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열왕기상(구속사)

열왕기상 18:21-40,영적싸움

호리홀리 2015. 5. 1. 09:48

영적전쟁(왕상 18:21-40)


(1) 첫번째 경고(21절)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두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 <공동역>은 " 언제까지 양다리를 걸치고 있을 작정입니까?"로 번역한다. 여기에서 "머뭇거리다"는  동사(pasach)는 "절뚝거리다"는 뜻으로서 다리를 다치고 제대로 걷지 못하는 사람의 모습을 보여준다(NRSV, 'limping'). 이 단어가 제사를 드리는 자와 연관될 때, 이런 사람은 하나님께 제물을 바칠 수 없다. "아론에게 고하여 이르라 무릇 너의 대대 자손 중 육체에 흠이 있는 자는 그 하나님의 식물을 드리려고 가까이 오지 못할 것이라 무릇 흠이 있는 자는 가까이 못할지니 곧 소경이나 절뚝발이(pisseach)나 코가 불완전한 자나 지체가 더한 자나..."(레 21:17-18). 만약 백성들이 계속 "바알과 여호와" 사이에서 절뚝거린다면, 그들은 언약 공동체에서 제외될 것이다.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르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를지니라." 엘리야는 "바알 종교"와 "여호와 종교"의 두 종교에 있어서 배타성과 포괄성의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여호와 하나님은 배타적이지만 바알은 포괄적이다. 그러나 백성들은 이 둘 중 하나를 선택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한 마디도 대답하지 않았다."



(2)  두 번째 경고: 대결의 법칙(22-24절)



 백성들은 여호와 하나님과 바알이 적수라는 것을 모르며 또한 적수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만큼 그들은 조상의 종교를 바알화 시켰다고 볼 수 있다. 이제 아브라함과 모세의 믿음은 가나안 땅에서 완전히 통속신앙으로 변질되었다. 따라서 엘리야는 두 종교의 대결을 제안한다.

먼저 엘리야는 백성들 앞에서 대결의 법칙을 세운다. (1) 백성들은 송아지 두 마리를 준비하게 한다(23 상). (2) 엘리야는 양편에서 준비할 것을 상세하게 말하며 둘 다 불을 붙여서는 안 된다(23 하). (3) 양편은 각자 자기 신을 부른다(24 상). 이 때 엘리야는 아주 독특한 인칭 변화를 가져온다. "너희는 너희 신의 이름을 부르라". 엘리야는 "그들이 그들 신의 이름을 부르리라"고 말하지 않는다. 여호와 하나님은 선택을 요구하므로, "너희는 너희 신의 이름을 부르라"고 말한다. (4) 최종적으로 "불로 응답하는 신이 참신으로 판정될 것"을 제시하며 백성들은 "그 말이 좋다"고 대답하였다.


(3) 엘리야와 바알 선지자들의 싸움(25-29절)



그렇지만 이것은 불공평한 싸움이었다. 싸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고지를 선점하는 것이다. 그러나 엘리야는 이 전투에서 모든 우선권을 바알 선지자들에게 주고 있다.

첫째, 바알 선지자들은 제물의 선택권에서 우선권을 갖는다(25절). 백성들이 가져온 두 마리의 송아지 중에서 "그들은 먼저 택한다." 제물은 제사에서 대단히 중요하다. 바알 선지자들은 더 좋은 제물을 먼저 선택하며 고지를 차지한다.

