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열왕기하(구속사)

열왕기하15:8~37,이스라엘과 유다의 죄

호리홀리 2015. 9. 2. 10:26

이사랴의 삼십 팔 년에. - 여기서 말하는 '아사랴의 38'이란 그의 부친, 즉 아마샤(B.C.796-667)와 함께 섭정한 24년을 합하여 계산한 것이다.

 스가랴가...왕이 되어. - 여기에 나오는 북왕국의 왕 스가랴(B.C.753-752와 대하26:5에 나오는 스가랴 선지자는 동명 이인(同名異人)이다. 한편 본절에 언급된 '스가랴'라는 이름은 '여호와께서 기억하신다'라는 경건한 뜻을 가지고 있으나 6개월 동안의 그의 치적을 살펴보면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죄에서 결코 떠나지 않았음을 알 수있다(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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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왕하15:9]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죄. - 북이스라엘의 초대왕인 여로보암은 백성의 종교심을 묶어 놓기 위해 우상 정책을 쓴 장본인이다(왕상12:25-33). 그래서 그는 하나님의 징벌로 말미암아 재위 22년에 죽고 그 아들 나답도 재위 2년 만에 죽고 만다(왕상14:13-20; 15:25-28). 특히 그가 만든 금송아지 우상은 매우 가증스러운 것이였기 때문에 결국 하나님의 심판을 받은 것이다(왕상12:28-33). 그래서 그후부터 그는 금송아지 우상의 대명사가 되었다. 한편 스가랴도 단(Dan)과 벧엘(Bethel)에서 송아지 숭배를 했기때문에(Wycliffe, Keil & Delitzsch) 이같이 표현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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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왕하15:10]

 야베스의 아들 살룸. - 여기서 아베스는 인명이 아니라 지명(地名)이다. 따라서 이 말은 살룸이 요단 동편의 야베스-길르앗 출신이라는 것을 나타내 주는 말이다(Hobbs). 그리고 이쉬다(Ishida)의 논문(Royal Dynasties, p.173-176)을 보면 그 당시 요단 동편 지역(Transjordan)과 서편 지역(Thiele). 따라서 살룸이 스가랴를 모반한 것은 바로 그러한 사실을 입증해 주는 것이다. 한편 요세푸스에 의하면 살룸이 스가랴의 친구였으나 왕위 계승 문제로 스가랴를 죽였다고 한다(Rawilnson, B hr). 그리고 본절에 언급된 지명 야베스는 오늘날의 '야습'(Yasuf)에 해당되는 곳이다(Gray).

 

백성 앞에서 쳐죽이고. - 본절의 '백성 앞에서'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카발 암'의 해석에 대하여 학자들에 따라 그 견해가 아주 다양하다. (1)대다수의 중세 맛소라 사본에는 그냥 한 단어로 '카발암'으로 쓰여 있으며 70인역 바티칸 사본(Septuagint; G MS, Codex Vaticanus)에도 '케블라암'으로 번역되어 있다. 그러나 (2)맛소라 사본(Masoretic Text)과 다른 헬라어 역본에는 '백성들 앞에서'(, 카테난티 투 라우)로 기록하고 있으며 KJV도 그렇게 번역하고 있다. (3)루시니안 헬라어 역본(Septuagint;Lucianic recension)에는 '엔 이블라암'으로 번역되어 있는데 대다수의 주석가들은 이것을 옳게 보고 있다(T.R. Hobbs, Word BiblicalCommentary, Vol. 13, p.195-196). 그리고 학자들이 그렇게 보는 데는 다음과 같은 이유가 있다. (1)히브리어 '카발암'이라는 명사에 대해서 전혀 알려진 바가 없다. (2)이것이 '백성들 앞에서'라는 뜻의 '카발 암'이라면 '백성'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 앞에 정관사가 붙어 있거나 아니면 이 단어가 부사로 사용되었다고 보아야 하는데 부사로 볼 때 문맥상 잘 어울리지 않는다. (3)따라서 '카발암'9:27에 나오는 '이블르암'에 대한 오기(誤記)라고 밖에 볼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이블르암'은 유다 왕 아하시야가 예후의 칼을 피해 도망하다가 시해된 곳이다(9:27). 그래서 스가랴는 아하시야가 죽은 그곳에서 처형당했다고 본다. 한편 본절의 표현을 (2)의 경우와 같이 보는 가운데서 공개적으로 사형시켰다는 말이다(Keil & Delitzsch,Vol. III, p.389; Wycliffe). 그런데 스가랴를 공개 처형했음에도 불구하고 백성이 동요하거나 복수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그들의 죄악성과(Wycliffe) 스가랴의 행악을 잘나타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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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왕하15:12]

본절은 10:28-31에 기록된 예언에 대한 성취 부분이다. 이와같이 예언의 성취를 언급함으로써 본서 기자는 이스라엘과 유다의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을 부각시키고 있다.

