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요한계시록강해

4과. 치유와 회복의 비전 성경본문: 계시록 3장: 1절~13절

호리홀리 2014. 12. 16. 16:46

  4과. 치유와 회복의 비전


  성경본문: 계시록 3장: 1절~13절


  요한계시록의 1차수신자는 아시아의 일곱 교회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교회를 언급할 때 맨 처음에는 단수로 나옵니다. 예를 들어 빌라델비아교회 혹은 사데교회 이런 식으로 나옵니다. 그러나 끝부분에서는(3:22)   ‘교회’라는 단어가 복수로 되어 ‘교회들’로 나옵니다. 그러므로 2차수신자는 앞으로 나타날 모든 교회, 모든 성도들을 말씀하신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사데교회와 빌라델비아교회는 이제 앞으로 4장 1절부터 펼쳐질 미래에 대한, 이 당시는 3장까지는 현재이며 4장부터는 미래인데, 미래에 펼쳐질 승리자와 패배자, 이긴 자와 패배자의 상징적인, 그리고 대표적인 모델을 보여주는 교회와 성도가 사데교회와 빌라델비아교회의 성도들입니다.


  사데교회


  사데는 과거의 리디아 왕국의 수도였습니다. 리디아 왕국은 굉장히 부유했고 사치와 음행으로 가득 찬 도시였습니다. 사데라는 도시는 450미터나 되는 높은 곳에 세워진 난공불락(難攻不落)의 요새였습니다. 그리고 막대한 금을 가지고 있었던 곳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절대 망하지 않는다고 장담했던 곳입니다. 그러나 페르시아 왕국에게 무너집니다. 그 이후에도 사데는 여전히 부유했기 때문에 그것이 교만을 가져왔습니다. 사데라는 도시 안에 있던 교회와 함께 사데라는 도시 역시 무너지고 맙니다. 교회가 서서히 죽어가니까 도시도 죽어가고, 도시가 죽으니까 교회 역시 죽어갔습니다. 그것이 사데교회를 향한 예수님의 메시지입니다.

  지역사회에 하나님께서 그 교회와 성도를 세워주신 것은 지역사회를 책임지게 하기 위해서 세워 주신 것이다. 여러분을 직장에, 사회에, 가정에 불러 주신 것은 그 공동체를 책임지라는 하나님의 음성입니다.

  1절을 보겠습니다.


  “사데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하나님의 일곱 영과 일곱 별을 가진 이가 가라사대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


  ‘하나님의 일곱 영과 일곱별’, 여기에서 ‘일곱’은 완전수입니다. 불꽃같은 눈으로 세밀하게 살피서 행위를 다 알고 계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행위’라는 단어에 주목하십시오. 사데교회의 성도들의 모든 행위를 다 감찰해서 알고 계시는 하나님께서 “네가 살았다는 이름은 가졌으나 실상은 죽은 자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껍데기만 있다는 것이죠. 교회의 외형적인 껍데기만 있다는 것입니다. 성도가 직분만 가지고 있는, 마치 고목나무와 같은 속이 텅 빈 상태라는 말씀입니다. 2절 보겠습니다. 


  “너는 일깨워 그 남은 바 죽게 된 것을 굳게 하라 내 하나님 앞에 네 행위의 온전한 것을 찾지 못하였노니”


  ‘죽게 된 것’은 서서히 죽어가는 것을 말합니다. 마치 고목나무와 같은 상태입니다. 그러나 고목나무에도 꽃은 핀다. 그래서 회복의 비전을 제목으로 잡았습니다.

2절에 보시면, ‘일깨워’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고목나무에서도 꽃이 피는 것처럼 회복을 위해서는 서로 깨워야 합니다. 3절에서도 ‘만일 일깨지 아니하면’이라는 말씀처럼 회복을 위해서는 서로 깨워야 합니다. 사데교회는 황제 우상숭배가 없었던 유일한 교회입니다. 핍박이 없는 유일한 교회입니다. 핍박이 없으니까 안일한 삶속에서 서서히 죽어가는 것입니다.

  미국의 코넬대학에서 비커 안에 개구리를 집어넣고 온도를 느끼지 못하도록 1분에 0.0015도씩 서서히 높이며 가열했을 때 물이 펄펄 끓는데도 개구리는 온도를 체감하지 못하고 앉아서 서서히 죽어갔습니다.  

