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열왕기하(구속사)

열왕기하20장,진실과 전심으로

호리홀리 2015. 9. 8. 09:20

그 때에 히스기야가 병들어 죽게 되매 -'그 때에'란 단어는 일반적으로 '막연한 어떤 시기'를 가리키지만(21:25) 여기서는 앗수르의 유다 침입(18,19)과 관련이 있다(6). 즉 병행구절인 사38:1-22에 의해서도 분명히 알 수있듯 히스기야의 병은 산헤립이 유다를 공격해온 초기에 일어났던 것이다. 한편 산헤립의 1차 유다 침입은 B.C.701년경 그리고 2차 유다침입은 B.C. 699년경의 일이었던 것으로 추정되니 히스기야의 발병(發病) 시기도 그때로부터 크게 벗어나지 않을 것이다. 18:17 주석 참조.

 너는 집을 처치하라 - 문자적 뜻은 '너는 네 집에 대하여 명령하라'이다. 이는 곧 죽기 전에 모든 일들을 정리하고 국정(國政) 인계를 하라는 뜻이다. 평행 구절인 사38:1에는 '너는 네 집에 유언하라'로 나와있다(Keil & Delitzsch Commentary,Vol. III,p.461).

 네가 죽고 살지 못하리라 - 50:5에서와 마찬가지로 이러한 구문에 나타난 미래형동사는 임박한 가까운 미래를 가리킨다. 또 이러한 임박한 죽음의 선포는 하나님의 심판을 나타낸다(1:1-4;삼상2:31-34). 그러나 히스기야가 어떠한 잘못으로 이러한 심판을 당하게 되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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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왕하20:2]

 히스기야가 낯을 벽으로 향하고 얼굴은 중요한 상징적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예를 들면 '얼굴을 든다'고 할 때 그것은 그 대상에 대한 존경심을 나타낸다. 그리고 누구에게서 '얼굴올 돌렸다'는 것은 그 사람에 대한 경멸이나 무관심을 가리킨다(왕상21:4;7:22). 따라서 기도를 위한 히스기야의 이러한 행동은 자신의 죽음이 임박했다는 소식을 들은 히스기야의 간절함을 나타낸다. 즉 그는 자기의 평상 업무와 주위의 사람들을 모두 물리친 후 오직 여호와께만 전심전력(全心全力)하여 매달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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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왕하20:3]

히스기야의 기도는 사38:3에도 나와 있다. 그런데 이 기도는 히스기야가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를 내세우는 것이 아니라 비록 보잘것 없는 자신의 행적이지만 하나님 앞에서 진실되게 행하고자 처신을 다했다고 하는 겸허하고 간절한 기도일 것이다.

 진실과 전심으로 주 앞에 행하며 - 이것은 히스기야가 여호와의 율법을 행함에 있어서 최선을 다했을을 가리킨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히스기야의 이러한 경건한 행위를 모방만하며 자신의 의를 드러내어 자랑하고 율법에 대한 사랑을 과시하였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그러한 바리새인들의 행위를 책망하셨다(18:9-14). 실상 그러한 위선적인 바리새인들과 히스기야 왕의 차이점은 진실됨과 그렇지 못함에 있었다.

 

 심히 통곡하더라 - (1)아직 그에게는 왕위를 계승할 아들이 없었기 때문이다(Josephus), 21:1에 따르면 히스기야의 아들 므낫세가 왕위에 올랐을 때 나이는 12세였다. 그렇다면 므낫세는 히스기야가 15년의 생명을 더 연장받은 후(6)에 얻은 아들임이 분명하다. 따라서 히브리적 관념에 비추어 볼 때 후사(後嗣)가 없이 죽는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신앙생활을 잘해 왔던 히스기야에게는 너무도 충격적인 형벌로 생각되었을 것이다. (2)하나님께서는 의인에게 장수(長壽)를 약속하셨는데(10:27) 한창 나이인 중년에 세상을 하직한다는 것은 불공정한 일처럼 여겨졌기 때문이다(Keil).이것도 역시 장수하는 것을 하늘의 축복으로 알았던 시대적인 상황에 비추어 볼 때 개연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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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왕하20:4]