둘째, 바알 선지자들은 장소의 우선권을 갖는다. 그들이 싸움을 벌릴 갈멜산은 바알 숭배가 강한 곳이었다. 갈멜산은 이스르엘 골짜기 남부를 형성하는 언덕 길에 위치해 있다. 해발 550미터의 정상은 이웃 평원들 위에 우뚝 서있다. 남쪽에서 보면 왼쪽에는 지중해를 끼고 있으며 하이파 위에 자리잡고 있다. 주전 9세기 갈멜은 페니키아 남쪽에 자리 잡았다. 이곳은 이 지역에서 가장 높은 곳이었으므로 아주 좋은 예배처였다. 이곳에는 바알 사당이 있었으며 마치 바알의 본토와 같은 곳이었다. 이 산은 마치 바알의 계룡산과 같은 곳이었다. 바알의 효험이 가장 잘 나타나는 곳이었다. 셋째, 바알 선지자들은 시간의 우선권을 가진다. 그들은 "아침부터 낮까지"(26절), "오정에 이르러는"(27절), "저녁 소제 드릴 때까지"(29절) 쉬지 않고 기도한다. 저녁 소제는 오후 3시 경에 드리며 매일 제사 중 가장 중요한 제사이다(요세푸스). 왕하 16:15에 따르면, 아하스는 "아침 번제와 저녁 소제"를 드린다. 엘리야는 자신의 차례가 올 때까지 기다리며 너무나 오랫동안 참는다.

넷째, 바알 선지자들은 싸움의 방법에 있어서 우선권을 가진다. 엘리야가 "불로 응답하는 신 그가 하나님이니라"(24절)라고 제안했을 때 백성들은 "다 대답하되 그 말이 옳도다"라고 대답하였다. 왜냐하면 바알은 번개의 신이기 때문이다. 불은 바알의 18번이요 그의 주무기이다. 바알은 오른 손에 번개창을 잡고 있다. 그는 번개불로 예배자가 바친 제물을 태우는 자로 믿어졌다.

이런 불공평한 싸움이 이 세상 어디에 있을까? 엘리야는 모든 우선권을 바알 선지자들에게 줄 뿐 아니라, 군사의 수에 있어서도 비교가 되지 않는다. 엘리야는 홀로서 450명의 바알 선지자들과 싸우고 있다. 바알 선지자들은 절대적인 숫적 우세를 갖고 있으며, 왕과 대신들과 백성들도 그들의 편이다.



(4) 바알 선지자들의 기도와 춤(25-26절)



먼저 바알 선지자들은 "바알이여 응답하소서" 하며 단지 요청만 한다. 이런 기도는 너무나 거칠고 야만적이다. 그들은 기도의 기본적인 형식을 이루는 서론이나 간청의 이유나 송영도 없이 "바알이여 응답하소서"라고만 외친다. 이 기도는 너무나 원시적이며 또한 야만적이다. 그들은 그동안 바알을 잘 먹였기 때문에, 이제 바알이 응답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들의 기도는 뒤 따르는 엘리야의 기도와 너무나 대조적이다(36-37절).

이어서 그들이 "그 쌓은 단 주위에서 뛰놀더라"는 모습은 너무나 독특하다. 앞에서 엘리야는 백성들이 둘 사이에 "절뚝거린다"(limping)라고 말했다. 이제 바알 선지자들은 제단 주위를 절뚝거리며 뛰논다. 이리하여 그들은 바알의 시선을 끌고자 한다. 이들은 유명한 "바알 춤"을 춘다. 절뚝 거리며 제단 주위를 돌아가는 춤이다. 이들의 춤은 너무나 아주 우스꽝스럽게 보인다. 마치 병신춤과 같다. 그들은 절망적인 상황에서, 바알의 시선을 끌기 위해 미친듯이 뛰고 있다.



(5) 엘리야의 조롱(27절)  



"정오가 되자 엘리야는 그들을 조롱한다

엘리야처럼 말 수가 적은 사람도 바알 선지자들의 광신적인 행동을 참을 수 없었던 것 같다. 그렇지만 그는 그들에 대해서가 아니라 바알에 대해 세 개의 조롱을 하고 있다.

