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빌립보서

빌립보서2장,그리스도를 본받아

호리홀리 2015. 12. 4. 12:49

1절은 '에이'( '만일')로 시작하는 네 개의 조건문을 통해서 그리스도인들이 교회안에서 지켜야 할 덕목을 나타낸다. 이런 덕목은 신자 개인의 윤리적 고상함에 근거를 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살아갈 때에만얻게 되는 것이다(Lenski). (1) 무슨 권면이나 - 바울이 교회에 대해 성령안에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권면한 것처럼(4:2;12:1;15:30; 16:17;고전 1:10;4:16;16:15;4:1;살전 2:11,12;5:14) 그리스도인들도 서로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여 권면해야 한다. (2) 사랑에 무슨 위로나 -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신 것처럼, 그리고 바울이 빌립보 교인들을 사랑한 것처럼, 그리스도인들도 서로가 사랑으로 연약한 가운데 있는 형제를 위로해야 한다. (3) 성령의 무슨 교제나 - '성령'에 해당하는 헬라어 '프뉴마토스'에 대해서 혹자는 관사의 부재(不在)를 이유로 '인간의 영' 혹은 '마음'이라고 해석하여 본절 '상호간의 조화' 혹은 '영적 교제'를 의미한다고 주장한다(Bruce,Hendriksen). 그러나 관사 없이도 성령을 의미하는 경우가 많으며(7:6;고전 2:4;3:3;5:16,18,25), 대개의 경우 '교제'는 영적 교제를 시사하기 때문에 '프뉴마토스'가 불필요하다. 따라서 본절의 '프뉴마토스''성령'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본절은 그리스도인들이 성령에 의해서 교회의 일원이 되었으므로 성령의 역사에 순종하여 교제를나누어야 함을 시사한다(Hawthorne). (4) 긍휼이나 자비가 있거든 - '긍휼'은 사랑에서 비롯된 '동정'이나 '애정'을 가리키며, '자비''긍휼'에서 비롯된 의부적 표현이다(Martin). 그리스도인들은 연약한 자나 어려움에 빠진 자들에게 긍휼과 자비를 베풀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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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음을 같이 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 마음을 품어 - '마음을 같이하여'의 헬라어 '토 아우토 프로네테'는 문자적으로'생각을 같이 하여'라는 의미이나 이것은 단순히 지적인 문제만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보다 넓은 의미의 '감정', '태도', '의지'를 같이함을 나타낸다(Meyer, Hawthorne). 바울은 '마음을 같이 하여'와 거의 동일한 의미의 '뜻을 합하며''한 마음을 품어'를 반복하여 빌립보 교인들 사이의 일치를 권면한다. 바울이 빌립보 교인들의 일치를 강조한 이유는 이교도의 핍박 하에서 믿음을 지키기 위해 일치가 필요했을 뿐만 아니라(Hendriksen) 빌립보 교회내의 분쟁과 불화를 종식시키기 위함이었다(K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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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 바울은 본절에서 '일치'를 위한 구체적 방법을 제시한다. 소극적 측면에서 '일치'를 위해서는 '다툼과 허영'을 버려야 한다. '허영'의 헬라어 '케노독시안''케노스'(, '내용 없는')'독사'(, '영광')의 합성어로서 '내용없는 영광이나 자랑'을 의미한다. 자기 자신을 높이고 헛된 영광을 추구할 때 다툼이 일어나게 되어서 교회의 '불일치'를 초래하게 된다. 한편 적극적 측면에서 일치를 위해서는 '겸손'해야 한다. '겸손'은 하나님 앞에서의 겸손으로, 이 겸손을 통해서 사람 앞에서 '타인을 자신보다 낫게 여기는' 겸손을 이룰 수 있다(벧전 5:5,6; Martin). 당시에 '겸손'은 미덕이 아니라 노예 근성에서 비롯된 '굴욕''비굴함'을 의미하였다(Lenski, Hawthorne).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이땅에 오셔서 '겸손의 본'을 보여주심으로(8;13:1-20) '겸손'은 기독교 최대의 미덕이 되었다. 이런 '겸손'을 통해서 서로 섬김으로 '일치'를 이루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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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각각 자기 일을 돌아볼 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아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케 하라 - '돌아볼'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스코푼테스''목표 혹은 목적을 바라본다'는 의미이다. 여기서 '목표나 목적의 내용'에 대해서는 두 가지 견해가 있다. (1) 혹자는 이것을 '이익'이나 '생활의 어려움' 등으로 해석하여 '자기의 이익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의 이익도 함께 생각하라'는 것으로 이해한다(Moffatt). (2)혹자는 이것을 '동료 그리스도인의 은사나 자질' 등으로 해석하여 '자기의 은사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은사도 잘 관찰하여 그것을 본받아라'는 의미로 해석한다(Lightfoot). 두 가지 견해가 나름대로 타당성을 지닌다. 그리스도인은 교회내에서 자신의 이익과 은사를 살펴야 할 뿐만 아니라 타인의 이익과 은사를 잘 살펴서 서로를 포용하며 연합으로 '일치'를 이루게 된다(Kent, Martin, Mull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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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 본절은 앞에서 빌립보 교회의 일치를 위해 '겸손'을 권면한 것에 대한 예증으로 '그리스도'를 제시하는 전환절이다. 그리스도는 궁극적인 모델로서 이 땅에 오셔서 '겸손'을 보여주셨다. 그래서 바울은 빌립보인들에게 모델이신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으라 권면한다.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낮추시고, 자기를 부정하심으로 십자가를 지기까지 복종하신 것처럼 그리스도인들도 서로가 겸손하고 자신을 부정할 때 다툼이나 허영은 사라지고 '교회의 일치'를 낳게 될 것이다(Martin, Kent, Hawthor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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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 '본체'에 해당하는 헬라어 '모르페'에 대해 두 가지 견해가 있다. (1) 혹자는 구약에서 하나님의 외적인 형체와 영광이 동일시되며(16:10;24:15,16;9:6,23;12:8;14:10) 선재하신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과 함께 영광을 나누셨기 때문에(17:5;고후 4:4;1:15), '본체''영광'으로해석한다(Behm, Fitzmyer). 그러나 이 해석은 7절의 '종의 형체'(, 모르펜 둘루)에서 나타나는 '고난 당함'을 설명할 수 없다(Hendriksen, Hawthorne). (2) 혹자는 이것을 하나님의 '본질적인 속성과 성품'으로 이해한다(Muller,Lightfoot, Kent, Hawthorne, Vincent). 두 가지 견해 중 후자가 타당하다. 왜냐하면 본문은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본체 안에서 존제하신다'는 의미로 하나님과 분리된 상태가 아니라 하나님께 속한 하나님의 본질을 소유한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 본절에 대한 해석은 두 가지이다. (1) 혹자는 '하나님과 동등됨'이 그리스도께서 장차 취하실 영광이지만 고난을 통과하기까지 유보하셨다고 해석한다(Martin, Stauffer). (2) 혹자는 본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과 동등된 분이나 시간과 공간에 제한받는 인간으로 오시기 위해 자신의 영광을 포기하셨다고 해석한다(Muller, Hawthorne, Lightfoot). 두 가지 견해 중 후자가 타당하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에도 이미 그의 영광은 하나님과 동등하셨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는 본래 하나님의 본체로서 하나님과 동등하시다. 그러나 타락한 인간의 구원을 위해서 동등됨을 포기하시고 종의 형체를 취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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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기를 비어 - '자기를'에 해당하는 헬라어 '헤아우톤'은 강조적 용법으로 사용되었다. 그리고 '비어'의 헬라어 '에케노센'에 대해서는 다양한 견해가 있다. (1) 그리스도 자신의 영광을 포기하였다(Plummer). (2) 독립적인 권위 행사를 포기하였다(Hendriksen). (3) 하나님의 대권적(大權的) 권능을 포기하였다(Lightfoot). (4) 존엄과 주권의 표지(標識)를 포기하였다(Calvin). (5) 하나님의 속성 즉 무소 부재, 전지 전능 등을 포기하였다(Forsyth, Mackintosh, Martin).위의 견해들 중 세번째가 타당한 듯하다(Kent).

