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열왕기상(구속사)

열왕기상 3장,레브 쇼메아

호리홀리 2015. 7. 15. 12:01

두 여인이 한 아기를 두고 서로 자기 아들이라며 옥신각신한다. 솔로몬은 이에 “칼로 아기를 반으로 나눠 공평하게 두 여인에게 주라”고 명령한다. 한 여인은 대뜸 그렇게 하라고 한다. 다른 여인은 제발 죽이지 말

라고 사정을 한다. 이 말을 들은 솔로몬은 아기를 죽이지 말라고 하는 여인이 친모라고 한다.

 

이 재판은 쉬운 재판이 아니었다. 본문에 언급된 두 여인은 평범한 여인이 아니었다.  ‘매춘부’였다. 몸은 다 망가져 있었을 것이다. 가장 밑바닥의 신분으로 사회의 주변인으로 살며 온갖 설움을 당하며 살았을 것이다. 정상적으로 결혼을 해서 아기를 낳고 살아가는 삶은 꿈도 꾸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 두 여인에게 꿈같은 행복이 찾아왔다. 어떤 경로였는지는 모르겠으나 이 두 여인이 각각 아들을 낳게 된 것이다. 이 아기들을 낳고 얼마나 신기해하며 기뻐했을까. 아들을 잘 키우겠다는 욕심이 가득했을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사건이 터진다. 이 여인들 중 한 명이 잠자다 실수로 아들 위에 누워 아들이 죽게 되는 사고가 발생한 것이다. 사실 대부분의 아기 엄마들이 갓난아기를 옆에 눕히고 자지 않는가? 그렇지만 아기를 깔아뭉개어 죽게 만드는 경우는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 그런데 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18절에 의하면 당시 집에는 두 여인들 외에 아무도 없었다고 한다. 아기는 낳았지만 버려진 인생인 두 여인들을 곁에서 몸조리 해 주는 사람이 전혀 없었던 것 같다. 창기였기에 주변에서 아기를 낳아 기르는 모습도 이 두 여인은 좀처럼 보지 못했을 것이다. 이 여인들은 아마 잘 길러 보려고 몸도 회복되지 않은 상태에서 밤낮을 가리지 않고 아기를 돌보다 몸이 많이 피로해졌던 것 같다. 피곤해진 몸으로 인해 여인은 자기 아들이 깔리는 것조차 몰랐던 어처구니없는 일이 일어나게 된 것이다. 이런 정황을 고려해 보면 자기 아기를 깔려 죽게 한 이 여인에게 많은 동정이 간다.

 

 아기가 죽었다. 일어나서는 안 될 비극이 지금 이 여인에게 일어나고 말았다. 심각한 문제가 생겼다. 얼마나 두려웠을까? 고민하다 이 여인은 해서는 안 될 일을 저지르고 만다. 자기 아기를 살아있는 아기와 바꿔치기 한 것이다. 중범죄를 저지른 것이다.

이 범죄를 순간의 실수였다고 보는 것은 좀 문제가 있다. 생각해 보라. 아기를 바꿔치기 한 후 옆에 자고 있던 여인이 일어나 깜짝 놀랄 때까지 범죄한 여인은 잠을 자지 못했을 것이다. 자기가 낳은 자기 친 자식을 먼발치 밀어놓고 남의 자식을 끌어안고 있는 이 여인의 마음은 과연 편했을까? 죽은 자기 자식에 대한 미안한 마음으로 억장이 무너지지 않았을까? 더군다나 옆에 누워있던 여인은 자기 친구 아닌가? 세상에서 마음을 따뜻하게 나누었던 유일한 친구였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아이를 기르고 싶은 그 강렬한 욕심이 끝내 범죄를 저지르게 했다. 친구 아기를 도적질한 후 밤새 불안한 마음에 갈등이 많았겠지만 아침이 되도록 아기를 돌려놓지 않는다.

일은 벌어졌다. 이제 이 여인에게 남은 선택은 끝까지 거짓말하고 자기 아들이라고 우기는 것이다. 둘 사이에서 해결이 되지 않자 결국 솔로몬에게까지 재판이 회부된다. 생각해 보라. 솔로몬은 왕이 아닌가? 한가하게 왕이 늘 창기들 문제까지 재판해 주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무슨 말인가? 왕이 아니면 해결이 안 되는 지경까지 왔다는 뜻이다. 지금은 유전자 감식 등의 방법을 통해 쉽게 판결할 수 있겠지만 당시로서는 참 어려운 재판이었을 것이다. 추정컨대 솔로몬에게까지 이 재판이 회부되기 전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수많은 재판이 앞서 열렸을 것이다. 그리고 앞선 재판들에서 죽은 아들의 어미는 재판에서 지면 이제 다 끝장이므로 온갖 꾀를 내어 거짓말을 해 댔을 것이다. 그리고 재판에 여러 번 참석하면서 이제 거짓말에 이력이 붙었을 것이다.

이 재판은 결국  솔로몬의 명 판결로 끝나게 된다. 서로 너무 필사적으로 변론했기에 그 이전 재판관들은 판결을 포기해 버린 이 사건을 솔로몬은 가뿐히 해결해 낸다.

