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창세기(구속사)

창2:15-17, 3:1-7 ,아담언약과 언약파기

호리홀리 2015. 7. 31. 12:24

창2:15-17, 3:1-7

 

17절의 '반드시 죽으리라' [모트 타무트]'반드시'는 히브리어 정동사 앞에 붙어 이를 강조하는 부정사 절대형을 우리말 부사로 옮긴 것이다.
야훼께서 아담과 맺은 일방언약이다.

 

본문은 하나님께서 그 지으신 사람을 동산에 자리잡게 하시고 그 사람에게 동산의 나무들에 대해 명령하신 바를 알려주는 2장 15-17절과 그 명령을 사람이 거스리는 바를 보여주는 3장 1-7절의 둘로 크게 나눌 수 있다.그 가운데 무엇보다도 2장 16-17절에 나오는 야훼의 말씀과 3장 1절 후반절에 있는 뱀의 말, 2-3절에 있는 여자의 말, 4-5절의 뱀의 말이 서로 관련되어  통일을 이룬다.

2장 15절 ,이 절의 주어는 야훼 하나님이시고 목적어는 사람이다.

' 야훼 엘로힘'은 4절 후반절에서부터 나오는 하나님의 이름이다.  1장 1절 - 2장 3절에서는 오로지 '하나님' [엘로힘]만 쓰이고 있다.
본문은 하나님을 '야훼 하나님'이라 부름으로써 본문의 주인공이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실 뿐만 아니라 언약의 하나님이심을 드러낸다.
'야훼'라는 이름은 애굽 땅에서 종살이하던 히브리 사람들을 건져내어 거친 들길을 거쳐 가나안 땅에 이끌어 들이신 하나님을 가리키는 이름이어서 이스라엘과 하나님 사이의 특별한 언약 관계를 암시한다.  그에 견주어 볼 때 '하나님'(히브리말로 [엘로힘])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가리키기도 하지만 전능한 하나님을 가리키는 데에도 쓰인다. 이미  [야훼 엘로힘]이라는 하나님의 이름 아래 이른바 구속신학과 창조신학이 한 데 어우러져  있다.
야훼 하나님은 4절 후반절에서 땅과 하늘을 만드셨고, 7절에서 사람을 흙으로 지으신 다음 그 코에 생기를 불어 넣으셔서 산 존재로 만드신 분이시며, 8절에서는 동쪽 에덴에 동산 하나를 '심으시고' 거기에 그 지으신 사람을 두신 분이시요, 9절에서는 '보기에 탐스럽고 먹기에 좋은 온갖 나무'와 동산 한 가운데 생명 나무와 좋고 나쁨을 알게 하는 나무가 땅에서 돋아나도록 하신 분이시다.
15절의 '그 사람'([하아담])은 7절에서 하나님이 흙으로 만드신 사람꼴에 코에 입김을 불어넣어서 산 목숨이 되도록 하신 그 '사람'을 가리킨다.
본문에서 사람을 뜻하는 낱말인 [아담]은 고유명사라기보다는 인류를 대표하고 상징하는 집합명사로 쓰인 다.  [아담]이 고유명사로 쓰이기 시작하는 것은  4장 1, 25절, 5장 1절에 이르러서이다.  사람을 히브리어 성경에서 [아담]이라고 부를 때 이는 사람이 그 어떤 차이에 관계없이 오로지 하나님에 의해 지음받았고, 바로 그 때문에 그를 지으신 하나님과는 다르게 제한된 존재라는 점을 두드러지게 말한다.

