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요한계시록강해

5 과. 사명과 비전 계시록 3장: 14절~22절

호리홀리 2014. 12. 16. 16:52

5 과. 사명과 비전


  성경본문: 계시록 3장: 14절~22절


  로마제국은 로마와 아시아로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을 것입니다.

  로마에서는 아우구스투스 황제 때부터 황제 우상숭배 사상을 강요하고, 그래서 불시에 동네사람 전체를 광장에 소집합니다. 그리고 향불을 피우고 황제에 대해서 우상숭배를 강요합니다. 그 당시 기독교인들은  내가 한 번 황제에게 고개를 숙이고 ‘나중에 믿음생활을 잘해야지, 이 위기를 피해가야지’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색출을 당하고 사자 밥이 되고, 화형을 당하고 순교하면서도 황제 우상숭배를 하지 않았습니다.

  소아시아에 있는 성도들은 박해를 피해 갑바도기아로 숨어들었고 로마에 있는 교인들은 로마 성곽에서 정확하게 4.8km 떨어진 검은 모래를 채취했던 채석장, 곧 화산 용암이 부드럽게 된 모래에 굴을 파고 숨어 들어갔습니다.

  A.D. 60년 후반부터 A.D. 313년 콘스탄틴 대제가 기독교를 공인하기까지 기독교인들은 250년 동안을 카타콤 속으로 들어가서 살았습니다. 지금까지 발견된 것이 60개인데, 그중에 54개는 기독교인의 카타콤이고 나머지 6개는 유대인의 카타콤입니다. 지금까지 발굴된 것만 그렇고 더 있을 수 있습니다. 카타콤의 총 길이는 940km인데, 이 거리는 신의주에서 부산까지의 거리 정도 됩니다. 그 속에서 250년 동안 무덤에 장사된 숫자가 600만 명 정도 됩니다. 카타콤 속에서 250년 동안 햇빛을 보지 못하고 심지어 어린아이들까지도 믿음을 지키기 위해서  이렇게 죽어갔습니다.

  안 이숙 여사가 여고 때 아침 조회시간에 다 신사참배를 하는데, 훈육 주임이 보니까 한 학생만 고개를 숙이지 않고 들고 있었다고 합니다. 안 이숙이라는 학생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때부터 끌려가서 고난을 받고 죄가 가중되어 후에는 사형언도까지 받게 됩니다. 사형집행 날자가 1945년 8월 15일 오후 2시였습니다. 그런데 해방은 1945년 8월 15일 오전 10시였습니다. 바로 일본 천황이 항복한 시간입니다. 오후에 사형이 집행될 것으로 예정되어 있어서 그녀는 순교하기를 원했는데, 하나님께서는 그녀를 살아있는 순교자로 만드셨습니다. “죽으면 살리라, 죽으면 살리라.”라는 안 이숙 여사의 일대기입니다. 참으로 우리에게 감동을 주고 있습니다.   

  사도요한도 순교를 원했지만 하나님께서는 사명이 있어서 마지막까지 남겨 두었습니다. 소아시아에 황제우상숭배가 강력하게 일어났습니다. 우리가 지금 보는 아시아의 일곱 교회는 해안을 따라서 있고, 두아디라, 라오디게아는 내륙에 있는데, 이 아시아에 있는 교인들은 동쪽으로 피신을 해서 아라랏산을 넘어 갑바도기아라는 곳으로 피난을 갔습니다. 버섯처럼 생긴 석회암으로 된 동굴을 파서 250년 동안 콘스탄틴 대제가 기독교를 공인할 때까지, 기독교를 믿도록 허용할 때까지 그곳에서 굴을 파고 기도하며 몇 만 명이 모일 수 있는 지하 광장을 파서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우리는 오늘 신앙생활 한다는 것이 부끄럽지요.


  라오디게아교회


  라오디게아교회는 에바브로디도가 개척했습니다.

  라오디게아는 동양과 서양이 만나는 중요한 세 개의 도로 한 가운데 있었기 때문에 교통의 요충지였습니다. 그래서 에바브로디도는 복음을 전하는 선교의 거점으로 라오디게아에 교회를 세웠습니다. 그러나 라오디게아교회 교인들은 요지부동(搖之不動)이었습니다. 라오디게아는 아주 잘 살았습니다. 그래서 은행도 많이 생겨났습니다. 또 요즘 말로하면 의과대학도 있었고, 양모 산업도 발달해서 부유했습니다. 14절을 보겠습니다.


  “라오디게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아멘이시요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요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가 가라사대”