 네 자손이 이스라엘 위를 이어 사 대까지 이르리라. - 북쪽 이스라엘 건국 이래 가장 강력한 종교 개혁을 시도했던 왕은 예후다(10:15-27). 그러나 그도 다른 이스라엘 열왕과 같이 여로보암이 범한 금송아지 숭배의 길에서는 떠나지 않았다(10:29). 그 결과 하나님께서는 예후 왕가가 지속되지 못하고 예후 이후 4대째만에 끝날 것이라고 말씀하였다(10:30). 이러한 하나님의 심판적인 예언은 스가랴가 즉위한지 6개월만에 성취되었다. 그러나 여기서 드러나는 한 가지 특징적인 사실은 예후가 하나님 앞에서 어느 정도 신실하게 행하였으므로, 4() 80년이라는 세월 동안 이스라엘을 통치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예후 한 사람의 적은 선행을 기억하시고(6:7-10; 10:24) 그의 자손들에게 복을 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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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왕하15:13]

 살룸이...한 달을 치리하니라. - 이와 같이 살룸이 한 달 밖에 왕위에 있지 못한 것은 북왕국 이스라엘의 정국이 얼마나 불안정했는가를 보여 준다. 그리고 이러한 사실 즉, 짧은 기간 동안 통치할 수 밖에 없는 당시의 상황을 통해 인간의 부질없는 권력욕을 발견하게 된다. 한편, 백성들의 의사와 하나님의 뜻을 무시하면서까지 인간이 만들어낸 이러한 자리는 아침이면 사라질 안개와도 같은 권력인 것이다(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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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왕하15:14]

 가디의 아들 므나헴. - '므나헴'이란 이름은 '슬퍼하다', '후회하다', '위로받다'라는 뜻의 히브리어 동사 '나함'의 피엘형(Piel:강조형 능동) 분사 형태로서 '위로자'라는 뜻이다. 그리고 그는 '장군', 혹은 '총사령관'의 지위를 갖고 있었던 자인 듯하다(Josephus, Keil & Delitzsch), 그런데 그가 살룸에 대한 반격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다음과 같은 사실에서 기인했을 것이다. (1)이스라엘 왕국은 '군사 군주제'(military monarchy)이다. (2)살룸 또한 왕위 찬탈자이다. (3)예후왕가가 멸망했기 때문에 왕위는 군대 장관에게로 돌아가야 한다(Wycliffe, p.354). 한편 '가디의 아들'이란 가디가 그의 출신지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아마도 아버지의 이름이 '가디'였던 것으로 추측된다. 그리고 '가디'라는 이름은 '가디야후'(Gaddiyahu)의 단축형으로서 주로 사마리아 지역에서 발견되던 인명(人名)이다(Gibson).

 살룸을 거기서 죽이고. - 요세푸스(Josephus)가 전하는 유대 전승에 의하면 므나헴은 스가랴의 군대를 이끌고 살룸에게 보복했다고 한다(Hobbs). 한편 이것은 므나헴이 디르사에서 태어나긴 했으나 그가 므낫세 지파의 일원이었기 때문에 당시의 지파 간의 전쟁이 치열했다는 논증의 좋은 증거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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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왕하15:15]

본절에서 살룸의 사적을 기록하고 있는 것을 볼 때 비록 그의 통치가 짧은 기간 동안이기는 하지만 그의 통치는 합법적이었던 것 같다. 왜냐하면 그의 치세가 공식적으로 역대 왕들의 사적을 기록한 역대 지략에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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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왕하15:16]

 딥사. - 왕상4:24에 따르면 '딥사'는 유프라테스 강변에 있는 한 성읍이다(Keil &Delitzsch, Rawilnson). 그러나 일부의 학자들은 므나헴이 그곳까지 정복의 손길을 뻗쳤다고는 보지 않는다(B hr). 그래서 본절에 언급된 '딥사'는 유프라테스 강변의 딥사(Thapsacus)가 아니라 '디르사 근처에 있는 딥사'라고 주장한다(Septuagint; Lucianicrecension)에도 '딥사''타푸아'(Tappuah)로 수정되어 있는데 대부분의 학자들은 이견해를 옳다고 본다(Hobbs). 그리고 수16:8에 보면 '타푸아'(답부아)는 북쪽 에브라임지경에 위치했다고 하는데 이곳은 디르사에서 그리 멀지 않은 지역에 위치하고 있다.그리고 무엇보다도 이곳은 여로보암 2세가 정복하여 되찾은 북방 경계선이 있는 곳이기 때문에(14:25,28) 그 지역을 이스라엘 땅으로 수호하기 위하여 므나헴이 원정을 한 것으로 보인다(Ishida). 그러나 '성문을 열지 않았다'는 본절의 표현은 그 지역의 사람들이 므나헴의 통치에서 벗어나려고 하였음을 보여 준다(B hr).

