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요한계시록강해

6과. 예배자는 승리자 계시록 4장: 1절~11절

호리홀리 2014. 12. 16. 16:54

  6과. 예배자는 승리자


  성경본문: 계시록 4장: 1절~11절


  요한계시록뿐만 아니라 성경에는 숫자가 많이 나옵니다. 특별히 요한계시록의 숫자는 마치 암호와 같아서 숫자를 이해하지 못하면 계시록을 이해 할 수가 없습니다. 숫자의 의미는 실질적인 숫자의 의미도 있지만 대부분은 상징적인 의미를 보여줍니다. 천국은 분명히 존재하지만 사도 요한이 본 천국은 비전이며 상징적인 모습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숫자 1은 절대 숫자입니다. 숫자 1은 유일하게 한 분만 계시는 하나님의 숫자입니다. 헬라어의 알파(‘Α’)는 1의 숫자입니다. 숫자 3은 하늘의 숫자입니다. 성부, 성자, 성령을 가리키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숫자입니다. 숫자 4는 동서남북을 가리키는 땅의 숫자입니다. 에덴동산에서 발원하는 물의 근원도 네 줄기였습니다.

  완전수가 3개가 나오는데, 첫 번째가 7입니다. 7이라는 완전수는 하늘의 숫자 3에 땅의 숫자 4를 더한 것입니다.

  본문에도 일곱 영, 일곱 등불, 일곱 대접, 일곱 나팔이 나옵니다. 구약성경에도 나아만이 물속에 7번 들어갑니다. 이것은 물론 7이라는 숫자의 의미도 있지만 나아만의 자아의 죽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나아만이 7번 장례식을 치르는 체험을 하나님이 요구하신 것입니다. 또 엘리야가 갈멜산상에서 머리를 무릎사이에 넣고 7번 기도했습니다. 이것은 완전한 하나님 앞에서의 내어맡김입니다. 철저하게 하나님을 의뢰하는 완전수의 숫자입니다. 여리고성을 7일 동안 돌고, 마지막 날 7번을 돌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6일 동안 천지창조를 하셨고 7 일째 안식하셨습니다. 우리도 그렇게 지키고 있고 7 년째에는 안식년으로 지키게 하셨습니다.

  특별히 요한계시록에 7이라는 숫자가 집중적으로 나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두 번째, 완전수는 10입니다. 10이라는 숫자는 완전수 7에 하늘의 숫자 3을 더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막, 성전의 모든 치수를 10진법으로 쓰게 하셨습니다. 기본 숫자가 10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왜 꼭 십계명을 주셨을까요? 완전수 10의 의미가 있습니다. 십일조도 내 수입의 십분의 일인 최소한의 내 수입을 드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하나님의 것을 완전하게 드린다는 의미가 십일조입니다. 또 하나의 완전수가 있습니다. 그 숫자는 12입니다. 12라는 숫자는 하늘의 숫자 3에 땅의 숫자 4를 곱한 숫자입니다.

  12지파, 왜 꼭 ‘12지파인가?’라고 할 때 12는 완전수의 의미가 있습니다.

  신약에서 예수님이 제자들을 뽑다 보니까 12명이 아니라 예수님은 12명을 생각하고 제자들을 뽑았습니다.

  구약에서 12지파 중에 레위지파가 빠지고, 요셉의 두 아들 에브라임과  므낫세가 들어가서 다시 12지파가 형성되는 것은 완전수를 맞추기 위해서입니다. 또 신약에서도 가룟인 유다가 빠지고 맛디아를 집어넣는데, 그것은 완전수를 맞추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구약의 12지파의 대표와 신약의 12제자의 대표는 상징성입니다. 구약의 12지파의 대표와 신약의 12제자의 대표가 더해져서 요한계시록의 24장로가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24장로는 구약의 성도의 대표와 신약의 성도의 대표를 상징하는 것이지,  24장로는 문자적인 24장로를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요한계시록 7장과 14장에 인 맞은 숫자 144,000명이 나오는데, 어떻게 인 맞은 숫자가 144,000명이 나옵니까?

  모든 성도들을 대표하는 대표성을 띤 12지파에서, 한 지파에서 12,000명이 나옵니다. 왜 12,000명이 나옵니까? 완전수 12×10×10×10을 곱하면 12,000명이 나옵니다. 이 숫자는 상징적인 숫자이지 문자적인 숫자가 아닙니다.

  모든 이단들은 144,000을 문자적으로 해석합니다. 그러나 144,000은 상징적인 숫자입니다.

  또 40이라는 숫자가 있습니다. 40은 땅의 수 4에 완전수 10을 곱한 것입니다. 인간의 고난이 끝나는 숫자입니다. 인간의 고난이 다할 때까지가 40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몇 년 동안 유리방황합니까? 40년입니다. 우리의 고난의 수는 40년이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이 정해준 수를 말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생명을 맡기고 금식할 때 40일을 합니다. 예수님도 금식을 40일 하셨고, 엘리야도 광야에서 40일을 금식한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노예생활을 몇 년 동안 했습니까? 400년입니다. 400년의 의미가 어디 있습니까? 고난의 숫자 40에 완전수 10을 곱한 것이 400년입니다.