"저는 신인즉 묵상하고 있는지 혹 잠깐 나갔는지"에서 마소라 사본의 독법(ki siach weki sig lo)은 번역하기 까다롭다. 첫 단어(siach)는 일반적으로 "묵상하다"(<개역>), "깊은 사색에 빠지다"(<공동>)로 번역된다. 이 단어의 일차적인 의미는 "크고 열정적인 소리를 지르다"와 "묵상하다"는 뜻으로 사용된다. 70인역에서는 "대화하다"로 번역하였으며(루시안, 벌게이트, 탈굼에서도), 현대 영어 번역에서도 "묵상하다"(RSV, JPSV), 혹은 "대화 중이다"(NJV)로 제시된다.

두번째 단어(shig)는 "바쁘다"(NIV), "멀리 갔다"(RSV), "방랑길을 떠났다"(NRSV), "잠깐 나갔다"(<개역개정>), "외출 중인지"(<공동>) 등으로 제시된다. 만약에 이 단어가 이런 뜻이라면, 엘리야는 바알이 <바알 사이클>을 따라 "분주하다"고 조롱한다. 바알은 사실 바쁜 신이다. 그는 여러가지 일을 한다. 궁궐도 짓고, 그의 대적도 패배시키고, 유별난 성적 욕망을 만족시키느라고 늘 빠쁘다.

그렇지만 "묵상 중이다"와 "외출 중이다"는 별로 어울리는 것 같지 않다. 오히려 이 두 단어(siach와 sig)는 중언법으로 하나의 의미를 가지는 것으로 보는 것이 좋아 보인다. 왜냐하면 두 번째 단어(sig)는 "떠나다, 곁으로 가다, 혹은 축출하다, 배변을 보다"는 뜻을 가지며, 탈굼 요나단에서는 "용변하다"로 사용된다(eased himself). 또한 첫 번째 단어도 "싸는 것"과 연관되며(아랍어에서 shh, '오줌 누다') 바알의 배설활동과 연관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바알 비문에는  바알은 무엇이든지 잘 싸는 자로 등장한다. <표준새번역>에서는 "바알은 신이니까 다른 볼일을 보고 있을지 아니면 용변을 보고 있을지"로 제시한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엘리야는 바알이 지금 화장실에 들어 갔기 때문에 나오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아닌지 조롱한다.



"혹 길을 행하는지"

엘리야는 바알이 "멀리 여행을 떠났다"(<표준>)고 조롱한다. 우가릿 본문에서 바알의 자매요 정부인 여신 아낫은 온 동네를 다 뒤지면서 바알을 찾으며 그의 종들에게 그가 어디 있느냐고 묻는다. 바알은 먼 사막의 가장자리에까지 가서 사냥을 즐기고 있다.

"바알은 그의 궁궐에 없다.... 보라 그는(자기) 활을 손에 쥐고,

그의 오른 손에 활을 들고, 그는 야생소들이 넘치는 사막의 언저리로 나아갔다".  



"혹 잠이 들어서 깨워야 할 것인지"

바알은 지치기도 하며 죽기도 한다. 바알은 자연의 순환을 말해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은 자고 깨는 신이 아니다. 엘리야는 계속해서 "여호와께서 살아계시거니와"로 맹세하며 말한다. 이것은 단지 선지자의 경건한 구호가 아니다. 그는 살아계신 주님과 무능한 바알을 대조한다.



(6) 바알 선지자들의 자해 의식(28절)



앞 절에서 엘리야가 "큰 소리로 부르라"고 명령했다(27절). 이제 그들은 "큰 소리로 부른다"(28절 상). 그들은 엘리야의 말을 문자 그대로 순종하고 있다. 나아가 그들은 "그 규례를 따라 피가 흐르기까지 칼과 창으로 그 몸을 상하게 하였다"고 한다(28절). 이것은 음부에 있는 바알을 살리기 위한 바알 종교의 정통 의식이었다. 그렇지만 갈멜산 싸움의 큰 맥락을 보면, 이들의 자해하는 모습은 조금 후에 다가올 그들의 죽음을 예고하고 있다(40절).