 아이 벤 부녀를 갈랐더라. - 이와 같은 잔인한 행위는 고대 근동의 전쟁에서 나타나는 일반적인 특징이다. 그리고 그 뿐만 아니라 전쟁에서의 승리자들은 그렇게 하는것을 당연한 의무로 생각한 것 같다. 한편 '갈랐더라'는 말은 히브리어 '빅케아'인데 이는 '갈기갈기 찢다'란 뜻의 '바카'에서 온 말이다. 즉 이것은 임신한 여인의 몸을 칼로 난도하는 모습을 회화적으로 나타낸 표현으로 그들의 잔인성을 보여 준다. 그리고 이런 잔인한 풍습에 관해서는 8:12과 사13:18; 13:16; 1:13을 참조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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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왕하15:18]

므나헴(B.C.752-742)의 행적에 대한 본절과 같은 주석은 아주 전형적인 것이다. 즉 이러한 방식의 기술과 표현은 북이스라엘의 말기에 와서 규칙적으로 자주 언급되고 있다.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죄. - 9절에 나타난 표현과 마찬가지로 이는 하나님 앞에서 악행을 일삼았음을 나타낸다. 특히 우상 숭배 중에서도 금송아지 숭배에 의한 죄악을 범했을 경우에 이렇게 표현했다(왕상12:28-30). 그리고 이러한 말은 북왕국의 초대왕 여로보암으로부터 멸망의 전조가 나타나는 말기까지 대부분의 열왕들이 악한 왕이었음을 암시적으로 나타내는 것이다.

 

[왕하15:19]

 앗수르 왕 불이 와서...치려하매. - 앗수르 왕 ''(Pul)의 정체에 대해서는 바벨론 열왕의 목록을 보면 알 수 있다. 거기를 보면 ''왕은 바로 디글랏 빌레셀(Tiglath-Pileser,III; B.C.745-727)과 동일 인물로서 그는 바벨론을 2년간 지배했었다. 그런데 그때 그에게 바벨론식으로 붙여진 이름이 ''인 것이다. 또 디글랏 빌레셀의 비문을 보면 앗수르가 사마리아의 므나헴으로부터 공물을 받았다고 기록하고 있어 이를 더욱 뒷받침해 준다(Luckenbill). 그리고 북이스라엘 왕 므나헴이 앗수르에 공물을 바친 때는 B.C.743년 쯤으로 디글랏 빌레셀 제 3년에 해당하는 것 같다(Thiele). 한편 앗수르의 불 왕이 사마리아에 온 것이 침략인지 아니면 므낫세의 초청에 의한 것인지에 대하여 견해가 다양하다. 그런데 이렇게 견해를 달리하게 된 것은 '와서...치려하매'로 번역된 히브리어 ''의 해석 때문이다. 혹자는 이것을 (1)침략을 나타내는 용어로는 쓰일 수 없다고 보는 반면에(Hobbs), (2)다른 사람들은 이 단어가 침략을 표현하는 경우로 쓰인 예가 있다고 보아(34:25) 이를 침략을 나타내는 행위로 본다(B hr). 그러나 본서 기자는 침략을 나타내는 용어로는 주로 '알라'를 썼으며(6:25; 12:17; 17:3,5), 본절에 나타난 것과 같은 ''를 쓰지는 않았다. 따라서 불 왕이 온 것을 '침략'으로 단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의 방문이 므나헴의 초청에 의한 것인지(Thenius) 므나헴을 정당한 왕으로 인정해 그를 왕위에 앉히기 위한 것인지(Ewald)에 대해서는 분명치 않다. 한편 성경에서는 본절에서 최초로 앗수르 제국에 대한 언급을 함으로 인해 앗수르가 강대국으로 팽창하는 과정에 있음을 시사해 준다(Wycliffe). 그리고 본절에 나타난 앗수르 왕 불 왕위

를 찬탈하여 제국을 새롭게 부흥시킨 자였다. B.C.743년이거나 B.C.738년에 일으킨 디글랏 빌레셀의 전쟁은 북이스라엘에게까지 파급되어 므나헴에게서 공세를 내게 했다. 앗시리아 왕에게 공세를 바침으로써 므나헴은 앗시리아 통치자의 신복 중 한 사람이 되었다. 그래서 디글랏 빌레셀이 바벨론 왕이 되었을 때 므나헴은 '불루'라는 이름을 얻었다(바벨론 왕 명부에도 그렇게 기록되었음). 팔레스틴 지방에서는 '므나헴'보다도 그의 바벨론식 이름이 더 널리 알려졌던 것 같다.