야훼 하나님께서  그를 '데려다가 '라카흐' 동산에 '자리잡게 하신'([누아흐] 의 사역형) 것이다. 15절은 이 동산은 '에덴의 동산'이라고 부른다.  이는 8절에서 '동쪽의 에덴에 있는 동산'이라 하던 바와 다르다.  '동쪽의 에덴에 있는 동산'이라 할 때 '에덴'은 '동산'이 자리잡고 있는 지역 이름을 가리키는 것처럼 보이지만, '에덴의 동산'이라 할 때 '에덴'은 동산의 이름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에스겔 31장 9절을 히브리어 성경으로 읽으면 '하나님의 동산 안에 있는 에덴의 나무들'이란 표현이 있어서 이 경우에는 '에덴'이 '동산'의 한 부분인 것처럼 나타나 있기도 하다.  이는 또한 창세기 13장 10절에서 나오는 '야훼의 동산'을 생각나게도 한다.
이처럼 구약성경에는 '에덴'이라는 이름과 '동산'의 관계가 여러가지로 다르게 나타난다.  히브리 낱말 [에덴]은 '실컷 먹다, 잘 먹다, 유복한 생활을 하다'를 뜻하는 동사에서 비롯되어 '더할 나위 없이 큰 기쁨'을 뜻하는 보통명사로 쓰이기도 하기에 본절에서처럼 이를 '동산'과 관계시켜 쓸 때는 먹을 열매가 넉넉하고 아무 걱정 없이 살 수 있는 그런 이상적인 곳을 가리킨다고 하겠다.
그런데 15절은 야훼 하나님이 사람을 동산에 자리잡게 하신 목적을 분명히 밝혀준다.  다름 아니라, 사람으로 하여금 동산을 '갈고 지키도록' 사람을 동산에 자리잡게 하셨다는 것이다.
'갈다'([아바드] )는 낱말은 이미 앞서 5절에 나왔다.  야훼 하나님이 비를 내리시지 않고 그 땅을 갈 사람도 없어서 땅에는 아무런 들풀도 없었고 밭의 채소도 하나 없었다고 하는 5절에서 사람([아담])은 땅([아다마])을 갈([아바드]) 존재임이 암시되어 있다.  심지어 나중에 사람이 동산에서 쫓겨난 다음에도 땅을 갈면서 살도록 되어 있음을 3장 23절이 일러준다.  2장 5절과 3장 23절에서는 '갈다'의 목적어가 '땅'([아다마] ), 조금 더 자세히 말한다면 '경작지'였는데, 15절에서는 에덴 동산이다.  '땅'([아다마])에서 만든 '사람'([아담])이 '땅'을 갈면서 살다가 다시 '땅'으로 돌아가게 된다 (3장 19절) 함은 땅과 사람이 창조의 섭리 가운데서 서로 뗄 수 없이 깊이 이어져 있음을 말한다면, 본문의 경우는 하나님이 사람을 위해 만들어 주신 '동산'과 '사람'과의 깊은 관계를 강조한다.  이리하여 이 경우 '갈다'는 동산 전체를 잘 가꾼다는 뜻을 지닌다.
이처럼 '갈다'라는 낱말은 본디 땅을 갈아 먹을 것을 내는 농사꾼의 움직임을 가리키는 말이어서 노동을 뜻한다.  넓게는 인간의 온갖 문화행위활동을 뜻한다.
'지키다'([샤마르])는 창세기에서 여기서 처음 나오는데 하나님이 삶의 터전으로 주신 동산을 잘 보존함을 뜻한다.   3장 24절에서 야훼 하나님이 사람과 그의 아내를 에덴에서 쫓아낸 다음 생명 나무에 이르는 길을 '지키도록' 에덴 동쪽에 불칼을 두셨다 할 때 이 낱말이 다시 나오지만 그 쓰임새가 틀린다.  다만, 겉보기에 같은 낱말이 동산에서 살게 된 사람의 이야기의 첫부분과 마지막 부분에 나온다는 사실에서 보면 본디 [아담]더러 지키도록 하셨던 동산 가운데 있는 생명나무에 이를 길을 나중에는 불칼이 지키도록 되었다는 식으로 이해하게 된다.
여기서 하나님께서는 처음 사람에게 그 삶의 터전으로 동산을 만들어주신 다음 그 사람에게 그 동산을 돌볼 책임을 맡기셨음을 알 수 있다.  곧 사람이 동산에서 아무런 일을 하지 않고 그저 있는 먹을거리만 먹고 살도록 하신 것이 아니라 동산을 다듬고 가꾸도록 하신 것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뜻에 따르면 사람을 일을 하면서 살도록 되어있다는 뜻이다.  그 일을 본절은 동산을 갈고 지키는 것이라 표현한다.  따라서 곧 이어서 16절에서 동산 나무들의 열매를 먹을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사람이 아무 이러도 하지 않고 나무 열매만 먹고 살아도 좋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는 없다.  오히려 나무 열매를 먹을 수 있다는 말씀에 앞서서 동산을 갈고 지키도록 사람을 그 동산에 자라잡게 하셨다 하심으로써 동산 나무 열매조차도 사람이 동산을 다듬고 가꾼 결과로 이해하도록 한다.
본문에서 하나님께서 사람으로 하여금 동산을 갈고 지키도록 하셨다 함은 1장 28절에서 사람더러 땅([아다마]가 아닌 [에레츠])을 정복하고 물고기와 새와 짐승을 다스리라 하신 바와는 전혀 다른 분위기를 느끼게 해 준다.  곧 1장에서는 사람이 살 세상이 사람의 정복과 다스림의 대상으로 표현되어 있지만 본문에서는 사람이 가꾸고 보살펴야 할 대상으로 나타난다.  이런 식으로 삶의 터전과 사람 사이가 본문에서는 1장에서보다 훨씬 더 친근하고도 밀접하게 묘사되어 있다.