  그리고 오순절(五旬節)은 ‘50일 째의 절일’이라는 의미를 지닌 헬라어로 ‘펜테코스테’(πεντηκοστη)입니다.

  숫자 50(오순절)은 완전수 ‘7× 7’이 끝나는 바로 다음이 50입니다. 50은 새 출발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오순절은 새 출발을 의미합니다. 오순절 때 성령이 새 출발합니다. 또 교회가 새 출발했습니다. 남의 나라에서 포로로 붙잡혀 오면 50년 째 되는 해에는 노예들을 자유롭게 풀어줍니다. 이 제도를 희년제도라고 합니다. 노예생활을 할 때도 50년째는 방면을 해줍니다.

  8이라는 숫자의 의미도 마찬가지입니다.

  7이라는 완전수가 끝나는 다음 날이 8인데, 8이라는 숫자도 새 출발을 의미합니다. 구약에 남자 아이가 출생하면 할례를 8일째 했습니다. 현대의학이 발견한 것은 아이가 태어나서 포경수술을 8일째 하면 피가 제일 빨리 응고된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현대의학이 밝혀낸 것이지만 성경은 이보다 더 깊은 의미를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남자 아이가 출생한지 8일째 할례를 행하는 것은 이제 이 아이가 하나님께 드려지고 새롭게 출발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6이라는 숫자는 완전수 7에서 하나가 부족한 숫자입니다. 그래서 짐승의 숫자입니다. 그 짐승의 숫자 6이 세 개가 합해지면 666인 사단의 숫자가 되는 것입니다. 어떤 신학자들은 666을 암호 풀듯이 또 다른 의미로 풀어내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대체적으로 우리가 숫자를 이렇게 이해하고 요한계시록을 보아야 합니다.

계시록 4장과 5장은 짝이 되는 내용으로서 4장은 창조주 하나님께 경배하는 것이고 5장은 구속주 예수그리스도에게 경배하는 것입니다. 4장부터는 미래적인 것입니다.1절을 보겠습니다.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하늘에 열린 문이 있는데 내가 들은 바 처음에 내게 말하던 나팔 소리 같은 그 음성이 가로되 이리로 올라오라 이후에 마땅히 될 일을 내가 네게 보이리라 하시더라”


  ‘마땅히 될 일’은 ‘반드시 될 일을’이란 뜻입니다.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의 예언이 그대로 성취된 것 같이 이제 앞으로 될 일도 보이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역시 신적동사인 ‘될 일(데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2절 보겠습니다.


  “내가 곧 성령에 감동하였더니 보라 하늘에 보좌를 베풀었고 그 보좌 위에 앉으신 이가 있는데”


  사도 요한이 본 것은 자기 본 것이 아니라 성령에 감동되어 본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실제적인 예배의 모습이 아니라 상징적인 것임을 이해해야 합니다.

  요한이 제일 먼저 본 것은 하늘의 보좌입니다. 요한이 하나님의 보좌를 보았는데, 하나님이 꼭 그 자리에 앉아 있다는 실제적인 의미가 아니라 상징적인 의미로 이해를 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보좌에 앉아 있고, 보좌를 둘러서 24장로들이 앉아 있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24장로들은 신약과 구약의 대표성을 상징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24장로는 흰 옷을 입고 있고, 머리에는 면류관을 쓰고 있습니다. 앞에서 일곱 교회의 승리한 성도들이 입는 옷이 흰 옷입니다. 또 승리한 성도들이 쓰는 것이 면류관입니다. 24장로들은 신약과 구약의 모든 승리한 성도들입니다. 천국의 모습은 승리한 성도들이 하나님의 보좌를 둘러서서 24장로처럼 보좌에 앉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보좌에 승리한 성도들이 같이 참여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다 천국에 가면 흰 옷을 입고 돌아다니는 것이 아니라 네가 정결했구나, 네가 신앙을 굳게 지켜 ‘승리 했구나’라는 의미로 흰 옷을 입혀 준다는 상징적인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5절 보겠습니다.


  “보좌로부터 번개와 음성과 뇌성이 나고 보좌 앞에 일곱 등불 켠 것이 있으니 이는 하나님의 일곱 영이라”


  24장로 앞에 일곱 등불 켠 것이 있으니, 이것이 곧 하나님의 일곱 영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일곱 영’은 성령입니다. 성령이 등불같이 불을 밝히는 것입니다. 성령의 역사가 여기 있는 것입니다. 4장은 성부하나님께 예배하는 것을 강조하고 있고, 5장은 성자 예수그리스도를 주라 칭하며 예배하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6절 보겠습니다.


  “보좌 앞에 수정과 같은 유리 바다가 있고 보좌 가운데와 보좌 주위에 네 생물이 있는데 앞뒤에 눈이 가득하더라”


  24장로 앞에 일곱 등부, 일곱 영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앞에 수정과 같은 유리바다가 있습니다. 그리고 7절을 보겠습니다.


