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열왕기상(구속사)

열왕기상 18:1-20,하나님나라의 두 영웅

호리홀리 2015. 5. 1. 09:36


(1) "너는 가서 아합을 만나라"(1절)



엘리야는 충격적인 말씀(왕상 17:1)을 전한 후,  도망치고 몇년 간 숨어 살아야 했다. 그렇지만 그 동안 그는  하나님을 만나고 기도의 능력을 체험하며 자신의 부름을 확인하는 시간을 가졌다. 그는 사렙다 과부 집에서 그녀의 죽은 아들을 위해 간절한 중보 기도를 드렸으며 "당신은 참으로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확인을 받았다(17:24).  사역을 떠난 긴 세월은 그에게 믿음의 단련 기간이었다. 우리 말로 "제 삼 년에"(<개역>)는 원어에서 문자 그대로 꼭 만 삼 년을 말하지는 않는다. 제 삼 년은 첫해와 마지막 해를 포함한다면 좀 더 짧을 수 있다. 문자 그대로 삼 년이었으면 고대 농경사회에서 치명적이었을 것이다. 물론 야고보서에서 "엘리야는 간절히 기도한 즉 삼 년 육 개월 동안 땅에 비가 오지 아니하고 다시 기도한 즉 하늘이 비를 주었다"(5:17-18)고 하는데 이 "삼년 육개월"은 합하면 7,완전수,완전한 징계,기다림일 것이다.  엘리야에게 "너는 가서 아합에게 보이라"고 명하신다. 이전에  엘리야에게 "숨으라"고 명하셨으나(17:2) 이제 "아합에게 너를 보이라"(18:1)고 명하신다.  그는 잠깐 동안 은둔생활을 했다. 현실을 잠깐동안 피하는 것은 목숨을 건지거나 영적인 휴식을 위해서이다. 그러나 완전히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세상을 등지고 소위 속세를 떠나는 것은 옳지 않다. 예수께서는 우리를 세상에서 데려가 달라고 기도하지 않았고, 오히려 악에서 보전되도록 구하였다(요 17:15). 우리도 엘리야처럼 휴식과 연단을 위해 잠깐 현장을 떠날 수 있지만 그러나 현장으로 다시 부르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드디어 엘리야를 보내시는 목적을 말씀하신다. "내가 비를 땅 위에 내리리라". 오랫동안 이스라엘에는 "비도 이슬도 그쳤다." 헬몬산에서 시온산까지 내리던 이슬도 그쳤다"(시 133:3). 그러나 이제 "은총의 비"와 "축복의 비"가 다시 내리기 시작할 것이다. 한발로 인한 기근도 이제 곧 끝날 것이다. 또한 엘리야의 등장으로 살아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던 영적인 기근과 가뭄도 끝날 것이다.



(2) 아합을 만나러 가는 엘리야(2절)



"너는 가서 아합에게 보이라"고 하나님은 명령하셨고, 엘리야는 "아합에게 보이려고 갔다"(2절). 여기에 가벼운 변화가 있다. 저자는 "엘리야가 가서 자신을 보였다"고 말하지 않고, "자신을 보이기 위하여 갔다"라고 말한다. 즉, 엘리야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떠나간 "목적"은 자신을 아합에게 보이기 위함이었다. 엘리야가 자신을 아합에게 보이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동안 아합은 엘리야를 찾기 위해 뒤지지 않은 "족속과 나라가 없었다"(18:10). 아합에게 나타나는 것은 자신의 목숨을 맡기는 것과 같았다. 그러나 하나님의 "명령"에 엘리야는 순종한다. 그는 사자 같이 담대하다(잠 28:1). 그는 너무나 위험한 사마리아로 돌아간다. 마치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들어가는 것 같은 분위기이다. 또한 루터가 보름스 회의에 소집을 당하고 "보름스의 모든 기왓장이 마귀가 된다 하더라도 나는 가리라"고 말한 것과 같다. 믿음의 사람 엘리야는 주저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말씀에 완전하게 순종하는 엘리야의 대조와 철저하게 불순종하는 아합의 대조가 강하다. 이 둘은 결국 오바댜의 중재로 이 이야기의 끝부분에서 만나게 된다(16-19절). "그 때에 사마리아에 기근이 심하였더라"라는 말로서 저자는 아합의 관점에서 기근의 영향력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그 동안 한발이 3년째 임했기 때문에, 무서운 기근의 영향력을 우리는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아합이 바알을 가장 열심히 섬기는 이스라엘의 수도인 사마리아도 예외가 아니었다(16:32). 이곳은 왕이 가장 신경을 많이 쓰는 곳이며, 그의 모든 정열을 다 쏟아 돌보는 곳이다. 그러나 '사마리아' 조차 기근의 영향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왜냐하면 이 기근은 단순한 보리 고개가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의 심판이었기 때문이다. 옛날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언약을 깨뜨리고 다른 신을 섬기면, 기근과 한발이 올 것을 예언하였다(신 28:48; 32:24).

