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역대하(구속사)

역대하22장,다윗언약때문에

호리홀리 2015. 12. 9. 13:39

 본절의 병행 구절인 왕하 8:24에는 아하시야가 어떻게 왕위에 오르게 되었는지 자세히 설명되어 있지 않으나, 본절에는 아하시야의 즉위 사건에 예루살렘 거민이 미친 영향이 암시되어 있다. , 왕위 계승과 관련하여 혼선이 있었다는 것이다(Keil, Zockler, Payne, Williamson). 아하시야의 모친인 아달랴가 왕권을 장악하려는 어떤 계략에 대해 예루살렘 거민이 반대하고 아하시야를 적극적으로 왕위에 계승시켰다고 추론할 수 있다. 이 추론의 타당성은 아하시야가 일년을 통치하고 죽자 그녀가 유다 왕가의 씨를 진멸시키려한 사실에서 찾을 수 있다(10).

 

사십 이 세라 - 왕하 8:26에는 아하시야가 위에 나아갈 때를 나이 이십 이세라고 했다. 그런데 본절에는 '사십 이세'로 나타난다. 이것은 필사자가 '이십''사십'으로 오기한 것으로 대부분의 주석 학자들에 의해 주장된다. 아하시야의 부친 여호람이 40세에 죽었는데(21:5) 1년을 다스리고 사망한 그의 아들이 42세일 수는 없는 것이다.

 

 오므리의 손녀더라 - 여기서 손녀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바트'''이란 뜻이다. 그래서 혹자는 아달랴를 오므리의 딸이요, 아합의 누이(21:6과 비교하라)라고 주장한다(Hitzig). 그러나 여기서 아달랴를 오므리의 딸이라고 한 것은 오므리가 아달랴의 부친이기 때문이 아니라 오므리 왕가의 시조(始祖)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오므리는 아합의 부친이며 아달랴는 그의 손녀가 된다. 이런 때에 히브리어 '바트''손녀'로 번역될 수 있는 것이다.

 

 이는 그 모친이 꾀어 악을 행하게 하였음이라 - 아달랴가 왕후로서 모든 세력을 잡고 그의 아들 아하시야를 조종한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아달랴는 배후에서 그의 아들 아하시야를 조정하여 유다를 더욱 바알 숭배로 몰아가려 했다. 우상을 숭배하는 이방여인이 유다의 심장부, 곧 왕궁에 들어옴으로 유다는 그 존재의 성격을 상실하여 가고 있었으니 유다는 하나님의 소유요, 제사장의 나라요, 거룩한 백성의 성격을 거의 상실한 지경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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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합의 집 교도(敎導)를 좇아 - 이는 아달랴가 아합 종교의 전파를 위해 종교 지도자들을 아하시야에게 보냈음을 암시한다. 여기서 역대기 저자는 아합의 집과 연혼한 것이(18:1) 얼마나 악한가 하는 사실을 강조한다. 아하시야는 다윗의 통치 성격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는 다윗이 세운 모범, 곧 하나님을 의지하고 이스라엘을 철저히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는 나라로 규정지어 가려 했던 통치 성격을 본받지 않고 도리어 배교(背敎)의 자리로 떨어진 아합의 통치를 본받았다. 비록 그가 형식상으로는 철저히 언약의 나라의 왕으로 군림했다 할지라도 실질적으로는 이방의 왕이나 다름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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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합의 아들 요람과 함께 길르앗 라못으로 가서 - 요단 동편에 위치한 길르앗 라못은 레위 지파의 므라리 자손에게 분배된 성읍이다(21:38). 이 성읍은 남북 분열 이후 아람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B.C. 853년에 아합은 그곳을 되찾으려고 여호사밧과 연합 공격을 했지만 도리어 전사(戰死)하고 말았다(18:34). 한편, 몇년 후에 아합의 둘째 아들 요람이 그 성읍을 재탈환했지만 다시 하사엘의 공격으로 부상을 입고 퇴각했다. 이 시기에도 남왕국과 북왕국의 동맹은 여전히 유지되고 있어서 군사 행동을 양국이 함께 했음을 볼 수 있다.

 

 아람 왕 하사엘 - 이 사람은 벤하닷 왕 수하(手下)에 있던 장군이었으나 역모를 꾀하여 그 왕을 죽이고 스스로 왕이 되었다. 그가 왕이 된 과정과 그의 잔인함에 대한 선지자 엘리사의 예언에 관해서는 왕하 8:12,13을 참조하라.

 

 아람 사람들 -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하아람밈'인데 히브리 원문에는 이것의 단축형인 '하람밈'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것을 무시한 70인역에서는 '하람밈''궁수들'이라고 번역했다.