 

 종의 형체를 가져 - 본문은 그리스도께서 종의 외적인 모습을 취하셨거나 종으로 가장하셨다는 의미가 아니라 종의 본질적인 속성을 취하셔서 종이 되셨음을 의미한다(Hawthorne). ''에 대해서 혹자는 사 52:13-53:12에 나타난 '야웨의 종'의 개념을 그리스도에게 적용시킬 수 있다고 주장한다(Martin, J. Jeremias, Lohmeyer). 그러나 본절의 ''11절에 나타난 고양된 그리스도이신 ''와 대조적인 표현으로 그리스도의 낮아지심을 나타낸다(Renqstorf, Hawthorne).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인류를 위하여 자신의 권리나 특권을 포기하여 죄 없는 인간의 모습으로 오셨음을 시사한다(10:45;22:27).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 '같이' 의 헬라어 '호모이오마티''유사함'(similarity)이나 '동일함'(identity)을 강조하는 것으로 그리스도께서 죄의 본성을 제외한 모든 면에서 다른 모든 인간들과 같이 되셨음을 시사한다(Kent, Lincol-n). 그리스도는 참인간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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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 그리스도의 겸손은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낮아지심에서 잘 드러난다. 영화로우신 분께서 낮고 천한 인간의 몸을 입으신 것은 지극한 겸손의 표현이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겸손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자발적인 순종 가운데 십자가를 지시는데까지 나아간다. 그분은 본래 하나님과 동등되심에도 불구하고 동등됨을 포기하셔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 죽기까지 순종하셨다(5:8). 이런 점에서 십자가는 그리스도의 겸손에 대한 분명한 증거가 된다(Kent, Hawthor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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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 '지극히 높여'에 해당하는 헬라어 '휘페립소센''휘페르'(, '위로')'휩소스'(,'높은 곳')의 합성어로 '가장 높은 곳으로 올려지다'라는 의미이다(Kent). 이것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겸손과 수치스러운 죽음의 자리에서 다시 부활과 승귀(昇貴)를 통해 영광에 이르도록 높이셨음을 시사한다(Robertson, Hawthorne).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 바울은 이 이름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가리키는지 언급하지 않는다. '이름'에 대해서 혹자는 '예수'라고 주장하며(De Wette), 혹자는 '예수 그리스도'라고 주장한다(Vincent). 그러나 문맥상 '이름'11절에 나오는 ''를 가리킨다(Muller, Weiss, Martin, Kent).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전우주를 다스리시는 주권을 소유하신 ''이심을 시사한다(Hawthor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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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높이시고 ''라는 이름을 주신 목적은 모든 피조물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 앞에 복종케 하여 주로 섬기게 하기 위함이다. 여기서 '예수의 이름'은 앞절에서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에게 주신 '뛰어난 이름'과 동일한 것으로 ''를 가리킨다(Lightfoot, Michael, Moule, Plummer). 그리스도께서 ''()이시기 때문에 모든 만물이 그에게 복종해야 한다. 한편 바울은 그리스도에게 복종해야 할 대상에 대해 세 가지로 언급하고 있다. '하늘에 있는 자들'(, 에푸라니온), '땅에 있는 자들'(, 에피게이온) '땅 아래 있는 자들'(, 카타크도니온)이다. 세 대상의 헬라어는 남성과 중성 둘 다로 해석될 수 있다. 그래서 혹자는 그것을 남성으로 이해해서 이성적(理性的)이며 생물적(生物的) 존재인 천사와 같은 초자연적 존재와 인간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Kent, Muller, Martin). 이들은 '에푸라니온'이 천사들과 하늘에 있는 성도들, '에피게이온'이 땅에 살아있는 자들, '카타크도니온'이 사단의 무리와 지옥에 있는 자들을 가리킨다고 해석한다. 혹자는 중성으로 해석해서 모든 만물이 그리스도를주로 경배하며 복종해야 함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Lightfoot, Moule, Hawthorne). 이러한 두 가지 견해는 나름대로의 타당성을 지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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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 '시인하여'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사본에 따라 다르게 사용된다. 