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열왕기상(구속사)

열왕기상 17:17-24,중보기도의 능력

호리홀리 2015. 4. 30. 12:31

 중보기도(왕상 17:17-24)

1) 사르밧 과부의 시련(17-18절)


사르밧의 과부는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고 있다. 그녀는 흉년에도 쉬임 없이 흘러내리는 기름병과 끊어지지 않는 밀가루를 공급 받고 있다. 그녀의 믿음은 훌륭하였다. 마지막 양식을 선지자에게 바친 여인의 믿음은 얼마나 놀라운 것인가. 그러나 이제 무서운 시험을 받는다. 이제는 기근의 도전이 아니라, 죽음의 도전을 받고 있다. 죽음은 인간이 만나는 최후의 원수이다(고전 15:20).

죽음이 다가올 때 우리의 평화는 얼마나 쉽게 깨어지는가. "이 일 후에 그 집 주모 되는 여인의 아들이 병들어 증세가 심히 위중하다가 숨이 끊어진지라 여인이 엘리야에게 이르되 하나님의 사람이여 당신이 나로 더불어 무슨 상관이 있기로 내 죄를 생각나게 하고 또 내 아들을 죽게 하려고 내게 오셨나이까?"(17-18절).

여기에서 "하나님의 사람이여"는 선지자에 대한 또 다른 칭호이다. 여기에 풍자가 있다. 엘리야 선지자는 앞에서 흉년 중에도 양식을 공급해주는 놀라운 기적을 베풀었으나, 과부도 이야기꾼도 엘리야를 이런 칭호로 부르지 않았다. 아들이 죽자마자, 과부는 엘리야의 신분과 직무가 자기 집안의 비극과 연관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즉, 엘리야가 자기 아들의 죽음을 간접적으로 가져온 것으로 여기고 있다. 거룩한 하나님의 선지자가 자기 집에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불필요하게 자기 집에 관심을 가지신 것이며 자신의 감추어진 죄를 드러내고 심판하신 것이다.

과부의 관점에서 보면, 그녀가 당하는 시험이 너무나 갑작스럽고 충격적이다. 우리도 이와 같은 믿음의 시험을 자주 받는다. 큰 구원 후에 큰 절망의 시험을 받는다. 아브라함도 한평생 기다린 약속의 아들 이삭을 받은 후,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아들을 바치라는 시험을 받는다(창 22). 욥은 의인이었지만, 그는 가족과 소유를 다 잃고, 자기 몸까지 썩어가는 시험을 받는다. 엘리야는 갈멜의 승리(왕상 18) 직후에 자기 목숨을 건지기 위해 도망친다(왕상 19). 이런 시험을 받을 때, 우리는 너무나 쉽게 믿음의 길을 떠나게 된다. 하나님의 신실성과 능력을 불신하는 시험에도 너무 쉽게 빠진다. 믿음은 단 번에 이루는 것이 아니며 시험과 시련을 통해 다져가고 성숙해 가는 것이다.

2) 엘리야의 기도: "주께서 그 아들로 죽게 하셨나이까?"(19-20절)
엘리야는 처음에 등장할 때부터 "여호와는 살아계신다"고 선언하였다. 그는 생명의 하나님을 전하는 자였다. 바알과는 달리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살아 계실 뿐 아니라 죽은 아들조차 살리시는 분임을 믿고 있다. 그는 사렙다 과부의 지독한 도전을 받으며 그녀와 그녀의 죽은 아들을 위해 온 몸과 마음을 다하여 간구한다.

여기에서 엘리야의 행동 몇 가지가 특이하다. "엘리야가 저에게 그 아들을 달라 하여 그를 그 여인의 품에서 취하여 안고 자기의 거처하는 다락에 올라 가서 자기 침대에 뉘였다"(19절). 먼저 엘리야는 아이를 "어머니의 품"에서 취하여 "그의 팔"로 안는다. 어머니는 죽은 아들을 쉽게 내어줄 수 없었겠지만, 엘리야의 팔에 맡긴다. 엘리야는 자연인 어머니의 품에서 죽은 아들을 취하여 자신의 "다락방"으로 데리고 올라간다. 이리하여 어머니의 공간에서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공간으로 옮겨진다. 어머니의 애정이 가득찬 자리에서 엘리야가 하나님과 교통하는 장소로 옮겨간다. 그리고 엘리야는 아이를 자신의 침대 위에 눕이고 기도한다. 엘리야는 하나님께 두 번 기도하며, 주님께 "부르짖고"(qara') 또한 "간청한다"('amar). 엘리야의 두 기도는 그가 아이 위에 몸을 엎드리는 행동을 중심으로 아래와 같이 대칭을 이루고 있다.