  왜 라오디게아교인들에게 '아멘'이란 표현을 썼을까요? 라오디게아교인들은 '아멘'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이런 교인이 있을까?’할 정도로 철저하게 불순종했습니다. 그래서 전도할 필요도 없고, 선교할 필요도 없고, 교회의 사명과 비전을 망각한 교회였습니다. 사데교회는 죽었다고 했는데, 그래도 몇 명은 깨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라오디게아교회는 완전한 세속적 교회, 껍데기 교회였습니다. 한 사람도 바로 서 있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형식적이고 기계적인 예배로 그쳤습니다. 고난과 핍박이 없었던 곳에는 부흥도 없었습니다. 라오디게아교회는 황제 우상숭배도 강요받지 않았고, 고난도 핍박도 없었습니다. 이들은 충성되고 참된 증인의 삶을 감당하지 못했습니다. 또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예수그리스도를 믿지 않았습니다. 15절을 보겠습니다.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더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더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라오디게아교회는 삼각형으로, 위에는 히에라폴리스라고 하는 유명한 온천지대가 있었습니다. 라오디게아는 도시 전체가 하얀색입니다. 사진을 보면 흰 색의 온천들이 흘러내리는 곳이 라오디게아입니다. 히에라폴리스에서 수로가 연결되어서 수도처럼 도시 전체로 물을 공급합니다. 그래서 히에라폴리스에서 온천수가 공급되다 보면 물이 내려오면서 미지근해집니다. 그 길이는 11km정도 됩니다. 그리고 그 옆에는 유명한 골로새교회가 있었던 골로새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라오디게아교인들은 너무 부유했습니다. 한 번은 지진이 일어나서 다 무너진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로마에서 너희를 도와주겠다고 했더니, 라오디게아 시민들이 그럴 필요가 없다고 거절할 정도로 부유했습니다. 16절을 보겠습니다.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더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미지근한 물을 염두 해 두고 이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인간의 경험가운데 가장 기억하기 싫은 것은 구토요인이죠. 그들은 하나님의 구토요인입니다. 하나님께서 너희를 보니까 토하고 싶다고 말씀하십니다. 너희를 보니 도대체 매스꺼워서 견딜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최악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라오디게아교인들은 이렇게 호언장담을 했습니다. 17절을 보겠습니다.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


  라오디게아교인들은 ‘나는 부자다’라고 말하는데,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가난하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들은 남을 돕지도 않고, 선교도 하지 않고, 구제도 하지 않고, 나도 도움을 받지 않겠다고 말합니다. 라오디게아교인들은 아무도 어떻게 할 수 없는 꽉 막힌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들은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도 못하는 영적으로 무지하고 깨닫지도 못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18절을 보겠습니다.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세 가지 권면을 합니다. ‘첫 번째, 금을 사라.’ 여기서 ‘금’은 믿음을 가리킵니다. 너희는 고난을 통과한 믿음이 없구나. 너희는 돈이 많으니까 그 돈으로 믿음을 사라고 권면합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 부패하고 타락한 그들에게 너희가 돈이 많다고 하니까 흰 옷을 사라고 말씀하십니다. 세 번째로,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좀 보아라고 권면의 말씀을 하십니다. 19절을 보겠습니다.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이런 최악의 교인들을 향해서도 내가 너를 사랑한다고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여기서 징계는 ‘파이듀오’로서 책망보다는 교육과 연단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20절을 보겠습니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문을 꽉 닫고 있는 그들에게 제발 문 좀 열어달라고 말씀하십니다.

  홀만 헌트가 그린『세상에 빛 되신 예수』라는 유명한 그림이 있습니다. 잔디밭 위에 두꺼운 반원 문에 등잔을 들고 문을 노크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의 그림입니다. 친구들이 완성된 그림을 보고 지적을 했습니다. 왜 이 문에는 문고리가 없느냐고 했습니다. 그러자 홀만 헌트는 말하기를 이 문은 안에서만 열수 있는 문이기 때문에 문고리를 그리지 않았다고 말했습니다.

  20절의 ‘서서’라는 단어는 현재완료시제입니다. 예수님은 오래전부터 서 계신 것입니다. 그 문을 계속해서 노크하고 계십니다. 완고하여 전도하지 않고 선교하지 않고 구제하지 않고 자기만 아는 고집불통과 같은 라오디게아교인들의 모습은, 어쩌면 오늘 우리 현대 교인들의 모습일 것입니다. 버티고 있는 라오디게아교인들을 위해서 예수님은 오래 전부터 등을 들고 서서 노크하고 계십니다.


  ‘풍성한 삶은 어디서 오는가?’


  몇 가지 동사가 나오지요. 20절에 먼저 ‘듣고’가 나옵니다. 풍성한 삶은 먼저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로마서 10장 17절에 믿음은 들으면서 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은 ‘열면’입니다. 마음을 열어야 풍성한 삶을 누릴 수 있습니다. 풍성한 삶은 물질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의 문을 여는 것에서부터 시작합니다. 우리가 새벽에 나와서 예배드릴 때도, 또 기도할 때도 마음의 문을 열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문을 이미 열어 놓았지만 라오디게아교인들은 문을 꼭 닫고 열어주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럼에도 내가 너희를 사랑한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먹는다’는 세 번째 동사입니다. 예수님과의 교제는 마음의 문을 열 때 시작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웃과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일곱 개의 교회 중에서 파격적인 최고의 축복을 약속하셨습니다. 왜 그럴까요? 라오디게아교인들이 그만큼 고집을 부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21절을 보겠습니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

  이기는 자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겠다고 하는 파격적인 제안을 합니다. 우리가 무엇을 이겨야 할까요? 고난이나 핍박도 이겨야 되지만 우리자신의 교만과 오만과 아집을 이겨야 합니다.

  라오디게아교회를 가장 중요한 교통의 요충지에 사명을 감당하라고 세워 주셨는데 그들은 마음의 문을 끝까지 닫아 버렸습니다.

  우리가 일곱 교회를 살펴보았지만 중요한 것은 이기는 것입니다. 우리가 문을 여는 것은 지는 것이 아니라 이기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 앞에 문을 여는 것은 항복하는 것이지요. 그러나 그것이 우리가 이기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 앞에 끝까지 고집을 부리며 버티는 경우가 있는데 그렇게 하지 말고 문을 열어 이기는 자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