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고린도후서

고후4장,낙심 할 수 없는 이유

호리홀리 2015. 12. 30. 20:59

 바울이 하나님으로부터 모세를 능가하는 직분을 부여받은 것은 하나님의 긍휼하심 즉 하나님의 자비와 은총 때문이었다. 바울은 예수를 만나기전까지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는 일에 누구보다 열심이었다(9:1, 2). 하나님께서 그런 죄인에게 자비를 베푸사 복음을 증거하는 직분을 맡기신 것이다. 바울은 자기가 받은 직분이 정죄의 율법이 아니라 자유의 복음을 전파하는 영광스러운 직분이므로(3:8) 용기를 잃지 않을 수 있었고, 자기를 향한 모든 적대적인 비난과 시련에 대해 굴복하지 않을 수 있었다(Bruce). 혹자는 '낙심하지 않는다'는 말을, '복음을 선포하는 직무를 태만히 하지 않는다'는 말로 이해한다(Barrett). 실제로 바울은그 자신에게 주어진 복음 전파의 직무를 이행함에 있어 자기의 생명까지도 아낌없이 바치려는 각오로 매진(邁進)하였다(20:24).

 

 숨은 부끄러움의 일 - 2절은 바울과 적대자들 사이의 논쟁적 상황에서 바울이 변증한 내용 가운데 하나이다. 본문의 뜻은 '드러내지 못할 창피스러운 일'(공동번역)이다. 어떤 이들이 모종의 행위를 숨어서 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 일이 드러날 경우 수치가 돌아온다는 것을 그들 스스로 알고 있기 때문이다. 바울은 자신과 논쟁자들을 구별하기 위하여 자신은 그런 일을 버렸다고 선언한다. '버리고'에 해당하는 헬라어 동사 '아페이파메다'는 부정과거로서 이미 버렸음을 의미한다. 바울이 이말을 사용하는 것은 한편으로, 그와 논쟁하는 자들이 그 일을 지금도 하고 있다는 의미를 함축한다. 여기서 그 부끄러운 일이 무엇인지 분명히 알 수는 없지만 바울더러 율법을 지키지 않는다고 비난하고 율법을 지키도록 강요하면서 자신들은 은밀한 곳에서 율법을 지키지 않는 적대자들의 행위를 가리키는 것일 수 있다.

 

 궤휼 가운데 행하지 아니하며 - '궤휼'에 해당하는 헬라어 '파누르기아''교활', `속임수'라는 뜻이며, 11:3에서는 사단이 하와를 미혹한 근본적 의도를 묘사하는 것으로 '간계'로 번역되었다. 바울은 적대자들에 의해서 악선전을 당한 일이 있었다(12:16). 바울은 본절에서 이런 악선전에 대하여 자신은 결코 그런 파렴치한 행위를 하지 않았다고 밝히고 있다.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케 아니하고 - '혼잡케'에 해당하는 헬라어 '돌룬테스''불순물을 섞다'는 뜻으로, 마치 약에 이물질을 섞어 약의 질을 떨어뜨리는 것처럼 순수한 복음에 필요없는 것을 첨가시킴으로써 복음의 본질을 왜곡시키는 행위를 가리킨다. 혹자는 바울이 복음을 전파하면서 모세의 율법을 지키도록 가르치지 않음으로 해서 복음의 질을 떨어뜨린다는 비난을 받았다고 한다(Barrett). 본문은 이런 비난에 대한 바울의 답변일 수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바울이 보기에 도리어 복음의 본질을 왜곡시키는 거짓 전도자들(2:17)에 대한 비판이기도 한다.

 

 오직 진리를 나타냄으로 양심에 대하여 스스로 천거하노라 - 바울이 여기서 '복음' 또는 '하나님의 말씀'을 사용하지 않고, 보편적인 개념인 '진리'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는 것은 그에게 가해졌던 또다른 비난 즉 `바울은 어떤 소수의 사람만을 위한 비교적(秘敎的)인 가르침을 베푼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그것을 해명하려는 의도 때문이다. 그가 본절에서 계속하여 하나님앞과 모든 사람의 양심에 대하여 자신을 천거한다고 선언하는 것은 그와 같은 의도를 지지해 준다. 여기서 바울이 자신을 천거하는 대상으로서 하나님 외에 '양심'( 쉬네이데신)을 든 것은 주목할 만하다. A.D. 1세기경의 유대인 주석가 필로(Philo)'양심은 하나님의 파수꾼으로서 인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음성'이라고 정의한 것처럼 인간의 양심은 비록 인간의 타락 이후로 무디어지고 때로는 왜곡되기도 했지만 그럼에도 선한 양심은 여전히 진리를 분별하는 능력이 있다(2:15). 결국 바울이 양심에 호소하여 자신을 변증한 것은 인간의 심령을 감찰하시는 하나님께 호소한 것과 같은 성격을 가진다. 한편 바울이 '스스로 천거한다'는 말이 3:1 내용과 모순된다고 볼 수는 없다. 본절에서 바울은 자신을 옹호하기 위하여 자천한 것이 아니라 오직 진리만을 증거했음을 공개적으로 밝히고 있는 것이다(Harris).

