1) 페르시아 왕들은 앗수르, 그리고 그 뒤를 이은 바벨론 왕들의 후계자임을 자처하였으며,(2) 실제로 다리오 왕은 앗수르의 옛 땅을 자신의 나라로 삼아 다스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다리오를 '앗수르 왕'이라고 한 가장 중요한 이유는, 하나님께서 역사속의 모든 제왕(帝王)들을 장중(掌中)에 넣고 친히 주권적으로 다스리고 계심을 보여주려는 의도 때문이었다. , 저자는 예전에는 하나님께서 '앗수르 왕'을 이스라엘을 징계하는 몽둥이로 사용하심으로써 그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공포의 대상이 되었으나(9:32), 이제는 '다리오'라는 '앗수르 왕'을 성전 재건을 위한 선한 도구로 사용하심으로써 그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호의를 베풀게 되었음을 보여주려고 한 것이다. 한편 '돌이켜'( 헤세브)'돌다' '둘러싸다' 등의 의미를 갖는 동사 '사바브'의 사역형으로서, 주권자되시는 하나님이 역사 개입을 통하여 상황을 변화시킨 사실을 나타낸다.

 힘있게 하도록(, 레하제크) - 이것은 '강하게 하다' 혹은 '힘쓰다'등의 의미를 갖는 동사 '하자크'의 강조형로서, 추진 중인 어떤 일의 완성을 이룰 수 있도록 마음을 강하게 하는 행위를 의미한다(1:38 ; 16:28 ; 삼하11:25 ; 35: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