어떤 사본에서는 제1부정과거 가정법인 '엑소몰로게세타이'를 사용하여 '시인하였을 것이다'라는 의미로 기술한다(*,B, P )다른 사본에서는 미래 직설법인 '엑소몰로게세타이'를 사용하여 '시인할 것이다'라는 미래적 의미로 기술한다(A, C, D, Textus Receptus). 두 가지 경우 중 문맥상 전자가 더타당하다. 왜냐하면 10절의 '꿇게 하시고'의 헬라어 '캄프세''캄프토'(,'굽히다')의 제1부정과거 가정법이기 때문이다(Kent, Hawthorne).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높이셔서 ''라는 칭호를 주심으로 모든 만물로 하여금 그에게 복종하게 하셨을 뿐만 아니라 ''라고 시인하게 하셨다. ''에 대한 시인은 하나님 뜻의 성취를 의미하는 것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다(K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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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 구원을 이루라 - '사랑하는 자들아'는 바울이 빌립보 교인들을 목양하는 자로서 친근감있게 부르는 호칭이다. 친근한 호칭과 더불어 바울은 본절에서 '구원을 이루라'고 권면한다. '구원을 이루라'에 대해서는 두 가지 견해가 있다. (1) 혹자는 '그리스도인 개개인'의 차원에서 본절을 이해한다(Muller, Kent). 본절의 권면은 칭의 이후에 오는 성화의 과정에서 신인협동(神人協同)의 차원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미 구원의 확증은 얻었지만 매일 매일의 삶 속에서 구원의 증거들을 실증하며 살아가야 함을 시사한다고 한다. (2) 혹자는 '그리스도인의 연합적인 차원'에서 본절을 이해한다(Hawthorne, Martin, Michael, Gnilka, Collan-ge). 바울은 4절에서 이미 개인적인 삶만 집착하지 말고 다른 사람을 돌보아 주라고 권면하고 있으며 본절 이하에서 개인적 구원의 문제를 생각한 종말론적인 분위기가 전혀 나타나지 않기에 교회 전체의 집합적, 공동체적 권면으로 볼 수 있다고 한(Hawtho-rne). 이러한 두 가지 견해는 나름대로 타당성을 지닌다(Lenski). 왜냐하면 '구원'에있어서 '개인''교회'는 분리할 수 없는 불가 분리의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은 구원의 완성을 향해 계속해서 성숙해가야 할 뿐만 아니라 다른 그리스도인들과 협력하여 나아가야 한다(4:1-6).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 구원을 이루어가는 방법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전적으로 의지하여 하나님의 계획과 명령에 늘 순종하는 것이다(Martin, Kent).이미 구원을 얻었으나 아직 아닌 "이미와 아직"속에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어 나아가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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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 '행하시는'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네르곤'은 현재분사로 하나님께서 진정한 힘을 부여하시며 우리의 결심과 소원까지도 인도하시는 분임을 시사한다(Hendriksen). 그렇다고 해서 본절이 인간의 자유 의지나 책임적 선택을 무시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은 일의 계획과 성취에 있어서 그 모든 것을 인도하시되 강제적인 방법이나 수단으로 하시지 않는다(Kent). 이런 하나님의 주권적 개입은 그리스도인의 인격을 조금도 손상시키지 않는다. 이것은 비록 온전히 이해할 수없을 만큼의 신비일지 모르지만 바울이나 성경이 명백히 증거하는 교훈이다(Hawthorne, Lensk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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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라 - '원망''투덜대는 불평'을 의미하며 '시비''악의(惡意) 있는 논쟁'을 의미한다. 결국 사소한 일을 가지고 '악의있는 마음으로 불평하는 태도'를 가리킨다. 후자는 바울이 이러한 표현을 사용한 것은 광야에서의 이스라엘 백성(15-17;14-17)들을 염두에 두고 서로 유비(類比)시켜 기록한 것으로 추측한다(Kent). 그러나 이러한 추측은 타당하지 않다. 왜냐하면 본문에서 그와같은 추정을 내릴 만한 근거가 전혀없으며 광야에서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의 권위를 빙자하여 하나님께 도전한 반면에 빌립보 교회의 문제는 순수히 교회 내부의 불화(2)이기 때문이다(Hawthorne, Martin). 바울은 교회내에서 불평과 싸움이 없이모든 일을 행하기를 권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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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는 너희가 흠이 없고 순전하여...빛들로 나타내며 - '흠이 없고'는 타인에게 책망받을 만한 일이 없는 것을 의미하며 '순전하여'는 이질적인 것이나 온전치 못한 것이 전혀 섞이지 않는 상태를 가리킨다.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이 타인에게 책망받을 만한 일이 없는 하나님의 거룩하고 온전한 성품을 닮아서 세상에 빛을 나타내기를 바라고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의 빛 으로서 온 세상을 비치도록 부르심을 받았다(5:14;5:8).