이제 북쪽 이스라엘에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 모세의 저주를 몸으로 경험하고 있다.




열왕기 저자는 엘리야와 아합의 대결로 바로 들어가기 전에 예비적인 싸움을 먼저 보여준다.  저자는 이런 예비 싸움을 통해 이야기의 흐름을 조절하여 긴장을 더욱 고조시키며 아합과 엘리야가 몇 년 만에 다시 만나 어떤 한판을 벌일지 우리가 궁금하게 여기게 한다. 또한 여기에서 '오바댜'의 등장은 여러 모로 놀랍다. 그는 엘리야와 아합의 길고 긴 대결에서(왕상 17-20장), 오직 여기에만 등장하고 무대 뒤로 사라지지만 아합과 엘리야의 갈멜산 대결의 무대를 완벽하게 준비해 주고 있다. 또한 그는 아합의 가장 가까운 측근이지만 하나님의 가장 신실한 종으로서 "비둘기 같이 순결하고 뱀 같이 지혜로운" 이중적 성격을 절묘하게 갖고 있는 인물로 나타난다.  



(3) "여호와의 종 오바댜"(3절)



"오바댜"란 이름은 "여호와의 종"이란 뜻이며, 그의 이름에 걸맞게 "크게 경외하는 자"로 소개된다. 그는 아합이 가장 총애하며 신임하는 "아합의 종"이었지만, 그의 근본적인 신분은 "여호와의 종"이었다. 아합 시대에 "하나님을 크게 경외하는 것"은 마치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들처럼 큰 위험을 초래하였을 것이다.

"오바댜"는 아합의 "궁내 대신"이었다. 이 칭호는 왕궁에서 가장 높은 직위를 가리키는 전문 술어이다. 이 직책을 가지는 자는 다윗과 솔로몬 시대에는 왕궁과 왕실 재산을 돌보는 일을 했지만 점점 높아져서 이후에는 왕 다음 가는 총리의 역할을 하게 되었다(사 22:15-24; 36:3; 왕하 15:5; 18:18). 오바댜는 왕궁에서 큰 책임을 맡고 있었기 때문에 늘 아합의 측근에서 일하고 있다.



(4) 오바댜의 양면(4절)



오바댜의 사람됨을 소개하기 위해 저자는 "거의 불가능한 헌신"을 소개하고 있다. 이전에 이세벨은 "여호와의 선자자들"을 "멸하였다"(killing off)고 한다. 여기에서 "멸하였다"는 단어는 "학살하였다"로 번역하는 것이 더 우리 말 느낌에 가깝다(<표준>, <공동>). 이세벨은 주의 종들을 완전히 죽였으며 집단적으로 없애 버렸다. 여기에서 우리는 처음으로 선지자들을 조직적으로, 체계적으로 박해하는 이야기를 보게 된다. 이세벨은 선지자들의 박해에 물꼬를 튼 여인이다. 그녀로부터 시작하여 사람들은 선지자를 죽이는 데 점점 담대해지기 시작하였다. 이리하여 이스라엘의 역사는 선지자들의 피로 점철되기 시작하였다. 소위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의 사자들을 거부감과 적대감으로 대하였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보다 오히려 전하는 자를 공격한다. 주님의 증인들은 감금과 죽음의 운명을 받아들였다(대하 16:10; 18:25-26). 엘리야 시대에 많은 선지자들이 죽었고, 도망치고, 위기 가운데 있었다. 가장 위대한 선지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최후의 선지자로  왔을 때에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다(마 21:33-41).