그런데 이처럼 사람이 동산을 돌보도록 되어있다는 점을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직접 명령하시는 식으로 표현하지 않고 - 이를테면 "야훼께서 사람을 데려다 그 동산에 자리잡게 하시고는 '너는 이 동산을 갈고 지켜라'라고 명령하셨다"하는 식으로 - , 사람을 동산에 데려다가 자리잡게 하신 하나님의 행동의 목적으로 서술함으로써 한편으로는 포괄적으로, 다른 한편으로는 은근히 말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언약을 체결하시는 장면을 보여준다. 하나님이 자신을 나타낸 신현과 언약체결식을 보여준다하겠다. 지으신 사람에 대해 하나님께서 직접 말씀하시는 것은 그 다음절에 이르러서이다.

2장 4절부터 15절에 이르기까지는  홀로 행동하시던 하나님께서 마침내 16절에 이르러 그 지으신 바 사람에게 말씀하신다.  이리하여 이는 창조주께서 숱한 피조물 가운데서 오로지 사람만을 말씀의 대상으로 삼으시기 시작하는 순간이 된다.  창조주와 피조물인 사람 사이에 말을 통한 사귐이 시작된다.  그런데 그 사귐은 창조주 쪽에서 여신 사귐이다.
야훼 하나님이 사람에게 하신 첫 마디 말씀의 형식은 명령임을 히브리어 성경 16절 첫 낱말이 일러준다.  이 점에서 본절은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복빌어주시는 말씀을 하셨던 1장 28절과 다르다.  성경 전체에서 창세기 2장 16-17절은 창조주 하나님께서 피조물 사람에게 하신 첫번째 명령을 소개한다.
그런데 그 뒤에 인용된 하나님의 말씀의 내용의 앞부분은 명령하시는 말씀이라기보다는 허락하시는 말씀이다.  '그 동산의 온갖 나무로부터 먹어도 좋다'는 것이 그 첫 마디 말씀이다.  이 허락의 말씀은 먼저 동산에 있는 먹을거리가 저절로 생겨난 것이 아니라 앞에서 9절이 똑똑히 알려주었듯이 야훼 하나님이 동산의 땅([아다마])에서부터 돋아나게 하신 것이어서 그 본 주인은 야훼 하나님이시라는 점을 깨닫게 한다.  다음으로 목적어가 동사보다 앞에 나와 강조됨으로써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최대한으로 허락하심이 두드러진다.
동산에 온갖 나무들이 돋아나도록 하신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이처럼 최대한으로 허락하신 것은 그 '나무들로부터 먹는 것'이다.  여기서 동산에 생겨난 나무들이 과일나무들인 것을 알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삶에 가장 필요한 먹을거리를 나무 열매로써 보장해주신 것이다.  우리 생각으로는 사람이 목숨을 이어나갈 수 있도록 하는 주된 먹을거리는 곡물이고 과일은 덧붙여 먹는 것이거나 비상식량일 뿐이지만 옛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있어서 나무 열매는 우리의 주식 못지 않게 중요하였다.
2장의 흐름으로 보면 16절이 말하는 '동산의 온갖 나무'는 앞 9절 전반절에 나오는 '보기에 탐스럽고 먹기에 좋은 온갖 나무'를 가리킨다.  이는 나무 열매가 쳐다보기만 해도 욕심이 나고 먹기에 좋아 보임을 뜻한다.  이런 식으로 하나님이 동산에 생겨나게 하신 나무들은 생명력이 넘치고 아름다움으로 가득한 나무들로 묘사된다.  나무에 대한 묘사가 나중에 3장 6절에서는 '먹기에 좋고 눈에 들고 슬기롭게 할만큼 탐스럽다'는 식으로 조금 달라지고 확장된다.