  우리 성도에게도 때로는 자극이 필요한 것입니다. 고난을 주는 목적과 경로는 다양하지만 고난은 축복입니다. 그렇게 믿고 기도해야 합니다.

  사단 마귀의 강력한 무기중의 하나는 편안케 하는 것입니다. 성도를 편안하게 3년 동안만 놓아두면, 또 자녀가 잘되고 직장과 사업이 다 잘되면 기도할 것이 없는 것이지요. 그러면 누구든지 다 넘어지고 말 것입니다. 사데교회가 이런 교회였습니다.

  예수님께서 회칠한 무덤 이야기를 자주하셨습니다. 회칠한 무덤은 밖에 회만 칠한 것이 아니라 거창한 무덤이지요. 그러나 무덤 속에서는 시체가 썩는 것이죠. 이처럼 사데교회가 껍데기였습니다. 교회만 있고, 직분만 있고, 건물만 있는 죽은 교회였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고 직분이 있고 없고, 오래 믿고 적게 믿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직분이 있으면 일하는 데는 편리할 수는 있지만 그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4장부터 앞으로 무너질 멸망할 심판받을 교회와 성도들의 모델로 사데교회가 등장합니다.

  하나님의 축복은 흘러야 합니다. 물이 흐르지 않고 고여 있으면 썩는 것처럼 은혜도 흘러야 합니다. 아무리 은혜를 많이 받았다 할지라도 나누지 않으면 그것 때문에 망합니다. 한국이 언더우드선교사나 아펜젤러선교사로부터 복음을 받고, 그것이 흘러서 어떤 경로를 통해서 여러분과 제가 복음을 받았는데, 그 복음이 흐르지 않고 우리에게서 끊어지면 안 되는 것이지요. 그러나 사데교회는 축복을 받고 은혜를 받았지만, 그 축복과 은혜가 계속해서 흘러가지 않고  끊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망해버린 교회입니다. 4절 보겠습니다.


  “그러나 사데에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 몇 명이 네게 있어 흰 옷을 입고 나와 함께 다니리니 그들은 합당한 자인 연고라”


  사데에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 몇 명이 있었습니다. 소수의 이 사람들은 2절에 서로 일깨웠던 사람들이고, 3절에 어떻게 들었는지 생각하고 지키어 회개한 사람들입니다. 고목나무에 다시 꽃이 피게 하는 5가지 동사를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그 5가지 동사는 ‘일깨워, 생각해, 지키어, 회개해, 들어’입니다. 5절 보겠습니다.


  “이기는 자는 이와 같이 흰 옷을 입을 것이요 내가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반드시 흐리지 아니하고 그 이름을 내 아버지 앞과 그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리라”


  ‘이기는 자는 흰 옷을’ 여기에서 ‘흰 옷’은 천국 백성들이 입는 옷입니다. 그리고 생명책에 너의 이름을 흐리지 않고 똑똑하게 기록하겠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사데교회는 다 죽었지만 그래도 소수의 살아있는 성도들이 있었습니다.


  빌라델비아 교회


  빌라델비아교회는 두 가지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나는 다윗의 열쇠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다윗의 열쇄는 다윗언약을 가리킵니다. 다윗언약의 성취로 오신 예수그리스도의  음성을 그들은 듣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무엇을 가지고 있었습니까? 8절 보겠습니다.


  “볼지어다 내가 네 앞에 열린 문을 두었으되 능히 닫을 사람이 없으리라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적은 능력을 가지고도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배반치 아니하였도다” 

  또 하나는 ‘열린 문’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열린 문’은 완료형으로 구원의 문을 가르킵니다. 그래서 ‘열려진 문’입니다.

  두 종류의 사람이 기도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여리고 성처럼 굳게 닫쳐진 사업의 문, 자녀의 문을 열어달라고 기도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다른 하나는 이미 네게 열린 문을 두신 줄 믿습니다. 그 문을 통해 보게 해 주시옵소서, 그 열린 문으로 들어가게 해 주시옵소서하고 기도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기도하시겠습니까?

  4장 1절, 5장 1절, 6장 1절에 보시면 이미 열려진 문입니다. 그래서 열린 문을 통해서 ‘내가 보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사도 요한은 계속해서 문을 열어달라고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열려진 문을 통해서 보기를 원했습니다.

  사도 바울이 아시아의 끝에 와서 기도할 때 문을 열어달라고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비전과 환상을 보여 달라고 하자 하나님은 마게도냐의 환상을 보여주셨습니다. 바울은 그 문을 통해서 하나님이 주신 담대함으로 계속 직진하였던 것입니다.