 은 일천 달란트. - 드라크마(Drachma)가 노동자의 하루 품삯에 해당하는 금액(15:8)이라고 할 때 은 한 달란트(Talent)는 약 6,000 드라크마에 해당하는 돈이다(38:27; 18:24). 그렇기 때문에 은 일천 달란트라고 하면 6백만 드라크마이다. 노동자 하루 품삯을 약 2만원으로 계산할 때 이는 약 1,200억원에 해당된다. 이처럼 많은 돈을 주고 므나헴은 자신의 정권을 유지시켰던 것이다.

 나라를 자기 손에 굳게 세우고자하여. - 므나헴이 앗수르 왕에게 많은 공물을 바친 것은 요단 동편으로부터의 위협을 제거해 주도록 부탁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성공은 하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25). 한편 앗수르 왕 디글랏 빌레셋에게 조공을 주어 자신의 불안정한 정권을 유지하고자 했던 그의 행위는 성전의 은과 금으로 전쟁에서 벗어나려했던 남유다의 아사(왕사15:18), 아하스(16:8), 히스기야(18:15)에 버금가는 악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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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왕하15:20]

토색하여. -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요체''나가다'라는 뜻의 동사 '야차'의 히필형(Hiphil:사역형 능동)이다. 그래서 '세금을 징수하다'라는 뜻의 동사 '에리크'(23:35)는 다르다. 그리고 이 단어를 문자적으로 직역하면 '나오게 하다'라는 뜻이 되는데 이것은 므나헴이 어마 어마한 돈을 세금으로 징수한 것이 아니라 군사력을 동원하여 부자들에게서 돈을 빼앗은 것임을 암시한다. 한편 자기 동족 중 딥사의 아이 밴 여인의 배를 가를 정도로 잔인했던 므나헴은(16) 바닥난 재정을 메우고 자신의 위치를 확고히 다지기 위해 부자들에게 토색하기에 이르렀다. 이것은 당시 이스라엘의 정치적, 경제적 상황이 매우 심각했음을 의미한다. 사회가 어려움에 빠졌을 때 악한 통치자와 관원은 자신의 배를 채우기에 급급하지만 선한 통치자와 관원은 자기 것을 희생해서라도 위기를 극복하려고 한다. 한편 므나헴은당시 정치와 경제의 지주였던 부자들에게서 토색하기에 여념이 없었던 바, 공의를 행하기 보다는 자신의 배만 채우고자하는 불한당같은 지도자에 불과했다. 어느 나라든지 지도자들이 이런 상태에 빠져 있으면 결코 부흥될 수 없다. 성도들은 이 같은 지도자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공의와 정의에 입각하여 통치를 하도록 권면하여야 한다.

 은 오십 세겔. - 은 한 세겔(Shekel)은 일반 노동자 4일의 품삯에 해당된다(30:24; 삼하24:24). 그렇기 때문에 은 오십 세겔은 200일에 해당하는 노동자의 품삯이다. 만약 노동자의 하루 품삯을 2만원이라고 한다면 이것은 400만원에 해당하는 돈이다. 그런데 은 오십 세겔로 은 일천 달란트를 만들려면 3만명 정도의 사람에게 강제로 거출해야 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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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왕하15:23]

 브가히야. - 므나헴의 아들 브가히야(B.C.742-740) 역시 2년 밖에 통치하지 못하였는데 이것은 당시 북왕국의 불안정한 정치적 상황을 시사해 주는 것이다

 

 [왕하15:25]

 그 장관. - 여기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솰리쇼''그의 장관'이란 뜻으로 23절의 브가히야와 연결되는 말이다. 그래서 이 말은 '브가히야의 장관'을 가리키는 용어이다. 한편 요세푸스(Josephus)는 이 사람을 '천부장'이라고 하고 혹자는 이사람을 '전속 부관'이라고 한다(Keil & Delitzsch).

