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열왕기하(구속사)

열왕기하16장,유다 왕 아하스의 악정

호리홀리 2015. 9. 2. 11:36

이십 세라...십 육 년을 치리하였으나 - 단순히 본절을 이해할 때 아하스가 20세에 왕이 되어 16년을 치리하였기 때문에 그가 죽었을 때의 나이는 36세가 된다. 그런데 18:2에 보면 그의 후계자 히스기야(B.C. 728-687)가 아버지를 이어 왕위에 오를 때의 나이가 25세였다. 그렇다면 아하스는 11세에 자기 아들 히스기야를 낳았다는 말이 되는데 이것은 상식적으로 불가능한 것이다. 이에 대하여 본절에 나타난 연대기적인 문제를 크게 두 가지로 보는 견해가 있다. (1) 아하스의 통치 연대를 B.C. 735년부터 716년까지 약 20년 전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J. Bright, Albright). 이같이 보는 이유는 히스기야 14년인 B.C. 701년에 산헤드립이 유다를 쳐들어 왔다고 보기 때문이다.그렇게 되면 아하스는 B.C. 716년에 죽은 셈이 되고 그때 나이가 40세가 되는 것이다. 그러면 아하스(B.C. 735-716)15세에 히스기야를 낳은 셈이 되어 어느 정도는 가능한 것이다. 한편 이를 뒷받침하는 자료로서 단시 근동에서 유행했던 조혼(早婚)제도를 들 수 있다. 즉 당시의 동양에서는 남자가 12, 13, 여자가 10, 11세에 결혼하는 예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혹자는 유다 왕국에서는 전혀 그런 예가 없었다는 이유로 이를 부정한다(Keil & Delitzsch, Vol. III, P. 398-399). (2) 아하스와 그의 아버지 요담이 섭정을 한 것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Thiele, Gray, Meer, Hobbs). 즉 북이스라엘과 아람의 동맹군이 유다를 침공한 B.C. 733년부터 두 사람이 섭정을 했는데 이때의 나이가 20세였다고 보는 것이다. 이 섭정이 4년정도 계속되었다고 보기 때문에 아하스가 단독으로 통치하기 시작한 것은 24세였고 그때부터 16년간을 다스렸다는 것이다. 그러나 본문에서는 이러한 섭정에 대한 분명한 증거를 찾아볼 수 없다. 한편 70인역(LXX), 수리아역(Syrica), 아람역(Arab.) 등에서는 아하스의 나이를 20세 대신에 25세로 기록하고 있어서 어느정도 위의 견해에 긍정함을 나타내고 있다.

 다윗과 같지 아니하여/하나님이 보시는 기준이다.  솔로몬과 르호보암의 아들 아비얌(B.C. 913-910)은 부정적으로(왕상 11:4 ; 15:3), 아사와 요시야는 긍정적으로(왕상15:11 ; 왕하 22:1, 2) 다윗의 행적에 비교되었다. 그리고 아마샤는 (14:1-5) 다윗과 같지는 않았으나 그에 상당하는 칭찬을 받았다. 한편 열왕들의 사적을 다윗과 비교하는 것은 다윗이 여호와의 명령과 그 법도를 지켰기 때문이다(왕상 11:34). 물론 다윗도 이전에 하나님의 법도를 어겨 범죄한 적이 있었다(삼하 11:1-27 ; 24:1-9). 그러나그는 선지자 나단의 책망을 순순히 받아들였을 뿐만 아니라 진실로 회개를 함으로(삼하 12:13 ; 24:10 ; 51) 하나님께 그 죄과를 용서받는 은혜를 입었기 때문에 성왕(聖王)의 대표적인 인물이 된 것이다. 특히 그는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일에 최선을 다했기 때문에 후일 열왕들을 평가하는 기준 근거가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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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왕하16:3]

 이스라엘 열왕의 길로 행하며 - 이와 유사한 평을 받은 유다 왕은 여호람이다(8:18). 여기서 아하스가 이스라엘 열왕의 길로 행하였다는 말이다. 특히 대하 28:2을 보면 그가 "이스라엘 열왕의 길로 행하여 바알들의 우상을 부어 만들고"라고 되어 있어 이러한 사실을 더욱 구체적으로 나타낸다. 그 뿐만 아니라 역대기에서는 '부어 만들고'라는 표현을 첨가시킴으로 인해 그들이 숭배한 우상이 금송아지인 듯한 인상을 준다. 그래서 혹자는 이 우상이 바로 그들이 고안해 만든 '송아지 우상'이라고 밝힌다(Keil & Delitzsch). 그러나 혹자는 이를 송아지 숭배로 받아들이지 않고 단순히 아하스가 아합과 아하시야와 같은 악한 행위를 했을 뿐이며 베니게인들의 우상을 재도입했다고 주장한다(Rawlinson, Bahi).

