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창세기(구속사)

11. 아브라함 언약 (창 15, 17)

호리홀리 2015. 3. 30. 14:08

 11. 아브라함 언약 (창 15, 17)

 


 

 복수전을 감행하는 고대의 관습을 알기에 두려움에 처해있는 아브라함을 하나님은 찾아오셔서 하나님 자신이 방패요 그 전쟁으로 실제적으로는 아무 것도 얻지 못한 그에게 하나님 자신이 바로 상급임을 선언하신다 (15:1). 이 선언에 대하여 아브라함은 처음으로 하나님께 하나님의 약속의 양면인 씨와 땅에 대한 질문으로서 반응을 보인다 (15:2-7).

 


 

먼저 씨에 대한 질문의 내용을 보면 사뭇 부정적이며 허탈감과 포기하는 마음이 진하게 배여있다. 자신의 적자(嫡子)는 그 당시의 관습을 따라서 다메섹 출신의 종인 엘리에셀이 될 것이라고 냉소적으로 선언한다. 그리고 이 냉소적인 표현에 설명을 덧붙이듯이 15:3을 내뱉는 것 같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내하시고 아브라함과 만난 밤이라는 상황을 사용하여 중동의 까만 밤하늘을 찬란하게 수놓은 무수한 별을 통하여 그 종이 후손이 될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몸에서 나온 후손이 별과 같이 많으리라는 실물교훈을 하신다 (15:5). 이 약속에 대하여 아브라함이 아마 머리를 숙여 하나님께 경배함으로 믿음으로 반응한 것 같고, 이 믿음의 반응을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의로 선포하신다 (15:6).

 


 

둘째로 아브라함이 땅에 대하여 물었을 때에 하나님은 언약을 맺도록 아브라함에게 준비시키셨다. 그리고 준비된 언약을 체결하기 위하여 당시의 습관을 따라서 쪼개어져 준비된 제물 사이로 언약의 쌍방인 하나님과 아브라함이 같이 피가 흥건히 배여있는 그 길을 걸어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상징한 불만이 지나감으로 (15:17, 참고 렘 24:18-19) 이 언약의 성취의 최종적인 책임은 하나님이 지심을 분명히 드러내었다. 고대의 언약을 맺는 관습대로 하나님이 약속을 지키지 않으시면 하나님의 생명이 문제가 되는 형편에 놓인 것이다. 이것은 아브라함이 곧 이어서 할례를 행함으로서 언약 수립에 능동적인 입장에 선 것과 대응하는 것이다 (17:23-27). 대대로 이행해야 할 할례는 하나님의 언약을 적극적으로 신실하게 지키심에 대한 인간 편에서의 언약 이행을 의미한다. 이 할례는 민족이 된 이스라엘이 정식으로 시내산에서 하나님과 언약을 맺을 때에 하나님의 언약법에 순종할 것을 작정하는 것과 같은 차원의 것이다. 이제 언약의 양방인 하나님과 아브라함이 언약서약을 함으로 이 언약은 앞으로 이루어질 하나님과 민족으로서의 이스라엘간의 시내산, 모압 언약의 기초가 된다. 물론 아브라함의 언약은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언약적 택하심과 약속에서 출발하지만 단순히 무조건적인 언약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후손들이 그 속에도 대대로 할례를 받아야 한다는 일종의 조건성이 존재한다. 이 점에서 아브라함 언약과 시내산 언약은 구조적인 유사성을 보인다.

 


 

하나님의 생명을 담보로 한 언약적인 이런 서약(15:17)에도 불구하고 믿음이 먼저 약해진 것은 인간들, 정확히 말하면 현실적인 압박을 더 많이 받고 있는 여자쪽이었다. 사라는 하나님과 엄청난 언약을 맺고 나자마자 (15장) 하나님 나라 역사에서 돌이킬 수 없는 엄청안 실수를 범한다 (16장). 종인 하갈을 아브라함의 첩으로 주어서 아들을 낳은 당시의 습관을 따르도록 16장 전체를 통하여 철저히 수동적으로 머물러 있는 아브라함을 졸라서 일을 성사시켰다 (16:2). 15장에서 종을 아들로 입양하는 그 당시의 관습을 따르려 했던 것과 같이 16장에서도 세상의 일반관습이 끊임없이 하나님 나라를 움직이는 추진 원리가 되려고 밀고 들어오는 것을 발견한다. 그러나 결과는 예상과는 전혀 다르게 나타났고 궁극적으로는 결국 하나님의 약속에 의하여 태어날 이삭의 자손과 이렇게 불신앙 가운데 태어난 이스마엘의 자손 사이에 역사적으로 해결의 실마리가 보이지 않는 견원지간의 관계를 만들어낸 것이다. 결국 이 문제는 하나님의 손에서 해결되도록 위탁될 수 밖에 없었다 (16:7-12).