A. 기도: "오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여"(20 상)

B. 간구(20 하)

 아이 위에 몸을 엎드림(21 상)

A'. 기도: "오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여"(21 중)

B'. 간구(21하).


엘리야의 첫 기도는 원망조이다. "여호와께 부르짖어 가로되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또 내가 머물고 있는 이 집의 과부에게 재앙을 내리사 그 아들로 죽게 하셨나이까?" 엘리야는 아이가 죽게 된 책임을 하나님께 돌린다. 그러면서도 그는 과부가 자신에게 베풀어 준 사랑을 하나님께 상기시킨다. 마치 엘리야가 "왜 그녀의 순종을 심판의 기회로 삼았습니까? 이것은 불공평한 처사입니다"라며 하나님께 따지는 것 같다.

엘리야의 관점에서 볼 때, "내 죄를 생각나게 하고 또 내 아들을 죽게 하려고 내게 오셨나이까?"라는 과부의 질문은 통렬하다. 엘리야는 많은 시련과 위험과 실망을 거쳐 여기까지 왔지만, 이런 상황에 자신이 던져질 줄은 꿈에도 몰랐다. 아이는 갑작스럽게 죽었고, 외아들을 잃은 과부의 고발은 지독하다. 모든 쓴 물이 울컥 올라오는 것 같다. 엘리야 자신도 충격을 받으며, 어떤 대답도 위로도 확신도 줄 수 없었다. 아마 엘리야 역시 이 여인처럼 혼란스러웠을 것이다. 그는 기도하기 위해 이렇게 먼 이방 땅까지 와서 숨어 사는데, 이곳에서 조차도 환란이 일어나고 있음을 보고 황당해 한다.

이런 정황 속에서 엘리야는 먼저 과부의 말을 하나님에게 그대로 가져간다. 과부가 한 쓴 말 "내 아들을 죽게 하려고 내게 오셨나이까"(18절)는 엘리야의 기도, "주께서 또 내가 머물고 있는 집 과부에게 재앙을 내리사 그 아들로 죽게 하셨나이까"와 동일한 형식으로 나타난다. 이것은 엘리야가 중보자로 역할을 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앞에서 엘리야는 주의 말씀을 여인에게 전했고, 과부에게 명령하였다. 이제는 과부의 말을 그대로 주님께 전한다. 선지자는 사람과 하나님 사이에 서서 두 방향을 부지런히 왔다 갔다 한다.

여기에서 엘리야는 여인의 운명과 자신을 동일시 한다. 그는 그녀의 상황에 대해 아주 동정적이다. 엘리야는 여인을 "과부"로 부른다(9, 10절). 이 호칭은 아주 독특하다. 17절에서는 "그 집 주모 되는 여인"으로 불렀다. 그녀가 엘리야가 사는 집의 주인임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이 이야기꾼은 아이의 죽음이 엘리야가 그 집에 거주하는 사건과 별개의 것이 아님을 말해준다. 나아가 엘리야는 자신을 "나그네"로 부른다(20절). 나그네는 과부와 함께 하나님에게 우선적으로 보호받는 계층이다(신 10:18). 엘리야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속성을 따라 여기에 있는 세 부류의 약자들인 "과부와 고아와 나그네"를 신속히 도와 주셔야 한다고 호소한다. 엘리야는 하나님의 약점을 잘 알며, 그의 아킬레스건을 건드리며 기도한다.

3) 자신을 제물로 드리는 엘리야(21절)
첫 번째 기도 직후에 엘리야는 "그 아이 위에 몸을 세 번 펴서 엎드린다." 이런 행동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에 대해 주석가들은 다양한 견해를 피력한다. 어떤 이는 엘리야가 아이의 몸을 따뜻하게 하여 아이가 일어나게 되었다고 보기도 하며(Rabbi David Qimchi), 또 어떤 이는 인공호흡을 하였다고 해석하기도 한다(LXX, enepusesen, "breathed upon"; "엘리야는 아이에게 세 번 깊이 숨을 불어 넣고..."). 그러나 현대의 대부분 학자들은 엘리야가 능력을 전수하기 위해 죽은 아이와 접촉하는 유감주술 의식을 행하고 있다고 본다(Montgomery). 이들은 과부의 죽은 아들이 선지자를 통해 생명을 새롭게 얻는 것은 열왕기서의 독자들에게 생명의 진리를 깨우치기 위함이라고 본다.