 베가. - 이 이름도 '브가히야'와 같은 어근인 '파카흐'에서 파생하였다. 그런데 하조르(Hazor)에서 발견된 그의 비문에는 그의 이름이 '페가 삼다르'로 기록되어 있다(Y. Yadin). 한편 본절에서 '르마랴의 아들 베가'라고 표현한 것으 베가 보다도 그의 아버지 르말랴가 당시에는 더 잘 알려진 인물이었기 때문(7:4; 8:6)인 듯하다(Rawilnson). 그리고 호위대의 대장이었던 베가가 왕을 반역하였다는 것은 그 군대의 기강이나 충성심이 얼마나 해이(解弛)해졌는지를 잘 나타내 준다(Wycliffe).

 왕궁 호위소에서. - 이것은 왕궁을 보호하고 방어하는 '요새' 또는 '높은 망대'를 가리킨다. 그러므로 반대로 이곳에서 왕궁을 공격하기는 매우 용이했을 것이다. 요세푸스에 의하면 브가히야 왕은 베가에 의해 살해되기 전에 이곳에서 친구들과 함께 잔치를 베풀었다고 한다.

 아르곱과 아리에를. - 여기서 대부분의 역본들은 이 구절을 생략하거나 29절에 삽입시킨다. 왜냐하면 아르곱은 신3:4,13에서 언급하고 있는 바와 같이 요단 동편 상부에 위치한 지역의 지명일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원문에서는 이것이 불확실하게 나타나 있어서 아르곱과 아리에가 인명(人名)인지 지명(地名)인지 의문을 남겨준다. 만약 두 이름이 인명(人名)이라면, 이들은 베가와 함께 공모한 사람들이었는지 또는 브가히야와 함께 살해된 사람들이었는지 결론지을 수 없다. 1886년 쉬타데(Stade)는 맛소라 사본의 아르곱과 아리에라는 어구가 25절과 가까운 29절에 대한 주석이었다고 시사한 바 있다. 이는 '길르앗'이 두 절에 나오기 때문에 필사자가 실수하여 이 두 지명의 주석을 29절 대신에 25절에 포함시킨 것으로 본 것이다. 그리고 아르곱은 '60개의 성읍'을 포함하는 옥의 나라 바산에 있었던 지방이지만(3:4,113,14;왕상4:13), 길르앗(왕상4:13; 32:40; 10:4; 대상2:22)에 속해 있는 '야일의 고을들'(하봇)과는 구별된다. 아르곱의 위치는 신3:4,13,14에 의해 정해져 있는데 그 서쪽 변경에는 그술 족속과 마아갓 족속의 영토(, 오늘날의 골란 고원)가 있다. 한편 유대 역사가 요세푸스(Josephus)는 이를 인명(人名)으로 간주하고 이 사람들을 왕의 친구들로 추측한다(Rawilnson). 그 뿐만 아니라 권위있는 일부 학자들도 이를 인명으로 보고 이 사람들을 '고관'으로 생각한다(B hr, Keil & Delitzsch, Vol.III, p.393).

 길르앗 사람 오십 명으로 더불어 죽이고. - 길르앗 사람들은 건장했기 때문에(대상26:31; 17:1) 왕의 호위를 맡아서 담당했다. 특히 그들은 베가의 명령을 받는 전속부관, 즉 장관의 명령을 받는 직속 부하였다. 한편 혹자는 본절의 표현을 부정하고, 대신 길르앗 50명이 베가를 도운 것으로 이해한다(Keil & Delitzsch, Vol.III, p.3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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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왕하15:27,28]