이제는 서서히 바알의 세력이 무너지고 있다. 3년 동안의 한발과 기근은 바알의 몰락에 대한 첫 실마리를 제공해 주었다. 그것은 바알의 무능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어 주었다. 그러나 이제는 바알이 기력을 회복해야 한다. 이것을 위해 바알 선지자들은 자신의 몸에 피를 흘리면서 바알이 부활하도록 도우려고 한다. 그들의 행동은 바알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엘이 절망적으로 애곡하는 것을 연상시켜준다. 가나안 만신전의 큰 신인 엘은 바알의 죽음 소식을 듣고 자기 보좌에서 내려와 땅에 엎드려 애곡한다(KTU 1.5. VI.17-23).




구약에서 몸을 난자하는 것은 금지된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이런 의식을 행했던 것 같다. 이것은 원래 장례의식과 연관되어 있었다(레 19:28; 21:5; 신 14:1-2; 렘 16:6; 41:5; 47:5; 48:37). 스가랴 13:6에서는 선지자들의 예언 행동과 연관된다. "혹이 그에게 묻기를 네 두 팔 사이에 상처는 어찜이냐 하면 대답 하기를 이는 나의 친구의 집에서 받은 상처라 하리라". 우리가 볼 때 이들의 행동은 지극히 어리석어 보이지만 바알을 믿는 사람들이 볼 때 이것은 숭고한 의식이었다. 마치 일본의 천조대신을 위해 가미가재를 타고 적군에게 뛰어드는 것 같다. 바알 신화가 이런 행동을 만든다.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들은 "진언하였다"(<개역>)고 한다. 이 단어는 일반적으로 "선지자로 행동하다"는 뜻이며, 선지자들의 통제불가능한 행동을 말한다(삼상 10:1-13; 19:18-24). 우리말 새번역에서는 "미친 듯이 날뛰었다"(<표준>) 혹은 "신접한 모습으로 날뛰었다"(<공동>)로 제시된다. 이 단어의 기본적인 형태는 보다 이성적이고 통제된 모습을 보여주며 하나님의 신탁을 전할 때 사용되지만 재귀형이 될 때 "광란적인 행동"을 가리킨다. 바알 선지자들은 점점 더 거칠어져 가며, 어떤 응답을 끌어내기 위해 절망적으로 몸부림친다.

그러나 결과는 어떠했는가? 26절과 29절을 보라. 이 단락은 "아무 소리도 없고 아무 응답하는 자도 없으므로"(26 상)로 시작하며 "아무 소리, 아무 응답하는 자도 없고 아무 돌아보는 자도 없더라"로 마친다(29 상). 바알 선지자들에게는 아무런 응답이 없었다. "바알이 응답하지 않았다"가 아니다. "없다". 즉, 바알이 없다.



(7) 허물어진 여호와의 단을 고쳐 쌓는 엘리야(30절)



엘리야는 바알의 무능을 조롱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는다. 남의 종교를 조롱한다고 그들이 회개하고 오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는 민족의 영적 갱신에 더욱 깊이 관심을 갖는다. 옛날에 갈멜산에는 주님께 제사를 드리는 제단이 있었다. 그러나 아합의 철저한 박해로 그것이 무너졌다. 이제 엘리야는 무너진 제단을 새롭게 쌓는다. 영적 갱신의 시작은 제단을 쌓는 데서 시작된다. 남의 종교를 조롱한다고 싸움에서 이기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 백성들의 심령이 변해야 한다. 참된 부흥은 하나님 백성들의 영적 갱신에서부터 시작된다.



(8) 언약의 돌을 세우는 엘리야(31-32절 상)



