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람과 전쟁을 벌이고 있는 난세에 엘리야는 침묵을 지키고 있다. 호렙산에서 하나님을 만난 이후에 엘리야는 역사의 전면에서 사라진다. 긴 전쟁의 역사에 대해서 일체 개입하지 않는다. 나봇의 살해에 대하여 심판하기 위해서 잠깐 등장하였다가 다시 침묵 속으로 사라질 뿐이다. 아합의 도성에 사는 도시민들이 이세벨에게 협조하여 농부 나봇을 죽인 사건에 대하여(왕상 21:8, 11, 13, 24) 엘리야는 이세벨과 그 자녀가 심판을 받을 것이라고 예언하였다. 포도원 농부 나봇을 죽인 사건이 있기 전에 한 익명의 예언자가 아합에 대해 심판의 예언을 하였고, 나봇의 사건 이후에는 미가야라는 선지자의 예언 활동이 보도된다.

아람 전쟁에서 이스라엘 왕 아합은 아람의 벤하닷 왕을 사로잡았으나 살려 주었다. 이에 대하여 익명의 한 예언자가 길가에 불쑥 나타나서 아합의 범죄를 규탄하고 심판받을 것을 고하였다. 나봇의 포도원을 빼앗아 자신의 궁정 정원으로 만든 아합은 남왕국의 왕 여호사밧을 초대해서 잔치를 벌였다. 아마도 자신의 정원을 자랑하고 있었을 것이다. 아합은 여호사밧에게 아람의 정벌을 제안하고 궁중 예언자들을 불러서 전쟁의 길흉을 물었다. 궁정 예언자들은 승리를 장담하였다. 여호사밧은 미가야에게 물어볼 것을 제안하자 미가야는 아합의 전사를 예언하였다.

 

엘리야의 활동은 열왕기상서 17장부터 시작된다. 엘리야의 후계자 엘리사가 사망하는 장면은 열왕기하서 13장에 나온다. 이 두 예언자의 시대에 줄곧 아람과의 전쟁이 이어지고 있다. 호렙산에서 하나님을 만난 이후로 엘리야의 활동은 국가의 문제로부터 멀찌감치 물러가 있는 양상을 띤다. 엘리야가 물러가 있는 동안 엘리야 대신에 다른 두 예언자들이 활약한다. 엘리야는 호렙 이후 승천하기 전 기간에는 나봇의 죽음에 대해 심판 예언을 전하고 우상을 섬기는 아하시야의 죽음을 예언하였을 뿐이었다. 매우 소극적인 활동이다. 이와는 달리 그의 제자 엘리사의 활약상은 매우 강력하고도 열렬하다. 엘리사는 하사엘을 통해 벤하닷을 죽이고 예후를 동원하여 이세벨과 아합 가족들을 몰살한다.

엘리야는 승천하였지만 엘리사는 병이 들어 죽었다. 엘리야와 엘리사 사이의 대조법이 펼쳐지고 있다.

 

호렙 신현 사건을 체험한 이후 엘리야가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진 듯 보인다. 이때 전쟁이 일어났다. 아람 왕 벤하닷이 이스라엘에 쳐들어온 것이다. 이 전쟁에서 아합은 승리를 거두고 벤하닷을 체포하였는데 종주권 조약을 맺고 그를 풀어 주었다. 이방과 언약을 맺지 말라는 야훼 하나님의 율법을 아합은 무시하였다. 이에 익명의 예언자가 일어나서 아합의 죽음을 예언하였다.

아람 전쟁에 승리를 거둔 후에 아합은 나봇을 죽이고 포도원을 빼앗았다. 이때 엘리야가 다시 등장하여 나봇을 살해한 아합의 가문이 멸망할 것을 예언하였다. 이후에 예언자 엘리야는 다시 역사의 전면에서 사라진다. 엘리야가 사라진 후에 다시 아람 전쟁이 벌어지는데 이 때 엘리야 대신에 미가야라는 예언자가 등장한다.

아합은 여호사밧이라는 남왕국의 왕을 북왕국으로 초청했다. 나봇의 포도원을 빼앗아 자신의 궁중에 딸린 정원을 가꾸었기에 그것을 여호사밧에게 자랑하고 싶었다. 북왕국 아합왕과 남왕국 여호사밧은 결혼 동맹으로 화친조약을 맺은 사돈 사이였다(대하 18:1). 적대하던 남과 북이 대결을 멈추고 서로 화친한 가운데 평화를 구가하였다. 양국의 권력자들이 서로 왕래하며 친하게 지내게 되었다. 여호사밧이 오자 아합은 가슴에 묻어 두었던 숙원을 풀어 놓는다. 아람 왕의 손아귀에서 탈환하지 못한 길르앗 라못이라는 도시를 이제 남왕국과 동맹하여 되찾아 오려는 계획을 털어 놓았다. 여호사밧은 그의 계획에 동참하기로 하고 양국은 군사를 일으켰다. 양국의 권력자가 만나니 부국강병 정책을 세워 영토를 확장하려는 야심으로 전쟁이 일어나게 되었다. 권력자들끼리 만나면 언제나 권력을 확대하는 야심을 서로 의논하기 십상이다.

이들 권력자들의 만남에서 이루어진 계획에 대해서는 엘리야가 아무런 평가도 역할도 하지 않는다. 대신 미가야라는 예언자가 본의 아니게 억지로 끌려 나와서 등용된다.  미가야가 박해를 피하려고 바른 말을 하지 않고 아합이 전쟁에 승리하리라고 짐짓 예언하였다. 그러나 아합은 굳이 바른 예언을 하라고 재촉한다. 이윽고 미가야가 바른 대로 예언하자 아합은 진노하여 미가야를 감옥에 가두고 말았다. '이 놈을 옥에 가두고 내가 평안히 돌아올 때까지 고생의 떡과 고생의 물을 먹이라'(왕상22:21).