  “그 첫째 생물은 사자 같고 그 둘째 생물은 송아지 같고 그 셋째 생물은 얼굴이 사람 같고 그 넷째 생물은 날아가는 독수리 같은데”


  그리고 수정과 같은 유리바다 앞에 네 생물이 있습니다. 4는 땅의 숫자입니다. 그래서 이 네 생물은 땅을 대표하는 모든 피조물의 대표성을 띠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만든 모든 피조물의 대표입니다. 맹수의 대표는 사자입니다. 그리고 초식동물의 대표는 소입니다. 또 모든 살아 있는 피조물의 대표는 사람입니다. 마지막으로 조류의 대표는 독수리입니다.

  네 생물은 에스겔서 1장에도 나옵니다. 그래서 천국에서 모든 피조물이 하나님을 예배하는 광경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모든 것으로부터 찬양을 받으실 분임을 나타내 보여 줍니다. 그 사이 유리바다가 있는 것은 하나님과의 사이가 너무 먼 것입니다. 그러나 투명하고 깨끗한 수정체 같은 유리바다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다시 정리하면 먼저 하나님의 보좌가 있고, 그 뒤로 24장로가 있고, 24장로 앞에는 일곱 등불 곧 일곱 영이 있고, 그 앞에는 수정과 같은 유리바다가 있고, 그 앞에는 모든 피조물의 대표성을 띤 네 생물이 있습니다. 이것은 모든 삼라만상(森羅萬象)이, 모든 인간이, 모든 피조물(被造物)이 하나님을 예배하고 찬양하는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은 하나님은 예배와 찬양을 받으실 대상이라는 말씀입니다.

  성경 전체가 그러하지만 요한계시록은 성령의 감동으로 우리에게 비전과 환상을 보여 주고 있는 것입니다.

  어떤 성도가 자기는 천국가기 싫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지금도 예배드리는 것이 지긋지긋한데, 천국에 가면 밤낮 예배를 드리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천국에 가면 이런 형태의 예배는 없습니다. 하늘에서 천국백성들 모아 놓고 아침예배, 점심예배, 오후예배, 저녁예배와 같은 형태의 예배가 아니라 상징적인 것입니다.

  천국은 우리의 일상적인 삶과 똑같이 되풀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요한계시록에서 천국의 모습은 실제적인 것이라기보다 상징적인 것입니다. 8절 보겠습니다.


  “네 생물이 각각 여섯 날개가 있고 그 안과 주위에 눈이 가득하더라 그들이 밤낮 쉬지 않고 이르기를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여 전에도 계셨고 이제도 계시고 장차 오실 자라 하고”


  네 생물이 여섯 날개가 있습니다. 6은 짐승의 숫자라고 했는데, 그러면 6이라는 숫자로 풀어야 합니까?

  우리가 이사야서와 에스겔서를 이해해야 이 장면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사야가 하나님을 예배할 때 스랍(천사)의 날개가 여섯 개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날개가 두 개씩 짝을 이루고 있습니다. 두 개씩 3의 완전수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숫자를 이루어 완전한 형태의 모습을 보여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을 찬양하는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하나님을 찬양할 때 ‘거룩, 거룩, 거룩’을 3번 반복하는 것은 히브리어에는 최상급이 없기 때문에 3번 강조하는 것이 최상급의 표현으로 가장 거룩하신 하나님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진실로, 진실로’하면 정말 진실한 것을 표현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10절 보겠습니다.


  “이십사 장로들이 보좌에 앉으신 이 앞에 엎드려 세세토록 사시는 이에게 경배하고 자기의 면류관을 보좌 앞에 던지며 가로되”


  24장로들이 하나님을 예배할 때 자기들이 머리에 썼던 면류관을 하나님의 보좌 앞에 내려놓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의 모든 공적으로, 하나님 앞에 영광으로 받는 면류관조차도 하나님께 예배드릴 때는 벗어 놓는 모습은 인간의 겸손, 예배자의 겸손한 모습을 보여 줍니다. 세상에서 아무리 직위가 높고 명예가 많다 할지라도 하나님 앞에 예배할 때는 내려놓아야 하는 모습을 보여 주고 상징하고 있는 것입니다. 11절 보겠습니다.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능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나이다 하더라”


  인간이 교만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내려놓고,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능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하면서 찬양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에덴동산을 창설하시고 아담을 창조하시고, 그 아담에게 예배자로 서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짐승을 잡아서 옷을 지어 입히시며, 예배자로 살게 하셨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그 자식들에게 그렇게 가르쳤지만 히브리서 11장에서 아벨을 가인보다 더 나은 예배를 드렸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아벨을 예배에 성공한 자라고 했습니다. 가인은 예배에 실패한 자입니다. 그 속에 시기와 질투가 들어 왔을 뿐만 아니라 예배에 실패하니까 다 실패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아우 아벨을 쳐 죽이게 되었습니다.

  노아가 인류의 두 번째 조상으로 홍수 이후에 제일 먼저 한 것은 하나님께 단을 쌓고 예배한 것이었습니다. 또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세우시자 아브라함은 가는 곳마다 단을 쌓고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므로 예배의 승리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롯은 예배에 실패했습니다. 여러분은 예배의 승리자로 사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