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열왕기상(구속사)

열왕기상19장,Burn out

호리홀리 2015. 4. 14. 10:02

Burn out(왕상 19:1-18)




처음 선지자로 부름받고 "내 말이 없으면 수년 동안 이스라엘에 비도 이슬도 내리지 않을 것"이라며 맹세하고 첫 말씀을 전했지만(17:1), 그 직후 이스라엘를 떠나 페니키아의 한적한 시골 마을인 사르밧으로 도망쳐 몸을 숨겨야 했다.  엘리야는 아합이 그를 찾기 위하여 혈안이 되어 "모든 족속과 나라에 사람을 보내어" 엘리야를 수소문하였고 "그들이 말하기를 엘리야가 없다 하면 그 나라와 그 족속으로 그를 보지 못하였다는 맹세를 하게 하였다"(18:10). 그러나 엘리야는 태연하게 아합의 종 오바댜에게 나타났고(18:11) 아합 앞에 나타난다(18:16). 아합은 엘리야를 향하여 "너는 이스라엘을 괴롭게 하는 자"라고 비난하자, "내가 이스라엘을 괴롭게 한 것이 아니라 당신과 당신의 아비의 집이 괴롭게 하였다"(18:18).
엘리야는 갈멜산에서 모든 우선권을 바알 선지자 450명에게 넘겨 주었으며 자신이 기도할 차례가 되었을 때에는 제단과 제물에 물까지 뿌리면서 그의 상황을 최악으로 만들고 모든 책임을 하나님께 떠넘긴다(18:32-35). 엘리야의 "장군"에 하나님은 강력한 화력으로 제물을 태워 "멍군"으로 대답하셨다(18:38). 백성들은 "바알과 여호와" 사이에서 절뚝거리며 양다리를 걸쳤지만 엘리야를 통해 나타난 주님의 능력을 체험하고 "엎드려 말하되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로다"며 그들이 그렇게 사랑하던 바알 선지자들을 모두 쳐 죽이는 데 앞장선다(40절). 엘리야 이야기는 "비와 이슬이 사라진 날"로 시작하여 드디어 이스라엘에 "폭우"가 내리던 날로 마친다(18:33). 그러나 엘리야는 이 이야기의 마지막 장면에서 마치 그가 아합의 사자나 되는 것처럼 아합의 마차 앞에서 달려가는 기묘한 장면으로 막을 내렸다(18:46).
엘리야와 그의 이야기의 역설은 첫 두 이야기에서 그치지 않고 19장에 제시된 세번째 이야기에서도 계속되고 있다. 여기에서 그의 역설적이고 풍자적인 모습은 더욱 심화된다. 아합 앞에서 담대하게 달리던 엘리야가 이제 이세벨의 한 마디 말에 공포를 느끼고 끝없는 광야를 지나 멀리 호렙산으로 도망친다. 왜 엘리야는 이렇게도 기복이 심할까? 그렇지만 엘리야의 죽 끓는 변덕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엘리야를 붙드신다.

1. "그 생명을 위하여 도망치는" 엘리야(1-3절)