 

 어그러지고 거스리는 세대 가운데 - 본문은 그리스도인들이 빛을 드러내야 할 '세상'을 의미한다. 빌립보 교인들이 현재 살고있는 이 '세상'은 하나님을 거역하고 악과 연합한 타락한 세대이다(6:12). 이러한 세상을 살아가는 빌립보 교인들의 사명은 흠이 없는 자로서 세상에 빛을 드러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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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명의 말씀을 밝혀 - '밝혀'의 헬라어 '에페콘테스'는 두가지 의미를 갖는다. 하나는 '단단히 붙들다'이며, 다른 하나는 '제시하다'이다. '에페콘테스'의 의미에 따라서 본절에 대한 해석도 두 가지로 나누어진다. (1) 혹자는 본절을 앞절의 '어그러지고 거스리는 세대'와 대조하여 '생명의 말씀을 단단히 붙들다'란 의미로 해석한다(Lightfoot, Moffatt) (2) 혹자는 '제시하다'는 의미를 받아들여 세상에 '생명의 말씀을 드러내는 것'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Muller, Lenski, hawth-orne). 두 가지 견해는 서로 다른 견해가 아니다. 전자의 견해는 후자를 뒷받침해 준다. 그리스도인들이 생명의 말씀 즉 복음을 굳게 붙들지 않으면 그것을 세상에 밝히 드러낼 수 없기 때문이다(Kent).