본문은 16절에서 동산의 '온갖' 나무라고 함으로써 사람이 나무 열매 먹는 것을 전적으로 허용함이 하나님이 뜻임을 분명히 한다.  이어서 17절에서는 단 한 나무를 이 '온갖 나무'에서 제외시킨다. 법을 제정하시는 장면이다.
17절 또한 16절과 마찬가지로 목적어를 앞세움으로써 전적인 허용에서 제외되는 나무가 어떠한 나무인지를 강조한다.  '좋고 나쁨을 알게 하는 나무'가 그 나무인데 이 나무 또한 이미 앞서 9절 후하반절에 나왔다.  야훼께서 동산의 '땅'([아다마])으로부터 돋아나게 하신 나무들을 '보기에 탐스럽고 먹기에 좋은 온갖 나무'라 한 다음 '그 동산 한 가운데 있는 생명 나무'와 '좋고 나쁨을 알게 하는 나무'를 덧붙임으로써 이 두 나무가 특별함을 암시하였다.  그런데 17절의 금지명령에서 '생명나무'에 대한 말씀은 없다.  뿐만 아니라 3장 1-21절에서 말하고 있는 나무도 '좋고 나쁨을 알게 하는 나무'일 뿐이다.  그리하여 9절과 17절만 두고 보면 야훼 하나님은 사람이 '생명나무' 열매는 먹도록 허락하신 것처럼 보인다.
그렇지만 3장 22절을 보면 '생명나무'도 금지의 대상이었음을 알 수 있다. - "야훼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  자, 그 사람이 좋음과 나쁨을 아는데 우리 가운데 하나처럼 되었으니 이제 그가 손을 뻗쳐 생명나무로부터도 (열매를) 따서 먹고 길이 살지 못하도록 하자."  이리하여 야훼 하나님은 23절에서 그 사람을 에덴 동산에서 내쫓으신다.
야훼 하나님이 동산의 다른 모든 나무 열매 먹는 것은 허락하시면서 '좋고 나쁨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는 먹지 못하게 하심은 바로 이 까닭이다.  사람은 피조물로서 주어진 한계 안에서 살아야 하는 것인데 그 한계를 벗어나고자 하면 불행하게 된다.  이를 미리 경고하는 것이 바로 17절의 언약관계의 금지 명령이다.
그러면 언약이란 단어가 없는데 무리한 해석이 아니냐 할 수 있으나 호6:7절에' 아담처럼 언약을 어기고' 구약 백성들은 이미 아담언약을 이해하고있었다

이 '좋고 나쁨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를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신 것도 바로 이런 흐름에서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  여기서 '네가 반드시 죽으리라' ([모트 타무트] 함은 그 표현으로 보아서는 저지른 잘못에 대해 사형을 선언하는 형식과 마찬가지이지만 (삼상14:44, 22:16, 왕하1:4, 6, 렘26:8, 겔3:18 등).  본문에서는 언약적저주 성격을 띠는 것으로 보인다.  이는 나중에 처음 두 사람이 이 명령을 거스려 그 나무 열매를 따 먹었지만 곧 바로 죽게 하신 것은 아닌데서도 알 수 있다.  벌을 받아 죽어야 할 사람들이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여전히 살 길을 열어주신 것이다.  다만 더 이상 에덴 동산에서는 살 수 없도록 쫓아내셨다.언약파기에 대한 지계였다.