엘리야가 12 돌을 모으며 그것으로 제단을 쌓는다. 여기의 12돌은 12지파를 상징한다(창35:5-7). 옛날 야곱은 세겜에서 벧엘로 갈 때, 모든 이방신들을 다 버리고 자신을 정결케 한다. 그리고 벧엘에서 제단을 쌓는다. 후에 여호수아는 요단강을 건넌 후 12돌을 길갈에 세운다(수 4:20). 그 후 그는 세겜으로 백성들을 데리고 올라가 여호와 하나님과 이방 신들 둘 중 한 하나님을 선택하라고 명했다. 이제 엘리야는 "야곱의 아들들의 지파의 수효를 따라 열 두 돌을 취하니 이 야곱은 여호와께서 옛적에 저에게 임하여 이르시기를 네 이름을 이스라엘이라 하리라 하신 자더라"(왕상 18:31). 엘리야가 야곱의 이름을 언급하는 것은 북 왕조의 조상인 야곱의 언약 전통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요 새 이름이다. 여기에 이스라엘 백성들의 소명이 있었다.그러므로 이것은 언약체결식을 의미한다. 



(9) 하나님을 더욱 불리하게 만드는 엘리야(32 하-35절)



엘리야는 하나님을 더욱 어렵게 하는 위치로부터 시작한다. 그는 물을 제단에 가득 부으라고 명하며, 12통의 물을 제단과 제물에 붓게 한다. 이것은 많은 양이었다. 백성들은 엘리야에게 순종한다. 물이 제단을 완전히 적셨으며, 제물과 그것을 태울 장작도 물에 흠뻑 젖었다. 주님의 불은 젖은 제물을 태우기에 충분해야 한다. 우리는 젖은 물건들에 불을 붙이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임을 잘 안다.



(10) 기도하는 엘리야(36-37절) 
        

여기에서 네 가지 사항이 독특하다.

(1) 엘리야는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하나님이 아니라, "야곱"을 "이스라엘"로 바꾼다. 그는 북쪽 이스라엘이 하나님과 언약관계에 있음을 상기시킨다.

(2) "주는 저희의 마음으로 돌이키게 하시는 것을 알게 하옵소서"는 독특하다. 하나님의 은총 없이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 돌아올 수 없다. 오직 주님 만이 이들을 돌이킬 수 있다.

(3) 엘리야는 "오늘"을 강조한다. 주님은 오늘 "불로 응답하셔야 한다."

(4) 엘리야의 기도의 초점은 "주께서 이스라엘 중에서 하나님이 되심과 내가 주의 종이 됨과 내가 주의 말씀대로 이 모든 일을 행하는 것을 오늘날 알게 하옵소서"에 있다. 그는 하나님이 하나님 되시고, 자신이 하나님의 참된 종인 것을 백성들이 알도록 구한다. 그의 기도는 앞에 있었던 바알 선지자들의 기도와 비교해 볼 때, 얼마나 간명한가.

(5) 하늘에서 내린 여호와의 불(38절)

전투의 핵은 "이에 불로 응답하는 신 그가 하나님이니라"에 있었으며 백성들도 "다 대답하되 그 말이 옳도다"라고 하였다(24절). 그동안 바알은 높은 고지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이점이 높을 수로, 불로 응답하시는 하나님의 영광은 더욱 커질 것이다. 바알 선지자들이 애를 많이 쓸 수록(18:26-29), 그들의 실패는 클 것이다. 엘리야가 그들을 조롱할 수록 그들의 좌절감은 커질 것이다. 드디어 불은 "엘리야의 제물"에 임했다. "이에 여호와의 불이 내려서 번제물과 나무와 돌과 흙을 태우고 또 도랑의 물을 핥은지라"(38절). 주님은 자신의 살아계심을 불로 친히 증거하셨다. 그는 강력한 불로서 모든 젖은 것을 다 태웠고 제단까지 태워버렸다.

가나안 종교에서 바알은 번개의 신이지만, 그는 이 결정적인 전투에서 침묵하였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불로 응답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이전에 하나님은 호렙에서 모세에게 나타나셨다(출 3:2). 주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를 통과할 때 불기둥과 구름기둥으로 임하셨다(출 13:21). 그는 이스라엘과 시내산에서 언약을 맺을 때에 불과 연기로 임하였다(출 19:18). 아론과 그 아들들이 제사장 임직을 받고 첫 제물을 드릴 때 첫 불이 임했다(레 9:24). 다윗은 하나님의 심판 중에 제물을 바치자 하늘에서 불이 내려 그의 제물을 받으시는 체험을 하였다(대상 21:26). 이 모든 불의 역사는 궁극적으로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있다(행2:3). 하나님께서는 악에 치명상을 입히시며 자기 백성의 죄를 속하기 위한 제물로서 자신의 독생자를 보내셨다(고전 15:24-27; 히 10). 갈멜산 사건의 목표는 바알의 패배나 심판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이 하나님 앞으로 돌아오게 하는 은총에 있었으며,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완성된다.



