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열왕기상(구속사)

열왕기상 17:2-7,말씀에 순종하라

호리홀리 2015. 4. 30. 12:05

말씀에 순종하라(왕상 17:2-7)
"내 말이 없으면 앞으로 비와 이슬이 내리지 아니하리라"는 엘리야의 맹세(1절)에 이어, 세 가지 이야기가 서로 이어지며 펼쳐지고 있다. 첫 이야기는 "여호와의 말씀이 엘리야에게 임하여 가라사대"로 시작하며(2절), 엘리야가 그 말씀을 따라 그릿 시냇가에서 숨어 사는 모습을 그려준다(2-7절). 두 번째 이야기도 "여호와의 말씀이 엘리야에게 임하여 가라사대"로 시작하며(8절), 엘리야가 그 말씀을 따라 사르밧으로 가서 숨어 사는 모습을 그려주고 있다(8-16절). 마지막 세 번째 이야기는 "이 일 후에"라는 새로운 시간대로 시작하여 사르밧 과부의 아들이 갑자기 죽음으로 야기된 위기와 생명의 회복 이야기를 담고 있다(17-24절).


1) "너는 숨으라"(17:2-3)
하나님은 갑자기 엘리야에게 숨으라고 명하신다(왕상 17:3; 18:1과 대조됨). 젊고 패기만만한 엘리야는 숨고 싶지 않았을 수 있다. 그는 주님을 위해 "각별한 열심"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의 기도 소리는 천둥 소리 같았을 것이며, 그의 설교는 폭포수가 쏟아지는 것 같았을 것이다. 그러나 "내 말이 없으면 수 년동안 비와 이슬이 내리지 아니하리라"는 단 한 마디를 던지고 도망쳐야 하는 수모(?)를 경험한다. 엘리야는 장차 더 큰 싸움을 해야 했기 때문에, 더 큰 주님의 연단이 필요하였고 사회생활이 없는 곳에서 주님을 더욱 의지하는 삶을 배워야 했다.

주님은 엘리야에게 "그릿 시내가에 숨으라"고 구체적으로 말씀하신다. 우리는 그릿 시내가 어디에 있는지 모르며, 엘리야가 그곳에 얼마나 오랫동안 숨어 있었는지도 모른다. 아마 가뭄이 팔레스타인의 넓은 지역으로 널리 확대되어 심각해질 때까지 있었을 것 같다(왕상 17:7-12). 엘리야는 그릿 시내 말고 다른 장소로 피하고 싶었을 수 있다. 그곳은 문화도 없고 사회생활도 없는 지극히 단조롭고 무미건조한 곳이었다. 그러나 주님은 그에게 "그릿 시냇가"로만 가라고 하시며 엘리야는 별 불평이 없이 순종하고 있다.

엘리야가 그릿 시냇가에 가서 숨어버리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관점에서 볼 때, 양식과 물의 기근 뿐 아니라, 하나님 말씀의 기근을 경험하는 것이 된다. "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 사람이 이 바다에서 저 바다까지 북에서 동까지 비틀거리며 여호와의 말씀을 구하려고 달려 왕래하되 얻지 못하리니 그 날에 아름다운 처녀와 젊은 남자가 다 갈하여 피곤하리라"(암 8:11-13).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지 않는 것 보다 더 절망적인 상황이 없다(시74:9).

2) "내가 까마귀들을 명하여 거기서 너를 먹이게 하리라"(4-7절)
엘리야가 그릿 시내로 피하여 숨는 이야기는 "하나님의 명령"과 "선지자의 순종"을 서로 잘 잇고 있다.


명령: "여호와의 말씀이 엘리야에게 임하여 가라사대"(2 상)

순종: "그가 여호와의 말씀과 같이 하여 곧 갔다"(5절)

명령: "너는 여기를 떠나 동으로 가서 요단 앞 그릿 시냇가에 숨으라"(3절)

순종: "그가 곧 가서 요단 앞 그릿 시냇가에 머물렀다"(5절 하).