 

15-17절은 통틀어 보면 이는 8-9절의 내용을 따로 더 발전시킨 것으로 볼 수 있다.  8절이 그냥 야훼 하나님께서 사람을 에덴의 동산에 두셨다 한 것을 15절에서는 동산을 갈고 지키도록 사람을 거기 자리잡게 하셨다는 식으로 더 자세히 말하고 있는 것처럼, 9절에서 그냥 야훼 하나님께서 나무들이 동산에 돋아나게 하셨다 한 것을 16-17절에서는 그 나무들의 열매를 사람이 먹을 수 있지만 좋음과 나쁨을 아는 나무 열매는 먹지 말라 명령하셨다는 식으로 더 구체화시킨다.
이런 식으로 15-17절은 사람을 만드시고 그 사람을 위하여 동산을 만드셔서 사람에게 맡기신 하나님께서 한편으로는 사람에게 최대한의 가능성을 허락하시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의 한계를 지킬 것을 처음부터 분명히 하셨음을 알게 해 준다.
창조주로서 피조물 사람을 위해 하실 일을 다 하시면서 사람이 피조물임을 똑똑히 하신 것이다.  그리하심으로써 피조물이지만 사람이 스스로 야훼 하나님의 명령을 쫓을 것인가 말 것인가 하는 문제를 남겨두신 것이다.  여기서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그냥 하나님 시키시는 대로만 하는 꼭둑각시로 만드신 것은 아님을 알 수 있다.  이는 만드신 동산의 관리를 사람에게 맡기신 것과 맞아 떨어진다.
이렇게 볼 때 2장 15-17절, 3장 1-7절이 금지 명령을 어긴 사람의 문제를 중심으로 다루고 있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첫 명령에서 금지 명령을 지나치게 강조함은 본문을 균형 있게 보는 것이 아니라 하겠다.

 

 

2장 17절에서 일단 끊어졌던 동산의 나무들과 사람 사이에 벌어지는 사건에 대한 이야기가 다시 이어지는 3장 1절은 '그런데 뱀이([웨한나하쉬])라는 낱말로 시작한다.
전반절이 이 뱀에 대해서 알려주는 바는 두 가지이다.  첫째, 이 뱀 또한 다른 동물들과 마찬가지로 야훼 하나님이 만드셨다는 것이고, 둘째, 다른 동물들보다 더 교활한 것이다.  2-3장의 흐름으로 보면 첫번째 사실은 야훼 하나님이 모든 들짐승을 만드셨다 하는 2장 19절을 생각나게 한다.  '능갈맞다'로 옮긴 히브리 낱말 [아룸]이 잠언에서는 어리석음에 반대되는 낱말로 '슬기롭다'는 뜻이지만 본문에서는 욥기 5장 12절과 15장 5절에서처럼 꾀를 부려 일을 그르치는 잘못된 슬기로움을 뜻한다.
3장 1절에서 뱀은 일단 하나님이 만드신 피조물 가운데 하나로 나타나기에 이 뱀이 곧 악이나 죄의 근원이라고 할 수는 없다.  본문은 죄가 뱀에게서 비롯된다기보다는 야훼 하나님의 명령에 사람이 순종하지 않는 데서 비롯됨을 똑똑히 말한다. 