19장의 첫 이야기는 앞장의 마지막 이야기와 이어진다. 아합은 이세벨에게 가서 갈멜산에서 일어난 일들을 빠짐 없이 보고한다. "아합이 엘리야의 무릇 행한 모든 일과 그가 어떻게 모든 선지자를 칼로 죽인 것을 이세벨에게 모두 고하니"에서 우리말 번역에는 "모두"가 단 한번 나타나지만 원문에서는 세 번 반복된다. 즉, 아합은 이세벨에게 "모든" 세부 사항까지 남김 없이 이세벨에게 보고하였다. 아합은 앗시리아의 대왕 샬만에세르 3세의 남진을 저지하면서 오론테스 강에 있는 칼칼(Qarqar)의 전투에서 반 앗시리아 전선을 형성하고, 이스라엘 군에서는 2천 대의 전차와 만명의 보병을 출전시킬 정도로  위대한 용사였다. 그러나 그는 그의 아내에 대해서는 이상한 두려움을 갖고 있었다. 그는 이상하게도 "그대 앞에서 서면 갑자기 작아지는" 모든 공처가의 원형이다.
"이세벨이 사자를 엘리야에게 보내어 이르되 내가 내일 이맘때에는 정녕 네 생명으로 저 사람들 중 한 사람의 생명 같게 하리라 아니하면 신들이 내게 벌 위에 벌을 내림이 마땅하니라 한지라"(2절). 성경에는 이세벨의 맹세 형식과 비슷한 것이 11번 나타나며, 그 중 두 번을 비이스라엘인이 하며 이 때에는 "하나님"(엘로힘)이 "신들"로 번역된다(왕상 20:10, 동사도 복수임). 이스라엘 사람이 할 때에는 "야웨"가 주어로 두 번 나타나며, 나머지는 모두 "하나님"(엘로힘)으로 나타난다(왕상 2:23, 동사는 단수임).
이세벨의 맹세에는 "생명"(네페쉬)이 두 번이나 반복되며, 3절에서 엘리야가 "그 생명을 위하여" 도망치며, 4절에서 그가 "죽기를 구하고('그의 네페쉬가 죽기를'), 내 생명을 취하소서"라고 간청한다. 즉, 이 단락에서는 "생명"이 핵심적인 모티프를 이루고 있다. 엘리야는 자신이 예언자로서의 직무를 계속 수행하는 것은 그의 생사가 걸린 문제로 느끼고 있다.
그렇지만 이 때 이세벨이 정말 엘리야를 죽이기로 작정했는지는 분명치 않다. 만약 그녀가 엘리야를 죽이기로 작정했다면 이런 맹세까지 하면서 엘리야에게 알려주지 않았을 것이다. 아마 이세벨은 엘리야가 이스라엘 땅에서 떠나기를 원했을 수 있다. 엘리야를 처치하는 것은 정치적으로 부담스러운 일이었을 것이다. 이전에는 이세벨이 야웨의 선지자들을 쉽게 죽였지만 갈멜산 사태 이후에는 국민 정서가 근본적으로 변했기 때문에 쉽게 엘리야를 죽일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엘리야는 이세벨의 맹세를 듣자말자 "그 생명을 위하여 도망한다"(3절). 원문을 보면 세 개의 동사가 연속적으로 이어진다. "그는 두려워하였고, 일어나서 목숨을 위하여 갔다"(3절 상). 여기에서 첫 동사 "보다"(wayyar')는 많은 사본들과 70인역, 시리아역, 벌게이트에서 "두려워하다"(wayyira')로 읽고 있다. 즉, 엘리야는 이세벨의 "협박이 두려웠던 것이다.
이리하여 엘리야는 "유다 땅에 있는 브엘세바로 갔다." 즉, 엘리야는 북서쪽 끝에 위치한 북 이스라엘의 이스르엘 골짜기에서부터 바로 남쪽 유다의 끝에 있는 브엘세바까지의 수백리 길을 단숨에 도망쳐 간다. 그리고 "그의 사환을 거기에 머물게 하고, 그는 광야로 들어가 하룻길쯤 더 간다"(4절상). 엘리야는 브엘세바조차도 불안하다고 생각하였는지, 그의 사환을 브엘세바에 떼놓고 단숨에 광야로 숨어 버린다.
이세벨의 한 마디 위협에 엘리야가 자신의 목숨에 대한 위협을 느끼고 서둘러 도망치는 모습은 몹시 풍자적이다. 그의 목숨을 건지기 위하여 허둥지둥 도망치는 꼴은 갈멜산에서 담대하게 싸우는 모습과 너무나 대조적이다. 엘리야는 분명히 방심한 듯 하다. 그가 원하는 방향으로 일들이 진행되지 않았다. "갈멜 사건 이후, 온 나라가 대규모로 하나님께 돌아오지 않을까? 백성들은 바알 선지자들을 내어 쫓고 주님께로 돌아오지는 않을까? 혹은 최소한 아합과 이세벨을 권좌에서 몰아내고 새로운 나라를 세우려고 하지 않을까?"라는 기대는 무산되었던 것 같다.