 성읍 가운데 까지도 이르기 전에 - 38:4에는 이러한 기록이 없다. 따라서 본문의 기록은 더욱 생생한 목격자의 진술임을 알 수있다(Pulit Commentary). 한편 여기서 '성읍 가운데'가 어느 곳을 가리키는지 명백하지 않다. '성읍'에 해당되는 히브리어'하이르'를 맛소라 학자들은 '마당' 또는 ''이란 뜻의 '하체르'로 읽을 것을 제안하고 있다. 그렇게 볼 때 본문은 '가운데 마당까지도 가기 전에'로 해석하여야 할 것이다. 물론 여기서 '가운데 마당'이란 히스기야의 왕궁 안에 있는 중간 뜰(middle court)을 가리킬 것이다. 아무튼 이사야가 미처 이곳을 벗어나기도 전에 계시를 받은 것은 히스기야의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이 그토록 신속했음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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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왕하20:5]

 내 백성의 주권자 - 이것은 성경에서 그렇게 흔하게 쓰이는 칭호가 아니다. 지금까지 삼상9:1610:1에서 사울에 대해, 삼상 13:14과 삼하 5:2에서 다윗에 대해 쓰여진 경우등을 들 수 있을 뿐이다(Pulpit Commentary). 여기서 이러한 호칭은 히스기야가 3절에서 자신을 이상적인 왕으로 표현한 것과 잘 어울린다. 그리고 '왕의 조상 다윗의 하나님 여호와'라는 호칭과 함께 이 칭호는 히스기야가 다윗처럼 하나님 마음에 합한 왕이었음도 시사해 준다(삼상13:14;13:22).

 

 내가...들었고 보았노라 - 19:20에서와 마찬가지로 이것은  성도의 눈물의 기도를 차마 뿌리치지 못하시는 하나님의 언약적자비와 사랑을 잘 나타내 준다(5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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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왕하20:6]

 십 오 년을 더할 것이며 - 자신이 죽게되었다는 소식을 접한 히스기야가 하나님께 간구한 것은 단지 자신을 긍휼히 여겨 달라는 것이었다(3).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히스기야의 생명을 무려 십 오 년이나 연장해 주겠다는 약속을 하고 계신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의인들에게 복 주시되 '우리의 온갖 구하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에 더 넘치도록'(3:20) 주시는 분이시다. 더군다나 히스기야 왕이 받은 이러한 생명의 연장은 믿는 자에게 영생을 주시리라는 그리스도의 약속(6:40)과 밀접하게 연결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히스기야와 같이 다윗의 반열에 속한 자들을 위하여 '영원한 집'을 약속하셨기 때문이다(삼하 7).

 

 앗수르 왕의 손에서 구원하고 - 이와 똑같은 내용의 글은 이미 19:34에 기록되어 있다. 이것은 산헤립의 공격과 히스기야의 발병 시기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음을 다시한번 시사해 준다(Hobbs, Keil).

 

 나를 위하고 또 내 종 다윗을 위하므로 - 하나님께서 히스기야의 간구에 귀를 기울이시는 이유가 곧 하나님 당신의 영광 및 다윗과 맺은 언약(삼하 7) 때문임을 거듭 천명하고 있는 구절이다

 

 [왕하20:7]

 무화과 반죽 - 고대 근동 지역에서는 악질 또는 기타 다른 요인으로 인한 종기(腫氣)및 위궤양등을 치유할 때 민간요법으로 무화과(Fig)를 사용하였다(R.D.Patterson). 그러나 여기서는 무화과의 본래적인 치유 효능으로 인해 히스기야가 질병에서 치유함을 받았다고 보기는 어렵다. 대신 마치 그리스도께서 진흙을 사용해 장님의 눈을 뜨게 하신 것처럼(9:1-12) 여기서 무화과는 하나님의 이적적인 치유 능력을 보여 주시는 매개물일 뿐이다. 평행 구절인 대하32:24도 히스기야가 질병에서 회복된 것이 하나님의 이적으로 된 것임을 분명히 증거하고 있다.

 

 종처 -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하쉐힌''염증', '종기'(2:7;9:9)또는 '역병' 등을 가리킨다. 그러나 히스기야가 발병 후에도 격리 수용되지 않은 점으로 보아 그의 종처는 전염성이 강한 역병은 아니었던 것 같다.