(11) 백성들의 반응(39절)



주님의 계시에 대한 백성들의 반응은 즉각적이었다. "모든 백성이 보고 엎드려 말하되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로다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로다 하니"(39절). 그들은 그동안 두 주인을 섬기며 살아왔다. 그들은 엘리야에게도 "우리는 바알과 야웨를 동시에 섬길 수 없나요?"라고 물었다. 엘리야는 "결코 그럴 수 없다"고 대답한다. "그렇다면, 주로 야웨를 섬기고, 가끔 바알을 섬기면 안되나요?" 엘리야는 다시 "안된다"고 말한다. 십계의 제 1 계명은 오직 하나님 만을 섬기게 한다(출 20:3). 주님을 섬기는 데는 두 마음이 있을 수 없다. 흔들리거나 의심하는 것은 안 된다. 아무도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마 6:24). 야고보는 "두 마음을 품은 자는 아무 것도 얻지 못할 것이라"고 한다(약 1:8). 그렇지만, 우리 시대의 우상들은 나무와 돌로 만든 것들이 아니다. 그들은 우리의 욕망과 돈, 권력, 지위, 안전, 관계들이다. 우리가 무엇을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느냐고 물어보면 우리의 우상이 무엇인지 쉽게 알 것이다. 우상들은 하나님 대신 우리가 의지하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과 돈", "믿음 생활과 성공"을 늘 동시에 추구한다. 그러나 "만약 주가 하나님이시면 그를 따르고 바알(돈, 권세, 안전)이 하나님이면 그를 따르라"는 엘리야의 도전은 여전히 유효하다(18:21).



(12) 바알 선지자들의 죽음(40절)



"엘리야가 저희에게 이르되 바알의 선지자를 잡되 하나도 도망하지 못하게 하라 하매 곧 잡은지라 엘리야가 저희를 기손 시내로 내려다가 거기서 죽이니라"(40절).

엘리야는 바알 선지자들을 "하나도 도망하지 못하게 하며" 그들을 잡아 기손 계곡까지 끌고가서 죽인다(18:40). 기손은 이스르엘 골짜기 서쪽 끝에 있다. 갈멜산을 거쳐 골짜기 아래로 내려간다. 옛날 그곳에서 시스라의 전차가 진흙탕에 빠져 드보라와 바락에게 참패를 당했다(삿 4:15; 5:4-5, 19-22). 다시 한번 더 하나님의 능력이 이곳에서 나타나고 있다.




(13) 엘리야의 기도(42-44절)



여기에는 "올라가다"가 계속 반복된다. 엘리야는 아합에게 "올라가라"고 말하며, 그도 갈멜산 꼭대기로 올라가며, 그의 시종에게 "산으로 올라가라"고 여러 번 명령하고 있다('오르다'는 동사는 41-44절에 모두 여섯 번 나타난다). 여기에서 "땅에 꿇어 엎드려 그 얼굴을 무릎 사이에 넣고" 기도하는 엘리야의 모습은 너무나 독특하다. 그는 극도의 집중을 하며 기도하고 있다. 그는 짧은 기도를 드린다. 그는 "아무 것도 없나이다"(43절)는 보고를 듣고 또 듣지만, 인내하며 일곱 번까지 기도한다. 그의 기도는 너무나 간절하다(약 5:17). 선지자로서 엘리야는 백성들에게 인정받고 제물을 태우고 이방 제사장들을 죽이고  하나님의 비를 주시는 약속이 이루어진다(18:1, 41). 엘리야는 이제 쉴 때가 되었다. 그러나 엘리야는 하나님께서 시작하신 일을 끝내시길 구한다(18:41-44). 엘리야는 지평선에 구름이 올 때까지 일곱 번 기도한다. 그는 너무나 작은 "손만한 구름"이 올 때, 이미 하나님의 응답은 시작되었다고 믿는다. 그는 곧 폭우가 쏟아질 것을 믿고 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큰 비가 내린다. 이리하여 엘리야의 맹세(17:1)가 완전히 이루어진다. 긴 가뭄이 그치고 비가 내리는 모습은 하나님께서 엘리야의 기도에 응답하였을 뿐 아니라, 친히 이스라엘의 하나님으로 돌아오시는 모습의 전조로 비춰지고 있다.