"이세벨이 여호와의 종들을 무차별하게 학살하고 있을 바로 그 때에" 오바댜는 100명이나 되는 선지자들을 동굴에 감추고 살렸다. 이 때 이세벨은 백성의 피땀 어린 혈세를 빼앗아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들에게 먹을 것과 마실 것을 넘치게 공급하였다. 그녀의 상에는 바알 선지자 450명과 아세라 선지자 400명이 삼시 세끼로 포식하고 있었다(19절을 보라). 그러나 오바댜는 왕실의 뜻을 거스리며 주의 선지자들의 목숨을 건져줄 뿐 아니라 그들을 돌보고 있다. 이런 일은 자신의 목숨을 걸지 않으면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는 참으로 '오묘한 사람'이었다. 그는 아합의 충신이면서 하나님의 진정한 충신이었다. 이 양면성이 어떻게 균형을 이룰 수 있는 지 우리는 모른다. 그러나 이 어두운 아합의 시대에 오바댜는 아합에게 가장 가까우면서도 가장 빛나는 사람이었다. 그는 단지 여호와를 마음으로만 경외하지 않고 온 몸을 던져 섬기고 있다. 오바댜는 바울이 로마에 있을 때 "시저 집에 있는 사람들"과 같다(빌 4:22). 그는 평신도 신자의 모델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주를 경외하는 자였고"(12절) 큰 위험과 유혹 속에서 자신을 지킬 뿐 아니라, 주님을 위해 최고의 봉사를 드린다. 그는 분리주의자도 분파주의자도 아니었다. 그는 영향력 있는 중요한 위치에서 원리를 희생하지 않고 주님과 나라를 위해 값진 봉사를 드린다.



(5)  아합(5-6절)  



등장인물과 배경에 대한 모든 설명을 마친 후 아합이 오바댜에게 "가자"라고 한 말과 함께 드라마가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한다. 드디어 아합이 화려한 왕복을 걸치고, 위엄 있게 그의 궁내 대신을 향하여 "가자"라고 말하며 얼굴을 내밀고 있다. 물론 지금 엘리야는 이 아합을 만나기 위해 어디에선가 오고 있을 것이다.

아합은 오바댜에게 "샘의 근원과 모든 시내를 샅샅이 찾아보자"라고 말한다. 3년 기근이 왔으니 마르지 않은 샘과 시내가 없을 것이며 풀도 찾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렇지만 아합은 무엇을 위해 "물"과 "꼴"을 찾고 있는가? 흥미롭게도 아합은 자신의 백성과 신하를 위해서가 아니라, 그의 말과 노새를 위해 절망적으로 물과 건초를 구하고 있다(18:5). 그의 백성은 굶주려도 그들은 그의 사유 재산은 아니다. 아무리 백성이 어려워도 그는 자기 재산을 잃을 수 없다. 아합은 자신의 말과 나귀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지며, 백성 보다도 자신의 가축을 더 열심히 돌보고 있다. 아합은 참으로 "목자 왕"(shepherd king)이다.