 

 나의 달음질도 헛되지 아니하고 수고도 헛되지 아니함으로 그리스도의 날에 나로 자랑할 것이 있게 하려 함이라 - 빌립보 교인들이 생명의 말씀에 사로잡혀 말씀을 세상에 밝히 드러낼 때 바울이 빌립보 교인들을 위해 해산의 수고를 하고 고난가운데 복음을 전파하여 열매를 맺은 것이 헛되지 않게 되며 '그리스도의 날' 즉 재림 때에 '자랑'이 된다. 그리스도의 재림의 날에 그리스도인들 이 땅에서 애써 수고한 대가를 보상받을 것이다(K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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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일 너희 믿음의 제물과 봉사 위에 내가 나를 관제로 드릴지라도 나는 기뻐하고 너희 무리와 함께 기뻐하리니 - '관제'는 고대 제사의 관습에서 포도주를 제물에 붓는 행위를 가리킨다. 바울은 이런 제사 행위를 연상시켜 자신의 순교를 암시한다. '관제로 드릴지라도'의 헬라어 '스펜도마이'에 대해 두 가지 견해가있다. (1) 혹자는 현재 수동태로 보아서 가까운 미래의 의미를 포함하는 형태라고 해석하여 현재나 가까운 장래에 바울 자신이 순교당할 것을 예견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Hendriksen, Martin). (2) 혹자는 현재 중간태로 보아서 바울이 자원하는 마음으로 순교의 제단에 드리려는 심정을 고백한 것이라고 주장한다(Lenski). 두가지 견해 중전자가 타당하다. 신약성경에서 '스펜도마이'는 두 번 나타나는데(17;딤후 4:6) 모두가 수동태로 사용되고 있다(Kent). 따라서 본문은 바울 자신이 가까운 장래에 순교당할 것을 예견(豫見)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한편 '믿음의 제물과 봉사'의 헬라어 '테뒤시아 카이 레이투 르기아 테스 피스테오스'에서 '제물과 봉사'는 하나의 관사 ''로 수식을 받고 있다. 이것은 '제물과 봉사''희생적 봉사'를 의미하는 중언법적 표현임을 시사한다(Kent).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이 그리스도를 위해서 행하는 모든 희생적인 봉사위에 자신을 관제로 즉 순교로써 드린다 할지라도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기뻐한다. 이러한 사실은 바울이 그리스도를 위해서 순교를 두려워하지 않음과 교회를 위한 바울의 헌신적인 열정을 시사한다(Mull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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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와 같이 너희도 기뻐하고 나와 함께 기뻐하라 - 본절은 바울 자신의 고난과 순교가 빌립보 교인에게 슬픔과 좌절보다는 기쁨과 소망이 되도록 하라는 권면이다. 앞절과 본절에 '함께 기뻐하라'가 계속 나오므로 혹자는 17절의 '함께 기뻐하니''축하하다'로 해석한다(Meyer, Lightfoot). 이미 빌립보 교인들이 기뻐할 내용을 알고있었기 때문에 본절에서 두번씩이나 기뻐하라고 권면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문맥상 어울리지 않는다. 왜냐하면 관제로 순교를 당할 바울에게 '축하를 보낸다'는 것은 문맥에 맞지 않는 어색한 표현이기 때문이다(Kent, Mull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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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디모데를 속히 너희에게 보내기를 주 안에서 바람은 너희 사정을 앎으로 안위를 받으려 함이니 - 바울은 디모데를 빌립보 교회에 보내기를 희망한다. 디모데를 보내려는 목적은 '안위를 받기 위함'이다. '안위를 받으려 함이니'에 해당하는 헬라어 '히나 카고 유프쉬코'에서 '카고'(, '나도 또한')'에고'(, '')와 강조형 용법의 '카이'(, '또한')가 합성된 것으로 결국 바울이 디모데를 보내려 한 목적이 두 가지였음을 나타낸다. 그 두가지 목적은 (1) 빌립보 교인에게 바울의 근황(近況)을 전하여서 빌립보 교인들을 위로하며(2) 디모데가 바울에게 돌아왔을 때 빌립보 교인들에 대한 소식을 들어서 바울 자신이 위로를 받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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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는 뜻을 같이 하여 너희 사정을 진실히 생각할 자가 이밖에 내게 없음이라 - '뜻을 같이 하여'에 해당하는 헬라어 '이소프쉬콘''이소스'(, '동등한')'프쉬케'(, '')의 합성어이다. '이소프쉬콘'은 두 가지의미를 지닌다. (1) 55:13'나의 가까운 친우로다'를 칠십인역으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이 단어가 사용된다. 그 뜻은 '친밀하고 깊은 관심을 가지고 돌보아 주다'를 의미한다(RSV). (2) 문자적인 해석으로 '같은 심령을 가지다'를 의미한다. 본절의 '이소프쉬콘'은 두 가지 해석이 다 가능하다. 전자의 의미로 해석하면 바울 주위에 디모데를 제외하면 친밀하게 돌보는 자가 없음을 뜻하고 후자의 의미로 해석하면 바울의 생각과 뜻을 같이 하는자는 디모데 뿐임을 의미한다(Lenski). 한편 '너희 사정을 진실히 생각할'은 디모데가 빌립보 교회의 사정을 잘 알고 있어서 빌립보 교회를 잘 목양할 수 있음을 시사한다(K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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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희가 다 자기 일을 구하고 그리스도 예수의 일을 구하지 아니하되 - 본절에서 바울이 책망하고 있는 '자기 일을 구하는 자'가 구체적 으로 누구인지 분명치 않다. 바울은 빌립보 교회에 사람을 파견하고자 하는 계획을 세우고 주변 사람들에게 언급하였으나 주변 사람들은 자신들의 사적인 문제와 유익만을 추구하고 그리스도 예수의 일을 위해서 희생할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을 보고 책망을 하고 있다(Muller, K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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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은 디모데를 빌립보 교회에 파견키로 한 후 빌립보 교인들에게 세 가지 이유를 들어 디모데를 천거한다.