 

 요람 - 이 이름은 '여호람'의 단축형이다. 따라서 여호사밧의 아들 유다 왕 여호람과 아합의 아들 요람은 동명 이인(同名異人)인 셈인데 그 이름의 뜻은 '여호와는 존귀하시다'이다. 성경에서는 이 두 이름이 서로 바뀌어 나타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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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스르엘 - 이곳은 오늘날의 '제르인'(Zer'in)에 해당되며 므깃도와 벱세안(Beth-shean) 사이 에스드렐론(Esdraelon) 평지 동쪽 끝에 위치해 있다(Curtis). 이곳에도 북왕국의 왕족이 거처하고 있는 왕궁이 있었다.

 

 유다 왕 여호람의 아들 아사랴가 이스르엘에 내려가서 - 여기서 '아사랴''아하시야'를 잘못 표기한 것이다(Keil, Curtis). 유다 왕 아하시야가 이스라엘 왕 요람을 방문할 때 길르앗 라못(라마)에서 이스르엘로 내려갔는지, 아니면 예루살렘에서 이스르엘로 내려갔는지는 분명치 않다. 왕하 9:14,15에 따르면, 요람이 이스르엘로 치료하러간 이후에도 이스라엘 군대는 예후와 함께 여전히 라마에서 하사엘과 접전을 벌이고 있었다. 그러나 이때 아하시야가 계속 하사엘과 싸우다가 요람을 방문한 것인지 아니면 예루살렘으로 갔다가 방문한 것인지 본문의 문맥을 통해서는 확인할 수가 없다. 한편, '내려가서'(, 야라드)라는 단어가 예루살렘에서 이스르엘로 내려간 것을 가리킨다고 보는 학자가 있다(Curtis). 어쨌든 아하시야의 이 방문은 아합의 집과 관련있는 모든 왕족, 즉 유다와 이스라엘의 두 왕족이 예후의 손에 참형을 당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는 여호와를 배반한 자들을 벌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섭리였다고 할 수 있다(7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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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를 받았으니 - 이에 대한 히브리어는 '테부사트'라는 명사이다. 이말은 '파멸', '몰락'이라는 뜻이다. 아하시야의 패망은 하나님의 엄위로운 심판이었다. 반면에 열왕기 기자는 이 사건을 신학적 해석을 가하지 않고 단지 역사적 사실로 보고한다(왕하 9:27). 그러나 역대기 기자는 그 사건을 하나님께로 말미암은 것으로 언급함으로써 하나님의 심판임을 지적한다.

 

 임시의 아들 예후 - '임시'는 히브리어 원문에 의하면 '님시'이다. 왕하 9:2에는 예후를 '님시의 손자 여호사밧의 아들 예후'로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이 원문을 직역하면 '님시의 아들 여호사밧의 아들 예후'로 번역된다. 그러므로 예후는 적어도 님시의 손자임을 알 수 있다.

 

 여호와께서 기름을 부으시고 아합의 집을 멸하게 하신 자더라 - 여호와께서 '아합의 집'을 멸하시기 위해 어떻게 '예후'에게 기름을 부으셨는가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왕하 9:1-10을 참조하라. 그런데 역대기 저자는 이 사실을 본문과 같이 간략하게 기록하면서 아하시야도 아합의 집안 식구임을 암시하고 있다. 따라서 하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은 예후가 아하시야를 죽인 것은 당연한 것이다. 다음의 8,9절에서는 주로 아하시야와 그의 가족들에 대한 예후의 심판적 행위에 대하여 기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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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하시야의 형제의 아들들 - 학자들간에 해석상 논란이 많은 구절이다. '형제의 아들들'에 해당하는 '베네 아헤''형제의 아들들'(KJV, RSV, NASB, 한글개역), '조카'(JB, 공동변역), '친척의 아들들'(NIV), '친척'(NEB) 등으로 번역된다. 보수주의 학자들은 이 '아하시야의 형제의 아들들'과 그 병행 구절인 왕하10:13,14'아하시야의 형제들'을 일단 동일인으로 이해한다. 그러나 이 두 구절을 이해하는 과정에는 차이가 있다. 카일(Keil)은 열왕기하의 '형제'(, 아헤)를 아하시야의 조카와 사촌으로 이해한다. 아하시야의 실제 형제들은 침략자들에 의해 이미 살해되었기 때문에(1;21:17), '형제'라는 말은 조카와 사촌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열왕기하와 역대하의 기록을 조화시키려고 했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에도 문제가 있다. 그것은 그 조카와 사촌이 과연 아하시야 왕을 섬길 수 있는(8) 성년이었느냐 하는 문제가 제기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다른 학자들은 본절의 '형제'(, 아헤)NIV에서처럼 '친척'으로 이해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Payne,Williamson). 그리고 역대기 저자가 열왕기 저자와는 달리 '아하시야의 형제들' 대신에 '아하시야의 형제의 아들들'로 바꾼 것은 그가 열왕기하에는 없는 사실 곧 아하시야의 형제들이 죽었다는 점(1;21:17)을 더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언어의 오해를 없애고 정확히 제시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아하시야의 형제의 아들들'이란 아하시야의 조카와 사촌일 필요가 없다. 그들은 아하시야의 친척의 아들들, 곧 그 왕을 섬길 수 있는 성년이 된 친척의 아들들을 뜻하게 된다. 따라서 열왕기하의 기록도 이렇게 이해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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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왕기하에는 역대기하와는 달리 아하시야의 죽음이 '아하시야의 형제의 아들들'의 죽음보다 먼저 나온다(왕하 9:27;10:13,17). 이 차이는 역대기의 짧은 언급이 시간상의 배열보다 주제상의 배열을 취하고 있기 때문이다. , 역대기 기자는 아하시야의 형제의 아들들의 죽음을 먼저 언급하고, 다음으로 아하시야의 죽음과 그의 장례와 왕권의 약화를 차례로 언급하려는 목적 때문에 그 순서를 뒤바꾸었을 것이다(Keil,Chronicles, p.407).