 

 망하는 자들에게 가리운 것이라 - 여기에서도 바울이 모호한 말을 전한다는 비난을 받고 있었음이 시사된다. 즉 바울은 소수의 영적인 마음을 가진 선택된 자들만이 알아들을 수 있게 전한다고 비난받았던 것으로 보인다(Barrett). 바울은 그렇게 비난하는 자들을 향하여 만일 자신의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면 그런 사람들은 멸망의 길을 걷는 자들이라고 분명하게 말한다. 바울은 누구나 이해할 수 있고 공개된 방식으로 설교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그들의 마음에 수건이 씌워져 있기 때문이고 그것은 전적으로 그들 자신의 책임이다(고전 1:18;2:14). 여기서 '가리운'에 해당하는 헬라어 '케칼륌메논'이 수동태로 되어있는 것은 복음 진리를 깨닫지 못하는 것이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기 때문임을 시사한다(Bruce). 어떤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이 감추어져 있다. 이것은 성도들이 그리스도의영광에 참여하고 직분을 부여받는 것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총에 의한 것이듯, 그리스도의 영광을 거부하고 멸망에 이르는 것 역시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주권 아래 이루어진다는 계시의 이중적 측면을 보여준다.

 

 이 세상 신 - `세상'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이오노스'는 고전1:20;1:4에서와 같이 '세대'의 의미이다(age, NIV). 따라서 '이 세상 신'보다는 '이시대의 신'이라 번역하는 것이 정확하다. 이 이름은 사단에 대한 별칭이다(Harris). 이외에도 사단은 `이 세상의 임금'(12:31), '정사와 권세와 어두움의 주관자요 악한영'(6:12)으로 불린다.사단은 본래 하나님의 피조물로 천사였으나 지고하신 하나님과 동등해지려는 교만을 품었기 때문에(14:13, 14), 하나님으로부터 정죄를 받고(14:12, 15) 하나님의 대적자가 되었다. 그러나 사단은 예수의 삶과 죽음 그리고 부활을 통하여 결정적인 패배를 당하였다(4:1-12). 그런데도 사단이 계속해서 성도를 타락시키려고 애쓰며, 믿음이 없는 자들로 하여금 성도가 되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활동을펴는 것은, 하나님께 종말까지 사단의 활동을 허락하였기 때문이다.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 '혼미케 하여'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튀플로센''눈을 멀게 하였다'는 의미이다(has bilnded,NIV). 따라서 '마음을 혼미케 한다'는 것은 '마음의 눈, 즉 영적인 눈을 멀게 한다'는 뜻이다. 사단은 사람들의 영안(靈眼)을 멀게 하여 영적인 어두움에 빠지게 하고 빛되신 그리스도를 미워하게 만든다(3:19;벧전 5:8).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 - 바울은 여기서 태초에 이루어진 하나님의 창조를 염두에 두고 있다(Bruce). 본절의 '형상'( 에이콘)은 원형(archetype)은 그대로 그린 초상을 가리킨다. 이것은 그리스도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보이는 초상으로서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인간의 원형이시며 하나님과 동일한 인격과 성품을 지니신 분임을 말해준다(2:6). 그러나 본문에서 바울이 강조하려는 것은 그리스도의 신성함 자체가 아니라, 하나니의 현시(顯示)인 그리스도를 거부하는 것은 곧 하나님을 거부하는 일이라는 것이다.