 디모데의 연단을 너희가 아나니 - 디모데는 바울이 제1차 전도 여행시 빌립보 지방에서 복음을 전할 때 바울을 만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바울의 믿음의 아들이 되었으며(16:3), 바울의 제2차 전도 여행시 에베소의 소동으로 바울이 휘말려 있을 때 바울을 대신하여 빌립보 지역을 순회(巡廻)하며 심방하였고(19:22) 바울의 제3차 전도 여행시 핍박을 피해온 바울을 영접하고 그들과 함께 복음 전도에 동참하였다(20:4). 빌립보 교인들은 이러한 디모데를 잘 알고 있었다.

 

 자식이 아비에게 함같이 - 디모데는 주 안에서 바울의 신실한 아들이었다(고전4:17;딤전 1:2;딤후 1:2). 이것은 바울과 디모데 사이가 매우 친밀한 관계임을 시사한다(Hawthorne).

 

 나와 함께 복음을 위하여 수고하였느니라 - 디모데는 바울의 2차 전도 여행 때부터 바울과 함께 그리스도를 위해 헌신하며 복음 선포를 하였다(Kent, Hawthor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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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일이 어떻게 될 것을 보아서 곧 이사람을 보내기를 바라고 - '내 일이 어떻게 될 것을 보아서'는 바울이 곧 재판을 받게 되리라고 예측하고 있음을 암시한다. 바울은 재판의 결과가 어떤 것인지를 안 후에 디모데를 빌립보에 보내겠다고 밝히고 있다(Martin, Kent). 혹자는 이 해석에 대해 반대한다(Hawthorne). 왜냐하면 성도들을 그토록 사랑하는 바울이 자기의 신상문제로 인해 교회의 화급한 문제를 제쳐두고 디모데 파송을 연기할 수 있겠는가 하는 반문이 생기기 때문이다. 그래서 비록 연기된 것은 사실이지만 그 내용이 언급되지 않기에 우리가 알수는 없으나 재판의 문제 때문에 연기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Hawthorne).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타당하지 못하다. 비록 판결의 내용이 지극히 불확실한 것은 사실이지만 바울이나 빌립보 교인 모두 결과에 관심이 집중되어 있으며, '보아서'의 헬라어 '아피도''다른 모든 것을 제쳐두고 이 한 사실에 집중한다'는 의미로 바울의 관심이 재판 결과에 있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 재판 결과를 알리기 위해 디모데를 잠시 지체(遲滯)시킨다고 보는 것이 타당한 해석이다(Lensk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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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도 속히 가기를 주 안에서 확신하노라 - 바울이 어떻게 풀려날 것을 확신했는지 분명치 않으나 그는 석방될 것을 확신하고 있다(1:25). 석방에 대한 그의 확신은 '주안에서'이루어졌다. '주 안에서'라는 것은 바울 자신의 미래에 대한 계획이 주의 계획과 바램에 따라 결정됨을 시사한다(고전 4:19). 본문은 바울 자신의 미래 문제가 자신이 해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주께 달려 있음을 인정하는 것으로 그리스도께 철저히 의존하고 순종하는 삶 속에서 나온 고백이다(Hawthor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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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나 에바브로디도를 너희에게 보내는 것이 필요한 줄로 생각하노니 - '에바브로디도'의 축약형은 '에바브라'이다. 이 사람은 신약성경의 다른 곳에 언급된 '에바브라'와는 다른 인물로(1:7;4:12;1:23), 골로새서에서 언급된 '에바브라'는 골로새 출신이고 본절의 '에바브로디도'는 빌립보 출신이다(Muller). '에바브로디도'는 본서를 빌립보 교회에 전달한 자로서(Kent) 바울은 이를 다섯 가지 칭호로 부르고 있다.