 


 

드디어 아브라함의 나이가 99세가 되어서 하나님이 씨와 땅의 약속을 재확인하러 나타나셨을 때 아브라함은 (비)웃었다 (17장). 하나님이 씨에 대해서 재차 약속하시려 나타나셨을 때 사라도 (비)웃었다 (18:9-12). 이 주제가 동양의 정서를 따라서 사라가 하나님과 아브라함 사이의 대화를 엿듣도록 의도적으로 "사라가 어디 있느냐"고 물으시면서 사라의 주의를 환기시키시는 하나님의 모습으로 아름답게 처리되어 있다 (18:9). 그 이후에 하나님과 사라 사이에 닭싸움하듯이 옥신각신하는 모습(18:12-15)은 오히려 끝까지 자신의 잘못을 시인하지 않는 인간과 같은 차원에서 낮아져서 끝까지 하나님이 옳으심을 주장하시는 희극적인 요소를 드러냄으로 독자로 하여금 인간과 같이 낮아져서 대화하시는 하나님을 만나는 기쁨을 누리게 한다. 이 희극적인 요소는 부부가 다 같이 하나님의 약속에 대해서 비웃었으므로 그 아들의 이름을 '이삭' 즉 '웃음'이라고 하게 하시는 일종의 심판이라는 비극적 요소와 어울려서 그 차원이 더욱 깊어진다.

 


 

그러나 이 두 번째 하나님의 찾아오심에는 하나님 나라의 건설을 위한 씨와 땅의 약속을 확인하는 것 외에 또 다른 목적이 있었다. 그것은 하나님이 참으실 한계를 넘어서는 죄악이 관영하는 소돔과 고모라의 심판이었다. 순진한 롯은 그 도시의 사람들을 끝까지 형제로 여겼으나 (19:7 '형제들아') 그들은 롯을 잔인할 정도로 냉정하게 이방인 취급하였다 (19:9 '이방인으로 우거하면서'). 또 롯이 내어놓은 두 딸을 집단 성폭행하는 것도 생각하기 어려운 타락인데 그것을 마다하고 심히 부패한 마음을 따라서 롯을 찾아온 손님과 기어이 동성애를 하고야 말겠다고 함으로 그들의 죄가 얼마나 심각한 수준에 있는가를 보여 주었다. 우리는 이 천사들의 방문에서 또 한 번 아브라함을 통한 하나님 나라의 건설(구원)과 소돔과 고모라라는 세상 나라의 심판이 공재하는 순간을 본다. 그런데 그 심판을 그냥 행해 버리시는 것이 아니라 선지자되는 아브라함에게 숨기시지 않으시고 알리심으로 어떤 의미에서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심판에 동참된 것을 나타낸다 (18:17-21). 이 심판의 정보를 듣고 아브라함은 수동적으로 머물러 있지 않았다. 그는 동양에서만 그 정서를 이해할 수 있는 과감한 게임을 감히 하나님과 하여 50인에서 10인까지 흥정해 내려간다. 이 희극성 속에서 그냥 두면 심판 속에 반드시 희생될 조카 롯에 대한 사랑과 관심이 전혀 언급되지 않았으나 강력한 열기로 전달된다. 적어도 소돔에 10인의 의인은 있을 것이고 그 속에 롯이 포함될 것이라는 계산을 아브라함은 한 것이다. 그러나 그 예상은 빗나가서 의인이라고는 오직 롯밖에 없었다는 것을 아브라함은 곧 알게 될 것이었다.