 

 나으니라 - 8절에서 히스기야가 쾌차(快差)의 징조를 구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히스기야의 종처는 그 즉석에서 완전히 나은 것이 아니라 점차적으로 나아 삼일 만에야 완전히 회복된 것으로 보인다. 만일 그렇지 않고 즉시로 완쾌되었다면 히스기야가 이사야에게 징조를 구하였을리 만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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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왕하20:8]

 무슨 징조가 있나이까 - 히스기야가 이미 치유를 받은 후에(7)도 왜 이처럼 징조를 구하였는가에 대하여 간혹 학자들간에는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그러나 병이 완전히 회복되는 기간으로 예언된 3(5)은 히스기야에게 있어서 참으로 초조하고도 긴 시간이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자기의 기도가 정말로 상달되었는지 확인할 수있는 징조를 구하였던 것이다(Pulit Commentary).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이를 히스기야의 연약한 믿음 탓으로 볼 수는 없다. 평행 구절인 사38:7,8에는 본절에서와 같이 히스기야가 직집 징조를 요구하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지 않고 바로 여호와께서 징조를 주셨음이 기록되어 있다. 이와같이 하나님께서 종종 먼 미래에 성취될 약속에 대해 좀더 가까운 징조를 주시는 것은 구약시대에서는 일반적인 일이었다(19:29;3:12;6:37-40). 오히려 아하스 같은 왕은 징조를 구하지 않으므로 책망을 받기도 했다(7:10-13). 그러므로 히스기야는 본절에서 자기에게 징조가 당연히 허락되는 줄 알고 징조를 요구한 것이다

 

 [왕하20:9]

 한 징조가 임하리이다 - 이와 비근한 예로 모세가 소명받을 때(3:12)에도 징조가 임했고, 엘리 제사장의 집이 멸망할 때(삼상2:34)에도 징조가 임한 것을 들 수 있다. 이러한 '징조'( 오트)는 자주 이적적인 사건과 연관이 되지만 항상 그런 것은 아니다. 한편 본절과 같은 장면에서 징조는 여호와께서 약속하신 바를 반듯시 행하실 것이라는 증표(證標)가 된다.

 

 해 그림자가 십도를 나아갈 것이니이까 -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 원문은 과거 시제로 '..... 십도를 나아갔습니다'로 되어 있다. 그리고 또 원문에는 의문사도 나타나 있지 않다. 그래서 버니(Burney)'나아갔습니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할라크)'하옐레크'로 수정하여 과거 시제를 미래 시제로 바꾸고 의문사를 첨가하였다. 한글 개역 성경의 번역도 그러한 견해에 입각한 것이다. 한편 ''()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마알로트''올라가다' 라는 뜻의 동사 '알라'에서 파생된 것으로 본래는 '계단'(Step)을 의미한다. 당시 해시계는 계단 맨 꼭대기에 막대를 세워 그 막대의 그림자가 비치는 계단의 수로 시간을 측정했다(Rawlinson). 이러한 해시계는 앗수르나 바벨론에서 처음으로 발명되었는데 유다에선 히스기야의 아비 아하스(Ahaz, B.C735-716)가 처음으로 일영표(日影表)를 만든듯하다(11;3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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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왕하20:10]

 히스기야 - 지금까지 '히스기야'라는 이름은 원어상 '히즈키야'로 기록되었다. 그러나 이제 여기서는 '예히즈키야후'로 기록되어 있다.여기 이외에 사1:1과 호1:1에도 그렇게 기록되어 있는데 오펠(Ophel) 비문에 보면 이것이 본래 이름이었던 것 같다(Gibson). 참고로 히스기야(Hezekiah)란 이름의 뜻은 '여호와는 강하심' 또는 '여호와께서 강하게 하심'이다.

 

 십도를 나아가기는 쉬우니...물러갈 것이니이다 - 여기서 '나아가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나타'의 문자적인 뜻은 '길게 하다', '뻗치다'이다. 일반적으로 그림자가 길어지는 때는 오후이다. 따라서 이 일이 오후에 있을 일이라면 그림자가 일반적인 속도보다 빨리 10도를 나아가게 한다 할지라도 별다른 확신을 얻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 히스기야 왕은 보다 분명한 증거를 '구하기 위하여 보다 어려운 징조를 선택한 것이다. 과거 삿6:36-40에서 기드온이 양털에 이슬이 있게 하는 것과 없게 하는 두 가지 이적을 요구한 것도 이처럼 분명한 증거를 구하기 위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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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왕하20:11]

 아하스의 일영표 - 헤로도투스(Herodotus)에 의하면 이 해시계는 바벨론으로부터 아하스가 본따 온 것이며 따라서 그것은 우상의 상징물이라고 한다. 그리고 사 38:8의 사해사본(Dad Sea Scrolls)에는 '일영표' '계단'이라는 뜻의 '마알로트''다락방'이라는 뜻의 '알리트'로 기록되어 있다.그래서 그레이(Gray)는 그것을 '성신(聖神)숭배를 위한 방'으로 생각했다. 그것이 우상의 상징물이었다면 히스기야가 종교개혁할 때(18:3-6)에 그것을 제하였을 것이다. 또 본문에서도 해시계가 다락방과 같은 그러한 건조물로 되어 있었다는 증거를 발견할 수 없다. 한편 야딘(Y. Yadin)'아하스의 일영표'가 지붕 위나 높은 건물 위에 있었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참고로 바벨론의 일영표는 12계단으로 되어 있었음을 기억함은 본문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Rawlinson).