 이방 사람의 가증한 일을 본받아 - 북이스라엘과 남유다의 역대 왕들 가운데서 이와 같이 이방 종교와 섞인 혼합주의(syncretism)를 처음으로 제창한 왕은 아합이다(왕상 16:30-33). 그런데 아하스도 동일하게 하나님을 섬기는 방법과 이방의 우상 숭배법을 혼합하는 죄를 범한 것이다(14, 18). 이러한 사실로 미루어 볼 때 아하스가 행한 우상 숭배는 금송아지를 우상화한 것 뿐만 아니라 이방 종교를 영입한 듯하다. 한편 본절에 나타난 우상 숭배 행위는 가나안 땅을 정복하기 이전에 그곳에서 유행했던 풍습인 듯하다(M. Cogan).

 자기 아들을 불 가운데로 지나가게 하며 - 본절은 분명히 아하스가 '이스라엘 열왕의 길'로 행한 것 중에서 그 한 예를 보여준 것이다. 그러나 성경 어디에서도 이스라엘의 열왕이 이방인의 이런 풍습을 따랐다는 기록을 없다. 한편 요세푸스(Josephus)는 아하스가 예루살렘에 세워진 제단 위에서 자기 자식을 희생 번제물로 바쳤다고 기술하고 있어 당시의 상황을 직접적으로 증언하고 있다(Antiquities of the Jews, Vol. IX,p. 243). 한편 성경에서는 몰록에게 자식을 바치는 일을 경고한 곳(18:21 ;20:1-5)이 있는데 이것은 인신제사가 우상 숭배의 행위에서 벌어지는 예식의 일부분뿐만 아니라 풍조이기 때문에 엄정하게 경고하신 것이다. 그리고 신 18:10에서 또 한번 이를 경고해 이스라엘 백성들이 취해야 할 자세를 엄하게 강조한다. 그런데 "불 가운데로 지나가게 한다"는 표현이 정확한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한 학자들의 견해는크게 두 가지로 나타나 있어 예식이 벌어지는 당시의 상황을 좀 더 알 수 있게 한다.(1) 이것은 신명기적 입장에서 본 왕의 배교에 대한 상징적 표현이라는 견해가 있다(Hobbs). 그러나 미 6:7 ; 7:31 ; 19:5 ; 32:35 등에서는 분명히 아들을 불 속에서 태우는 것을 언급하고 있어 그것이 단지 상징적이라는 견해는 타당치 못한 것 같다. 더욱이 미가 선지자(B.C. 735-716)를 전후로 한 시기에 활동했던 선지자이므로 그들의말은 당시에 이런 행위가 직접적으로 있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리고 그후의 예레미야 선지자(B.C. 627-580)나 이스라엘 선지자(B.C. 593-570)도 이러한 사실을 근거로해서 증언한 것이다(16:21). (2) 이것은 직접 아이를 죽여 불로 태웠음을 의미한다는 견해가 있다(Keil, B hr, Eusebius, Wycliffe). 이 견해는 대부분의 학자들이 공동으로 긍정하는 것으로 오늘까지도 정설로 받아들여진다. 그러므로 단지 불로만 통과케하고 죽이지는 않는다는 의식적인 해석은 부정케 된다. 왜냐하면 의식적인 측면에서이 사실을 보는 견해는 이 행위가 정결케 하는 불침례를 의미한다고 보기 때문에 본절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한편 이러한 인신 제사는 아하스 뿐만 아니라 므낫세(21:6)도 범해 하나님의 심판을 받았다

 

 [왕하16:4]

 산당과 작은 산 위와 모든 푸른 나무 아래서 - 이런 표현은 신명기서와 본서 뿐만 아니라(12:2 ; 왕상 14:23) 예레미야서(2:20 ; 3:6)에서도 종종 나타난다. 이렇게 근동의 우상 숭배자들은 그들의 예배 대상인 우상과 조금이라도 가까워지기 위해 산에서 종교 의식을 거행했다. 또한 거기에 참여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경외심을 불러일으키고 의식에 엄숙함과 신비함을 부여하기 위해서 무성한 나무 숲 아래서 제사를드렸다(12:2). 아하스는 이러한 산당에서의 종교적 행위를 허용(왕상 3:2 ; 14:23; 15:14 )했을 뿐만 아니라 다른 왕들과는 달리 적극적으로 그 행위를 장려했다. 그래서 그는 통치 말기에 이르러서는 급기야 예루살렘 성전을 폐쇄하기까지 했던 것이다(대하 28:24). 4:13에서는 이런 장소에서 행음(行淫)이 이루어졌다고 밝혀 당시의 사회상과 타락상을 고발하고 있다

 

 [왕하16:6]

