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1-19, 유월절 준수
요시야는 율법준수의 일환으로 유월절을 제대로 지키게 된다. 날짜를 2월로 잘못알고 지켰던 히스기야 시대의 유월절과는 달리(대하 30:2), 요시야는 정월 14일에 지킨다. 율법대로 정확히 지킨 것이다. 이 유월절을 지키면서 요시야는 새로운 규율들을 만들어 내었다. 레위족속들에게 새로운 임무를 준다. 성전이 있는 상황에서 법궤이동 임무는 더 이상 필요하지 않으므로 과거에는 제사장에게만 특권적으로 부여되었던 제사업무를 일부 공유하게 한다(35:5-15). 또한 유다민족만의 축제로 끝나지 않고 이스라엘 거민들도 참여하는 축제로 발전시킨다(35:18). 멸망당했던 북이스라엘을 20세 때 행한 개혁에서 소외시키지 않았던 요시야는 유월절 제의에 이들을 다시 포용함으로써 온 이스라엘이 하나가 될 미래를 소망하고 있다. 이런 요시야의 노력에 대해 역대기저자는 “선지자 사무엘 이후로 유월절을 이같이 지키지 못하였다”고 평가하고 있다.
요시야의 죽음(35:20-27)
요시야의 행적을 신앙개혁의 관점에서 서술한 저자는 이제 요시야의 죽음에 대해 언급한다. 당시의 주변정세는 급변하고 있었다. 대제국 앗수르는 주변 국가들로부터 곤혹을 당하다가 주전 612년에 마침내 메대와 바벨론 연합군에 의해 니느웨가 함락된다. 하지만 여기서 탈출한 일부 왕족들과 군사들은 하란으로 피신해서 마지막 저항을 하고 있었다. 이때 바벨론이라는 새 제국이 들어서는 것을 탐탁지 않게 생각하던 애굽의 바로 느고가 앗수르 군대를 도와주기 위해 하란으로 가고 있었다.
앗수르의 멸망을 고대하던 요시야는 이때 느고의 원정을 막기위해 므깃도로 올라갔다가 불행히도 그곳에서 부상을 입고 전사하게 된다. 이 선한 왕 요시야가 왜 죽게 되었을까? 평행본문인 열왕기는 이 점에 대해 침묵하고 있지만, 역대기는 이에 대한 답변을 시도하고 있다. 본문에 의하면 느고는 자신의 원정은 하나님의 계획의 일환이었음을 밝혔음에도 요시야가 이 경고를 듣지 않았다는 것이다(대하 35:21). 이 문제에 대해 의견의 일치가 이루어지고 있지 않다. 느고의 증언을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하지만 그렇지 않다고 보기도 한다. 하지만 본문을 가감 없이 그대로 읽는다면, 요시야 같은 선한 왕이지만 이와 같은 판단실수를 범할 수 있음을 우리에게 교훈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요시야에 대한 마지막 평가에서 보듯이(36:26-27) 그것이 하나님 앞에 결정적인 잘못은 아니겠지만 말이다.
1. 한 사람의 힘(Power of one)
요시야가 8세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을 때 많은 사람들은 미래에 대한 극도의 불안감을 가졌을 것이다. 숙청으로 얼룩졌던 아몬시대와 55년간 통치하며 유다와 예루살렘을 반역의 도시로 바꾸어 버렸던 므낫세 시대가 떠올랐을 것이다. 여호와의 전 안에까지 온갖 우상들과 미동(美童)의 집이 침투해 있던(왕하 23:4이하 참조) 그 시대에, 그래서 여호와의 노(怒)를 격발시켰던(대하 35:25) 이 상황에서 과연 어린 요시야에게 희망의 미래를 기대할 수 있었을까. 하지만 요시야는 해냈다. 제대로 해냈다. 예루살렘과 유다 전체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깨끗케 되었다. 예전에는 곳곳이 우상덩어리들이었지만 이제는 하나님 말씀으로 새롭게 되었다. 율법의 말씀이 곳곳에서 들린다. 백성들은 유월절을 지키며 하나님 안에서 새 희망을 싹틔운다. 한 사람의 힘이 얼마나 클 수 있는지 여실히 보여준 것이다. 예측할 수 있는 대로 성경 역시 요시야에 대해 곳곳에서 극찬을 하고 있다.