즉, 그들은 지금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 있는 하나님의 아들들인 이스라엘을 상징해 준다. 이들은 이제 선지자의 말씀을 새롭게 듣고 순종함으로써 새 생명을 얻을 수 있음을 가르치기 위함이라고 본다. 그렇지만 이런 해석들은 지나치게 인본주의적이며, 선지자를 통하여 생명의 역사를 이루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제대로 믿지 못하기 때문에 나온 것 같다. "여호와께서 엘리야의 소리를 들으심으로 그 아이의 혼이 몸으로 돌아오고 살아난지라"(22절)라는 말씀을 보면, 아이가 살아난 것은 주님의 자비와 능력에 근거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엘리야의 행동은 고도의 주술은 아니었다. 그것은 단지 하나님으로 그 아이를 살아나게 하도록 감동시켰을 뿐이다.

그렇다면, 엘리야가 이 아이 위에 엎드리는 행동은 무엇을 상징하는가? 이 문제를 풀기 위해, 보다 넓은 문맥을 보자. 열왕기상 17장에서 엘리야는 계속 죽음과 싸우고 있다. 그는 계속하여 죽음과 연관된 것과 접촉하여 왔다. 먼저 그는 까마귀가 주는 양식을 먹었다. 까마귀는 부정한 동물이다(레 11:15; 신 14:14). 이 새는 죽음과 연관된다. 아마 시체를 먹는 새들과 함께 있기 때문이다. 엘리야가 까마귀를 먹지 않았지만, 그는 부정한 새가 주는 것으로 생존해야 했다. 둘째 이야기에서(7-16절), 사르밧 과부는 죽음에 직면해 있었다. 그녀는 엘리야의 약속을 듣고 믿음으로 순종함으로써 살았다. 셋째 이야기는 문자 그대로 아이의 죽음으로 시작한다.

엘리야가 죽은 아이 위에 몸을 던져 소년과 일치하게 되는 행동은 구약의 관점에서 볼 때, 단지 소년과 동일시 하는 것이 아니라, 시체와의 접촉으로 자신을 부정하게 한다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즉, 엘리야는 지금 시체와 직접 접촉하고 있다. 죽음과 부정의 문제는 오경에서 까다로운 문제이다. 율법은 성별된 사람이 죽은 자와 접촉하는 것을 엄격하게 금한다(레 21:1-4, 민6:6-8; 신 21:22-23). 거룩한 사람일지라도 일단 죽은 자와 접촉한 후에는 정결 의식을 거쳐야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다(민 19:11-13). 그렇지 아니하면 그는 죽임을 당하게 된다.

게다가 엘리야는 지금 시체와 접촉하고 있으면서 하나님께 기도 드리고 있다. 기도는 하나님께 나아가는 순간이며 이 때 기도자는 의식적으로 정결해야 한다. 엘리야는 시체 위에 엎드렸으므로, 의도적으로 자신을 더럽힌 것이다. 따라서. 금송아지에 대한 주님의 분노 앞에서, 모세도 엘리야처럼 자신의 목숨을 걸고 기도한다(출 32:32). 두 선지자 모두 중보자로서 하나님의 자비를 얻기 위해 자신을 저주한다. 모세는 백성을 위해, 엘리야는 과부의 죽은 자식을 위해 자신을 하나님께 드린다.

바로 여기에 열쇠가 있다. 즉 엘리야는 소년을 위한 제물로 자신을 드린 것이다. 죽은 희생 제물이 예배자를 대속하듯이, 엘리야도 죽은 아이를 위한 대속 제물을 드리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만약 우리가 이런 식으로 볼 수 있다면, 엘리야는 정결법을 깨뜨리는 것이 아니라, 정결 법을 따른 것으로 볼 수 있다. 제사법에서는 부정해진 자를 위해 동물 제사를 드려 그를 정결케 하고 하나님과 다시 화목하게 한다. 이와 같이 엘리야는 자신을 제물로 하나님께 드리며, 하나님께서 자신을 받으시고 아들을 살리시기를 구하고 있다. 만약 하나님께서 아이를 살리지 않으시면, 차라리 죽고자 한다. 이리하여 엘리야는 그 어떤 동물 제사로서도 불가능한 인간적 차원을 만들고 있다.

4) "그 아이의 혼이 몸으로 돌아오고 살아난지라"
엘리야의 두 번째 기도는 첫 번째 기도 보다 더욱 공손하다. "여호와께 부르짖어 가로되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원컨대 이 아이의 혼으로 그 몸에 돌아오게 하옵소서"(21 하). 그는 하나님께서 직접 아이를 살려 달라고 간청하지 않고, 단지 그는 아이가 살아나기를 소원하고 있다(May this child's life please come into him again). 이 때 하나님께서 그의 기도를 들으신다. 하나님께서 엘리야에게 감동을 받았다. 이리하여 "그 아이의 혼이 몸으로 돌아오고 살아난지라"로 이야기의 갈등은 해소되고 있다(22절 하).