 엘랏을 회복하여 아람에 돌리고 - '엘랏'은 본서가 기록될 당시까지는 유다나 에돔의 소유였었다(왕상 9:26 ; 22:48 ; 왕하 14:22). 그러므로 한번도 소유한 적이 없는'엘랏'을 아람 왕 르신이 회복되었다는 말은 그 주장에 있어서 앞뒤가 맞지 않는다.이에 대해 학자들 간에는 크게 두 가지 견해로 나누어져있다. (1) '아람''에돔'으로 수정해야 한다는 견해가 있다(Hobbs, Gray, Myers). 그리고 70인역(LXX)과 벌게이트(Vulgate)역에도 이를 '에돔'으로 번역하고 있어서 위의 견해를 뒷받침해 준다. 그렇다면 아람이 엘랏을 정복하여 '에돔'에게 돌려주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에 본절의 '회복'이란 용어는 적절한 것으로 간주할 수 있다. (2) '회복하여'에 해당하는 히브리어'헤쉬브'를 단순히 '정복하여'로 해석해야 한다는 견해가 있다(Keil,B hr). 그래서 카일(Keil)은 아람 왕 르신이 예루살렘을 공격하기 이전에 먼저 엘랏지역을 '정복하였다'고 한다(Keil & Delitzsch, Vol. III, p. 401-405). 그러나 오늘날 밝혀진 고고학의 자료에 의하면 '엘랏'은 분명히 에돔의 소유였다(J.M.Myers,Albright Festschrift, p. 377-392 ; Y. Hoffmann, The Bible and Jewish History, p.76-89). 그리고 엘랏은 다메섹에서 아주 먼 곳에 떨어져 있기 때문에 아람의 르신이 이곳을 먼저 정복한 뒤에 예루살렘을 공격했다는 것은(Keil) 도저히 불가능한 것이다. 그래서 대하 28:17에서는 분명히 에돔인의 침략으로 유다 백성이 사로잡혀 갔음을 기록하고 있다. 따라서 위에 언급된 아람을 에돔으로 고치는 것은 당연히 수정이다(Rawlinson). 그리고 엘랏을 회복하는 일에 아람 왕 르신의 공로가 컸을 것으로 짐작된다. 한편 당시에 경제적으로 많은 도움을 주었던 엘랏 항구를 상실한 일은 유다에게있어서 매우 치명적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아하스는 앗시리아(앗수르)의 도움을 긴박하게 요청하지 않으면 안되었던 것이다(7).  오늘날까지 이르렀더라 [왕하16:7]

선지자 이사야는  유다 왕 아하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 주었다. 이사야는 아하스 왕에게 진짜 적은 인근의 작은 나라들의 왕이 아니라 앗수르임을 가르쳐 주었던 것이다(7:3-17). 이사야의 말은 앗시리아가 근동 전지역을 가공할 만한 전쟁이 상태로 몰아감으로써 사실로 드러났다. 하나님께서는 아하스의 죄를 벌하시기 위하여 다시 에돔과 블레셋을 통해 유다를 치도록 하셨다. 이에 이하스는 그들의 침략을 막기 위하여 앗시리아 왕의 군사 원조를 청하였다. 실로 아하스는 먼저 에돔과 블레셋의 침략을 막기 위한 목적도 가졌으나 동시에 아람과 이스라엘의 침략자마 막으려는 목적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그가 이사야의 권면을 듣지 않고 여호와를 배반하고 취한 망령된 행동이다. 정녕 이사야가 이하스 왕에게 '아람과 북이스라엘을 두려워 말라'(7:3-9 ; 8:5-8)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앗시리아를 의존한 것이다. 그의 이런 처사는 결국 남유다에 대한 앗시리아의 압제를 초래하고 말았다.

 디글랏 빌레셀에게 사자를 보내어 - 아사야 선지자는 왕에게 앗수르왕과 동맹 맺는 것에 대해 엄중히 경고했었다(7:4). 왜냐하면 강대국 즉, 앗수와의 동맹은 강대국에 대한 약소국(남유다)의 종속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사실상 이때부터 유다는 정치적으로, 또 한 군사적으로 앗수르에 예속되기 시작한 것이다.

