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역대상(구속사)

역대상8장,끝이 좋아야

호리홀리 2015. 8. 18. 13:45

 역대상 8장 말씀은 7장에 이미 했던 베냐민 지파의 족보를 보다 상세하게 재언급하고 있습니다. 역대기의 기자가 이렇게 유독 베냐민 지파의 족보를 따로, 그것도 재차 상세하게 기술하는 것은 다음과 같은 몇 가지의 이유에 의해서입니다.
 
① 베냐민 지파가 이스라엘의 초대 왕 사울을 배출한 지파이기 때문.
② 솔로몬 이후 이스라엘 남북으로 분열될 때 유일하게 유다지파를 지지지하여 다윗왕조를 지켰기 때문.
③ 바벨론 포로 귀환 이후 이스라엘 내에서 차지하는 베냐민지파의 비중이 컸기 때문.
 
이와 같은 배경 속에서 역대상 8장에 기술된 베냐민 지파의 족보를 살펴보다보면 우리는 다음과 같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성령님의 음성에 잇닿게 됩니다.
 
첫째, 끝이 아름다운 삶이어야 합니다.
: 베냐민 지파의 시작은 야곱의 12번째 아들인 베냐민으로부터였습니다. 그는 태생 적부터 슬픔과 약함을 안고 태어났던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후손인 베냐민 지파는 사사시절 사악한 범죄자를 두둔하는 바람에 이스라엘 지파 연합군으로부터 공격을 받음으로써 겨우 600명의 남자만이 살아남아 멸문지화를 당할 뻔 했습니다.
 
하지만, 베냐민 지파는 남왕국과 북이스라엘로 분열되는 결정적 순간에 다수의 10지파를 따르지 않고, 하나님의 법궤(말씀)와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을 선택했습니다. 나아가 그들은 바벨론 포로에서 귀환할 때도 다른 지파들에 비해 월등히 많은 수가 귀환하여 이스라엘 재건에 기여했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께서는 시작이 가장 작았을 뿐 아니라, 중간에 심각한 오류를 범했었지만,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중심을 잡고자 했던 베냐민 지파를 보다 상세하게 기록케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속한 가정을 비롯한 공동체가 혹 그 시작이 내세울만한 것이 없고, 빈약하다 할지라도 오늘 우리가 무엇을 바라고, 어디에 서느냐에 따라 우리 뒷 세대가 더 아름다울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러기에 오늘 우리가 진리 편에 선다는 것은 이후 우리 뒷 세대를 위한 가장 큰 배려요, 고귀한 유산임을 깨닫게 됩니다.
 
둘째, 신앙의 가문은 내 생각대로 세워가는 것이 아닙니다.
8절 이하에 보면 사하라임이라는 독특한 인물이 나옵니다. 그는 두 아내 후심과 바아라를 내 보냈다고 하는데, 이것은 두 아내와 이혼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두 아내와 이혼한 후에 사하라임은 모압의 여인들과 더불어 많은 자녀를 낳습니다. 그 자녀들이 9절과 10절에 기록되어 있으며, 그들은 모두 족장이 되었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입니다. 성경은 더 이상의 언급을 금함으로써 그 자손들의 계보가 중요하지 않음을 반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반면, 11절 – 28절을 보면 사하라임이 쫓아낸 아내 중 하나인 후심의 아들들 가운데 엘바알 가문의 계보를 상세하게 기록함으로써 하나님의 언약적 관심이 누구를 향해 있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시고, 이루길 원하시는 믿음의 가문은 우리의 말초적 신경이나 세속적 가치에 의해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과 언약 위에서 세워져 간다는 것임을 깨닫게 됩니다.
 
셋째, 단점을 장점으로 승화해 가야 합니다.
베냐민 지파는 왼손잡이 사사 에훗, 이스라엘 초대 왕이라는 ‘사울’, 모르드개와 에스더라는 걸출한 인물을 배출했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문제가 있던 지파였습니다. 최초 야곱이 베냐민을 축복할 때(사실 축복이라기 보다는 마치 저주처럼 들린 말) ‘물어뜯는 이리’라고 했듯이, 베냐민 지파는 과격함을 지니고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과격함이라는 단점을 ‘용감’이라는 장점으로 승화시켜 갔습니다. 그 결과 민족전체의 죽음이 예고되었던 부림의 날을 구원의 날이 되게 하는 통로가 되기도 했습니다. 이것을 기억하신 하나님께서는 베냐민 지파 족보의 마지막을 기술하는 40절에 ‘다 용감한 장사’라는 말을 기록케 하셔서 베냐민 지파가 어떻게 자신들의 단점을 승화시켜 왔는지를 기념케 하셨습니다. 
  

오늘 우리는 또 하루의 은혜로 주어진 날을 살아가게 됩니다. 천국에 소망을 두고 생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하루 더 사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날마다 그리스도의 영과 교제함으로 생의 날 수만큼 잃어버린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해 가는 사람들에게는 오늘 이 하루가 얼마나 값지고, 귀한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오늘 이 하루의 시간만큼 우리는 보다 끝이 아름다운 삶을 만들어 갈 것이며, 하나님의 말씀 위에서 우리 삶을 세워감으로써 우리의 가정과 일터를 믿음의 자리로 세워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나아가 그 속에서 우리의 단점은 더 이상 주위의 사람을 상하게 하고, 당황케 하는 격함의 가시가 아니라, 생명의 통로가 되는 아름다운 용기가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결코 걸림돌이 아닌 디딤돌이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