 

 십도를 물러가게 하셨더라 - 여기서 '물러가게 하셨더라'에 해당되는 히브리어 '와야쉐브'는 히필형(Hihpil;사역형 능동)으로서 하나님의 명령에 의하여 해 그림자가 물러갔음을 강조해 준다. 한편 이 사건이 전세계에 영향을 주는 지구 회전의 역전(逆轉)을 의미하는지 아니면 아하스의 일영표에만 영향을 끼친 국지적(局地的) 사건이었는지는 분명치 않다. 그러나 태양과 달이 멈추었던 사건(10:12,13)과 더불어 이 사건 역시 하나님의 놀라우신 이적이었던 것만큼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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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왕하20:12]

 발라단의 아들 바벨론 왕 부로닥발 라단이 - 앗수르 비문에는 부로닥발라단(Berodach-Baladan)'발라단의 아들'이 아니라 '야긴의 아들'로 기록되어 있다. 여기서 '야긴'(Yakin)은 그의 조부 이름이거나 왕조의 명칭인 것으로 추측된다. 이때의 바벨론 왕국은 종종 '비트-야긴'(Bit-Yakin)으로 언급되곤 했다(Hobbs). 한편 이사야서는 이 왕의 이름을 '므로닥발라단'(Merodach-Baladan)이라고 표기하고있다. 그의 이름의 바벨론식 표기가 '말둑-아팔-이디나'(Marduk-apal-iddina)인 것으로 보아 이사야의 표기가 더 정확한 것 같다. 한편 이 이름의 첫 부분인 '므로닥'은 본래 바벨론의 신 이름이다(50:2). 이 므로닥 신은 별들의 왕으로서 최고의 재판관으로 나타나는데당시 근동의 사람들은 이와같이 신의 이름을 본따 왕명을 지었다(B hr). 한편 바벨론왕 므로닥 발라단은 B.C. 722년 사르곤(Sargon) 원년에 앗수르에 반란을 일으켜 B.C.710년까지 약 12년간 바벨론을 통치하다가 다시 사르곤에 의해 왕위에서 쫓겨났다. 그리고 B.C. 705년에 사르곤이 죽고 난 뒤 다시 6개월 동안 통치하였는데(Eusebius) 후에 산헤립에 의해서 국외로 추방되었다(Rawlinson). 그리고 그 이후 B.C.702년경부터 그는 메소포타미아 남동쪽의 엘람(Elam)에 거처를 정하고 계속해서 앗수르에 대항해 왔는데 그가 히스기야에게 사절단을 보낸 것은 바로 이때의 일이 아닌가 추측된다(Leonwood). 따라서 여기서도 히스기야의 발병 시기를 알 수 있는데 아마 므로닥발라단은 산헤립을 믈리친 히스기야의 명성을 듣고 사절단을 보냈을 것이다. 그리고 히스기야의 병 완쾌를 축하한다는 구실로 유다에 사절단을 보내어 유다와 군사동맹을 맺으려고 했을 것이다.

 

 병들었다 함을 듣고...보낸지라 - 여기서 '병 들었다'에 해당되는 히브리어 '할라'는 과거 완료형으로서 그것은 이미 병이 나았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Keil &Delitzsch Commentary Vol. III, p.466). 한편 대하 32:31에 의하면 바벨론 사절단의 방문 목적은 히스기야의 병회복을 축하할 뿐만 아니라 그에게 나타났던 하나님의 이적에 관해서도 알고자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요세푸스가 전하는 바에 의하면 이외에도 거기에는 히스기야가 죽기 전에 그로부터 자기 나라의 독립을 얻기 위해 군사적 도움을 구하기 위한 목적이 개재되어 있었다고 한다. 사실 비록 산헤립이 뜻하지 않은 재앙으로 인하여 원정(遠征)을 포기하고 본국으로 돌아갈 수 밖에 없었지만(19:36) 그때에도 앗수르는 여전히 바벨론을 억압하고 있었다. 그래서 브로닥발라단은 앗수르의 공격을 성공적으로 막아낸 히스기야와 동맹을 맺어 자국의 독립을 꾀하려고 했던 것이다(Von Gerla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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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왕하20:13]