 나는 왕의 신복이요 왕의 아들이라 - 이렇게 유다의 아하스는 자신을 굴욕적으로 비하(卑下)하면서까지 앗수르를 의지하여 복종의 자세를 취했다. 이러한 그의 행위는 잘못된 동기, 즉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 북이스라엘과 아람을 들어 유다를 벌하시려는 것을 인간의 힘과 능력으로 막아 보려는데에서 출발했다. 그래서 결국 스스로 재난을 초래하게 된 것이다. 오늘날 최근의 역사에서도 나타나듯이 자국의 생존을 위해 외세에 의존하는 정책은 결코 이득이 될 수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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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왕하16:8]

 아하스의 이런 행위는 15:20에 기록된 므나헴의 악한 행위와 비슷하다. 그리고 성경에서는 뇌물받는 것을 엄금하고 있으며 사무엘의 아들들이 바로 뇌물때문에 책망을 받은 장본인이다(삼상 8:3). 또한 신명기서의 기자는 '뇌물은 지혜자의 눈을 어둡게하고 의인의 말을 굽게 한다'고 함으로 뇌물을 받는 것 뿐만 아니라 주는것까지도 엄중히 경고하였다(10:17 ; 27:25). 이런 의미에서 볼때 아하스가 앗수르왕에게 뇌물을 바치는 행위는 결코 비난을 면치 못할 것이다. 특히 본절에서 '여호와의 전'에 있던 보물로 뇌물을 삼은 행위(12:18 ; 18:15 ; 왕상 15:18)는 극심한 배교행위 중의 하나가 될 것이다. 왜냐하면 (1) '여호와의 전'에 있는 은금은 () 왕들이주변 국가를 정복한 후 승전의 기념으로 하나님께 바쳤던 헌물과(삼하 8:11, 12) ()백성들이 낸 헌물이었기 때문이다(12:4). (2) '왕궁 곳간'에 있는 은금은 주로 백성들의 세금을 거둬들인 것이었기 때문이다. 아하스는 이처럼 하나님께 바쳐진 헌물과 백성의 세금을 가지고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일에 사용했다. 이러한 행위는 근본적으로 하나님에 대한 불신앙에서 비롯되었으므로 하나님의 진노를 사기에 충분했다. 그래서 오늘날 교회의 지도자들이나 정치 지도자들은 돈을 사용함에 있어서도 하나님의 청지기로서의 의식을 가지고 잘 사용해야 한다. 왜냐하면 자칫하면 아하스처럼 하나님의진노를 사는 데에 돈을 사용하기 쉽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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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왕하16:9]

앗수르 왕 디글랏 빌레셀이 아람을 친 것이 마치 앗수르가 유다의 구원 요청을 절대적으로 받아들여 도운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실제로 앗수르의 자료들을 살펴보면 그러한 의도는 전혀 없었음을 알 수 있다(Hobbs). 이에 대한 보충 자료로서 대하 28:20에 나타난 바에 의하면 '앗수르 왕 디글랏 빌레셀이 와서 오히려 유다를 포위하고 공격하였다'고 증언하고 있다. 그래서 오히려 당시에 앗수르는 이미 서방으로의 진출 정책을 실현하고 있던 중이라 유다의 요청을 구실로 삼아 쉽게 다메섹과 사마리아를 공격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때의 연대는 정확치 않지만 대개 사마리아를 공격하기 한 해 전인 B.C. 733년에 닷무르(Tadmor)를 선두로 한 공격으로 보고 있다(Cogan). 그 뿐만 아니라 아하스가 앗수르에게 원군 요청을 할 때 이미 디글랏 빌레셀은 게셀(Gezer)의 포로들과 함께 예루살렘 가까이에까지 와 있었다(W. hallo). 그러니까 앗수르는 이때 2차 원정 중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들의 접근은 다메섹 정복과 함께 북이스라엘과 남유다에게도 큰 위협이 되었던 것이다. 앗수르의 1차 원정은 15:29, 30에서 이미 다루었다. 그리고 그들의 3차 원정은 17:3-5(호세아 5)에 나타난다.

 

 올라와서 다메섹을 쳐서 - 앗수르의 편에서 볼 때 사마리아보다도 다메섹이 가깝기 때문에 이곳을 먼저 침공한 것 같다. 그뿐만 아니라 여기는 경제적으로 부요했고, 군사적인 면에서 볼 때도 사마리아보다 중요했기 때문에 먼저 침략을 당한 것 같다(Rawlinson). 한편 본절에서 언급된 '쳐서 취하여'라는 말은 히브리어 '이트페세하'를 번역한 것이다. 그런데 이는 '손으로 다루다', '압도하다', '장악하다'란 의미의'타파스'에서 온 용어이기 때문에 '완전히 정복했음'을 시사한다. 그래서 수리아(아람)는 이 사건을 계기로 완전히 역사 위에서 사라지게 되었다(B.C.732).

