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고린도후서

고린도후서 4:16-5:10,종말론적인 삶

호리홀리 2015. 6. 11. 11:44

고린도후서 4:16-5:10은 신자가 어떻게 종말론적 삶을 살아야 하는가. 

 종말을 사는 기본적인 태도는 낙심하지 않는 것이라는 것이다. 바울은 신자가 낙심하지 않아야 하는 이유를 몇 가지 대조 문구를 통해서 설명한다.

 

첫째, 육체를 가진 “것 사람”은 점점 쇠해 지지만, 크리스천의 본질을 형성하는 “속 사람”은 더욱 더 새로워지기 때문이다(4:16).

둘째, 신자가 현재에 받는 환란은 “일시적”이고 “경한 것”이며, 신자의 내세의 삶은 “영원하고” “중한 것”이기 때문이다(4:17).

셋째, “보이는 것은 잠간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하기 때문이다(4:18).

 넷째, “땅에 있는...장막 집[임시 집]” 즉 육체가 죽으면,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 즉 부활의 몸을 다시 받기 때문이다(5:1-4). 바울은 위와 같은 모든 것은 하나님이 신자에게 이 땅에서 하늘의 것을 맛보라고 주어진 “보증”으로서의 성령을 통해 깨닫고 경험하게 된다고 한다(5:5; 1:22 참조). 여기서 “보증”(avrrabw/na)이란 집을 사는 사람이 집을 계약하고 그 계약의 표지로서 지불하는 “기본 첫 불입금”(down-payment)을 의미한다. 즉 여기서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하나님은 종말의 윤명에 대해서 두려워하고 걱정하는 신자들에게 성령을 체험하게 함으로써 미래의 구원을 이 땅에서 미래 맛보게 함으로써 성령이 신자에게 구원에 대한 보증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위와 같은 배경에서 바울은 계속해서 특히 종말을 사는 크리스천이 낙심하지 않고 담대하게 되는 것을 논증한다(5:6-10). 본문의 기본적 배경은 신자가 이 땅에 살면서 저 세상의 도래를 고대하고 있는 종말론적 삶이다. 먼저, 몸을 가지고 이 땅에 거주하는 신자의 삶을 주와 떨어져 있는 삶이라고 묘사한다(6절). 이 때 신자는 이 땅에서 살지만 보이는 것에 따라 판단하지 않고 보이지 않는 것에 따른 판단, 즉 믿음에 의한 판단을 한(7절). 그런데 신자가 마음속으로 소망하는 바는 육체의 몸을 벗어 버리고 부활의 몸으로 주와 영원히 거하는 것이다(8절). 하지만 바울은 현실을 부정적으로만 묘사하지는 않는다. 신자는 이 땅에서의 삶을 하직하고 주와 영원한 삶을 살 것을 고대하지만, 이 땅에서도 성령을 통해 저 하늘의 것을 맛 볼 수 있기 때문에 이 땅에서의 삶이 무료하거나 무의미한 것은 아니다. 그래서 신자는 이 땅에서 살든지 죽든지 “주를 기쁘게 하는 것”에 최대한 관심을 두게 된다는 것이다(9절). 결국 모든 신자는 그리스도의 최후 심판대 앞에 서게 될 것이다(10절).