 

 그리스도 예수의 주 되신 것과 - 바울이 자신을 자랑한다거나 자기의 유익을 구한다는 비난을 받으면서도 개의치 않고 계속해서 사도직을 수행할 수 있었던 것은 그에게 은혜로 직분이 주어졌다는 것과(1), 그 직분의 사명이 그리스도 예수가 ''라는 것을 선포하는 것임을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자신의 인간적인 지위나 특권을 포기하지 않고는 그직무를 수행할 수 없음을 잘 알고 있었기에 가능했다. 바울은 몸소 종의 형체로 오셔서 종의 직분을 다하신 예수(2:7)의 발자취를 따랐다. 한편 본문의 ''( 퀴리온)는 예수가 하나님과 동일한 신분을 가지고 있음을 의미한다. 그리스도 예수가 주라는 진술은 초대 교회로부터 전해오는 기독교의 중요한 교리이자 신앙 고백이다.

 

 예수를 위하여 우리가 너희의 종된 것을 전파함이라 - 바울은 자신이 행하는 사도직의 본질을 알기 쉽게 설명하고 있다. 바울은 율법이 가져다주는 것이 죽음인(3:7) 반면, 복음이 가져다주는 것은 자유라고 했다(3:17). 그런데 지금 바울은 율법의 정죄로부터 벗어나 복음의 자유로 옮기워진 것의 또다른 의미가 무엇인지 가르쳐 주고 있다. 그것은 종이 되는 것이다. 그는 기꺼이 자신을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표현했다(1:1;1:1). 그리스도의 종이 된다는 것은 사람들을 위하여도 종이 되는 것이며 그들을 위하여 자신을 소비하는 것이다(12:15). 본절에서 바울은 그와 같은 사실을 기쁘게 증거하고 있다. 이는 사 40-48장에 나와 있는 여호와의 종의 노래가 보여주듯이 비록고난을 받는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기쁘게 여기는 것과 같다(Martin).

 

 어두운 데서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취셨느니라 - 바울은 자신의 구원받음과 사도직에 대하여 설명하기 위하여 온 세상의 어두움을 밝히신 하나님의 첫번째 빛의 창조(1:3)와 인간의 영적 무지을 몰아내기 위하여 인간의 마음에 구원의 빛을 비춘 두번째 빛의 창조를 병행(竝行)시키고 있다. 첫번째 창조의 빛이 어두움을 몰아내고 사물을 볼 수 있게 해주었다면, 바울의 영혼에 비친 구원의 빛은(9:3, 8;22:6, 9, 11;26:13) 그를 덮었던 영적 무지의 어두움을 몰아내고 그리스도의 얼굴에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지식을 갖게 하였다. 이 지식은 구체적으로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계시된 복음에 대한 지식이다. 이 지식을 소유한 자는 그리스도의 얼굴에 하나님의 영광이 있음을 아는 자이고 그리스도가 곧 하나님이심을 아는 자이다(Harris).

 

 보배 - 복음, 곧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구원의 복음을 가리킨다.

 

 질그릇 - 성경에는 질그릇에 대한 비유가 종종 사용된다. 가령 64:8에서는 하나님과 그의 백성을 도공과 질그릇에 비유하면서 질그릇이 스스로를 빚을 수 없다는 점이 강조되고 있고, 4:2에서는 질그릇의 깨어지기 쉬운 속성에 초점이 맞추어져 묘사되고 있으며, 딤후 2:20, 21에는 금그릇이건, 은그릇이건, 나무그릇이건, 질그릇이건 간에 주인이 쓸 수 있도록 깨끗해야 한다는 점이 강조되고 있다. 이런 것들 가운데, 공통적인 것은 질그릇의 가치가 형편없다는 것이다. 본문에서도 질그릇은 앞에서 언급된 '보배'와 극명하게 대조되어 가치없는 것으로 비유되어서 바울 자신과 성도들을 가리킨다. 이러한 표현은 인간의 육체가 갖는 한계성과 연약성을 나타내는 것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사람의 육체를 부정하거나 인간의 인격을 무시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것은 복음의 무한한 영광과 숭고함에 비교된 인간의 상대적 무가치성을 표현한 것이다. 이처럼 복음의 존귀함과 그것을 전파하는 사람에 대한 대조는 (1) 복음의 능력이 오직 하나님께 있음을 깨닫게 하고, (2) 인간의 연약성을 통해 하나님의 완전한 능력이 나타남을 보여주며, (3) 인간의 교만과 자랑을 방지하려는 목적을 갖는다.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 '우겨쌈을 당하여도'에 해당하는 헬라어 '들리보메노이'`즙을 짜기 위해 포도를 짓누르다'는 뜻으로 바울을 비롯하여 당하는 고난이 얼마나 극심한 것인가를 말해준다. 성도들에게 고난이 있는 것은 필연적이다. 왜냐하면 앞절에서 언급된 대로 성도는 질그릇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질그릇 안에 있는 보배, '능력의 심히 큰것'의 원천인 하나님의 보호하심이 있기 때문에 질그릇은 결코 깨어지지 않는다. 바울이 선교 활동을 하면서 자기를 지탱해 준 힘의 원천이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이라고 말할 수 있었던 것은 추상적 이론이나 관념적 논리가 아니라 실제적인 그의 사역에서 전인격적으로 경험한 데서 기인한다(6:3-10;고전 4:9-13;15:30, 31). 실로 바울에게 있어 자신은 질그릇이라는 사실을 뼈저리게 절감(切感)하는 것이 그가 가장 강해질 수있는 비결이었다(1:8, 9).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 이 은유적 표현은 군대에서 사용하는 전투적인 표현이다. 그 의미는 대적들이 포위하여 한곳에 몰아넣는다 하더라도 결코 움직일 틈이 없도록 궁지에 몰아넣지는 못한다는 것이다(Tasker).