 

 나의 형제요 - 에바브로디도는 바울과 함께 신앙을 공유하며 하나님 가족의 일원으로서 깊은 애정을 나누는 자이다.

 

 함께 수고하고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쉬네르곤'으로서 '동역자'를 의미한다. '동역자'는 복음증거를 위해 함께 수고하는 자를 가리킨다. 이것은 에바브로디도가 바울과 함께 빌립보 교회를 세운 것을 암시하는 듯하다(Martin,Ha-wthorne).

 

 함께 군사된 자요 - 이는 하나님의 복음을 위해 대적자들과 계속해서 싸우는 일꾼을 가리키는 것으로 그가 계속해서 고난당하였음을 암시한다(1:2).

 

 너희 사자로 - '사자'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포스톨론'은 문자적으로 '사도'를 가리키는 것으로 '에바브로디도''보냄을 받은 자'임을 시사한다. 에바브로디도는 사역을 감당하기 위해서 '권위'를 부여받고 보냄을 받은 자이다(H-awthorne).

 

 나의 쓸 것을 돕는 자 - '돕는 자'에 해당하는 헬라어 '레이투르곤'은 문자적으로 '봉사자'란 의미로 에바브로디도는 빌립보 교인들이 바울의 필요를 도와 주기 위해서 보낸 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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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절은 바울이 에바브로디도를 빌립보 교회에 보내려고 하는 두 가지 이유이다(Ha-wthorne, Muller).

 그가 너희 무리를 간절히 사모하고 - '간절히 사모하고'의 헬라어 '에피포돈'은 강렬한 열망을 의미한다. '에피포톤'은 바울이 빌립보 교인들을 사랑하는 마음과(1:8) 갓난 아이가 젖을 간절히 원하는것을 나타낼 때 사용되었다(벧전2:2). 이것은 에바브로디도가 빌립보 교인들을 얼마나 간절히 사랑하고 보고 싶어했는지를 암시한다. 바울은 이런 에바브로디도의 열망 때문에 빌립보 교회로 보내려고 하였다.

 

 자기 병든 것을 너희가 들은 줄을 알고 심히 근심한지라 - '심히 근심한지라'의 헬라어 '아데모논'(*)'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겪는 심한 고통'을의미하는 것으로 에바브로디도가 자신의 건강 문제로 빌립보 교회가 염려함을 듣고 자신의 건강 문제 보다는 교회에 대해 더 크게 염려함을 시사한다. 한편 에바브로디도가 걸린 병에 대해서 혹자는 향수병과 과로라고 추측한다(Hawthorne). 또한 혹자는 바울의 시중에 따른 과로는 인정하나 향수병은 거부한다(Lenski). 왜냐하면 문맥상 바울의 석방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에바브로디도가 고향으로 돌아갈 날을 기대하면서 향수병에 빠진다는 것은 타당치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견해는 단순히 추측에 불과하며 분명히 알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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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가 병들어 죽게 되었으나 하나님이 저를 긍휼히 여기셨고 저 뿐 아니라 또 나를 긍휼히 여기사 - 바울은 에바브로디도의 병세가 심각하여서 거의 죽게 될 뻔했으나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기적적으로 살아났다고 진술한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이상한 점은 에바브로디도의 병세가 심각했고 치유 과정이 큰 사건임에도 불구하고 바울이 병세나 치유 과정에 대해서 한마디 언급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사실은 바울의 관심이 병의 원인이나 치료 과정 보다는 병을 낫게 하신 하나님의 간섭 즉 '하나님이 그를 긍휼히 여기셨다'는 것에 있음을 시사한다. 한편 바울은 에바브로디도에 대한 하나님의 긍휼이 자신에게도 미쳤다고 진술한다. 이것은 바울이 주의 사역에 헌신한 종들을 붙들어 주시는 하나님의 은총을 에바브로디도의 치유로 말미암아 깊이 깨달았음을 의미한다(Hawthorne).

