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열왕기상(구속사)

열왕기상 17:8-16,언약적축복

호리홀리 2015. 4. 30. 12:25

언약적축복(왕상 17:8-16)
1) 엘리야를 바알의 본부로(8-9절)

하나님께서는 그릿 시내가 영원히 흐르도록 하실 수도 있었지만, 그 시내가 마르도록 허락하신다(7절). 이제 주님은 엘리야에게 다시 한번 친숙했던 환경을 떠나라고 명하신다(8절). 그리고 이번에는 엘리야에게 사렙다로 가라고 명하신다. 그레이(Gray)는 사렙다가 시돈에서 남쪽으로 약 7마일 거리에 있는 오늘날의 라스 사라판드(Ras Sarafand)라고 한다. 이곳은 두로와 시돈 사이에 있는 지중해의 해변 도시로 알려져 있다. 주님은 엘리야를 바알 숭배의 본산지인 페니키아 땅으로 보내신다.
하필이면 페니키아의 사렙다로 보내실까? 표면적으로 볼 때, 지금 아합은 엘리야를 찾는 데 혈안이 되었기 때문에 마치 "등잔 밑이 어둡다"는 속담처럼 모든 상식을 뒤엎고 엘리야를 두로 왕의 도시에 숨기고 있다. 그렇지만, 더 깊은 뜻이 있다.

하나님께서는 먼저 이곳에서 자신의 주도권을 보여주기 위하여 엘리야를 이곳으로 보내신다. 엘리야의 하나님은 안방 장군이 아니다. 현재 이스라엘의 문제는 페니키아의 바알을 숭배하는 것 때문에 생겼으므로(왕상 16:31-32), 이곳에서 자신의 지혜와 능력을 드러내실 필요가 있었다. 주님은 자신의 능력이 이스라엘 지역 안에만 한정되어 있지 않음을 보여주고자 하신다. 그는 "언덕과 들판의 신"에 불과한 신이 아니시다(왕상 20:23 참조).

페니키아의 바알은 비와 풍년의 신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기근과 가뭄을 선언하실 때(17:1), 그 영향력은 이스라엘 땅 경계를 훨씬 넘어가며 바알의 본토에까지 미친다. 주님의 권세는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에게 약속한 땅에만 제한되지 않는다. 이제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바알의 무능을 바알의 본토에서 보여주시길 원하신다. 이리하여 열국의 신들은 단지 환영임을 드러내시고자 하신다.

페니키아는 원래 해양국이었지만, 이 나라도 스스로 먹고 살 힘이 없었다. 성경의 여러 기사를 보면, 페니키아는 이스라엘에서 많은 양식을 수입하여 먹고 살았다(대하 2:10; 겔 27:17; 행 12:20). 이스라엘이 페니키아의 바알을 풍년의 원천으로 예배하는 시험을 받는 것은 역설적이다. 자기 백성도 먹여 살리지 못하는 페니키아의 바알에 대해 왜 이스라엘은 유혹을 받았을까? 그렇지만 여기에 바로 하나님의 백성의 비극과 무지가 있지 않는가? 그들은 자신의 영혼의 갈망을 채울 수 없는 존재에 모든 마음을 다 빼앗기고 살고 있다. 우리들도 우리의 빈 마음을 부, 교육, 지위, 명예로 채우기 위해 우리의 정신을 모두 빼앗기며 살고 있지 않는가?

2) 사르밧 과부의 믿음(10-16절)
하나님은 이제 자신의 선지자를 두로의 한 과부에게 보내신다. 이 과부는 그 당시의 사회적 계층으로 볼 때, 가장 소외되고 낮은 여인이었다. 그녀는 이방인이요, 과부요, 자신의 마지막 식사를 먹고 죽기를 기다리는 절대적인 궁핍과 위기 가운데 있는 여인이었다. 이제 하나님은 엘리야를 통해 자신의 은혜를 이방 나라의 가난한 과부에게 나타내실 뿐 아니라, 그녀를 통하여 자신의 선지자를 돌보신다.