바울은 본문을 앞 구절(4:16-5:5), 특히 바로 앞 절(5:5)과 연결시킨다. 신자의 현존은 몸을 가지고 있는 것이고, 임시 집에서 사는 것이어서 종말의 부활의 몸으로, 영원한 집으로 살 것을 소망으로 살면서도 성령을 통해 이 땅에서 하늘의 것을 맛볼 수 있기 때문에  이 땅에서 든든하다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바울은 이 땅에서 신자가 육체를 가지고 살 때는 그리스도와 완벽한 교제를 나누지는 못하기 때문에 몸으로는 그리스도와 떠나 있는 것이라고 말한다. 바울은 여기서 몸에 거하는 것(evndhmou/ntej)을 주와 떨어져 거하는 것(evkdhmou/men)을 언어유희를 통해 대조시키고 있다. 이것은 마치 위에서 바울이 말한 것 사람의 삶과 속  사람의 삶, 혹은 땅에 있는 장막 집과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과의 대조를 연상케 한다. 바울은 본 절에서 8절과 연관하여 이 땅에서의 삶이 최종적이지 않고 임시적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6절에서 이 땅의 삶의 영원하지 않음에 대해서 말한 것에 대해서 그렇다면 이 땅에서의 삶은 어떤 원칙에 따라 살아야 할 것인가를 바울이 일종의 주(註) 형식으로 언급한 것이다. 앞 구절과 본 구절이 “이는”(ga.r)이라는 전치사로 연결되어 있지만 이것이 이유를 명확하게 나타내는 것으로 쓰인 것 같지는 않다. 여기서 이 전치사는 앞 구절과 뒤 구절을 느슨하게 연결하는 역할을 한다. 어쨌든 몸을 가지고 신자가 이 땅에서의 삶의 원칙으로 바울이 제시한 것은 “믿음으로” 행하는 것이다. 바울은 믿음으로 행하는 것에 대한 반대 의미를 “보이는 것으로” 행하는 것이라 하여 양자를 강력하게 대조시킨다. 앞에서도 바울은 보이는 것은 일시적인 것이고,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한 것이라고 천명한 바 있다(4:18). 곧 믿음으로 행하는 것은 이 땅에서의 상식에 의해서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과 신뢰에 의해서 행동하는 것을 말한다.

(8절)

본 절의 내용은 이미 6절의 내용에서 예견되었던 것이다. 이 땅에서의 삶이 임시적이고 또 그리스도와의 완전한 교제에 이르지는 못하기 때문에 결국 신자의 궁극적 소망은 몸을 벗어버리고 그리스도와 영원히 함께 거하는 것이다. 앞에서도 고찰했듯이 이것은 종말에 대한 바울의 일관된 소망이다(살전 4:17; 빌 1:20-26). 여기서도 바울은 6절에서와 마찬가지로 몸을 떠나 거하는 것(evkdhmh/sai)을 주와 함께 거하는 것(evndhmh/sai)으로 표현하면서 언어유희를 계속하고 있다. 신자의 궁극적 소망은 이 땅에 몸을 가지고 영원히 거하는 것이 아니라 결국은 육체의 몸을 버리고 부활의 몸으로 주와 함께 거하는 것이다. 특기할 만한 것은 6절에서와 마찬가지로 바울은 여기서도 분사형의 “우리는 담대합니다”라는 말을 앞세운다는 것이다. 사실 여기서 무엇에 대해서 든든하다는 것인지 명확히 표현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종말을 맞이하는 태도에 있어서 종말의 심판을 생각하여 벌벌 떠는 입장이 아니라 신자는 오히려 적극적으로 종말에 주와 함께 거할 영원한 소망으로 인해 든든하게 된다는 것이다.

 

(9절)

본 절 서두를 “그런즉”으로 시작함으로써 바울은 앞 구절에서 말한 것에 근거하여 일종의 종말을 사는 신자의 삶의 원칙을 추론적으로 말하고 있다(1:20; 4:13; 살전 5:11; 롬 4:22; 15:22; 빌 2:9). 즉 신자의 궁극적 삶의 소망은 주와 함께 영원히 거하는 것인데, 그렇다고 이 땅에서 신자가 주와 전혀 교제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무의미한 것은 아니다. 신자는 이 땅에서 믿음으로 행하면서 저 세상에서 오는 행복을 맛볼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거하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기를 힘쓰노라”고 한다. 그러므로 신자에게 있어서 궁극적인 삶의 목적은 무조건 육체의 몸을 벗어버리는 것만은 아니다. 육체를 벗고자 하는 것은 주와 더 가까이 거하면서 주를 기쁘시게 할 수 있다는데 있는 것이지 그것 자체가 궁극적 목적은 아닌 것이다. 이에 바울은 삶의 궁극적 목적이 주를 기쁘시게 하는 것에 있기 때문에 어떤 면으로는 이 땅에 거하든지 주와 함께 거하든지는 부차적인 것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바울이 데살로니가전서를 쓰면서 말한 내용 중 “깨든지 자든지 자기와 함께 살려 하려 하셨느니라”(5:10)를 생각나게 한다.