범죄한 여인은 솔로몬 앞에서도 자신의 입장을 굽히지 않고 사력을 다해 거짓말을 했을 것이다. 하지만 거짓 어미의 변론이 솔로몬에게는 안 통했다. 솔로몬은 가만히 듣고 있다가 아주 엉뚱한 명령을 내린다. 칼을 가져오라는 것이다. 그리고 둘 모두 아기의 어미라 하니 칼로 반을 잘라 반 씩 주라는 것이다. 이 엉뚱하고 돌발적인 명령에 두 여인은 ‘즉각적으로’ 반응한다. 한 명은 내 것도 네 것도 되게 말고, 나누자고 한다. 다른 한 명은 제발 죽이지 말라고 한다. 심리학적 연구가 필요하겠지만 결과적으로 볼 때 범죄한 여인은 솔로몬의 이 엉뚱한 질문에 걸려든 것이다. 아마 그 여인은 여러 번의 재판을 받아오며 예측 가능한 이른바 ‘이성적’인 질문들에 대해서는 마음에 단단히 준비를 해 두었을 것이다. 반면 솔로몬의 예기치 못한 이 명령에 대해서는 전혀 마음의 준비를 못했던 것 같다.

 

 솔로몬의 이런 재치와 기지가 어디서 나왔을까? 흔히 대답할 것이다. 하나님께서 솔로몬에게 주신 ‘지혜’ 때문이라고. 앞서 말하자면 정확한 답변은 아니다. 그럼 정답이 뭔가? 정답을 찾기 위해 이 재판 이야기 바로 앞 본문(1-15절)을 들여 다 보자.

다윗을 이어 왕이 된 솔로몬은 하나님께 감사의 예배를 드린다. 일천 마리가 넘는 번제물을 준비한다. 일천 마리 번제물을 잡으려면 넓은 곳이 필요했기에 기브온까지 가서 제사를 드리게 된다. 제사 드리던 날 밤 기브온에 있던 솔로몬에게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물으시자 솔로몬이 대답한다.

“누가 주의 이 많은 백성을 재판할 수 있사오리이까. 지혜로운 마음을 종에게 주사 주의 백성을 재판하게 하여 선악을 분별하게 하옵소서. 솔로몬이 이것을 구하매 그 말씀이 주의 마음에 맞은지라.”(9-10절)

 

 솔로몬이 하나님께 구한 것은 ‘지혜’(호크마)가 아니다. 개역성경이나 표준새번역성경에서 ‘지혜로운 마음’으로 되어 있다. 하지만 이것 역시 정답은 아니다. 왜냐하면 개역성경의 ‘지혜로운 마음’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단어는 ‘레브 쇼메아’인데  쇼메아는 쉐마에서 온 단어로 이 말의 뜻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마음이다. 쉐마는 순종이 포함된 단어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듣는 마음을 달라고 한것이 하나님 마음에 맞았다. 또한 “듣는 마음”(listening heart)은 사람들의 말을 듣는 것을 의미 한다.   솔로몬은 자신이 왕이 되어 재판을 할 일이 많아졌으니 행여 공평되지 못한 판결을 하지 않도록 ‘레브 쇼메아’, 즉 들을 수 있는 마음과 가슴, 귀를 달라고 하나님께 구했고, 바로 이것이 하나님의 마음에 맞았다는 것이다.12절에서는 아주 분명하게 “지혜로운 마음” 즉 히브리어로 표현해서 “레브 하캄”이라고 표현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하캄이라는 말은 “지혜”를 말한다.                                   

 

 

 “하캄”은 “듣는 마음”에서 온다. 

 

 

 본문은 하나님께서 지혜를 주셔서 어떤 문제가 닥치든지 척척 알아내는 그런 사람으로 솔로몬을 소개하고 있지 않다. 반대로 누가 오든지 외모로 그 사람을 판단하지 않고 그 사람 이야기를 잘 경청할 수 있는 마음과 자세를 달라고 간구했던 사람으로 솔로몬을 소개하고 있다.

이런 점들을 염두에 두고 두 여인의 재판 이야기를 읽으면 이해가 잘 된다. 전술한 대로 이 재판은 판결하기 어려운 재판이었다. 생사가 달린 문제이므로 죽은 아들을 둔 여인은 죽음을 각오하고 거짓말 한다. 그래서 솔로몬 이전 재판관들은 다 포기했다. 하지만 솔로몬은 이 재판을 아주 쉽게 해결한다. 무엇이 달랐을까? 솔로몬의 지혜 때문인가? 본문에 의하면 솔로몬이 선물로 부여 받은 ‘듣는 마음’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솔로몬은 두 여인이 자신들의 입장을 변호하며 열변을 토할 때 이들의 이야기를 흘려듣지 않고 귀담아 경청했다. 들으며 하나님께 기도했다. 그리고 그 결과 거짓과 참을 구분해 내는 명 판결에 이르게 되었다.

 

 예수님은 위로는 하나님의 음성을 늘 듣고계셨고 아래로는 사람들의 소리를 들으셨다.수로보니게여인의 외침도 바디메오의 절규도,불의한 재판관의 비유에서도  듣는 마음은 예수님의 마음이다.주여!우리에게도 이 마음을 주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