 

 핍박을 받아도...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 바울이 계속해서 성도들이 당하는 혹독한 육체적 고통을 사실화하고 있음에 주목해야 한다. 혹자는 이것을 영지주의와의 대결이라는 측면에서 이해해야 한다고 본다(Barrett). 즉 바울은 영지주의자들이 육을 무시하고 영적인 것에만 의미를 두는 것에 반대하여 육이 당하는 고통을 사실화하고 도리어 육의 고통이 하나님과의 만남을 가능하게 한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아무튼 본절과 앞절을(8) 통해 바울이 분명히 말하는 것은 그 어떠한 고난도 성도들을 궁극적으로 패배시키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성도들에게 주의 영이 있고 주의 영이 있는 곳에는 죽음으로부터의 자유가 있다는 것의 또다른 표현이다(3:17).

 

 예수 죽인것을 몸에 짊어짐은 - 본절과 11절은 바울이 독특하게 사용하는 역설적인 표현으로서 그리스도인의 존재 양식이 십자가와 부활에 의해 규정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것은 고난을 통한 영광이고 죽음을 통한 생명이다. 한편 혹자는 바울이 '죽음'에 관해 언급할 때, 일반적으로 헬라어 '다나토스'를 사용하는데 비해 여기서는 '네크로신'를 사용하고 있음에 주목하여 이것이 단순한 죽음 외에 '죽는 과정'을 함축하고 있다고 본다(Barrett). 그렇다고 볼 경우 본문은 성도로서 신앙적 삶을 지켜나가고자 할 때 예수의 죽음과 같은 고난의 과정이 계속해서 반복된다는 의미를 내포한다. 바울은 이것을 육체로 경험했고 그의 실존에는 이런 십자가의 흔적이 남아있다(6:5;고전 4:11;6:17).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 여기서는 십자가의 고난을 기꺼이 감내하는 성도들에게 부활을 통한 궁극적인 구원이 주어질 것이라는 예시가 나타나고 있다. 성도들은 주를 위한 고난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하고 종말론적으로는 그리스도의 재림 때 부활함으로써 영원히 승리하게 된다(8:36;1:24). 이런 의미에서 그리스도인의 고난은 패배의 표징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생명을 소유하게 되는 승리의 표징이다(3:13).

 

 우리 산 자가...죽음에 넘기움은 예수의 생명이...나타나게 하려 함이니라 - '우리 산 자'라는 표현은 죽음의 의미를 더 분명하게 드러내고 있다. 만약 성도들이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 때문에 고난을 당하고 죽음에 넘기워진다면 그것은 곧 그의 몸에 그리스도의 생명이 나타나고 있는 증거이다. 그것은 죽을 육체가 영적인 몸으로 변화되는 것을 뜻한다(고전 15:35-49). 여기서 주의 재림을 기다리는 성도들이 죽지 않고 살아 있는 모습으로 그날을 맞아야 한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다. '육체적 생존'이 주의 재림에 확실히 참여할 수 있는 조건이 되는 것은 아니며 오히려 주를 위하여 십자가의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는 것이 재림에의 확실한 참여를 보장한다.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하느니라 - 본절에서 바울은 '죽음 가운데서의 생명'이라는 논지를 1:6, 7에서 언급한 '다른 사람을 대신하여 받는 고난'과 관련시켜 말하고 있다. 곧 바울이 당하는 고난이 심할수록 고린도 교인들에게는 더 좋은 영적 상황이 전개된다는 것이다(Harris). 바울은 자신의 고난이 메시야적 고난을 감내(堪耐)했던 예수의 십자가의 삶을 본받는 것이라고 이해했음에 틀림없다. 한편 혹자는 본문이, 바울 자신은 주의 재림 이전에 죽을 것이지만 그의 성도들은 살아서 주의 재림을 보게 되리라는 기대를 담고 있다고 본다(Dodd). 또 어떤 이는 바울의끝없는 고난과 시련을 보면서도 편안하고 안일한 생활에 젖어있는 고린도 교인들에 대한 바울의 냉소적 비난을 함축하고 있다고 보나(Calvin), 이 두 견해는 타당하지 않다. 오히려 본문은, 예수께서 만인에게 생명을 주기 위하여 고난과 십자가의 죽음을 감내하셨던 것처럼 바울 자신의 고난과 시련이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에게 유익하게 되었음을 말하고 있다(1:24).