위의 패턴을 보면 엘리야는 하나님의 명령에 철저히 순종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의 순종은 거의 문자적이며, 절대적이고 완전하다. 이것이 바로 이상적인 이스라엘의 모습이었다. 하나님은 자신의 말씀에 철저하게 순종하는 백성을 갖고 싶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을 버렸고 바알에게 무릎 꿇고 입맞추는 자들이 되어 버렸다.

하나님은 엘리야에게 "까마귀들을 명하여 거기서 너를 먹이게 하리라"고 약속하신다(4절). 그렇지만 왜 하필이면 까마귀인가? 매튜 헨리는 여기에서 "까마귀"에 대해 멋있는 설명을 하고 있다.

(1) 까마귀는 먹을 것을 보면 게걸스럽게 잡아 먹는 맹금류이다(잠 30:17).

(2) 까마귀는 부정한 짐승이며(레 11:15), 주님은 자기 백성들에게 "까마귀를 먹지 말라"고 명하셨다(신 14:14).

(3) 까마귀는 곤충과 썩은 고기를 먹고 사는 새이다.

(4) 까마귀는 조금 밖에 먹을 것을 가져올 수 없다.

(5) 까마귀는 자기 새끼조차도 잘 돌보지 않는다.

까마귀가 엘리야에게 먹을 것을 가져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며, 비록 까마귀가 먹을 것을 가져준다 하더라도 엘리야는 본능적으로 먹고 싶어 하지 않았겠지만, 하나님은 주권적으로 까마귀를 선택하셔서 엘리야를 돌보게 하신다(시 135:6). 하나님의 길은 우리 길과 너무나 다르다. 하나님은 바로의 딸로 하여금 모세를 나일 강에서 건지게 하여 바로의 아들로 자라게 하시며, 발람을 통해 메시야의 예언을 하게 하시고, 나귀의 턱뼈를 삼손의 손에 주어 블렛셋 군사들을 죽이게 하시며, 다윗의 물맷돌 하나로 블렛셋의 괴물 골리앗을 처치하게 하신다. 참새 한 마리가 떨어지는 것도 아시는 주님이 까마귀를 명하여, 엘리야에게 떡과 고기를 가져오게 하신다. 어떤 사람들은 여기의 "까마귀"('rbm)가 "아랍인" 즉, "사막에 거하는 베두인들"을 가리킨다고 말하지만(Skinner), 본문은 새들도 창조주의 뜻을 따르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시내 광야에서 방황할 때, 하나님은 "독수리"처럼 그들을 돌보셨다(신 32:11). 주님은 엘리야를 자신의 날개 그늘 아래에 두신다.

엘리야는 참 언약백성의 모델을 보여주고 있다. 그는 오직 주님께만 충성을 바치고 그만 섬긴다. 따라서 주님께서도 자신의 선지자를 버리지 않으시며, 주께 순종하는 나라에 복의 징표를 주신다. 하나님께서 모세의 지도 아래에서 백성들에게 음식과 물을 광야에서 주신 것 같이(출 17:1-7; 민 11:4-9; 20:1-13), 이제 그의 신실한 종 엘리야에게 까마귀를 통하여 먹을 것을 주신다.

넓은 맥락에서 보면, 하나님의 말씀을 철저히 따르는 엘리야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이 된다. 예수께서도 참된 이스라엘을 구현하신다. 그는 참된 하나님의 백성의 원형으로서, 장차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나라를 이루려고 하셨다. 그러나 그는 먼저 순종하지 않는 자신의 백성들을 위해 하나님의 심판을 받으신다. 그가 십자가에 달렸을 때, 엘리야도 그를 구원하러 오지 않았다(마 27:47-49).

하나님께서 그릿 시냇가로 피한 엘리야에게 양식을 주신 것처럼, 우리가 메마르고 거친 세상에 살아갈 때 우리 앞에 식탁을 베풀어주신다(시 23:5). 우리는 메말라 가는 그릿 시내를 엘리야와 함께 바라보면서, 영원히 메마르지 않는 시내를 사모하게 된다. 예수께서는 자기를 따르는 자들에게 자신이 결코 마르지 않는 생수의 샘이 될 것이라고 약속하셨다(요 4:14; 7:37-3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