어떻게 이 일이 가능했을까? 34장 3절에 답이 있다. 요시야는 어렸을 때부터 하나님을 ‘구했다’는 것이다. 여기서 ‘구했다’라는 단어는 히브리어의 <다라쉬>를 옮긴 것이다. 이 히브리어 단어는 ‘상의하다’, ‘열정적으로 알려고 애쓰다’(전 1:13, ‘궁구하다’)라는 뜻이다. 즉 요시야는 어려서부터 하나님과 매사에 상의하려 했고, 하나님의 뜻을 알기위해 힘썼다는 것이다. 유다와 예루살렘을 깨끗케 하는 추동력은 이런 훈련된 영성에서 나온 것임에 틀림없다. 훈련된 영성은 북이스라엘 지역을 개혁대상에서 배제하지 않고, 오히려 언젠가는 한 동포로서 한 제의로 통합될 수 있을 것이라는 꿈을 갖게 했다. 또한 각계각층의 사람들을 개혁의 주체로 초대하는 포용력으로 이어졌다. 성전수리기금 모으는 일에 온 백성들이 기쁨으로 참여하도록 유도했으며, 레위인들의 신분을 격상시켜 제의에 주도적으로 참여케 하고 발견된 율법책의 유권해석을 훌다에게 의탁함으로써 예언자 그룹을 껴안게 했다. “개혁하며, 동시에 개혁되는” 나라와 백성들이 되었다. 훈련된 한 사람―많은 것을 변화시킬 수 있다.
2. 본(本)을 위해 기도하자
본문 안의 백성들을 보면 내심 부럽다. 위대한 개혁적 인물과 함께 살아가기 때문이다. 제한된 존재인 인간은 본성상 보수적일 수밖에 없다. 변화는 싫고 두렵게 느껴질 수밖에 없다. 하지만 오늘 본문 안의 백성들은 변하고 있다. 백성들이 나서서 바알들의 단을 훼파한다(34:4). 자발적으로 성전보수공사 헌금을 낸다(34:9). 일꾼들은 진실된 마음으로 성전을 위해 일한다(34:12). 열조의 하나님께 복종하고 떠나지 않는 생활을 한다(34:33). 얼마나 아름다운 모습인가! 60여 년 가까운 세월동안 우상의 세력에 눌리고 찌들려 살던 자신들의 모습과는 전연 딴판이 되었다. 이런 변화의 힘이 어디서 왔을까? 우리는 때때로 주변 사람들을 통해 하나님을 느낄 때가 많다. 하나님을 경험하고 싶지만 영이시기 때문에 주변 인물들의 본(本)을 통해 하나님을 보는 것이다. 백성들은 지금 요시야의 모습을 보며 배운 것이다. 요시야가 먼저 바알의 단을 격파하니 자신들도 그렇게 했다. 요시야가 하나님 일을 진실히 하니 자신들도 그렇게 한 것이다. 우리 주변에 이런 큰 인물들이 있는 것은 행복한 일이다. 우리 교회에 우리나라에 이런 인물 주시길 기도하자.
3. '성경’으로 돌아가자
성경은 개혁의 책이다. 성경은 나를 보며 바꿀 것을 주문한다. 성경은 곳곳에서 우리를 고발한다. 그래서 때때로 우리는 성경읽기가 부담스러워지기도 한다. 본문의 시대를 생각해 보자. 자신들이 어떻게 하나님을 배반해 왔는지 너무도 잘 알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율법책에 귀 기울이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하지만 요시야는, 그리고 그를 따르는 백성들은 주저하지 않고 ‘책’으로 돌아갔다. 이 책을 존중했다. 책 앞에 자신을 비추어 고쳐나갔다. 말씀 앞에 비쳐질 자신의 모습이 두려웠지만, 잘못에 대해서는 회개하고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할 것인지 그 책으로부터 배워갔다. 그리고 결국 성공한 개혁의 주체들이 되었다. 본문은 곳곳에서 “기록된 대로”, “규례대로”라는 말을 반복하여 사용하고 있다. 그 ‘책’의 권위를 인정한 것이다. 권위의 붕괴와 해체를 요구하는 포스트모던 시대에 살아가고 있지만, 양보할 수 없는 절대권위는 지켜나가자.
4. 절기, 제대로 지키자
성경에는 여러 개혁이야기들이 나온다. 느헤미야 8장에도 개혁이야기가 나온다. 흥미로운 것은 바벨론에서 돌아온 백성들이 예루살렘 수문 앞에서 율법을 듣고 신앙갱신을 선언한 후 곧바로 초막절을 지킨다(느 8장). 이 초막절 준수사건에 대해 성경은 매우 칭찬하고 있다(느 8:17). 비슷한 상황이 본문 역대하 35장에도 나온다. 유월절 지킨 것을 두고 길게 보도하면서(35:1-19) 극찬을 하고 있다(35:18). 정리해 보자. 두 경우 모두 개혁이 필요한 시점이었다. 힘들게 개혁을 했다. 성공했다. 성공 후 초막절과 유월절을 지킨다. 이것을 두고 성경기자들은 잘했다고 극찬한다. 무슨 뜻일까? 절기들의 어설픈 준수 혹은 무시가 개혁이 필요한 상황을 초래하고 있다는 뜻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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