 

3장 1절에 뱀이 말을 건 '그 여자'([하잇샤])는 2장 22절에서 야훼 하나님이 만드셔서 '그 사람'에게 데려다 주신 '여자'이다.  뱀이 여자에게 한 말 가운데 보면 하나님이 하신 말씀을 이끌어 쓰는데, 앞 2장 16절과 견주어 보면 다음 몇 가지 점에서 다르다.
첫째, 2장 16절에서 야훼 하나님께서 사람더러 "동산의 온갖 나무로부터 네가 먹을 수 있다" 하신 것을 뱀은 전적으로 부정한다.  전적인 허용을 전적인 금지로 뒤바꾸려 한다.  더구나 수사의문문을 써서 여자로 하여금 야훼의 명령에 그냥 순종하기보다는 스스로 야훼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따져 보도록 한다.  앞서 뱀을 두고서 능갈맞다 함이 바로 이런 데서 드러난다.  이리하여 뱀은 성경에서 처음으로 하나님의 좋은 뜻을 의심하도록 한다.
둘째, 2장 16절은 한 사람 '너'에 대한 말인데 뱀은 이를 '너희'에 대한 말로 바꾸고 있다.  여자에게 말할 때 남성2인칭복수를 씀으로써 실제로는 남자와 여자 둘 모두에게 말하고 있다.  여기서 한편으로는 2장 16-17절에 있는 야훼 하나님의 명령을 받는 '너'는 모든 사람을 대표하여 '너'임을 알 수 있다.  곧 2장의 흐름으로 보아 아직 여자가 생기기 전, 사람이 혼자 있을 때 야훼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하신 명령은 그 뒤 생겨난 여자에게도 해당된다는 사실이 당연한 사실로 전제되어 있다.  다른 한편으로는 3장에서 사람이 야훼 하나님의 명령을 거스릴 때 이는 여자 혼자의 문제가 아니라 처음부터 남자도 함께 하는 사람 모두의 일임을 알아차릴 수 있다.

 

여자가 홀로 있다가 뱀의 유혹을 받아 하나님께서 따 먹지 말라 하신 열매를 먹었고 나중에 남자가 돌아오자 그 열매를 남자에게도 주어서 그로 먹게 한 것이라는 식으로 설교하거나 어린이들에게 본문을 풀어 말하지만 이는 본문이 말하는 바가 아니다.  오히려 6절에 '자신과 함께 있는, 자신의 남편'이라는 표현으로 있는 것을 보면 본문은 이 장면 첫 순간부터 남자가 함께 있었음을 넌지지 알려주고 있는 듯하다.  또 2절에서 여자가 '우리'라고 말함도 둘이 하나로 묶여 있음을 여자가 의식하고 있음을 드러내어 보여준다.  이리하여 3장 1-7절에서 남자는 침묵의 공범자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뒤이어 나오는 구절들은 이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남자를 주범으로 다루는 듯한 인상을 준다.  9절에서 하나님께서는 그 '사람'([아담]), 곧 남자만 부르셔서 그에게 "네가 어디 있느냐?" 하셨지 남자와 여자 둘 다 부르셔서 그 둘에게 "너희가 어디 있느냐?" 하지 않으셨다.  11절에서도 먹지 말라는 야훼의 명령의 대상은 오로지 '너'였음이 다시 한 번 밝혀진다.  여자에 직접 말씀하시는 것은 13절에서야 나온다.  또 뒤에 뱀과 여자와 남자에게 차례로 벌을 알려주실 때도 먹지 말라 하신 나무로부터 따 먹은 잘못은 남자에게 하시는 말씀에만 나온다(17절).  이처럼 2-3장은 야훼 하나님의 금지 명령의 대상자와 위반자를 오로지 '사람'([아담])에게로 집중시키고 있다.