야고보 사도는 우리에게 엘리야를 본받으라고 말한다. 그는 우리가 쉬지 않고 기도하길 권하면서(1:2-8) 엘리야의 효과적이며 강력한 기도를 상기시킨다.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로되 저가 비 오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한즉 삼년 육개월 동안 땅에 비가 아니 오고 다시 기도한 즉 하늘이 비를 주고 땅이 열매를 내었느니라"(5:17-18). 하나님은 자신의 약속을 지키시는 분이시다.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빌 1:6).



(14) 아합의 전차 앞에서 달리는 엘리야(44-46절)



갈멜산 전투의 마지막 장면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에 사로잡혀 허리에 띠를 띠고, 아합의 전차 앞에서 이스르엘까지 달려가는 마라톤 선수 엘리야의 모습을 보게 된다. 이 기이한 장면을 이해하는 것이 쉽지 않지만, 일차적으로 엘리야는 마치 그가 아합 왕의 전령처럼 왕의 앞에서 달리고 있다. 아합은 악한 왕이지만, 여전히 이스라엘을 대표하므로 엘리야는 왕의 수행원을 대표하여 앞에서 달리고 있다. 그렇지만 여기에서 엘리야가 아합 보다 먼저 이스르엘에 도착하는 모습도 흥미롭다. 아합은 전차로 달리지만 엘리야는 달려서 그 보다 앞서 간다. 그는 장장 27.2 킬로미터를 아합보다 빨리 달려 이스르엘에 가서 여호와께서 주신 은총의 비소식을 먼저 전하고 있다.  


갈멜산에서 이루어진 엘리야와 바알 선지자들의 싸움은 보다 더 큰 싸움의 축소판이며 예고편이다. 갈멜산 전투는 최후 전쟁의 그림자이다. 갈멜산은 이스르엘 골짜기를 내려다 보며, 고대의 므깃도에 아주 가깝다. 세계사에서 가장 치열한 전쟁은 이 골짜기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아시아와 유럽과 아프리카의 세 대륙을 잇는 고속도로가 갈멜산 가까이에 있는 평원을 관통하며 세계를 정복하려던 모든 제왕들이 이곳을 지나간다. 고대 이집트의 투트모스 III세로부터, 라암세스 II세와 성서의 드보라, 여호수아, 다윗, 솔로몬, 요시아 뿐 아니라, 블레셋, 이집트, 앗시리아, 바벨론, 페르시아의 대왕들과, 알렉산더, 로마 연대들, 이슬람 군대들, 십자군들, 나폴레옹, 1-2차 세계대전에서 터키군, 영국군, 이스라엘인들이 모두 이스르엘 골짜기를 관통하는 전략적 고속도로를 지배하기 위해 싸웠다. 사도 요한은 아마겟돈 전쟁이 여기에서 벌어질 것이라고 한다. 이 무서운 최후의 싸움에서 하나님의 거룩한 군대와 세계를 지배하는 악의 세력이 폭풍처럼 부딪힐 것이다(계 16:16-21). 엘리야는 이 최후의 승리를 미리 맛본다(히 10:27; 빌 2: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