 베가가...이십 년을 치리하며 - 디글랏 빌레셀(Tiglath Pileser III)의 비문을 보면 앗수르가 B.C. 732년에 베가를 정복했다고 기록되어 있다(29). 그리고 이 앗수르왕은 B.C. 745년부터 727년까지 약 18년간 통치했기 때문에 이 중에서 므나헴의 통치기간 10년과 브가히야의 통치 기간 2년을 제외하면 베가에 해당되는 통치 연수는 불과 6년 남짓하다(Thiele). 그러므로 베가가 20년간 북왕국을 통치했다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한 것이다. 그래서 많은 학자들은 딜리(Thiele)의 주장을 따르고 있는데 그는 여기서 말하는 20년이 북왕국 내의 지파 간에 전쟁이 일어난 햇수를 가리킨다고 본다. 한편 이러한 국내 분쟁이 발생한 기간은 유다 왕 아사랴 38년 즉, 북이스라엘 왕 스가랴(B.C. 753-752) 때부터(8) 남왕국 아사랴 52년까지 약 14년 정도 된다. 그러므로 베가가 왕으로 단독 통치한 햇수는 6년에서 8년 정도로 추측할 수 있다. 이에 대해 달리(Thiele)는 요담 12년까지 약 8년 정도를 베가의 단독 통치 기간으로 보고 있다. 또한 본절에 나타난 베가의 20년간의 톤자치 기간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에 의심을 품는 학자들도 있다. 즉 이 연대는 30, 16:1의 내용과 일치하지 않는다. 그리고 17:1에 의하면 베가의 후임 왕 호세아의 통치 기간은 9년인데, 이렇게 되면 베가의즉위 연도인 B.C. 740년부터 '사마리아 함락'까지의 기간은 29년이 되는 셈이고, 사마리아 함락의 시기도 B.C. 711년경이어야 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그러나 실제로 사마리아 함락은 B.C. 722년에 이루어졌으므로 베가가 20년간 왕위에 있었다는 주장은 역사적인 사실과 맞지 않는다. 그러나 이 연대 문제는 본문을 수정하지 않고도 해결될 수 있다. 즉 베가는 B.C. 740-732년까지 9년 동안 정식으로 왕으로서 통치했으나, 그 이전에도 길르앗 지방을 11년간 다스렸다고 볼수 있는 것이다(25). 다시 말해서 그는 여로보암 2세가 죽고 나서 B.C. 752년경 길르앗 지방을 장악했으며, 계속적으로 이스라엘 전체의 통치권을 잡고자 기회를 넘보다가, B.C. 740년경 앗수르의 후원에 힘입어 쿠데타에 성공했고 이스라엘 왕위에 올랐던 것이다. 따라서 이 길르앗 통치 기간까지 합한다면 그의 통치 기간은 B.C. 752-73220년이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본절을 베가가 '사마리아에서 이십 년을 치리했다'라고 이해하기 보다는 베가가 '사마리아에서 치리했고 또한 이십 년을 다스렸다'라고 이해하는 것이 당시의 상황과 맞는다. 그러므로 전자에대한 의심의 해결 방법과 후반부에 언급된 회의에 대한 해결책을 종합하면 비교적 정확한 해답이 나온다

 

 [왕하15:29]

앗시리아의 디글랏 빌레셀이 이끄는 이 전쟁은 B.C. 739-732년에 일어났다. 앗시리아 침략의 직접적인 이유는 유다왕이 이스라엘과 시리아 사이에 맺어진 동맹 관계에 대항하기 위해서 앗시리아의 도움을 요청했기 때문이다(16:17). 침략의 구실을 찾고있던 디글랏 빌레셀은 이스라엘로 진군하여 갈릴리와 갈르앗 주변의 모든 성읍들을 파괴하고 수많은 백성들을 사로잡아 갔다. 그는 마침내 다메섹으로 진군하여 도시를 약탈하고 아람왕 르신을 처형시켰다(16:9).

 디글랏 빌레셀이 - 이 이름은 19절에 나타난 ''이라는 바벨론식 이름과 동일한 앗수르 왕으로서의 정식 왕명이다. 그런데 대부분의 학자들은 앗수르 왕이 정복을 목적으로 원정한 해가 B.C. 733년 경인 것으로 보고 있다. 이것은 B.C. 743년 경인 것으로 보고 있다. 이것은 B.C. 7431차 출정(29)B.C. 7352차 출정(7:1-9)이후 세번째 출정이다. 그리고 이때에 디글랏 빌레셀은 팔레스틴 전역을 공격하여 이스라엘 도시의 대부분을 정복하였다. 그 뿐만 아니라 그는 다시 B.C. 732년경 다메섹을 주목표로 재침공 했다(Jerusalem Bible).

 이욘 - '폐허'란 뜻을 지닌 이 도시는 이욘 강변에 위치하고 있으며 아벨벳마아가에서 북쪽으로 약 15km 정도 떨어져 있다. 그리고 이곳은 벤하닷의 침략을 받은 납달리 자손의 마을(왕상 15:20)로서 이스라엘의 최북단에 위치한다.

 아벨벳마아가 - '압제하는 집의 초원'이란 뜻을 지닌 이 도시는 기럇 세모나(Qirvat Shemona)의 북쪽에 위치한 오늘날의 '텔아빌'(Tel Abil)과 동일한 곳이다. 한편 이곳은 팔레스틴 북부 갈릴리 상부의 훌레 계곡에 위치했던 성읍(삼하 20:14, 15)으로 정치 선동가 세바가 요압의 추격을 피해 숨어 있던 장소이다(삼하 20:14-22). 또한 이곳은 아람 왕 벤하닷에게 점령당했던 곳이기도 하다(왕상 15:20).