아합의 "말과 노새"에 대한 관심은 역사적으로도 인정받고 있다. 그는 오론테스 강에 있는 칼칼(Qarqar)에서 앗시리아의 대왕 샬만에셀 3세와 싸울 때 이천 대의 전차를 몰고 간다. 이 시대에 조그만 이스라엘에 이천 대의 전차가 있었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렵다. 그는 엄청난 군비를 전차부대 유지에 쏟고 있다. 그러나 나라에 시련이 닥쳤을 때, 그는 다윗과 너무나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다윗은 "나는 범죄하였고 악을 행하였삽나이다. 이 양의 무리는 무엇을 행하였나이까?"(삼하 24:17)며 회개하고 애통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의 양을 구하기 위해 친히 자신을 십자가에 제물로 드린다. 예수 그리스도는 진정한 의미에서 "선한 목자"이시다. 이스라엘과 고대 근동아시아에서 왕권은 주로 목자의 영상으로 그려진다. 좋은 왕은 선한 목자이다. 그들은 백성을 양처럼 보호하고 돌보며 필요를 채우고 복지를 도모한다. 아합은 다윗과 예수 그리스도와 대조를 이룰 뿐 아니라 그의 신하 오바댜와도 대조를 이룬다. 이것이 열왕기 저자의 중심 관심이다. 오바댜는 그 이름대로 "여호와의 종"이며  "크게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요 사마리아에 양식과 물이 없어지면서 생필품 가격을 예측할 수 없을 때 매점매석하여 부를 쌓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왕과 왕후의 살인적인 분노 속에서 수 백 명의 선지자들을 숨기며 먹이고 돌본다. 그러나 왕 아합은 모든 백성이 굶주리고 있을 때 자기 말과 노새의 꼴을 구하고 있다.

아합이 자신의 말과 노새를 위해 꼴을 찾는 모습은 일면 심각하면서도 또한 우스꽝스럽다. 얼마나 다급했으면 왕이 자신의 짐승을 위해 "꼴"을 찾고 있는가? 그는 왜 하나님을 찾지 않고 "혹시 재수가 좋으면, 꼴을 얻을 수 있으리라"고 말하는가? 아합은 하나님의 진노를 걱정해야 할 때 말과 노새의 건초에 대해 걱정한다. 어떻게 이럴 수 있는가? 그렇지만 이것이 우리의 모습이 아닌가? 하나님이 지으신 환경은 날마다 파괴되며 난 개발과 홍수로 고통 가운데 살지만 여전히 사람들은 더욱 부를 쌓고 그 결과로 자의적인 인생의 행복을 추구하려고 한다. 그렇지만 그들은 결코 만족할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생수의 근원되신 주님"을 찾지 않고 물을 저축할 수 없는 웅덩이나 파고 있기 때문이다(렘 2:13). 


"이리하여 그들은 전국토를 둘로 나누고 한쪽은 아합 자신이, 다른 한쪽은 오바댜가 담당하여, 제각기 길을 나섰다"(6절, <표준>). 오바댜는 아합의 충복이지만 그들은 "각기 자신의 길을 간다." 이것은 꼴을 찾기 위해 서로 헤어지는 장면이지만 그들의 운명이 다르다는 것을 암시적으로 보여주는 것 같다.



(6) 오바댜와 엘리야의 첫만남(7-8절)



"내 주 엘리야여 당신입니까?"(7절)

이 절은 오바댜의 관점에서 엘리야를 우리에게 생생하게 비추어 주고 있다. 오바댜가 자신의 길을 가고 있을 때, 갑자기 엘리야가 그에게 나타난다. 이 두 사람의 만남은 필연적이었을까? 주님께서는 엘리야와 아합을 바로 대면시키지 않고, 서로가 가장 신뢰할 수 있는 오바댜를 통하여 둘의 만남을 주선하고 있다. 오바댜는 엘리야를 보자말자 그를 바로 알아 보았다. 그는 서둘러 얼굴을 땅에 대고, "내 주 엘리야여 당신 입니까?"라고 묻는다. "정말 당신이 엘리야 입니까?"라는 정체 확인을 위한 질문이 아니다. 이것은 "엘리야 선생님, 정말 그동안 평안하였습니까?"라는  깊은 문안이다.


