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요한계시록강해

9과. 위대한 승리자들 계시록 7장: 1절~17절

호리홀리 2014. 12. 16. 17:02

  9과. 위대한 승리자들


  성경본문: 계시록 7장: 1절~17절


  8장 1절을 보면 일곱째 인을 떼실 때입니다.

  7장은 여섯 번째 인과 일곱 번째 인 사이에 있습니다. 왜 이 사이에 기록했을까요? 우리는 초림과 재림사이에서 재림에 가깝고, 다섯 번째 인을 뗄 때와 여섯 번째 인 사이에 우리가 있다고 했습니다.

  1세기도 마찬가지고 21세기도 마찬가지고 우리는 초림과 재림사이에 서있습니다. 이 땅에 살고 있는 모든 성도들은 고난 받는 자들입니다. 사단과 영적전쟁을 치루는 자리이고요. 1세기에 고난 받는 성도들이나 21세기에 고난 받는 성도들의 고난의 양상과 크기는 다르지만 모두가 고난을 받고 있습니다. 마지막 일곱 번째 인을 떼기 전에 7장의 이 사건이 기록된 것은 이 땅에서 힘들게 외롭게 영적전투를 치루는 성도들을 위로하기 위해서 썼습니다. 신학적으로 중간계시라는 표현을 씁니다.

7장은 여섯 번째 인과 일곱 번째 인을 떼기 전 사이에 삽입된 일종의 샌드위치 기법을 쓰고 있습니다. 그 만큼 중요하다는 뜻이지요.

  1절~8절까지는 땅의 모습에 대한 비전이고, 9절~17절까지는  하늘의 모습에 대한 비전인데, 병행구조로서 대조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같은 그룹을 다른 각도에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1-8절은 언약적 관계, 9-17절은 구속사적관점입니다. 1절부터 보겠습니다.


  “이 일 후에 내가 네 천사가 땅 네 모퉁이에 선 것을 보니 땅의 사방의 바람을 붙잡아 바람으로 하여금 땅에나 바다에나 각종 나무에 불지 못하게 하더라”


  ‘이 일 후에’는 ‘여섯 번째 인이 떨어진 후에’입니다. ‘네 천사가 땅 네 모퉁이에’에서 ‘4’라는 숫자가 나옵니다. ‘4’라는 숫자는 땅의 숫자라고 했습니다. ‘네 천사’는 땅을 심판하는 네 명의 천사입니다. 땅이라는 말이 강조되고 있고, 역시 ‘네 모퉁이’는 사방을 가리킵니다. 땅의 사방을 심판하는 대리자로서의 한 천사를 보니까 바람을 붙잡고 있습니다. 왜 바람을 붙잡고 있습니까? 그것은 심판을 지연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2절 보겠습니다.


  “또 보매 다른 천사가 살아 계신 하나님의 인을 가지고 해 돋는 데로부터 올라와서 땅과 바다를 해롭게 할 권세를 얻은 네 천사를 향하여 큰 소리로 외쳐”


  또 보매 하나님의 대리자인 다른 천사가 하나님의 인(印)을 가지고 해 돋는 데로부터 올라와서 땅과 바다를 해롭게 할 권세를 얻은 네 천사를 향하여 큰소리로 외칩니다. 3절 보겠습니다.


  “가로되 우리가 우리 하나님의 종들의 이마에 인치기까지 땅이나 바다나 나무나 해하지 말라 하더라”


  우리 하나님의 종들의 이마에 인칠 때까지 땅과 바다나 나무를 해하지 말라고 합니다. 심판을 지연하라고 합니다. 4절 보겠습니다.


  “내가 인 맞은 자의 수를 들으니 이스라엘 자손의 각 지파 중에서 인 맞은 자들이 십사만 사천이니”


  인 친다는 것은 소유권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이라는 뜻이지요. 그래서 이 천사가 인을 치는데 인 맞은 자의 수가 이스라엘 각 지파 중에서 144,000이라는 숫자가 나오고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의 중심에 서 있는 144,000을 잘못 해석하면 계시록 전체를 잘못 해석하게 됩니다.

  ‘7’이라는 완전수를 사용할 때는 대부분 영적인 숫자를 쓸 때 사용했습니다. 예를 들어 여리고성 7일 동안 돌고 마지막 날 일곱 바퀴 도는 것, 일곱 교회, 일곱 대접 등 모두 영적인 숫자입니다.