2-3절에서 여자는 제 나름대로 야훼의 명령을 이해한 바를 따라 뱀의 물음에 대답하는데 이 여자의 말은 2장 16-17절에 나온 야훼의 명령과 다음 몇가지 점에서 다르다.
첫째, '동산의 나무 열매들로부터 우리가 먹을 수 있다' 함은 '동산의 온갖 나무에서부터 네가 먹을 수 있다'와 거의 비슷하다.  다만 '너'의 단수가 '우리'의 복수로 된 점과 '온갖' 대신 '열매'란 낱말이 쓰인 것이 다를 뿐이다.
둘째, 그 다음 '동산 가운데 있는 나무의 열매'라 함은 글의 흐름으로 보아서는 2장 17절에 나오는 '좋고 나쁨을 알게 하는 나무'를 가리킴이 분명한데 '동산 가운데 있는'이란 꾸밈말은 9절 후상반절에 나오는 '동산 가운데 있는 생명나무'를 생각나게 한다.  이 두 나무가 서로 얽혀 나옴은 두 전통이 한 데 어루러지게 된 데서 비롯됨에 대해서는 이미 앞서 말한 바 있다.
셋째, 2장 17절에서 야훼께서는 '네가 그로부터 먹는 날이면 반드시 죽으리라' 하였는데 3장 3절에서 여자는 '너희가 죽지 않도록 그것에 손대지 말라'라고 한다.  이처럼 본문은 여자가 야훼의 금지 명령을 자기 나름대로 풀이하고 있는 모습을 보여준다.

앞서 야훼의 허락을 전적인 금지 명령으로 뒤집어 묻던 뱀이 여자의 답을 듣고 나서는 아예 야훼의 말씀을 부정하면서 여자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바를 알려 준다.
뱀은 여자에게 던진 첫마디에서 본디 야훼께서 사람에게 하신 최대한 허락의 말씀에 부정사 [로]  를 붙여 최대한의 금지로 바꾸어버리려 했지만 여자가 이에 따르지 않자, 이제는 그 금지 명령에 뒤따르던 야훼 하나님의 경고인 '네가 반드시 죽으리라'를 '너희가 결코 죽지 않으리라'로 바꾸어 단정적으로 말한다.  곧 앞에서와 마찬가지로 야훼께서 엄히 경고하신 바를 부정사 하나로써 아무렇지 않게 만들어버리려 한다.  그런데 이번에는 처음처럼 의문문 형식이 아니라 강력한 주장을 표현하는 서술문 형식을 취한다.
이어 5절에서 야훼 하나님께서 금지 명령을 내리신 까닭이 사람이 하나님처럼 되지 못하게 하려는데 있다고 함으로써 한편으로는 야훼 하나님을 비난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여자로 하여금 하나님처럼 삶에 관한 모든 것을 잘 알고 싶은 마음을 지니도록 한다.  먼저 2장 17절을 본떠 '너희들이 그(나무)로부터 먹는 날'이라고 한 다음 '너희 눈이 열려서' '하나님처럼 좋고 나쁨을 알게 될' 것이라 한다.
여기서 앞서 3장 3절에서 여자가 '동산 한가운데 있는 나무'라 한 것을 뱀은 '좋고 나쁨을 알게 하는 나무'로 이해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아무튼 뱀은 사람이 '좋고 나쁨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으면 피조물 된 사람의 한계를 뛰어넘어 불행하게 될 것을 염려하여 다른 모든 것은 사람에게 허락하지만 이것만 금하신 야훼 하나님의 뜻을 나쁘게 풀이하여 여자에게 말한 셈이다. 

 