 

 아하시야는 사마리아에 숨었더니...잡아다가 죽이고 - 이 언급은 열왕기하의 언급(9:27,28)과 모순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역대기 저자는 열왕기하에 빠진 기사를 더 첨가시켜 보충하였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이런 전제 하에 아하시야의 최후 행적을 추적한다면 다음과 같이 재구성할 수 있을 것이다. , 아하시야는 예후의 추격을 받고 사마리아로 대피하였으나 곧 예후의 부하들에게 발각, 체포되어 예후에게로 이송되어 오던 중, 이블르암 근처 구르 비탈에서 탈출을 시도하다가 큰 상처를 입고 므깃도로 도망하였으나 그곳에서 절명(絶命)하였다(Keil, Kings,pp.343-344, Payne).

 

 이에 아하시야의 집이 약하여 왕위를 지키지 못하게 되니라 - 이것은 아하시야의 뒤를 이을 마땅한 계승자가 없었음을 뜻한다. 그리고 다른 한편, 아하시야의 모친 아달랴가 정권을 완전히 장악하는 것을 막을 만한 힘이 아하시야의 집에 없었다는 것을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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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다 집의 왕의 씨를 진멸(殄滅)하였으나 - 여기서 '왕의 씨'라고 하면 왕위를 계승할 자격이 있는 아하시야의 모든 아들들과 친척들을 포함한다. 그러나 이 때에 아하시야의 친척들은 거의 없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전에 아라비아 사람들(21:16,17)과 예후(본장)에 의해서 모두 살해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22세에 왕위에 오른 아하시야에게서 난 자식들은 모두 대단히 어렸을 것이다. 한편 아달랴는 그녀의 친정 아합의 집이 이미 멸망한 상태에서 정권을 잡지 않으면 자신이 죽임을 당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자신의 손자 손녀까지도 모두 살해하였을 것이다. 만일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유다 백성들은 어린 왕자 하나를 왕위에 옹위(擁衛)하여 아달랴를 몰아내고 말았을 것이다. 그러나 구사일생(九死一生)으로 살아난 요아스가 7살 되던 해, 즉 그로부터 7년 후 제사장 여호야다에 의해서 유다 왕이 되었다. 이것은 다윗의 집과 맺으신 언약(21:7;삼하 7:14-16)에 신실함을 보이신 하나님의 섭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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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왕의 딸 여호사브앗 - 여호사브앗은 여호람의 딸이며 아하시야의 누이이다. 그러나 아달랴가 아닌 다른 아내에게서 난 딸일 것이다. 그녀는 아하시야 집의 멸망을 막기 위해 죽음을 각오하고 왕궁에서 요아스를 훔쳐내어 유모와 함께 성전에 있는 침실에 숨겼다.

 

 제사장 여호야다의 아내더라 - 제사장 여호야다가 대상 6장의 족보 가운데도 나타나지 않은 것으로 보아 이전까지는 그렇게 세력 있는 제사장은 아니었다고 판단된다. 그러나 여호사브앗(열왕기에는 '여호세바')으로 인하여 여호야다는 후에 세력을 얻게 되었고 아달랴를 몰아내고 왕위를 복원하는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맡게 됨으로써 새로운 세력으로 역사의 전면(前面)에 등장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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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님의 전에 육 년을 숨어 있는 동안에 - 요아스가 왕위에 오를 때 나이가 7세였다. 따라서 요아스가 태어난 지 몇 개월이 안되어 아달랴의 살륙 사건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를 통하여 우리는 모세 시대의 유아 살해 사건(1:15-22)과 예수 시대의 유아 살해 사건(2:13-18)을 연상하게 된다. 이처럼 다윗의 씨에 대한 무서운 사단의 공격 속에서도 그 씨를 보존하시는 하나님의 은총은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신실한 언약의 이행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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