 히스기야가 사자의 말을 듣고 - 대하 32:27에 따르면 히스기야의 부와 영광이 극에 달했다고 한다. 그리고 "여러 사람이 예물을 가지고 예루살롑에 와서 여호와께 드리고 또 보물로 유다 왕 히스기야에게 드린지라 이 후부터 히스기야가 열국의 눈에 존대하게 되었더라"(대하 32:23)고도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본절에서 바벨론 사절단의 방문은 여러 이방사절단의 방문들 가운데 하나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히스기야는 앗수르 왕 산헤립이 유다에서 철수, 고국으로 돌아간 이후 이러한 영광을 획득하게 되었음도 알 수 있다(대하 32:22). 한편 당시 국력이 신장(伸張)하고 있던 바벨론의 사절단이 히스기야를 방문한 것은 히스기야에게 특별한 기쁨이 되었을 것이다. 또한 그는 바벨론과 동맹을 맺는다면 앞으로 앗수르의 침입은 걱정하지 않아도 되리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래서 히스기야는 바벨론 사절단에게 신망(信望)을 얻기 위하여 자기 보물고를 보여 주었을 것이다(B hr).

 

 자기 보물고의 금은과 향품 - 여기서 '보물고'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베트 네코트)의 문자적인 뜻은 '향료의 집'이다. 이것은 주로 향료를 보관하기 위해지은 창고로서 간혹 금과 은을 보관해 두기도 했다(Keil).

 

 보배로운 기름 - '기름'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세멘'으로서 '감람유'(olive oil)를 가리킨다. 따라서 본절은 '값진 감람유'라는 뜻이 되는데 이것은 일반적인 들 감람유가 아닌 왕궁에서 쓰는 향료용 기름(balsam oil)인 듯하다.

 

 내탕고 - 이는 곧 왕이 자신의 사사로운 재물을 모아 두는 곳집을 가리킨다.

 

 모든 것을 다 사자에게 보였는데 - 본절은 겉으로 보기에는 18:15,16에서 히스기야가 금은을 모두 앗수왕에게 주었다는 진술과 모순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히스기야가 앗수르 왕에게 금은을 다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많은 보물들을 여전히 소유하고 있었던 데 대하여 다음과 같이 생각해 볼 수 있다. (1)히스기야는 산헤립에게 모든 보물을 다 주지 않았다. 즉 그는 은 삼백달란트와 금 삼십 달란트만을 주었을 뿐이다(18:14). 그리고 그가 성전 문에 입힌 금박까지 벗겨서 다 주었던 것은 산헤립에게 더 이상 줄것이 없음을 나타내 보이기 위한 위장 술책이었다(Keil). (2)히스기야는 선조 때부터 물려 내려오던 많은 보물들을 감추었을 뿐만 아니라(17) 그 동안 다른 이방 나라의 사절단으로부터 많은 예물을 받은 것이 틀림없다(대하 3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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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왕하20:14]

 선지자 이사야가...나아와서 - 이사야는 이방 나라와 동맹을 맺어 의지하려는 마음이 히스기야에게 있음을 간파하고 비록 왕의 청함이 없었지만 그를 징책하고 경계하기 위하여 히스기야에게 나아갔을 것이다. 사실 지금까지 이사야는 오직 여호와께만 도움을 구하고 이방을 신임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누누이 강조해 왔었다(30:1-7;31:1-7). 그러기에 이제 이사야는 히스기야의 심증을 캐묻기 위하여 또는 히스기야가 바벨론을 의지하려는 마음이 있었음을 고백하고 회개토록 하기 위하여(B hr, Mattew Henry) 그에게 "이 사람들이 무슨 말을 하였으며 어디서부터 왕에게 왔나이까"라고 질문하고 있는 것이다.