"나다, 가서 너의 주에게 내가 여기 있다고 말하라"(8절)

오바댜의 겸손과 사랑이 넘치는 문안에는 전혀 아랑곳 하지 않고, 엘리야는 "나다"라고 거칠게 한 마디로 대답한다. 그리고 여덟 마디를 덧붙인다. "가서 네 주에게 고하기를 엘리야가 여기 있다 하라"(원어는 다섯 단어임). 그는 그동안 어떻게 살았는지, 왜 다시 나타났는지, 아합에게 무엇을 하려는지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단지 "너는 가서 내 말을 전하라"고만 한다. 오바댜가 엘리야를 처음 대하는 태도를 생각해 보면 엘리야는 상당히 교만하고 무례하다. 우리는 왜 엘리야가 이런 고자세를 취하는지 알지 못한다. 이 시점에서 엘리야는 오바댜의 믿음과 선행을 인정하고 있지 않다. 그는 분명히 오바댜를 알고 있다. 그러나 좋은 믿음의 동지로 인정하고 있지 않다. 그는 오바댜를 아합의 종으로 생각하며 오바댜가 자신의 믿음의 정체성을 더욱 뚜렷이 해야 한다고 생각했을 수 있다. 엘리야는 의도적으로 자신을 오바댜로부터 멀리 하고 있다.



(7) 오바댜와 엘리야의 두 번째 만남(9-16절)



오바댜는 엘리야의 대답을 듣고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있다. 그는 엘리야가 그에게 준 명령, "가서 아합에게 엘리야가 여기 있다"를 두 번이나 인용하며(11, 14절), 그것은 자신을 죽이는 일이라고 말한다. 그는 "당신이 당신의 종을 아합의 손에 붙여 죽이게 하려 하십니까?"를 세 번이나 반복하고 있다(9, 12, 14절). 그의 첫 마디, "내가 무슨 죄를 범하였기에 당신이 당신의 종을 아합의 손에 붙여 죽이게 하려 하시나이까?"는 수사학적인 질문이다. 그는 엘리야가 자신의 목숨을 위태롭게 한다고 강하게 항의한다. 그는 엘리야가 그에게 맡긴 일을 결코 하고 싶어하지 않으며 할 수도 없다는 점을 네 가지로 제시한다.



첫째, 아합은 "병 안에 갇힌 지니"처럼, 만약 엘리야를 잡으면, "분노의 병 안에서 벗어나" 그를 능지처참 하리라고 이를 갈고 있었다. 그는 엘리야를 찾기에 혈안이 되어, 온 이스라엘 뿐 아니라 인근 나라를 뒤지지 않은 곳이 없었다(10절). 아마 이세벨이 아합을 부추겼기 때문에 그로서는 모든 정보부원을 동원해도 엘리야를 찾지 못했을 때 자존심이 깊이 상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제 엘리야가 나타났다는 사실을 오바댜가 전해주어야 한다. 그가 이 사실을 전할 때 아합이 어떤 반응을 보일까? 그는 결코 오바댜에게 상을 줄 것 같지 않다. 그는 엘리야에게 뺨 맞고 오바댜에게 갚을 수 있었다.

둘째, 엘리야는 마치 '바람의 아들'처럼, 언제 어디로 사라질 지 아무도 모른다. 따라서 오바댜가 아합에게 보고하러 간 사이에 "여호와의 신이 나의 알지 못하는 곳으로 당신을 이끌어 가버린다면," 아합은 대노할 것이고, 그것은 오바댜의 목숨을 위태롭게 하는 일이 될 것이다(12절).

셋째, 아합의 변덕과 엘리야의 종잡을 수 없는 변화를 언급한 후 오바댜는 비로소 자신을 변호한다. 그는 엘리야에게 "당신의 종은 어려서부터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라"라고 말한다(12절 하). 우리는 앞에서 저자가 "이 오바댜는 크게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라"고 소개한 말을 들었다. 저자가 오바댜를 칭찬할 때 우리는 감동을 받지만 오바댜 자신이 그의 믿음을 은근히 자랑하는 듯한 암시를 할 때 우리는 그에 대해 약간 주춤하게 된다. 그러나 여기에서 "어려서부터"라는 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오바댜는 모태신앙이었을 뿐 아니라, 그 자신이 "어려서부터" 주님을 인격적으로, 개인적으로 믿어왔다. 그의 믿음은 "냄비처럼" 확 달아오고 식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무쇠 솥처럼" 평생동안 주님을 의지하고 따르는 삶이었다. 따라서 어떤 배도와 시련이 있다 하더라도 그는 주님을 신실하게 믿어왔다고  엘리야에게 말하고 있다.