(10절)

사실 본 구절에서 최종 결론은 9절에서 이미 내려졌다. 그런데 종말에 대해서 담대함을 주제로 하는 내용에 바울은 왜 갑자기 그리스도의 최후의 심판과 신자의 행동에 대해서 말한 것일까? 이것이 비록 본문에서는 갑자기 나왔지만 바울이 종말에 대해서 이야기 하면서 종말에 윤리적 삶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은 낫선 것은 아니다(살전 4:13-5:11). 아마도 바울은 종말에 대해서 담대함에 대해서 강조하면서도, 썩어질 몸이 존재하는 이 땅에서 행한 것에 대한 심판은 반드시 행해진다는 것을 독자들에게 상기시키고자 했던 것일 것이다. 여기서 바울은 담대함에 대해서는 계속해서 “우리”라는 말을 사용했지만 심판에 대해서는 “각자”라는 말을 써서 심판은 각자가 행한 것에 따라 선악 간 판단이 내려질 것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것은 신자와 불신자 간의 심판은 아닌 것 같다(롬 2:6-11 참조). 이것은 신자가 받는 판결인데 그렇다고 어떤 상급이라기보다는 각자의 행위에 대한 판단을 받을 것이라는 것이다. 바로 앞 구절과 연관해서 말하면 신자는 주를 기쁘시게 했는지 그렇지 않았는지를 나중에 판단 받을 때가 있다는 것이다. 본 구절의 기조로 볼 때 이것은 위협이라기보다는 부드럽게 이 땅에서 몸을 가지고 사는 신자는 주를 적극적으로 기쁘게 하는 삶을 살자고 제안하는 것이다. 



본문은 바울이 여러 곳에서 종말론적 삶에 대해서 기술한 것의 일종이다(살전 4:13-18; 5:1-11; 고전 15:50-58; 고후 5:1-10; 빌 1:21-24; 3:20-21). 묵시문학적 주제는 바울 신학의 핵심에 해당하는 것이다. 바울은 어떤 의미에서도 이 땅에서 영원한 집을 짓고 살려는 사람이 아니었다. 바울의 소망은 여러 곳에서 표출된 대로 이 땅에서의 삶인 몸을 벗어버리고 저 세상에서 주와 영원히 함께 사는 것이다. 하지만  바울은 이 땅에서의 삶을 의미 없는 것으로 보지 않았다. 아마도 양자의 큰 차이점은 이 땅과 저 세상을 연결하는 성령에 대한 개념의 유무에 있을 것이다. 바울에게 있어서 몸을 입고 있는 한 사람은 영원한 존재 양식을 갖고 있는 것이 아니지만 성령을 통해 저 세상을 맛볼 수 있기에 이 땅의 삶은 아름다운 것이다. 본문에도 이러한 바울의 종말론에 대한 사상이 깊이 배어있다. 이 땅을 영원한 삶의 터전으로 생각하지 않고 부활의 몸으로 주와 함께 영원히 거할 것을 사모하는 것과 이 땅에서의 신자의 삶의 원칙이 제시되어 있는 것이다. 
 

사실 이 땅에서 영원한 둥지를 틀고, 이 땅에 임하는 하나님 나라에만 만족하는 사람들은 종국에는 세속화되기 마련이다. 반면, 묵시문학적 사고방식에 몰두해 저 세상만 바라보며 이 땅에서 몸으로 사는 모든 행위를 의미 없는 것으로 간주하는 사람들은 일종의 염세주의자가 되기 쉽다. 전자에게는 인간화가 곧 복음화로 여기며 이에 몰두하기 쉽고, 후자는 건전한 노동의 가치도 무시하게 된다. 바울은 양자의 위험을 잘 알고 있었고 양 극단의 사고를 모두 경계한다. 종말에 대한 고대가 없는 것이나 종말 신앙으로 현실이 피폐해 지는 것은 바울이 종말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바울이 생각한 것은 신자의 궁극적 존재 양식인 저 세상의 능력이 성령을 통해 이 땅에 임하므로 종말의 능력의 삶이 현실에서 선취되어 신자의 삶은 이 땅에서도 풍요롭고 행복한 것이다.   
 
1) 신자의 궁극적 소망: 몸을 떠나 그리스도와 영원히 함께 하는 것(6, 8절)
2) 종말에 관한 신자의 삶의 원칙: 믿음으로 행함과 주를 기쁘시게 하는 것(7, 9-10절)
3) 종말을 바라보는 신자의 태도: 담대함(6, 8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