 

 기록한바 내가 믿는 고로 말하였다 한것같이 - 이 문구는 시 116:10의 인용이다. 그런데 시 116:10의 히브리어 본문 '헤에만티 키아답베르'는 다음 세가지로 해석된다. (1) 나는 믿었다. 고로 나는 말할 것이다. (2) `나는 굉장히 고난받고 있다'고 말했을 때조차 나는 나의 믿음을 지니고 있었다. (3) 나는 믿는 고로 말하였다. 이상에서 바울이 의도한 것은 (3)의 해석으로 여겨진다. (3)은 본절의 맛소라 본문(Massora Text)에 해당하는 70인역(115:1)에 대한 해석으로서 '내가 믿는고로 말하였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본문 '에피스튜사 디오 엘랄레사'의 의미를 그대로 전하고 있기 때문이다("I be-lieved;therefore I have spoken.", NIV). 결국 바울은 본절에서 70인역의 시 115:1을 인용했다고 볼 수 있다. 시편 기자는 절망적인 질병과 그에 수반되는 낙담 속에서 하나님의 구원을 헤아리며(116:1-11) 어떻게하면 하나님께 가장 적절하게 헌신할 수있을까를 고려하였다(116:12-19). 바울은 절망적인 상황에 처하여서도 복음을 굳게 믿었고 항상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임이로다'(고전 9:16)라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바울은 자신이 믿는 바 복음을 증거하지 않을 수 없었다(Harris).

 

 우리가 같은 믿음의 마음을 가졌으니 - 혹자는 본문의 '같은 믿음'이 고린도 교인들과 같은 믿음을 뜻한다고 보지만(Calvin) 그보다는 시편 기자와 같은 믿음을 가지고 있음을 표현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시편 기자가 가졌던 믿음, 즉 어떠한 고난의 상황에서도 하나님이 구원해주신다는 믿음이 바로 바울 자신의 믿음이며 그것이그로 하여금 어떠한 상황에도 절망하지 않고 사도직을 계속 수행할 수 있게 해주는 근거가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바울이 말하는 믿음은 하나님이 단지 바울 자신을 구원해 주신다는 개인적 차원의 믿음을 넘어 만인을 구원하는 복음에 대한 믿음이다.

 

 예수와 함께 우리도 다시 살리사 - 바울의 사도적 삶은 철저히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에 대한 믿음에 근거한다. 예수께서 대속의 고난을 당하셨던 것처럼 바울도 십자가의 고난을 본받았다. 바울이 온갖 죽음의 위협과 시련을 마다하지 않은 것은 예수께서 죽음에서 일으켜진 것처럼 바울 자신도 죽음에서 일으켜진다는 것을 믿었기 때문이다(11:2;5:27;1:22).

 

 너희와 함께 그 앞에 서게 - 종말론적 구원의 날 바울과 그의 성도들은 함께 구원의 기쁨을 나누며 그리스도 앞에 서게 될 것이다. 그날 바울을 비롯하여 믿는 자들은 그리스도의 승리에 참여하게 되겠지만 불신자들에게는 정죄(定罪)의 심판대가 기다리게 될 것이다. 바울은 이 영광스러운 미래를 고린도 교인들에게 열어주기 위해 온갖 비방과 오해와 육체적 고난을 마다하지 않았다. 바울은 이런 사실이 고린도 교인들에게 받아들여지고 이해되어지기를 희망했을 것이다.