  8절을 보시면, 강조하는 단어는 ‘행위’입니다. 빌라델비아교회의 성도들의 행위와 사데교회의 성도들의 행위를 서로 대조적으로 비교하며 평가해 보십시오.

  8절에 빌라델비아교인들은 ‘작은 능력’에서 ‘작은’은 마이크로(micro)란 말입니다. 마이크로(micro)는 ‘작은’이라는 뜻의 헬라어 미크로스(μικρός)에서 파생된 단어로, ‘아주 작은, 미세한, 겨자씨만한, 뜻입니다.

  그러나 겨자씨 속에 생명이 있는 것이 중요합니다. 아무리 크고 거창한 믿음을 가졌다 할지라도, 또 예수님을 수십 년 믿었다 할지라도 그 속에 생명이 없으면 죽은 것이고, 아무리 작은 믿음이라 할지라도 그 속에 생명이 있으면 30배, 60배, 100배의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믿음이 없다고 탓하면 안 됩니다. 또 믿음을 달라고 기도하면 안 됩니다. 왜냐하면 이미 주시고 받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미 구원해 주셨는데 구원을 달라고 기도하면 안 됩니다.  사데교회 교인과 빌라델비아교회 교인들의 기도와 행위가 이렇게 차이가 났습니다.

  다시 8절에 보시면, 작은 능력을 가지고도 내 말을 지키며 배반치 아니했습니다. 9절을 보겠습니다.


  “보라 사단의 회 곧 자칭 유대인이라 하나 그렇지 않고 거짓말 하는 자들 중에서 몇을 네게 주어 저희로 와서 네 발 앞에 절하게 하고 내가 너를 사랑하는 줄을 알게 하리라”


  ‘사단의 회’ 곧 자칭 유대인이다. 유대인들은 유대공동체가 아주 강화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유대공동체 안에서도 예수 믿는 자들은 핍박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소아시아 일곱 교회에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것은 아무리 유대인 공동체에게 핍박을 당해도 그들을 대적하지 않았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들이 소수였기 때문일까요. 아닙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공동체 안에서  문제가 일어나서 다툴 때 절대로 싸우면 안 됩니다. 인간관계의 다툼이나 갈등을 인간관계속에서 해결하려고 하면 안 됩니다. 그런 문제는 하나님께 가지고 나가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 믿는 공동체 안에서도 어려움을 당할 수 있고요. 공동체 안에서도 핍박받을 수 있습니다. 또 오해를 당할 수 있고, 시험을 받을 수 있습니다. 큰 믿음을 가진 사람과 작은 믿음을 가진 사람간의 문제가 생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핍박을 받을 때도 유대인공동체와 싸우지 않았습니다. 힘이 약해서가 아니라 싸우면 안 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이 문제들을 하나님 앞에 가지고 나갔고, 이겨냈습니다. 빌라델비아교인들은 핍박 속에서도 오히려 역동적인 모습을 보였습니다. 사데교인들은 고난도 없었고 핍박도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망해 버리는 모습을 대조법으로 우리에게 보여 줍니다. 10절 보겠습니다.


  “네가 나의 인내의 말씀을 지켰은즉 내가 또한 너를 지키어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하리니 이는 장차 온 세상에 임하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시험할 때라”


  네가 인내의 말씀을 지켰으니 나도 네를 지키어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하겠다고 말씀하십니다. 11절 보겠습니다.


  “내가 속히 임하리니 네가 가진 것을 굳게 잡아 아무나 네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


  네가 가진 것을 굳게 지켜라. 또 네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12절 보겠습니다.

  “이기는 자는 내 하나님 성전에 기둥이 되게 하리니 그가 결코 다시 나가지 아니하리라 내가 하나님의 이름과 하나님의 성 곧 하늘에서 내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의 이름과 나의 새 이름을 그이 위에 기록하리라”


  이기는 자는 하나님 성전의 기둥이 되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새 예루살렘은 계시록 22장에 나오는데, 성도들 가운데 승리자와 패배자의 모습을 끝까지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비록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 약속, 축복, 믿음을 적게 가졌더라도 불평하거나 타협하지 말고 열쇠를 이미 가지신 예수님이 문마다 다 열어 놓았을 뿐 아니라 그분이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사실을 알고 승리자로 사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