 


 

반면에 롯의 탈출은 극적이었다. 영적으로 타락한 환경을 잘못 선택한 롯을 잡아당기는 소돔의 끈은 너무나 강인했고 끈질겼다. 먼저 결혼이 확정되고 다른 사람과 결혼하면 그 사회에서 버려지게 될 상태에 있는 딸들과 정혼한 사위들이 롯과 같이 소돔을 떠나기를 거부한 것이다. 딸을 데리고 떠나라는 천사의 명령이 없었으면 롯은 결단을 못내릴 처지였다. 그리고 롯의 아내가 얼마나 정신적으로 영적으로 소돔과 강하게 연결되었는가는 천사의 명령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뒤를 돌아보는 것으로 나타났다. 소돔이 롯을 잡아 당기고 있는 최악의 강인한 끈은 소돔이 멸망된 후에도 없어지지 않고 바이러스처럼 롯의 가정에 껍질을 쓰고 남아 있었다. 그 끈은 살아남은 롯의 두 딸이 소돔에서 눈으로 보아서 배웠던대로 자기의 아버지와 성적인 관계를 가짐으로 자손을 이어갈 비참한 계획을 수행해 버리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미 이스마엘을 인정하시고 큰 민족이 되게하실 계획을 보이신 하나님(16:10-12)은 여기서도 인간이 만들었으나 인간이 도무지 풀 수 없는 역사의 실마리를 자신이 푸실 것을 약속하신다. 즉 롯의 두 딸을 통해서 그렇게 더럽게 태어난 모압과 암몬의 후손들을 이스라엘 옆에 살게 하심으로 궁극적으로 이스라엘에서 시작되는 은혜를 미래에 나누어 가질 수 있게 하신 것이다 (19:36-38). 타락중에 태어난 이 아이들을 살려서 민족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결국에는 승리로 나타날 것이나 그것은 하나님 편에서는 고귀한 독생자를 죽도록 버려두시는 엄청난 역사를 통해서만 이루어지는 것이다.

 


 

아브라함은 사라의 미모 때문에 남방에서 장차 그 후손들이 싸울 불렛셋의 선조였던 아비멜렉에게 또 한번의 실수를 범한다 (20장). 이것은 소돔 사건에서 보인 믿음의 용사가 했으리라고는 도무지 생각할 수 없는 나약한 아브라함의 모습이다. 그러나 이 상황은 단순한 위기가 아니라 하나님의 씨에 대한 근본적인 약속이 무너질 위기와 관계있는 것이다. 논리적으로 만약 사라가 늙었지만 하나님의 약속대로 여성으로서 다시 배란할 수 있는 능력을 얻었을 때 아비멜렉과 관계한다면 하나님 나라의 전체 계획이 허물어지게 되고 여기에 대한 책임은 하나님이 지셔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이 점 대신에 순전히 인간적인 것만을 고려하여서 순간을 모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오히려 신자가 불신자에게 책망을 듣는 부끄러움의 역사가 애굽에서와 마찬가지로 재현하게 하셨다. 이렇게 아브라함이 부끄러움을 당하는 것은 하나님께도 수치이지만 장차 세상에 있는 하나님 나라가 받아야 할 교훈과 심판을 위해서 자신의 이름이 걸린 성전조차 헐어버리실 하나님의 놀라운 속성과 일치하는 것이다.

 


 


 

기다리던 아들 이삭이 태어났을 때 17장에 나타났던 웃음의 희극적인 요소가 완성되었다. 태어날 아들에게 붙여진 이삭이라는 이름을 사라가 흔쾌히 받아들였다는 것은 사라가 출생을 전후해서 붙인 코멘트(21:6)에 잘 나타나 있다 : "하나님이 나로 웃게하시니 듣는 자가 다 웃으리로다." 비웃음이라는 부정적인 의미로 하나님께서 주신 이름이 이제는 기쁨을 주는 웃음이라는 긍정적인 의미로 전환되었다. 또 한 번 은혜의 승리를 경험하는 현장이다. 그러나 모두가 파안대소하는 시간들이 진행되는 어느 한 날, 이삭이 젖을 떼는 날에 갑자기 찬물이 끼얹어졌다. 하갈의 아들 이스마엘이 이삭을 조롱한 것이다. 여기에 대해 사라가 이스마엘과 그 어미 하갈을 내어쫒기를 얼음과 같이 차겁게 요구하는 것에 대해 아브라함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깊이 근심한다' (21:11). 그러나 또 한 번 인간의 죄와 불순종 때문에 생겼으나 인간이 처리하지 못하는 역사의 문제를 하나님은 당신의 손에 맡으셨다 (21:12-13). 하나님은 광야로 쫒겨간 하갈과 이스마엘에게 우물을 발견하게 하심으로 그들을 보호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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