 

 모든 것을 너희를 위하여 하는 것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 - 바울은 다시 1:6의 주제로 되돌아간다. 바울은 자신이 당하는 모든 고난 뿐만 아니라 그의 믿음과 전도, 이 모든 것들이 오직 고린도 교인들을 위한 것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더많은 사람들이 은혜를 받게 됨으로써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함임을 역설하고 있다. 이것이 바울의 사도직에 대한 분명한 자의식이다. 여기에는 바울이 자신의 이익을 생각할 여지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 '그러므로'라는 표현은 바울이 낙심하지 않는 이유가 앞에서 제시되었음을 암시한다. 바울이 낙심하지 않는 이유는 다음의 세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 첫째,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새 언약을 전하는 고귀한 직분을 받았기 때문이다(1). 둘째, 죽음에서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승리에 동참하리라는 소망 때문이다(14). 셋째, 고린도 교회 성도들의 영혼을 윤택(潤澤)케 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하기 때문이다(15).

 

 겉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 - 여기서 '겉사람'은 죽어 흙으로 돌아갈 수 밖에 없는 제한된 육체를 가진 이 세대의 인간을 가리킨다. 이에 대조되는 '속사람'은 복음을 통해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중생한 영적 실존을 가리키는데(5:17;2:5;3:9, 10;벧전 1:3), 장차 다가올 새로운 세대의 사람이라고 할 수도 있다. '겉사람'이 낡아져 가는 것은 이 세대의 인간들에게 적용되는 생성 소멸의 원리이다. 그러나 '속사람'이 도리어 새로와지는 것은 중생한 영혼이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지식이 새로와지며 결국에는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이르게 되기 때문이다(4:15;3:10). '새로와짐'은 종말론적 재림의 때에 완성되는 것이지만,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인해 이미 현재화되어 있다. 바울은 이것을 '날마다 새롭도다'로 표현하고 있다. 한편 본문은 바울 자신에게도 적절하게 적용되는 바, 그의 육체는 끊임없이 다가오는 고난들(1:7-9;4:8-11)과 세월의 흐름으로 하여 점점 쇠약해지지만 그의 영적 실존은 나날이 새로와지는 것이다.

 

 환난의 경한 것이...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 본절에서는 두 가지 사항이 강조된다. 하나는 영광을 얻기 위해서는 환난을 피해갈 수 없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환난을 당한다 하더라도 미래에 받을 영광에 비하면 그 환난은 오히려 가볍다는 것이다. 이것은 '잠시''영원' 그리고 '경한 것''능한 것'의 극명(克明)한 대조로 잘 나타나고 있다. 바울이 그의 사도직을 수행하면서 당한 환난은 사실상 결코 가벼운 것이 아니었다. 1:8에서 고백한대로 그가 당한 환난은 너무 심하여 살 소망까지 포기해야 하는 상황도 있었다. 그럼에도 그는 이것을 '경한 것'이라고 분명히 말하고 있다. 이것은 바울이 하늘에서 받을 영원하고도 영광스러운 축복에 대한소망을(1:5) 확신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 - 여기서 '돌아보는'에 해당하는 헬라어 '스코페오''주목하다', '소망하다'의 뜻이다. 바울과 성도들이 소망하는 것은 이 세대의 물질적인 것이 아니라 하늘 나라의 영적인 것이었다. 여기서 우리는 바울이 보이는 것을 일시적인 것으로, 보이지 않는 것을 영원한 것으로 묘사하고 자신이 후자를 바란다고 했을 때, 그것은 물질과 영, 현실과 이상에 대한 이원론적(二元論的) 구별을 말하는 것으로서 육체적이고 감각적인 것에 대한 부정을 뜻한다고 이해해서는 안 된다. 만약 육체적인 것이 무의미하다면 그가 당한 육체적 고통도 고린도 교인들에게 아무런 유익을 끼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분명히 자기가 당하는 고난이 고린도 교인들에게 유익이 된다고 하였다(1:6). 다만 바울이 말하는 것은 많은 사람들이 그러하듯이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며 결국 없어질 것에 궁극적인 가치를 부여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보이지는 않지만 종말론적 구원의 날에 도래할 그 영원한 세계를 소망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바울은 이 보이지 않는 것을이미 보며, 미래의 종말론적인 것을 이미 현재적인 것으로 누리고 있다. 그것은 그가 믿음을 가지고 보기 때문이다(11:1). 이런 바울의 모습은 유한한 육체를 입고 환난이 현존하는 이 세대에 살고 있지만 이미 주의 영으로 말미암아 자유함을 누리고 사는 그리스도인의 영적 실존의 한 모범이며, 마찬가지로 어떤 성도라도 믿음을 가지고 있다면 바울과 동일한 영적 실존으로 살아갈 수 있음을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