 야노아 - '나머지'란 뜻을 지닌 이 도시의 정확한 위치는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러나 대개 (1) 세겜의 남동쪽 약 10km 지점에 위치한 오늘날의 길벱 야눈(KhirbetYanum)이거나 (2) 악고의 북동쪽 약 16km 지점에 위치한 야노아(Janoah)로 보고 있다. 이외에도 여러 견해가 있으나 최근에는 (2)의 견해가 큰 지지를 받고 있다. 한편 이곳은 납달리에게 배당된 성읍인데 에브라임의 경계 지역으로도 알려진 곳이다(16:6,7).

 게데스 - '성소'란 뜻을 지닌 이 도시는 아벧벱마아가와 하솔의 중간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그리고 이곳은 두로 동쪽 약 36km 지점에 있는 오늘날의 '텔 게데스'(TelKedesh), 혹은 '가데스'로 알려져 있다. 한편 이곳은 납달리 지파에 속한 레위인들의 도피성(19:37 ; 21:32)이었을 뿐만 아니라 바락의 고향이며(4:6) 그가 드보라를 돕기 위해 병력을 집결시킨 장소이기도 하다(4:1-10).

 하솔 - '울타리 마을'이란 뜻을 지닌 이곳은 고대 훌레(Hulh)호수의 남쪽 약 8km지점에 위치한 큰성읍이다. 이곳은 가나안의 수도로서 여호수아에 의해 정복당했다(11:1-13). 그후 재건되어 납달리 지파에게 할당된 후(19:32, 36) 솔로몬에 의해 요새화되었다(왕상 9:15). 한편 이 지역은 1950년 야딘(Yadin)에 의해서 발굴되었는데, 이곳에서 큰 건물들이 불타 파괴된 흔적이 발견되었다. 이것은 아마 디글랏 빌레셀 3세에 의해 파괴된 것으로 추측된다.

 길르앗과 갈릴리와 납달리 온 땅 - 이 지명들은 성경에서 잘 알려져 있다. 그런데 요단 동편의 중부 고원지역에 위치한 길르앗 지방과 갈릴리 지역이 첨가된 것은 그 당시 북이스라엘의 북쪽 지역에 미친 재난의 영향이 얼마나 컸는가를 짐작케 한다. 그리고 디글랏 빌레셀은 이 지역들을 장악함으로써 이스라엘의 북쪽과 갈릴리 방향인 서부지역을 쉽게 얻을 수 있었은 뿐만 아니라 하솔을 장악함으로 인해 다메섹까지의 진출이 용이하게 되었다.

 앗수르로 옮겼더라 - 앗수르의 공식적인 기록들에는 포로에 관한 구체적인 언급이 없다. 그러나 이와 같이 정복자로서 포로들을 납치해 가는 것은 앗수르의 정책상 정당한 것이었다(M. Cagan). 아마도 앗수르는 대외적인 명예를 생각해서 포로에 대한 기록을 생략한 것으로 추측된다. 그러나 본 구절을 역사적으로 증명해 주는 역대서에는 포로로 끌려간 사람들이 속한 지명들이 구체적으로 언급되어 있어 이 사실을 확인시켜준다(대상 5:26). 또한 그후 앗수르의 살만에셀 5(Shalmaneser V, B.C. 727-722)에의해 이스라엘 백성들은 두번째로 포로로 잡혀갔는데 이는 모두 신 28:36의 성취이다(Wycliff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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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왕하15:30]

 요담 이십 년에 - 7:1-8:8을 보면 베가와 아람, 즉 소위 아람과 에브라임이 동맹하여 남왕국 왕 요담의 후계자인 아하스와 싸웠다(16:5). 그런데 본절에서 베가가 요담 20년에 죽임을 당했다는 것은 아무래도 이상하다. 그리고 요담이 예루살렘에서 16년을 통치했다는 33절의 기록과도 이 연대는 맞지 않는다. 이에 대하여 딜리(Thiele)는 베가 17년부터 아하스와 요담이 섭정한 것으로 본다(16:1). 그렇게 되면 요담과 아하스는 4년을 넘게 섭정을 했다는 것인데 이에 대한 성경적인 증거는 매우 희박하다. 그러나 간접적인 증거로 아람 왕 르신(B.C. 750-732)과 북이스라엘 왕 베가가 동맹하여 유다를 친 전쟁이 마치 요담과 아하스 때 두 번 있었기 때문에(15:37 ;16:5) 두 왕의 섭정 기간 동안에 치루어진 전쟁이라 보면 된다. 한편 본절에는 단순히 '호세아가 반역하여 베가를 죽이고 왕이 되었다'고 되어 있다. 그러나 앗수르의 비문에 나타난 내용과 공식 문서들을 참고할 때 당시 북이스라엘의 상황은 디글랏 빌레셀 3세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즉 디글랏 빌레셀은 북이스라엘의 내정까지 깊이 간여해 베가를 죽이고 호세아를 왕으로 세웠던 것 같다. 그러므로 디글랏 빌레셀이 호세아의 반역을 승인한 것으로 추측된다(Rawlinson, Wycliff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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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왕하15:32]