(1) 엘리야의 부탁과 여인의 은근한 거절(10-12절)

그릿 시냇가에서의 첫 장면(2-7절)에 이어 사르밧에서의 둘째 장면(8-16절)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이 먼저 임하시고 이어 선지자는 즉각적으로 순종하는 모습이 나타난다. 그러나 둘째 장면에서는 이외의 변수가 생겨 이야기의 복선을 더욱 깊게 깔아준다.


(1) 하나님의 명령: "사르밧으로 가서 거기 유하라"(9절 상)

(2) 하나님의 약속: "내가 그 곳 과부에게 명하여 너를 공궤하게 하였느니라"(9절 하)

(3) 엘리야의 순종: "저가 일어나 사르밧으로 가서 성문에 이를 때에"(10절 상)

(4) 정황: "마침 한 과부가 그곳에서 나무가지를 줍는지라"(10절 중)

(5) 엘리야의 청원: "청컨대 그릇에 물을 조금 가져다가 나로 마시게 하라... 청컨대 네 손에 떡 한 조각을 내게로 가져오라"(10절 하-11절)

(6) 여인의 응답: "나는 떡이 없고 다만 통에 가루 한 움큼과 병에 기름 조금 뿐이라"(12절)


앞에서 엘리야 선지자는 "내 말이 없으면 가뭄이 오리라"는 저주를 선언하였다(17:1). 그러나 그릿 시내가 마를 때 그는 자기 말의 씨를 스스로 거둔다. 그는 선지자로서 자기 선포의 희생자가 된다. 선지자들이 하나님의 심판을 전할 때, 그도 심판의 영향 속에 들어가게 된다.

이제 엘리야는 새로운 곳으로 옮겨야 했다. 그러나 이곳에서는 더 이상 까마귀를 통해 양식이 오지 않았다. 그는 양식을 얻는 데 동참해야 했다. 물론 그에게는 하나님의 약속이 있었다. 그러나 그 약속은 쉽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는 자존심을 접고 이방 과부에게 요청해야 했으며, 또한 은근한 거절까지 각오해야 했다.

"그가 일어나 사르밧으로 가서 성문에 이를 때에 한 과부가 그 곳에서 나뭇가지를 줍는지라"(10절)는 엘리야의 눈에 비친 과부의 모습을 보여준다. 하나님께서 엘리야를 "사르밧의 한 과부"에게 보내시겠다고 말씀하셨을 때, 그는 이렇게 가난한 과부를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가 앞으로 긴 세월동안 의지하고 살아야 할 과부는 나뭇가지를 줍고 있다. 그녀는 충분한 연료조차 갖고 있지도 않다.

그렇지만 엘리야는 그녀에게 공손하게 부탁한다. 고대 사회에서 남자가 여자에게 말을 걸고, 그것도 "먹는 문제"로 부탁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는 여인에게 "물 한 모금"과 "떡 한 조각"을 부탁한다. 그는 소량을 부탁한다. "한 조각"은 "부스러기"이다(시 147:17에서는 '우박'에 대한 은유로 나타난다). 과부는 물 한 모금은 즉시 주겠다고 하나 떡은 거절한다. 여인의 대답은 의외였다. "나는 떡이 없고 다만 통에 가루 한 움큼과 병에 기름 조금 뿐이라"는 대답은 단지 그녀의 형편에 대한 설명이 아니라, 은근한 거절이었다. 이것은 엘리야의 담대한 부탁과 대조를 이룬다.

누가 이런 상황에서 마지막 양식을 내어 놓을 수 있겠는가? 과부의 관점에서 보면 생면 부지의 이방인이 갑자기 나타나 자신과 자기 아들이 먹으려는 최후의 식사를 달라고 한다. "나와 내 아들을 위하여 음식을 만들어 먹고 그 후에는 죽으리라"(12절)는 그녀의 말은 비장하기까지 하다. 이 말은 엘리야에게 한 그녀의 맹세와 강한 대조를 이룬다.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12절 상), 그녀는 "생명"(여호와께서 살아계시거니와)에서 "죽음"(우리가 죽으리라)으로 넘어간다. 이것은 그녀가 예측할 수 있는 유일한 운명이었다.