두번째 뱀의 말은 여자로 하여금 그 금지된 나무를 새롭게 바라보게 하였다.  여자가 본 나무를 묘사하는 문장은 2장 9절의 경우와는 다르면서 한 마디가 더 길다.  2장 9절에서는 '보기에 탐스럽고 먹기에 좋다' 하던 것을 여기에서는 '먹기에 좋고 눈에 바람직하고 슬기롭게 할만큼 탐스럽다' 하여 '먹기에 좋다'는 것이 맨앞에 나오고 이어 '눈에 들고'라 한 다음, 본디 '보기에'란 낱말에 붙였던 낱말이 '탐스럽다'([네흐마두])를 '슬기롭게 할만큼'([레하스킬] )이란 새로운 낱말과 어우러지게 하였다.  이리하여 이 마지막 낱말 [레하스킬]이 본절 이해에 중요함을 알 수 있다.  곧, 겉모습이 아름답고 먹음직스러워보이는 것 자체는 나쁜 것도 좋은 것도 아니며 하나님 지으신 나무 열매의 모습을 그냥 그대로 표현하는 것이지만, '슬기롭게 할만큼'이란 말은 이미 야훼 하나님의 명령을 거스리도록 할 수 있는 어떤 요소를 암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같은 낱말은 아니지만 이 낱말과 1절에 나오는 '능갈맞다'는 말은 결국 슬기라는 큰 틀 안에 함께 속할 뿐만 아니라, '좋고 나쁨을 안다'는 표현이 뜻하는 바와도 통한다.  곧 바로 앞에서 뱀이 그 열매를 먹으면 '눈이 열려 하나님처럼 좋고 나쁨을 알게 되'리라 한 것은 바로 피조물이 피조물의 한계를 뛰어넘는 정도의 슬기를 지니게 됨을 뜻하기 때문이다.  또 '슬기롭게 하다'를 뜻하는 이 히브리 낱말은 또한 '일이 잘되다, 성공하다'는 뜻으로 쓰이기도 하기에 이는 곧 사람이 제 홀로 힘으로 성공적인 삶을 살아가려고 함을 암시하기도 한다.
아무튼 2장 9절에서는 그냥 나무가 어떠한지를 묘사하고 있었는데 3장 6절에서는 그 점을 여자가 알게 된 것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는 곧 객관적 사물을 주관적으로 인식하게 되었다는 뜻이다.
이리하여 여자가 그 열매를 따 먹고 또 그 남편에게도 주어서 그도 먹게 함으로써 야훼의 명령을 두 사람 다 거스르게 된다.  이는 본디 홀로 사는 삶이 야훼 하나님 보시기에 좋지 않아 완전한 사람을 이루기 위해 도울 짝으로 여자를 만드셔서 둘이 어우러져 살게 하신 하나님의 뜻에 비추어 보면 다른 사람과 사귐 가운데 삶을 가꾸어 가도록 된 사람이 이제는 하나님을 거스르는 일도 함께 하게 됨을 보여준다.

두 사람 모두 금지된 열매를 먹고 나자 이들에게 새로운 상황이 전개된다.  두 사람의 눈이 열려서 자신들이 알몸뚱이임을 알게 되고 무화과 잎사귀를 엮어 알몸을 덮을 치마를 만든 것이다.  이리하여 3장 1-6절까지 남자는 그냥 뱀의 말 '너희'와 여자의 말 '우리' 속에 묵시적으로 포함되어 있다가, 7절에 이르러서야 '그 둘'이라고 똑똑히 밝힘으로써 남녀가 함께 주어로 등장한다.
눈이 '열린다' 할 때 쓰인 동사 [파카흐]     단수재귀형([니팔])은 사람의 보통 능력을 넘어서서 무엇을 보게 됨을 뜻한다.
이는 앞서 말한 바와 같이 2장 25절의 경우와 대칭을 이룬다고 볼 수 있다.
이들의 눈이 열렸다 함을 볼 때 뱀이 5절에서 한 말의 첫 마디는 거짓이 아니다. 다만 눈이 열린 다음 '하나님처럼 좋고 나쁨을 알게 되리라' 한 것과는 달리 이들이 알게 된 것은 자신들이 벌거벗었다는 것과 그 벌거벗음을 가릴 치마를 무화과나무 잎사귀로 엮어 만드는 법에 그치고 말았지 그들의 삶의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그런 완전한 앎이 아니었다.  이들이 만든 치미가 그들의 벌거벗음을 하나님으로부터 가릴 수 없었다는 점은 그 다음 8절에서 대뜸 드러난다.  또한 3장 21절에서 야훼께서 짐승 가죽으로 된 옷을 만들어주셨다는 점에서도 사람이 열린 눈으로 한 일이 완전하지 못함을 알 수 있다. 가죽옷은 짐승을 죽여 피의 속죄를 통해 하나님과 회복하는 피언약을 피상적으로 보여준다. 이것이 은혜언약인 노아를 통해 구체화되며 시내산언약체결식을 통해 절정에 이르며 예수그리스도의 갈보리언약에 와서 완성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