 베가 이 년에...요담이 왕이 되니 - 27절에서 베가가 요담의 아버지 아사랴의 52년즉, 그의 마지막 통치 연도에 왕이 되었다는 기록과 본절의 연대기는 정확히 일치한다. 그리고 '요담'은 여호와의 이름과 '안전한', '경건한', '순결한'이란 의미의 '타맘'이라는 동사가 합성된 형태로서 '여호와는 완전하시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한편 그는 웃시야(아사랴, B.C. 791-739)와 공동 통치했을 뿐만 아니라 아하스(B.C. 735-716)와도 공동으로 섭정했다는 일부의 주장(Thiele, Wycliff)을 받아들인다면 그는 실제로 므나헴 2년부터 통치한 것이다(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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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왕하15:33]

 십 육년을 치리하니라 - 여기서 말하는 16년은 요담이 그의 아버지 아삿랴(혹은 웃시야)와 함께 섭정하기 시작한 해부터를 말한다(Rawlinson, 대하 26:23 ; 27:1). 그리고 요담의 통치 16년은 북이스라엘 왕 베가 17년에 해당한다(16:1).

  사독의 딸이더라 - 사독이 제사장이라는 것이 확실하다면 요담은 제사장 계열과 왕족 계열의 맥을 동시에 이은 자임이 분명하다. 한편 34절을 보면 요담에 대한 평은 그의 아버지 웃시야에 비해 좋지도 나쁘지도 않다. 그러나 대하 27:2의 기록으로 미루어보아 그가 제사장의 딸이라고 간주되는 그의 어머니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 같다. 왜냐하면 그는 부친보다는 성전의 규례를 잘 지켰기 때문이다(34절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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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왕하15:34]

 웃시야의 모든 행위대로 - 본절과 평행 구절인 대하 27:2에서도 요담의 행위에 대해 동일하게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역대서에서는 그가 '여호와의 전에는 들어가지 않았다'는 사실을 추가하고 있어 불경건한 행동을 하지 않았음을 나타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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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왕하15:35]

 여호와의 전의 윗문을 건축하니라 - '윗문'은 안마당, 혹은 윗마당의 북쪽에 있는 문으로서(대하 27:3 ; 9:2) 제물로 바쳐질 것들을 잡는 곳이다. 그러나 이 문은 북쪽 지방으로부터의 침략을 방어할 목적으로 세워진 듯하다. 그리고 이 문은 예루살렘성전의 북쪽문을 말하는데 일명 '베냐민의 윗문'이라고도 했다(14:10). 한편 대하27:3을 보면 요담이 오벧 성을 많이 증축했을 뿐만 아니라 유다의 성읍을 많이 건축했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그가 수도를 요새화하고 성읍을 건축한 것은 당시의 혼란한 국제 상황을 반영하는 것임과 동시에 여호와께 대한 그의 신앙의 자세를 반영하는 것이다(대하 27:6). 한편 역대기 기자는 이 뿐만 아니라 요담과 암몬과의 전쟁에 대해서도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대하 2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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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왕하15:37]

아람 왕 르신과 북왕국 왕 베가와의 동맹은 사 7:1-8:8에 잘 나타나 있다. 그런데 역대기 기자는 암몬과의 전쟁은 언급하면서도(대하 27:5) 본절과 같은 전쟁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을 하지 않는다. 한편 이사야의 기록을 보면 베가와 르신은 다브엘의 아들을 유다의 왕위에 앉혀서 유다를 자신들의 동맹에 가담시키려고 했던 것 같다. 그러나 그 일은 결국 성공하지 못했는데 이 사건 때문에 이사야 선지자는 르신과 베가를 저주했던 것이다(7:7-9). 그리고 이러한 역사적 배경 속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임마누엘' ,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라는 믿음에 대한 예언이 주어졌던 것이다(7:10-14). 한편, 아람이 다브엘의 아들을 유다의 왕위에 앉히려고 한 것은 그를 유다의 왕위에 세움으로 유다의 직접적인 도움을 받아 앗수르의 압박에서 벗어나기 위한 것이었다. 그리고 르신과 베가에 대한 이사야 선지자의 경멸과는 달리 본서 기자는 하나님께서 그들을 사용하여 유다를 징벌하셨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는 저자들의 기록 관점을 나타내 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