2) 엘리야의 약속과 과부의 순종(13-16절)

그러나 엘리야는 당황하지 않고 다시 여인에게 명령하며 하나님의 약속을 전한다.

(1) 엘리야의 명령: "가서 네 말대로 하려니와 먼저 그것으로 나를 위하여 작은 떡 하나를 만들어 내게로 가져 오라"(13절)

(2) 엘리야의 약속: "여호와의 말씀이 나 여호와가 비를 지면에 내리는 날까지 그 통의 가루는 다하지 아니하고 그 병의 기름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14절)

(3) 여인의 순종: "저가 가서 엘리야의 말대로 하였더라"(15절)

선지자는 단지 주의 말씀에 순종하며 자동적으로 양식을 얻는 것이 아니라, 어려움 가운데 있는 사람에게 양식을 공급해 주어야 했다. 여인이 엘리야를 위해 양식을 만들기 위해서는, 주님께서 그녀에게 밀가루와 기름을 공급하여야 했다. 선지자는 그릿 시냇가에서 까마귀로부터 양식을 수동적으로 받기만 했으나, 여기에서 그는 자신과 과부의 집을 위한 양식을 얻기 위해 능동적으로 간청하고, 또 양식을 공급해 주어야 했다.

엘리야 편에서 볼 때 "나를 먼저 먹여라"는 말은 하기 어려웠을 것이다(왕상 17:13). 여기에서 "먼저"와 "뒤"가 중요하다. 엘리야는 과부에게 어려운 헌신을 요구한다. 그러나 이 요청에는 주님의 약속이 있다. "나를 우선하고 내 능력을 시험해 보라. 내 말을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라." 이 때 사르밧의 과부가 가난한 거지 같은 외국인을 믿을 수 있었을까? 하나님의 약속은 늘 우리에게 어리석어 보인다. 따라서 주님의 약속은 항상 우리에게 믿음을 요구한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순종할 때, 하나님의 약속은 능력이 된다(고전 1:18).

여인은 의외로 선지자의 약속을 잘 믿었다. 칼빈주의적 관점에서 보면, 하나님께서 이 여인에게 믿음을 주신 것이다. 그녀에게 선지자의 말씀을 믿는 믿음을 주셨다. 이 여인이 가진 믿음도 기적이다. 이런 극한 상황에서 누가 이런 믿음을 가질 수 있겠는가? 그렇지만, 이 여인의 입장에서 보면, 선지자의 말씀을 능동적으로, 자발적으로 믿은 것이다. 문을 열 때는 내가 원해서 열고 들어 온 것 같은 데, 들어와 보면 하나님께서 열어주신 것과 같다.

이 여인은 단지 옛 성서의 인물이 아니다. 오늘날 우리도 이런 과부와 같은 정황에 던져질 때가 있다. 훌륭한 직업을 가지고 촉망 받던 한 여성이 선교에 헌신한 후, 이 기사를 읽고 이런 기도를 썼다. "나는 힘도 시간도 사랑도 인내도 정서적인 여유도 돈도 거의 없습니다. 그렇지만 나는 내가 가진 가장 보잘 것 없는 것도 요구받는 상황에 처해있습니다.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은 하나님께 맡기는 것 뿐입니다. 내게 남은 가장 작은 것도 사용하시고, 가장 약한 노력에도 복 주시길 기도할 뿐입니다."
사르밧 과부의 이야기는 "여호와께서 엘리야로 하신 말씀 같이 통의 가루가 다하지 아니하고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아니하니라"(16절)는 말씀으로 끝난다. 이리하여 "여호와의 말씀이 엘리야에게 임하여 이르시되"(8절)와 수미일치를 이룬다. 열왕기 저자는 "하나님의 말씀"은 꼭 이루어짐을 강조한다. 주님은 "메마르지 않는 기름통"의 기적을 이 여인에게 선물로 주신다. "엘리야와 그녀와 그 아들"이 흉년이 다 지나갈 때 까지 하나님의 공급을 받는다.