 

아합은 늘 길조를 예언하는 거짓 예언자들을 주변에 많이 거느리고 있었다. 사백 명의 거짓 예언자들이 전쟁의 길흉을 알아보고 전쟁에 승리한다고 예언하였다. 이는 여호와의 하늘 궁정에 있는 만군 중에 한 영('루악흐')이 작용하여 예언자들을 속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지금 아합을 죽이려는 야훼의 작전이 진행되고 있는 줄을 아합은 까마득히 모르고 있다. 여호사밧은 사백 명의 궁중 예언자들을 믿지 않았다. 여호사밧은 미가야라는 예언자를 불러서 전쟁의 미래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야훼 하나님께 물어보자고 제의했다. 아합은 마지못해 미가야를 불렀으나 왕이 전사할 것이라는 흉조만을 듣게 되었다(왕상 22:8). 아합의 가족은 그의 아들 대에 가서 재앙의 심판을 당하겠지만(왕상 21:29) 아합 자신은 이제 곧 아람 전쟁에서 전사할 운명이라는 것이었다.

시드기야라는 거짓 예언자가 폭력을 휘두르며 미가야를 박해했다. 시드기야는 철로 뿔을 만들어서 행위로 상징하는 예언을 하였다. 야훼께서 철 뿔로 아람 군대를 받아서 무찌를 것이라고 예언한 것이다. 그러나 미가야가 이스라엘이 패전할 것이며 아합 왕은 전사할 것이라고 예언하였다. '여호와의 말씀이 이 무리에게 주인이 없으니 각각 평안히 자기의 집으로 돌아갈 것이니라'(왕상 22:17). 왕이 없어지면 민중은 평화를 되찾고 자기 집으로 돌아갈 수가 있을 것이었다. 그러나 시드기야는 이 예언을 듣고 미가야를 때리며 폭행하였다. 거짓 예언자의 특징이 여실히 드러났다.

 시드기야와 사백 명의 거짓 예언자들은 아합 왕에게 녹을 받아먹으면서 국가의 번영을 위해서 기도하였다. 그들은 왕의 권좌에 복을 빌어 주고 있었다(왕상 22:13). 그러나 익명의 예언자와 미가야는 야훼의 말씀을 그대로 선포했다가 두들겨 맞고 감옥에 갇히는 화를 면하지 못했다.  이상하게도 이러한 국가 내의 갈등 문제를 보면서도 엘리야는 침묵을 지킨다.

 

엘리야는 완전히 자취를 감추고 숨어 있었다. 왕도 더 이상 엘리야를 찾지 않았다. 나봇의 포도원 사건으로 엘리야는 역사의 뒤안으로 물러가 몸을 숨기고 있었다. 하나님의 사람은 시대의 절실한 요구들 앞에서 현실 참여의 여부를 심사숙고한다. 지금 나아갈 것인지 아니면 가만히 숨죽이고 있을 것인지에 기도하면서 현명하게 판단한다. 엘리야는 아합의 죽음을 예언하였지만 그가 죽도록 만드는 작업에는 일체 관여하지 않는다.

미가야가 감옥에 갇히고 거짓 예언자들이 판을 치는 세상에서 엘리야는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그는 야훼께서 불러서 사용하실 때까지 가만히 있었다. 야훼께서 하시는 일의 추이를 예의 지켜보고만 있을 뿐이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는 일심으로 초야에 묻혀 살았다. 나중에 아합의 아들 아하시야가 병이 들었을 때 그에게 사망을 예언하라는 야훼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을 때 엘리야는 분연히 떨치고 일어서서 하나님의 말씀을 크게 외쳤을 뿐이다(왕하 1:4).

 

엘리야, 그는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엘리야가 승천하는 장면에 보면 엘리사 외에도 '선지자의 제자들'이 등장하고 있다. '벧엘에 있는 선지자의 제자들'이 엘리사에게 나아왔다(왕하 2:3). 또 여리고에서도 '선지자의 제자들'이 엘리사에게 나아와서 엘리야의 승천에 대하여 질문하였다(왕하 2:5). '선지자의 제자 오십 명'이 엘리야와 엘리사의 요단 도하 장면을 지켜본다(왕하 2:7). 여기서 ‘선지자의 제자’란 표현의 원어는 <버네이-하나비임>인데 이것을 직역하면 ‘그 선지자들의 아들들’이 된다. <하너비임>의 <하>는 정관사이고 <너비임>은 복수명사이기에 ‘그 예언자들’이다. 엘리야는 예언자들과 그 아들들을 모아서 하나님의 뜻을 익히고 배워 주의 뜻대로 살려는 선지학교운동과 공동체 운동을 펼치고 있었던 것 같다.

열왕기하서 2장에는 벧엘 공동체와 여리고 공동체가 언급된다. 벧엘은 북왕국에 중심 신전이 있는 주요 도시이며 그 신전에 금송아지를 모신 우상숭배의 도시였다. 여리고는 다시는 재건하지 말라는 여호수아의 명령을 어기고 새롭게 신축한 신생 도시였다. 엘리야의 제자 공동체는 우상숭배와 국가권력 숭배가 압도적인 죄악과 폭력의 도시 한 가운데에 설립되었다는 말이 된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엘리야는 권력자를 변화시켜서 국가 체제를 선하게 만들려는 모든 시도를 포기하였다는 말이다. 엘리야는 제자 공동체를 만들어서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익히고 실천하는 하나님나라의 운동을 전개하였다고 추정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