 

 길로 옮기고 - (kir)의 위치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려진 바가 없다. 그레이(Gray)는 암 1:5을 근거로 들면서 ''(, 키르)은 고유 명사가 아니라 '도시'라는 뜻의 일반 명사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이것이 '니드웨'를 가리킨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본문에서는 이에 대한 그 어떤 분명한 증거도 없다. 한편 암 9:7에는 ''(kir)이 아람인들의 본래 고향인 것으로 나타나 있다. 그런 이유 때문에 카일(Keil)은 본절의 ''을 쿠르(kur) 강가의 한 지방으로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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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왕하16:10]

 아하스 왕이...다메섹에 갔다가 - 아하스는 디글랏 빌레셀이 자기의 요청대로 응해준 것을 감사하기 위하여, 그리고 디글랏 빌레셀이 유다로 침공해 오는 것을 미연에 방지하고자(Thenius) 그를 찾아 다메섹으로 갔다. 그런데 당시 앗수르 왕들은 이웃의 왕들로부터 뇌물을 받기 위하여 따로 접견실을 만들어 놓고 있었다(Rawlinson). 그래서 아하스는 그곳에서 앗수르 왕을 만났던 것으로 추측된다.

 거기 있는 단을 보고 - 구약 성경에서는 '보는 것'(Seeing)으로 말미암아 범죄에 이르게 되는 경우를 자주 발견하게 된다.(3:6 ; 6:2 ; 12:15 ; 34:2 ; 38:2 ; 삼하11:2). 아하스도 그에 대한 예외는 아니었다. 당시 앗수르 왕들은 자기 제단을 따로 가지고 다녀서 쉽게 옮겨갈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제단은 흔히 그들의 진영에 두는 습관이 있었다(Rawlinson). 그렇기 때문에 디글랏 빌레셀을 방문하러 갔던 아하스는 그 단을 쉽게 볼 수 있었던 것이다. 한편 아하스가 앗수르의 제단을 보고 그대로 똑같이 만들게 한 이유에 대해서는 분명치 않다. 그레이(Gray)는 이것을 아하스가 앗수르에 대한 전적인 복종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었다고 본다. 그러나 이와는 달리 대하 28:23에서는 그 단을 '다메섹 신들'에게 제사드리기 위해 세운 것이었다고 말하고 있어 제단을 본떠서 만든 이유를 더욱 불분명하게 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하스가 앗수르의 제단을 본떠 만든 것이 앗수르 왕에게 아부하기 위해 자원해서 그렇게 했음을 부인할 수는 없다(Pulpit Commentary).

 제사장 우리야 - '여호와의 빛이시다'라는 의미는 '우리야'라는 이름은 성경에서 '우리' 또는 '우리야'로 나타난다. 8:2에서 이사야는 그를 '진실한 증인'으로 평가하고 있는데 본장에서 그의 역할을 볼 때 반드시 그런 것만은 아닌 듯하다. 왜냐하면 그는 왕의 배교적인 명령에 대해 제사장으로서의 권위로 한 마디의 비판도 없이 그대로 고분고분하게 순종하였기 때문이다(11,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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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왕하16:11]

본절에서는 아하스가 무슨 목적으로 그 단을 만들게 했는지 분명히 알 수가 없다. 아하스가 이 단을 만들라고 제사장 우리야에게 명령했을 때 우리야는 제사장으로서 이일에 대하여 아무런 칭찬도 정죄도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아하스가 여호와 숭배를 디글랏 빌레셀처럼 개인적인 안위를 도모하기 위한 목적으로 시행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제사장 우리야는 이 일에 대한 평을 회피한 것 같다. 그러나 온 백성을 하나님께로 인도하고 하나님의 규례의 법도를 지키도록 교육해야 할 책임이 있는 제사장이 특정한 왕에게만 복속되어 하나님의 계명을 버리고 죄범하는 것을 수수 방관했다는 것은 결코 바람직한 일이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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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왕하16:12]

 단을 보고 - 아하스는 다메섹에서 그랬던 것과 같이 또 다시 눈으로 단을 보자 곧장 충동에 이끌려 제사를 드리게 된다. 그런데 여기에 나타난 '본다'라는 말에 해당되는 히브리어는 '라아'로서 단순히 보는 것 뿐만 아니라 '즐기다', '준비하다', '나타나다'라는 의미가 있다. 그래서 이는 아하스가 단을 보고 마음으로 흡족히여겨 제사를 준비해서 행동으로 나타냈음을 시사한다.

 그 위에 제사를 드리되 -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와야알 알라이우'에 대한 해석에 있어서 학자들의 견해는 매우 다양하다. (1) NEB'그 계단 위에 올라갔다'(mounted the steps)로 번역한다(Luther, De Wette, B hr). (2) KJV'그것을 위하여 드렸다'(on its behalf)로 번역한다. 즉 이 말은 새 단의 건축을 기념하기 위해 기념식을 올렸다는 뜻이다(Gray). 그러나 '오르다'를 뜻하는 '알라'는 전형적인 '번제'를 가리키는 용어로 사용되었음을 고려해 볼때 (Davidson) 이는한글 개역 성경과 같이 번역하는 것이 당연한 것 같다. 그래서 본절은 앗수르의 제단을 본뜬 단을 아하스가 개인용으로 삼아 제사드렸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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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왕하16:13]