 

 내 근심 위에 근심을 면하게 하셨느니라 - 에바브로디도의 회복은 단순히 하나님의 일꾼을 하나님께서 보호하신다는 확신 이상을 바울에게 가져다 주었다. 바울은 에바브로디도의 병세 악화가 빌립보 교인들을 엄청난 좌절과 실의에 빠지게 될 것을 인식하였다(Kent). 바울의 근심은 단순히 에바브로디도에 대한 것뿐만 아니라 에바브로디도의 병세 악화나 사망이 초래할 빌립보 교인들의 충격에 대한 것이었다. 그러기에 에바브로디도의 회복은 바울이 안고 있던 이중(二重)의 근심을 해결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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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더욱 급히 저를 보낸 것은 - '보낸'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펨프사'는 서간체 부정과거로 에바브로디도가 바울의 편지와 함께 이미 떠났음을 보여준다. 한편 '더욱 급히'의 헬라어 '스푸다이오테로스''보다 급하게'를 의미하는 비교급으로 중병에서 회복된 지 얼마되지도 않은 에바브로디도를 급하게 보냈음을 시사한다. 바울이 급하게 에바브로디도를 보낸 이유는 빌립보 교인들이 에바브로디도를 빨리 만나봄으로 근심과 좌절에서 벗어나서 다시 활기를 찾고 바울 자신도 근심을 덜기 위함이다(Hawthorne, Hendriksen, K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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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 안에서 모든 기쁨으로 저를 영접하고 또 이와 같은 자들을 존귀히 여기라 - 여기서 '주 안에서'(, 엔 퀴리오)가 무엇을 수식하느냐에 따라 본절의의미가 달라진다. (1) 만약 동사 '영접하고'를 수식한다면 본절 '주께서 에바브로디도를 영접하시듯이 모든 기쁨으로 그를 영접하라'는 권면이 된다(15:7). (2)만약 '모든 기쁨'을 수식한다면 본절 '주안에서 그리스도인들이 누리고 있는 특성 중의 하나인 순수한 기쁨으로 영접하라'는 권면이 된다(16:2). 비록 강조하는 바에 따라 약간의 차이가 있을지라도 전체 문맥상으로는 큰 차이가 없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이면 누구나 주 안에서 한 형제된 동료 그리스도인을 기쁜 마음으로 존귀히 여기며 섬겨야 하기 때문이다(Hawthorne, Mart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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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립보 교인들이 에바브로디도를 영접하고 존귀히 여겨야 하는 이유는 두 가지이다.

 저가 그리스도의 일을 위하여 죽기에 이르러도 자기 목숨을 돌아보지 아니한 것은- 에바브로디도는 로마에 갇힌 바울을 돕기 위해 처형당할 것을 두려워하지도 않고 심지어 자신이 병들어 죽게 될 지경에 이르기까지 헌신하였다. '돌아보지 아니한'의 헬라어 '파라볼류사메노스'는 본래 '도박사가 돈을 따기 위해 모험'을 하거나 '탐험가가 값진 것을 얻기 위해 생명을 거는 위험'을 의미한다. 바울은 에바브로디도가 자신의 조력자로 봉사하는 일이 이처럼 헌신적이었음을 빌립보 교회에게 전해주면서 에바브로디도를 영접하고 존귀히 대하라고 권면한다(Ha-whorne, Hendriksen, Martin).

 

 나를 섬기는 너희의 일에 부족함을 채우려 함이니라 - ''의 헬라어는 '레이투르기아스'(, '봉사' )로서 복음전파 사역을 의미한다. 빌립보 교인들은 바울과 함께 동참해서 복음 선포 사역을 감당해야 했으나, 할 수 없음으로 대신 에바브로디도를 보냈던 것이다(Martin, Kent). 그렇기 때문에 빌립보 교인들은 에바브로디도를 영접하고 존귀히 여겨야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