우리는 사르밧 과부의 이야기에서 먼저 약자를 돌보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본다. 그는 여자요, 과부요, 외아들을 가진 자요, 이방인이다. 그 당시 이스라엘의 세계관에서 보면, 세계의 변경에 있는 자요, 가장 소외된 계층의 사람이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의 과부와 아버지 없는 아들에게 자비를 베푸신다. 그는 세상의 약하고 낮은 자를 선택하사 은혜를 먼저 베푸신다. 이 세상에서 가진 것이 없고, 보호자도 없는 자들을 하나님은 우선적으로 돌보신다. 또한 하나님은 우리에게 가난하고 어려운 자를 돌보도록 명하셨다. 왜냐하면 이것이 하나님이 성품이기 때문이다(사 10:1-4; 잠 14:31).

여기에서 이 여인이 이방인이었다는 사실도 중요하다. 하나님은 엘리야를 이방 땅에 보내셨다. 여기에 선교적인 차원이 있다. 원래부터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독점물이 아니셨다. 주님께서 아브라함을 선택하실 때부터, 그의 복은 이스라엘 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온 땅의 족속들"을 향한 것이었다(창 12:3; 18:18; 22:18).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들은 하나님의 복을 "온 땅의 모든 백성들"에게 전해야 했다. 이스라엘은 열국에게 하나님의 증인으로 부름 받아 어두운 세상의 빛이 되어야 했다. 그러나 북왕국에서 바알 숭배가 국가 종교가 되어, 이스라엘은 그 사명을 이루지 못하였다. 이스라엘은 비록 자신의 사명을 이루지 못했지만, 하나님의 약속은 좌절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그의 선지자를 통해 친히 이방 선교의 모델을 보여주신다.

사르밧의 과부에게 찾아가는 엘리야의 경험은 후에 예수 그리스도에게 모델이 된다. 예수께서 "이방의 갈릴리" 지역을 여행하시면서, 복음을 이방나라들에 전하실 때, 고향 나사렛 사람들은 좋아하지 않았다. 그들은 예수께서 이방에서 베푼 것과 같은 기적을 그들에게도 요구하였다. 이 때 예수는 엘리야의 경험을 암시하셨다(눅 4:24). 엘리야 시대에 이스라엘에 많은 과부가 있었지만, 그는 이방 과부에게 보냄 받은 것 같이, 자신도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한다고 말씀하셨다. 그 때 그들은 예수를 죽이려고 하였다(눅 4:28-30). 그들은 "원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보고싶어 하지 않았다. 이런 태도는 엘리야 시대에도 마찬가지였다. 엘리사도 하나님께서 원수 나라의 장군의 문둥병을 고쳐줄 때, 같은 문제로 고심하였다(왕하 5).

사르밧 과부의 믿음은 우리에게 모범이 된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이 여인이 소위 "주의 종을 잘 대접하여 복을 받았다"는 공식이 아니다. 그녀는 선지자의 말씀을 믿었고, 자신과 아들의 최후의 양식을 드렸다. 그녀는 기근을 해결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갖고 온 몸을 드린다.  열왕기는 바벨론 포로기에 쓰여졌음을 기억해 볼 때, 저자는 주전 6세기에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온 자들에게 이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그는 동일한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 "우리는 이방 땅에 살면서 일용할 양식을 위해 어디를 향해 손을 펴고 기도할 것인가?"

 기적은 구속적이다. 하나님은 때때로 기적을 통해 우리를 구속하고 회복하신다. 기적은 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임한 저주를 풀어준다. 무엇보다 말씀에 순종하는 엘리야와  사르밧과부에게 임한 언약적축복을 강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