 불사르고 -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야크테르''불태우다'라는 동사 '카타르'의 히필형(Hihpil ; 사역형 능동)이다. 그런데 이 동사가 하필형으로 사용될 때는 '제물을 태우는 것'을 나타내고, 피엘형(Piel : 강조형 능동)으로사용될 때는 '분향하는 것'을 나타낸다. 그래서 본절에서는 '제물을 불에 태우는 것'을 말한다. 자기의 번제와 소제 - 에서 3인칭 단수 소유격 형태인 '자기의'(, 3인칭 단수접미어)는 일반 백성들이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와는 다른 왕 자신을 위한 제사임을 암시한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솔로몬과 같이(왕상 8:63) 왕이 직접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다는 의미로 이해해서 '자기의'라는 말을 해석해서는 안 된다(Gray). 

 

 수은제 - 성경에서는 화목제 혹은 수은제로 나와 있는데 이 제사에는 세 가지가 있다. 즉 감사제(thank - offering), 서원제(vow - offering), 자원제(free - willoffering)가 그것인데 '감사제''지나간 축복에 대해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 '서원제''장차 받을 축복의 조건 제사''자원제'는 축복에 대한 조건이라기보다는 '기도에 대한 보조 제사' 형식으로 드렸다. 그리고 제물은 가축 중에서 암수를 가릴것 없이 흠없는 것으로 드렸는데 기름 바른 무교병을 같이 드렸다. 제사 드리는 순서로는 제물에 안수한 후 잡아서 제단에 피를 뿌리고 다음과 같은 3부로 나누어 드렸다.(1) 내장에 덮인 기름, 콩팥, 간에 덮힌 꺼풀과 꼬리를 제단 위에서 불사르고, (2)오른쪽 어깨와 가슴은 제사장에게 주고, (3) 남은 것은 제주(祭主)가 먹되 감사 제물은 그날에, 자원제물이거나 서원 제물이면 다음 날까지 다 먹되 남은 것은 진영 밖에서 불살랐다(3:1-17 ; 7:11-21, 28-34 ; 9:18-21). 한편 '수은제'만을 지칭할 때는 '손을 펼친다'란 뜻의 히브리어 '야다''토다'가 쓰여진 듯하다(4:5). 그러나 '수은제'는 일반적으로 '감사제'와 같은 의미로 혼용했기 때문에 성경에서는 대부분 감사제를 나타내는 즉 '쉐람'을 사용했다. 그런데 본절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원문에는 '쉐람'으로 되어 있는데 이를 '감사제'로 하지 않고 왜 '수은제'라고 번역했는지에 대해서는 그 이유를 분명히 알 수가 없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감사제''수은제'라는 표현을 혼용했기 때문에 별 문제가 없다(7:12 ; 22:29). 한편 본제사에 대해 KJV, LB, RSV의 영역판에서는 '화목제'(peaceofferings)로 번역되어 있고 NIV 영역판에서는 '친교제'(fellowship offerings)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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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왕하16:14]

 놋단 - 이에 대해서는 겔 9:2을 참조하라. 70인역(LXX)에는 ''에 해당하는 적절한 단어가 없다. 그래서 혹자는 맛소라 학자들이 아하스의 새 단과 구별하기 위해 이전에 있던 단, 즉 솔로몬이 만든 단 앞에다 ''이라는 단어를 적절하게 삽입해 넣은 것이라고 본다(Burney). 그러나 15절 후반부에 나오는 '놋단'이라는 단어와 중복을 피하기 위하여 70인역(LXX)에서 ''이라는 단어를 생략했다고 볼 수도 있으므로 버니(Burney)의 제안을 불필요한 것으로 여겨진다. 한편 제단은 제사를 위해(8:20) 분향하는(30:1, 7, 8 ; 1:10, 11)기구이다. 그런데 조각목으로 만든 후 놋으로 쌌기 때문에(27:2) 일명 '놋단'이라고 불리는 것이다(39:39 ; 왕상 8:64).

 그 단북편에 두리니 - 즉 다시 말하면 아하스의 명령에 의해 만든 새 단은 성소의 정면 중앙에 위치 하도록 하고 옛 솔로몬이 만든 놋단은 한쪽 구석에 치워져 버렸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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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왕하16:15]