넷째, 오바댜는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그의 선행을 다시 반복한다(13절). 우리가 볼 때에 그가 여호와의 선지자를 100명이나 살려준 이야기를 다시 그의 입으로 말하는 것은 불필요한 반복같다. 이 훌륭한 그의 헌신은 그가 "어려서부터 주님을 믿어온 삶"의 열매요, 증거로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오바댜는 그의 헌신과 그의 죽음의 가능성을 연결시키고 있다(14절). 오바댜가 엘리야를 찾았다는 이야기를 아합에게 전할 때 어쩌면 아합은 '오바댜가 그동안 엘리야를 몰래 숨겨주지 않았을까?'라고 의심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의 의심을 확인하기 위해 오바댜를 몰래 조사하는 중에 그가 100명의 여호와의  선지자들을 숨겨 주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될 가능성도 있었을 것이다. 이런 사실이 드러난다면, 아마 아합은 오바댜의 칠족을 처형하려고 했을 것이다.

엘리야는 오바댜의 긴 항의와 설득과 변명을 들으면서 한 마디로 간단히 대답한다. "내가 모시는 만군의 여호와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내가 오늘날 아합에게 보이리라"(15절). 엘리야는 그의 첫 메시지처럼(17:1), 다시 맹세하며, 자신이 "여호와의 종"으로서 그의 "명령"을 신실하게 수행하며(18:1), 어떤 위기가 있더라도 "참으로 아합을 만날 것"을 확신시켜 준다. 엘리야는 분명히 말 수가 적은 사람이었다. 그는 꼭 필요한 말만 하고 있다. 이 이야기는 "오바댜가 아합에게로 가서 이 사실을 알렸다"는 이야기로 마무리 한다(16절 상). 그리고 오바댜는 다시는 엘리야나 아합의 이야기에 등장하지 않는다. 우리는 그가 이후의 삶을 어떻게 살았는지 모른다. 그렇지만, 그는 여호와의 선지자를 100명이나 살린 위대한 헌신을 하였을 뿐 아니라 "엘리야를 찾았다"는 위험한 메시지를 아합에게 증거하는 마지막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그는 분명히 "먼저 하나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는" 사람이었다(마 6:33).

 

(8) 아합의 비난(17절)



앞에서 오바댜가 엘리야를 만났을 때 그는 "내 주 엘리야여 당신입니까?"라고 물었다(7절). 이제는 아합이 엘리야를 만나자 말자, 그는 "이스라엘을 괴롭게 하는 자여 네냐?"라고 묻는다(17절). 이 두 사람의 질문 형식은 동일하다. 그렇지만 어조는 정반대이다. 저자는 두 만남을 소개할 때 앞에서는 오바댜의 관점에서 엘리야를 소개하였고, 여기에서는 아합의 관점에서 엘리야를 비추고 있다. 오바댜는 엘리야 앞에 엎드리며, "내 주 엘리야여"라고 부르지만 아합은 "이스라엘을 괴롭게 하는 자여 너냐"라고 비난한다.