 

 먼 지방 바벨론에서 왔나이다 - 이러한 히스기야의 대답 속에는 두 가지 의미가 담겨 있다. (1)자신의 명성이 바벨론에까지 전파되었다는 사실을 자랑스럽게 여겼음을 의미한다. (2)먼 지방에서 온 이방인들과 동맹맺는 것을 경계한 율법의 말씀들(29:22;9:6,9)을 생각하고 자신이 범죄하였음을 인정하는 의미도 포함되어 있다(Hob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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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왕하20:15]

 내 궁에 있는 것을...다 보았나니 - 본절에서 히스기야는 자신이 바벨론 사절단에게 행한 일들을 자세하고 솔직하게 고백하고있다. , 왕을 경책하기 위해 온 선지자에게 히스기야는 마치 하나님 앞에서 모든 일들을 고백하듯이 분명하게 토로하고 있는것이다. 바로 여기에 다윗에 버금가는 히스기야의 위대한 신앙이 있다 할 것이니(삼하12:13) 사실 잘못을 지적받고 바로 그 자리에서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기란 여간 쉽지않은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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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왕하20:17]

 날이 이르리니 - 이러한 구절은 일반적으로 대개 어떤 미래적인 사건을 선포할 때 쓰인다(31:31;23:29). 사실 본절에 기록된 사건 역시 실제로 25:13 이하에서 비로소 성취되고 있다.

 

 열조가 오늘까지 쌓아 두었던 것 - 여기에 언급된 보물들 가운데 금은의 상당 부분은 앗수르에게 넘어 갔지만(18:15,16) 기타 다른 보물들은 여전히 히스기야가 보관하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3절 주석 참조.

 

 바벨론으로 옮긴 바 되고 - 이처럼 히스기야가 바벨론 사절단에게 국고(國庫)를 열어 보인 것(13)은 그만 도둑에게 자신의 보물을 자랑한 꼴이 되고 말았다. 실제로 본절의 예언은 그대로 성취되었으니 곧 B.C.586년 예루살렘 멸망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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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왕하20:19]

 여호와의 말씀이 선하니이다 - 히스기야가 이렇게 말한 것은 비록 후대에는 형벌이 있을 것이나(17,18) 자기가 살아있는 동안에 자신은 형벌을 받지 않게 되었기 때문에 안심이 되어서 하는 말(Rawlinson)은 결코 아니다. 만일 그렇다면 그는 이기주의자로 비난받아 마땅할 것이다. 어디까지나 히스기야가 본절과 같이 말한 것은 여호와의 말씀에 대한 순복의 표시로서 왕의 편에서 공적인 태도를 표명한 것이다(B hr, Keil,Hobbs). 즉 히스기야는 자신의 죄를 시인하고서 엄청난 징책을 선고한 하나님의 말씀을 정당한 것으로 받아들였던 것이다.

 

 나의 사는 날에 태평과 진실이 있을진대 - '태평''진실'은 상호 관련성을 지닌 것으로(33:6) 미천한 자에게 평화의 언약을 지키시는 하나님의 진실성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제 이와같은 축복이 히스기야에게 주어지고 있음은 3절에서 보는 바와 같이히스기야가 진실과 진심으로 행하고 주께서 보시기에 선하게 행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히스기야는 본절에서 그 같은 하나님의 공의와 긍휼을 찬양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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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왕하20:20]

 히스기야의 남은 사적 - 대하 32:27-33에 보면 히스기야 시대의 사회적, 경제적 번영에 대해서 잘 알 수 있다. 그런데 이 모든 번영들은 대부분 B.C.701년 앗수르의 침략 이후에 획득한 것이니 그가 병에서 완쾌된 후 15년 동안은 실로 태평 성대를 이루었음을 알 수 있다.

 

 못과 수도를 만들어 - 대하 32:2-8에 따르면 히스기야가 예루살렘 성 밑으로 수로(水路)를 뚫어 만든 못과 수도는 앗수르의 침략을 대비하여 만든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고고학자들이 증거하는 바에 따르면 이때 만든 지하 수로의 길이는 약540m 가량된다고 한다(Gibson). 이에 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은 18:17주석을 참조하라.

 

 [왕하20:21]

 그 열조와 함께 자고 - 대하 32:33에는 히스기야의 죽음과 관련 "다윗 자손의 묘실 중 높은 곳에 장사하여 저의 죽움에 존경함을 표하였더라"로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유대인의 전승이 전하는 바에 의하면 히스기야는 다윗과 솔로몬 다음 자리에 장사되었다고 한다(Ginzberg). 한편 레이몬드 웨일(Raymond Weil)이 다윗 성에서 왕들의 묘실을 발견했는데 안타깝게도 그 묘들이 너무나 많이 훼손되어 있어서 어느 것이 누구 묘인지 구별하는 것은 전혀 불가능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그 묘들 가운데 하나가 히스기야의 묘임은 분명하다(Hobb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