  ‘12’라는 완전수를 사용할 때는 육적인 숫자입니다. 눈에 보이는 숫자를 쓸 때, 예를 들어 12지파, 12제자, 마가의 다락방의 12문도 입니다.

  다음에 천국의 거룩한 성의 치수도 144스타디온입니다. 144는 12×12입니다. 다 상징적인 것입니다.

  그러면 144,000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요?

  문자적으로 해석하면 안 됩니다. 계시록의 모든 수는 상징적인 숫자이기 때문에 문자적으로 해석하면 안 된다고 했습니다.

  모든 이단들의 특징은 144,000을 문자적으로 해석합니다. 물론 문자적으로 해석한다고 다 이단은 아니지만 모든 이단은 다 문자적으로 해석합니다. 모든 이단은 요한계시록을 잘못 해석하는 데서 나옵니다. 모든 이단들의 특징은 자기들이 믿는 144,000안에 들어와야 구원을 얻는다고 주장합니다.

  5절 보겠습니다.


  “유다 지파 중에 인 맞은 자가 일만 이천이요 르우벤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갓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유다 지파 중에 인 맞은 자가 일만 이천이요. 각 지파의 인 맞은 자의 수가 다 똑같습니다. 이것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면 안 되는 이유가 민수기 1장 1절부터 군데의 숫자를 뽑을 때 각 지파대로 배열을 하고 있습니다. 각 지파의 숫자가 다 다른데, 예를 들어 3만 명을 갖은 지파와 5만 명을 가진 지파와 6만 명을 가진 지파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중에서 12,000명을 똑같이 뽑았다고 하는 것은 상징적인 완전수의 개념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그래서 똑같이 각 지파에서 12,000명을 뽑았다는 것은 문자적인 각 지파가 아닙니다. 144,000을 문자적으로 해석한다면 민수기 1장에서도 12,000명 씩 12지파의 144,000명도 문자적으로 해석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이방인 중에서는 구원 얻을 사람이 한 사람도 없다는 자가당착(自家撞着)에 빠지게 됩니다. 144,000은 상징적인 숫자입니다. 지파를 보면 단지파가 빠져있습니다. 6절 보겠습니다.


  “아셀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납달리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므낫세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므낫세지파가 들어가 있습니다. 물론 레위지파 때문에 에브라임지파가 빠져 있습니다. 8절 보겠습니다.


  “스불론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요셉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베냐민 지파 중에 인 맞은 자가 일만 이천이라”


  에브라임지파가 빠지고 요셉지파가 들어가 있습니다. 요셉의 두 아들 중에 므낫세는 쓰고 에브라임은 쓰지 않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것은  완전히 구원받은 상징적인 숫자입니다.

 

계7장과 14장에 나오는 144,000명을  이스라엘의 각 지파를 언급하면서 온 이스라엘의 구원얻을 자들을 가르치고 있는 것인데도, 여호와의 증인들과 신천지 그리고 하나님의 교회(안상홍증인회)들이 자신들의 족수들을 각각 12지파로 나누어 마치 자신들이 구원받을 144,000이라도 되는냥 푼수를 떨고 있습니다. 참으로 무식하고 자의적인 성경해석의 극치를 보고 있는 것이지요. 분명히 사도 요한은 144,000 외에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라도 능히 셀수 없는 큰 무리"(계7:9)를 따로 구분지어 표현하므로 이스라엘과 이방인의 분별을 꾀하고 있음에도, 이단과 기독교 사이비들은 이러한 성경의 자증을 거부하고 제멋대로 성경을 논단하고 있는 것입니다.  

 

 9절 보겠습니다.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라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흰 옷을 입고 손에 종려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서”


  9절에 나오는 ‘이 일 후에’와 1절에 나오는 ‘이 일 후에’는 같은 병렬구조로, 대조법으로 나오고 있습니다.

  9절에 내가 보니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라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는 누구입니까? 이 큰 무리는 흰 옷을 다 입고 있습니다. ‘흰 옷을 입은 것’은 다 ‘승리자들’이라는 뜻입니다. 고대 올림픽에서 승리한 자에게 월계수를 씌워 주었듯이 승리한 자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양 앞에 서서 큰소리로 외칩니다. 계속해서 10절 보겠습니다.


  “큰 소리로 외쳐 가로되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있도다 하니”


  구원 받은 자들이 큰 소리로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양께 있도다.”하면서 찬양합니다. 11절 보겠습니다.


“모든 천사가 보좌와 장로들과 네 생물의 주위에 섰다가 보좌 앞에 엎드려 얼굴을 대고 하나님께 경배하여”


  경배하고 12절에 다시 찬양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13절 보겠습니다.