사르밧 과부 아들의 죽음과 소생 이야기는 "여인이 엘리야에게 이르되 내가 이제야 당신은 하나님의 사람이시요 당신의 입에 있는 여호와의 말씀이 진실한 줄 압니다"라는 고백으로 마친다(24절). 이 고백이 이야기 끝에 나온다는 점이 의미심장하다(왕상 17:24). 과부는 기름과 밀가루의 항아리가 늘 넘치는 축복을 받았을 때, "당신은 하나님의 사람이요, 당신의 말씀은 진실합니다"라고 말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 탄성은 시련을 넘어서 체험적으로 나오고 있다. 우리도 심각한 상황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며 "주의 말씀은 진실합니다"는 고백을 하게 된다.


열왕기상 17장은 가뭄으로 말미암은 기근의 문제를 다룬다. 이것은 농경 사회에서 생사가 걸린 심각한 문제였다. 그러나 엘리야는 이 때에도 잘 산다. 처음에 그는 아침에도 저녁에도 까마귀가 특급우편으로 가져온 떡과 고기를 먹는다. 그 당시에 매일 "고기"를 먹을 수 있었다는 것은 대단한 특권이었을 것이다. 주님께서 엘리야에게 기적을 베푸시는 정도가 아니라, 사치스러울 정도로 넘치는 대접을 하고 있다. 물론 이 이야기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생활을 할 때, 하나님께서 만나와 메추라기로 그들을 먹이신 기사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신 것처럼, 순종하는 자신의 종을 특별하게 돌보신다.

이 장에는 주님의 말씀이 여러 번 반복되어 중심 사상을 이루고 있다(2, 5, 8, 13, 15, 16절). 엘리야는 주님의 말씀이 그에게 임할 때 마다 철저하게 순종한다. 그는 주님의 종이지만, 순종을 통하여 진정한 종으로 인정 받는다. 따라서 엘리야와 하나님 사이에는 특별하고 친밀한 관계가 이루어진다. 과부의 아들이 죽었을 때, 엘리야는 기도했고 주님께서는 "엘리야의 소리를 들으셨다"(22절)고 한다. 여기에서 "듣다"는 표현은 주로 "순종하다"는 뜻으로 사용된다(수 10:14). 마치 주님께서 엘리야의 말에 순종한 듯한 느낌을 주고 있다. 주님과 그의 종 사이에 있는 특별한 관계는 우리가 짐작하기 어려울 정도이다.

신약의 빛으로 열왕기 상 17장을 볼 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새로운 엘리야로 등장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1) 예수 그리스도는 진정한 선지자로서 엘리야처럼 하나님께 완전한 순종을 드린다. 엘리야와 예수 그리스도는 순종하는 하나님의 백성의 진정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하나님의 나라는 순종하는 백성들로 이루어진다.

(2) 엘리야가 이방 땅에 가서 주님의 은혜를 전한 것처럼, 예수께서도 "이방" 지역을 다니며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선포하셨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은혜는 민족과 인종의 경계를 넘어가고 있다.

(3) 엘리야가 과부의 죽은 아들을 기도로 살린 것 같이, 예수께서는 나인성 과부의 아들을 살리신다(눅 7:11-17). 또한 예수도 두로 지경을 다니실 때, 시리아 - 페니키아 태생의 헬라 여인을 만나며 그 딸도 고치신다(막 7:24-30).

(4) 엘리야가 자신의 다락방에서 죽은 아이를 살리며 하나님과 과부 사이에 중보자가 된 것 같이 예수께서도 임박한 죽음 앞에서 다락방으로 올라 가셨다. 그리고 그곳에서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셨다(요 14:6). 그는 엘리야 보다 더욱 완전한 중보자이시다.

(5) 엘리야는 자신의 몸을 죽은 아이 위에 세 번 펴서 엎드려 기도한다(왕상 17:21). 이와 같이 하나님의 아들도 세상에 생명을 주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자신의 팔을 뻗으셨다. 그렇지만 엘리야와 예수 그리스도 사이에는 차이점도 있다. 엘리야는 기도로 죽은 아이를 살렸지만, 예수께서는 친히 "부활과 생명"이 되신다. 그는 무덤에까지 내려가시며 죽음을 정복하고 부활하셨다. 그는 무덤에서 사단의 권세를 깨뜨리시고 죽음을 정복하시며 생명의 주가 되셨다.

사르밧의 과부는 그 아들의 죽음을 보고 자기 죄를 기억하였다는 점이 역설적이다(왕상 17:8). 그녀의 아들이 그녀의 죄의 댓가로 죽을 수는 없다. 또한 아들을 살리기 위해 그녀가 대신 죽을 수도 없었다. 오직 하나님 만이 우리의 값을 지불하기 위해 자기 아들을 내어줄 수 있었다. 우리는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자신의 몸을 내어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참된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