 이 큰 단 위에 불사르고 - 여기서 말하는 '큰 단'이라는 것은 왕상 8:64에서 솔로몬의 놋단이 작았다는 기록과 대조가 된다. 그러나 본절의 '큰단'은 솔로몬의 단보다 규모가 커서 그렇게 불리워진 것은 아니었다(Rawlinson). 그렇게 큰 단이라고 불리워진 것은 아마도 아하스의 새 단이 현관과 성전 바로 정면에 위치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혹자는 아하스의 단이 솔로몬의 단보다 컸기 때문에 '큰 단'이라고 불렀다고 생각한다(Keil & Delitzsch, Vol. II, P. 406). 한편 어떤 주석가는 솔로몬의 단이 작아서 그로 인한 불편을 없애기 위해 단을 교체했다고 주장하나(Hobbs) 그것은 설득력이 있는 설명이 아니다. 왜냐하면 아하스는 앗수르 왕에게 아부하기 위해 단을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10) 그 단이 보기에 좋아서 새 단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하스가 제사장 우리야에게 명했던 각종 제사는 겔 46:13-15에 기록된 것과 일치할 뿐만 아니라 율법적으로도 조금도 어긋남이 없었다(29:38-42 ; 28:2-8). 그렇다고 해서 그가 행한 제사가 배교적인 행위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Hobbs)은 무리다. 왜냐하면 새 단은 앗수르의 양식에 의한 것이기 때문에 우상을 숭배하는데 적합한 것이지 하나님을 섬기는데 알맞은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나의 물을 일에 -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리비케르'의 해석에 관해서학자들 간에는 견해가 매우 다양하다. (1) 혹자는 이것을 '나의 생각해 볼일'로 해석한다(Keil, Rawlinson). 즉 다시 말하면 '내가 그것에 관해서는 좀더 생각을 해서 앞으로 조치하도록 하겠다'라는 뜻이라고 한다. (2) 혹자는 '비케르''구하다' 또는 '묻다'라는 뜻이 아니라 '주의하다'라는 뜻이라고 한다(B hr). (3) 또한 다른 학자들은 '비케르''구하다' 또는 '기도하다'라는 뜻이라고 한다(Thenius,Hobbs). 한편 이 '비케르'라는 단어가 레 13:27, 33에서는 병든 사람의 피부를 '살핀다'라는 뜻으로, 27:4에서는 '기도'라는 의미로, 20:25에서는 물건을 '주의깊게 살핀다'는 뜻으로, 그리고 겔 34:11, 12에서는 '잃어버린 것을 찾는다'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그러므로 이 단어는 '구하다', '기도하다'라는 용어로도 사용될 수 있다. 그러나 이렇게 다양한 의미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하스가 한 말은 '내가 그것을 다시 배치 하겠다'이다(Wycliffe). 왜냐하면 본절과 평행구절인 대하 28:23에는아하스가 '다메섹의 신들에게 제사했다'라고 증거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은 아하스가 아람 왕들의 신들에게 제사를 지내 그 신들의 도움을 받으려고 했던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볼 때 '새 단'은 번제단으로 사용하고 '놋단'은 기도 제단으로 사용했다는 주장(Hobbs)은 설득력이 없다. 왜냐하면 '새 단'은 번제단으로 사용했을지라도 놋단은 결국 치워버렸기 때문이다(14, Rawlinson). 한편 본서에서는 '하나님께 구한다'는 말을 '비케쉬'로 표현하고 있는데 이것은 '비케르'의 동의어로 볼 수 있다(Hobbs, Theni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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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왕하16:16]

 제사장 우리야가 아하스 왕의 모든 명대로 행하였더라 - 비록 제사장 우리야가 하나님 앞에 진실된 증인이었다 할지라도(8:2) 뚜렷이 하나님의 율법에 어긋나는 아하스의 명령을 그대로 순종한 것은 잘못이다. 이것은 파숫군이 칼이 임함을 보고도 나팔을 불지 아니하는 것과 같다(33:6). 반면에 세례 요한은 헤롯의 잘못을 과감하게 꾸짖었으며(6:18), 예수께서도 대제사장과 바리새인들 그리고 율법사와 서기관들과 같은 자들의 잘못을 적나라하게 책망하셨다(23:1-36). 그러므로 교회의 지도자들도 매일의 삶 가운데서 종교적인 개혁은 물론 정치적인 개혁까지 신경을 써서 사회가 하나님 말씀 가운데서 굳게 설 수 있도록 힘써야 하겠다. 만일 그렇지 않고 우리야 처럼 잠잠하면 하나님께서는 죄 가운데서 죽은 자들의 피값을 말씀을 맡은 지도자들에게서 찾으실 것이다(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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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왕하16:17]