  “장로 중에 하나가 응답하여 내게 이르되 이 흰 옷 입은 자들이 누구며 또 어디서 왔느뇨”


  장로 중에 하나가 묻습니다. 이 흰 옷 입은 자들이 누구며, 어디서 왔느냐고 묻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대답하시겠습니까?

  이 사람들은 여러분들입니다. 14절 보겠습니다.


  “내가 가로되 내 주여 당신이 알리이다 하니 그가 나더러 이르되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


  주여 당신만이 아십니다. 그가 나더러 이르되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회개 한 자들입니다. 우리들입니다.

  계시록 7장은 중요합니다. 지상의 모습과 천상의 모습을 대조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지상에 인 맞은 숫자 144,000은 완전수입니다. 셀 수 없는 큰 무리입니다. 이 사람들은 이 땅에서 영적전투에 임하는 자들입니다. 환난과 고난과 질병 속에서 승리한 오늘 하나님의 택함 받은 백성들, 구원받은 백성들, 언약 백성들입니다. 이 사람들이 저 하늘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하늘과 땅을 상징적으로, 대조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에베소서 2장 5절 ~ 6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부활하실 때 혼자 부활하신 것이 아니라 우리와 함께 부활하셨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부활하지 않았는데, 왜 우리와 함께라는 표현을 썼을까요? 우리는 그 시대에 2,000년 전에 없었는데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것은 과거에 구원받은, 현재에 구원받는, 장차 구원받을 미래의 모든 성도들과 함께 부활하셨습니다.

  에베소서 2장 6절에 보면, ‘우리를 하늘에 앉히사’라고 하는데, 우리는 이미 하늘에 있는 자입니다. 우리의 위치가 하늘에 있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이미 구원받은 존재이고, 우리는 이미 천상에 있는 존재입니다. 지금 이 땅에서 영적전투를 치루고 있지만 우리의 신분은 하늘에 있는 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 이 말씀은 그 말씀입니다. 우리가 꿈에서라도 천국에 갔다 온다면 얼마나 힘이 나는 말씀입니까? 그런데 꿈에 천국에 있는 정도가 아니라 고난 받고 핍박받는 성도들에게 ‘너희는 장차 저렇게 될 자들이다’고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너희는 ‘하늘에 있는 자들이다’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하늘에 있는 자입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이미 구원받은 자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천상에 있는 존재들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땅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그것을 보여주는 것이 7장의 주제입니다.

  요한계시록 14장은 7장의 해석입니다. 14장은 예수님의 재림장입니다. 14장에서 다시 인 맞은 자의 숫자 144,000이 나옵니다. 144,000은 예수님의 재림 때 인 맞은 자입니다. 지금은 일곱 번째 인 떼시기 전에, 예수님의 재림 전에 보여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 재림하실 때 14장과 7장은 대조적으로 보여줍니다. 14장에는 다시 인 맞은 자는 구원받은 자라는 것을 선포합니다. 그러면서 14장에는 짐승의 표, 짐승의 인 맞은 자도 나옵니다. 13장 마지막 절부터 14장까지에서 짐승의 표, 짐승의 인 맞은 자가 바로 666입니다. 그러면 적그리스도의 인 맞은 자가 666명입니까? 이것도 상징적인 숫자입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 14장에는 짐승의 인(印)을 받은 자와 하나님의 인(印) 맞은 자 144,000을 대조적으로 보여줍니다. 144,000은 천상에 있는 자들이지만, 666은 지옥 불에 환란과 고통 속에서 떨어질 자들이라고 묘사를 하시면서 대조법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 14장과 7장에 대한 해석입니다.

  우리에게 제일 중요한 것은 우리의 현 위치가 어디냐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 1세기 성도나 우리가 영적전투 속에서 환란을 겪고 있지만 7장 17절에 어린양이 저희의(우리의) 목자가 되사 저희(우리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얼마나 위로가 되는 말씀입니까? 

  이 땅에서 고통당하며 외로운 영적전투를 치루는 성도들인 너희는 지금 천상에 있다는 것을 대조적으로 대비하면서 보여주며 위로를 주시고 이제 마지막 일곱 째 인을 떼기 직진의 모습으로 넘어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천국을 본 자가 아니라 이미 천국에 있는 자이며, 구원을 얻을 자가 아니라 이미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 자이며, 영생을 이미 받은 자라는 사실을 기억하며 믿음위에 굳게 서서 날마다 승리하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