우리 입술의 말은 우리 마음의 상태를 말해준다. 아합은 현재 이스라엘의 모든 고통이 엘리야의 책임이라고 생각한다. 여기에서 "괴롭게 하는 자"('oker)라는 말은 "망치는 장본인"(<표준>)이라기 보다 "재앙을 가져오다, 혼란스럽게 하다"는 뜻을 갖고 있다. 즉, "직접적인 책임" 보다는 "간접적인 책임"을 암시하는 말이다. 마치 아간은 개인적으로 가져서는 안 되는 전리품을 이스라엘 진 안으로 가져와 "이스라엘을 괴롭히는 자"가 된 것 같다. 아간은 이스라엘에 오염 물질을 가지고 들어와 온 공동체를 괴롭히는 결과를 초래하였다(수 7:25-16). 즉, 아합이 볼 때 엘리야는 뭔가 잘못하여, 이스라엘에 고통을 가져왔다는 것이다. 아합이 볼 때 엘리야는 '비의 신' 바알을 분노하도록 자극하여,  바알이 이스라엘에 비를 내리지 않고 있다고 비난하고 있다. 혹은 이스라엘에 기근과 한발은 "엘리야의 맹세"로 시작되기 때문에 마치 엘리야가 사울(삼상 14)이나 입다(삿  11:30-40)처럼 성급한 맹세를 하여 심각한 결과를 초래하게 되었다는 점을 비난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Roberts 1996:91). 아합이 모든 책임을 엘리야에게 전가시키는 것을 보면 그는 자신의 죄에 대해서는 소경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이 죄인의 참된 모습이다. 벧엘의 제사장 아마샤가 아모스에게 모든 책임을 전가하는 것을 보라(암 7:10-13). 바울과 실라는 빌립보에서, "이 사람들이 유대인인데 우리 성을 심히 요란케 하여 로마 사람인 우리가 받지도 못하고 행치도 못할 풍속을 전한다"는 비방을 받고 매를 맞는다(행 16:20-21). 바울은 데살로니가에서 "천하를 어지럽게 하던 이 사람들이 여기도 이르매"라는 비방을 받는다(행 17:6). 예수께서도,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지 못하되 나를 미워하나니 이는 내가 세상의 행사를 악하다 증거함이라"(요 7:7). 예수님 자신도 이런 비난을 받았다. "무리가 더욱 굳세게 말하되 저가 온 유대에서 가르치고 갈릴리에서부터 시작하여 여기까지 와서 백성을 소동케 하나이다"(눅 23:5).



(9) 엘리야의 대답(18절)



엘리야는 "내가 이스라엘을 괴롭게 한 것이 아니라 당신과 당신의 아비의 집이 괴롭게 하였으니 이는 여호와의 명령을 버렸고 당신이 바알들을 좇았음이라"고 대답한다(18절). 먼저 엘리야는 아합이 그에게 전가한 모든 책임을 그에게 되돌린다. 아합과 모든 오므리 집이 이 기근을 책임져야 한다. 오므리의 범죄는 "여로보암의 금송아지 우상"을 섬긴 것이며(왕상 16:25-26), 아합은 한 술 더 떠서 "바알을 본격적으로 섬기기 시작하였다"(16:31-33). 즉, 아합의 죄가 더욱 심각하다. 여기에서 "바알들"(원어)이란 복수형은 "가나안의 풍년신인 바알이 다양한 지역적 현상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the various local manifestations)"(G. H. Jones, 1 and 2 Kings, NCBC II:315). 이스라엘 주위에 있던 여섯 나라들(시리아, 두로, 블렛셋, 모압, 암몬, 에돔)은 모두 "바알"의 다양한 모습들을 섬겼다. 따라서 성경에서는 "바알들"이란 표현을 자주 사용한다(삿 2:11; 3:7; 8:33; 10:6, 10; 삼상 7:4; 12:10; 대하 34:4; 렘 2:23; 9:13; 호 2:15, 19; 총 13회, habe'alim).



(10) 엘리야의 제안(19-20절)



첫번째 대답에 이어 엘리야는 두 번째로 아합에게 명령한다. 대부분 성경에서 "명령"과 "순종"은 말을 문자 그대로 두 번 반복함으로써 이루어진다. 여기에서 엘리야는 "온 이스라엘과 이세벨의 상에서 먹는 바알의 선지자 사백 오십 인과 아세라의 선지자 사백 인을 갈멜산으로 모아 내게로 나오게 하소서"라고 아합에게 명한다(19절). 그러나 아합은 "이스라엘 모든 자손에게로 보내어 선지자들을 갈멜 산으로 모았다"(20절). 아합은 엘리야가 말한 "모든" 선지자들을 데려오지 않는다. 즉, 아합은 엘리야의 권위를 인정하고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이 전투에 참여한다. 이제 이스라엘 모든 자손들과 바알 선지자들이 등장하면서 새로운 전환이 이루어 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