 물두멍 받침의 옆판을 떼어 내고 - '물두멍'(대야)은 물을 담기 위해 만든 뚜껑없는 원형 물통을 말한다. 이것은 바퀴 달린 받침 위에 놓여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었으며, 또한 받침과 분리시킬 수 있도록 만들어졌다. 그 용도는 제사장들의 손발과 희생제물을 씻는 데 사용되었다. 모든 제사장들은 여호와의 제단에 나아가서 그들의 공식적인 임무를 수행하기 전에 반드시 손발을 씻어야만 했던 것이다(30:19-21). 이 물두멍의 용량은 40(1밧은 22L로 계산하면 880L), 크기는 직경이 4규빗(1.82m)이었다. 그리고 성전에서 그것의 위치는 제사장의 뜰(안뜰) 좌우편에 각각 5개씩 두었다. 한편 성막에서는 그것을 성막과 제단 사이에 두었는데(40:30), 성전에서 그렇게 하지 않은 것은 편리를 고려했기 때문인 것 같다. 그리고 더욱 자세한 물두멍의 구조에 대해서는 왕상 7:27-39을 참조하라. 한편 아하스가 이와같이 성전의 구조를 훼손시킨 목적은 분명치 않다. 혹자는 '앗수르 왕에게 선물로 보내기 위해' 그렇게 했다(Ewald,Thenius)고 하나 전혀 근거가 없다. 그리고 혹자는 아마도 아하스가 성전 운영을 효과적으로, 또는 정확하게 하기 위해서 그것을 옮겼다고 하나(Hobbs)이에 대한 근거 또한 찾지 못한다. 그래서 우리는 아하스가 이같이 행한 것을 '우상이 있는 신전이나 왕궁 같은 곳에 옮겨 붙이기 위한 것(Keil & Delitzsch, Vol. III, P. 407)으로, 혹은단순히 제단이 바뀐 것과 때를 같이하여 여호와 신앙에 대한 흔적을 지우기 위해 성전안의 구조를 '파괴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Rawlinson). 한편 아하스가 앗수르 왕디글랏 빌레셀(Tiglath - pileser)을 두려워하여, 그가 예루살렘에 올 것을 대비해 그의 탐욕을 자극할 만한 것을 제거했다는 혹자의 주장(Wycliffe)에 대해서도 쉽게 이해할 수 없다. 왜냐하면 만약 그렇다면 물두멍에 붙어 있는 옆 판 뿐만 아니라 물두멍과 받침 전체를 없앴어야 하기 때문이다(Keil & Delitzs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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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왕하16:18]

 낭실 -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메싸크''물건을 덮다', '어떤 장소를 덮다'라는 뜻의 동사 '싸카크'에서 파생된 것이다. 이에 대한 영역본을 살펴보면 NEB'구조물'(structure), RSV'덮은 길'(covered way), KJV'밀실'(covert)로 서로 다르게 번역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들보다 더 만족스런 번역은 없는 듯하다. 한편 본 낭실은 '안식일에 쓰기 위하여 성전에 건축한 낭실'인데 이는 바닥에 '무엇을 깔아 놓은 곳'으로서 왕의 성전을 방문했을 때 자리 잡던 장소였을 것이다(Keil & Delitzsch). 들어가는 낭실 이것은 위에서 언급된 '낭실'과는 다른 것으로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마보', '입구'라는 뜻이다. 이것은 솔로몬에 의해 만들어진 것으로서(왕상 10:5) '왕이 성전으로 들어갈 때 거치는 계단'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공동 번역에서는 '바깥 대문'으로 번역하였고, 대부분의 영역본에서는 '입구'(entry)로 번역하였다.

 앗수르 왕을 인하여 - 대부분의 주석가들은 이것을 '앗수르 왕을 두려워 하여'로 번역한다(Keil, Rawlinson). 왜냐하면 아하스는 앗수르 왕 때문에 이 두 낭실을 여호와의 전으로부터 다른 곳으로 옮겼기 때문이다. 한편 다른 주석가는 이것을 '앗수르왕 앞에서'로 번역하는데 이것은 대하 28:20, 21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아하스는 앗수르 왕이 올 것을 대비하여 이런 조치를 취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본절의 이러한 표현은 앗수르 왕이 그것을 보고 달라고 요구할까 걱정해서이기도 하지만(B hr) 속국의 왕으로서의 태도를 반영한 것이기도 하다(Hob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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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왕하16:19]

역대기서는 열왕기서에서 발견할 수 없는 다음과 같은 중요한 사실을 첨가해 아하스의 치적에 대한 바른 평가를 할 수 있게 한다. (1) 남유다의 아하스가 북이스라엘의 베가에 완전한 패배를 당함(대하 28:5). (2) 아람에게 패함(대하 28:5). (3) 에돔에게 패배함(대하 28:17). (4) 통치 기간 중 남쪽의 많은 지역을 블레셋에게 빼앗김(대하 28:18). (5) 다메섹의 우상을 숭배했으며 오히려 그것들에 의해 망한 사실(대하28:23). (6) 그의 통치 말기의 성전 폐쇄(대하 28:24), 낭실 문을 닫음(대하 29:7), 등불을 끈 것(대하 29:7), 그리고 하나님께 제사드리지 않고 분향을 하지 아니한 것(대하 29:7). (7) 마지막으로 유다 각 성읍에 산당을 지어 우상 숭배를 조장한 것(대하 28:25)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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