갈멜산에서의 힘의 시위는 이세벨로 회개하게 하지 않았다(19:1-2). 오히려 그녀는 선지자의 목숨을 노렸다. 이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예수 당대의 무리들은 그의 기적을 보았고 하늘에서 하나님의 천둥소리를 들었다(요 12:28). 그러나 그들은 믿지 않았다(요 12:37). 예수는 자기 고향사람들에게 자기 말을 믿기 어려우면 자신이 행하는 "기적을 믿으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들은 오히려 그를 붙잡아 죽이려고 하였다(요 10:38). 죄로 죽은 마음과 어두워진 눈은 보지도 깨닫지도 못한다(사 6:10). 기적 자체는 우리의 완악한 마음을 부드럽게 하지 못하며, 닫힌 눈을 열지도 못한다. 오직 하나님만이 완악한 마음과 닫힌 눈을 여실 수 있다.
갈멜산 승리는 역사에서 계속 반복되지만 악은 여전히 세상에 넘친다. 엘리야의 승리는 악을 결정적으로 쳐부순 것은 아니었다. 이것은 후에 십자가에서 이루어질 일이었다. 가라지와 알곡은 함께 자라다가 최후 추수에 나누어질 것이다(마 13:24-30). 우리가 이 사실을 잊을 때 쉽게 절망하게 된다. 한 때 엘리야는 사자같이 담대하였다. 그는 악과의 싸움에서 승리의 절정에 섰다. 그는 주님의 능력에 붙잡혀 아합의 마차 앞에서 달렸다. 그러나 이세벨의 한 마디에 그는 도망친다. 마치 태양이 먹구름 사이로 사라지는 것 같다. 전열을 가다듬은 이세벨은 악의 힘과 괴력을 보고 엘리야는 두려워한다. 치를 떠는 한 여인을 보고 놀란 엘리야의 모습은 한 계집 종 앞에서 주를 부인하는 베드로의 모습이다. 이런 모습은 바로 탈진한 사역자의 모습이다
2. "지금 내 생명을 취하소서"(4 하-8절)

두 번째 장면은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먼저 엘리야가 하나님께 절망적으로 말하고, 한 천사가 등장하여 그에게 먹을 것과 마실 것을 주며 엘리야는 먹고 힘을 얻어 다시 광야로 깊숙히 들어간다.

1) 로뎀 나무 아래에 앉아 죽기를 구하는 엘리야(4절)

이 장면은 너무나 처절하다. 사실 "로뎀" 나무는 나무가 아니라 가시덤불이며 그 그늘은 너무나 보잘 것 없어 광야에 있는 자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 로뎀 나무는 엘리야의 절망감에 위로가 되지 않으며, 작열하는 광야의 태양의 열기를 막아주지도 못한다. 더구나 이 나무도 너무나 외롭게 서있다. "그는 한 로뎀(rotem 'ehad) 나무 아래에 앉아 있다."
이 광야의 로뎀 나무 아래에서 엘리야는 죽기를 기다린다. 그는 "족합니다"(넉넉합니다)라는 단음절 말로 시작한다(rab). "지금 내 생명을 취하소서"라는 기도는 너무나 무례하며 앞의 이야기에서 기도하던 모습과 크게 다르다(17:21에서 그는 공손하게 삼인칭으로 간접적으로 말한다). 또한 앞에서는 하나님의 영광과 이스라엘의 미래를 위해 기도했으나(18:36-37) 여기에서는 자기 연민으로 가득 찼다.
엘리야의 마음은 쓰리고, 그의 말은 원망과 불평으로 가득 찼다. 이것은 마치 노아의 술취함, 롯의 육정, 모세의 분노, 아론의 금송아지 숭배, 미리암의 질투, 여호수아의 서두름, 다윗의 간음, 요나의 불순종, 베드로의 부인, 바울과 바나바의 싸움과 같다. 엘리야는 한 때 그릿 시냇가에서 하나님의 섭리의 손길인 까마귀를 기다리며 까마귀가 가져다 주는 음식도 감사하게 받았으나, 이제는 광야의 로뎀 나무 아래에서 죽기를 구한다. 한 때 그는 사르밧 과부의 아들을 살렸으나 이제는 자기 목숨을 주께서 취하길 구한다.
왜 엘리야는 이렇게 깊은 절망에 빠졌는가? 아마 그는 자신의 수고가 헛되다고 생각한 것 같다. 마치 "밤 새도록 수고했으나, 잡은 것이 하나도 없다"고 말한 베드로와 같다(민 11:14, 15; 사 49:4; 빌 1:23). 또한 그는 교만해졌음이 분명하다. 그는 계속 "나"에 대해 푸념하고 있다(10, 14절). 그의 영광의 절정(18:46)에서 이제 깊은 절망의 수렁으로 내려가고 있다. 이 때에는 누구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또한 엘리야는 "나는 내 열조보다 낫지 못하니이다"고 말한다. 이것은 주님에 대한 간접적인 도전이다. 엘리야는 주님께서 그에게 너무나 많은 것을 요구한다고 말한다. "나는 초인이 아닌데 주님께서는 나에게 초인적인 능력을 요구하신다"고 불평하고 있다.
엘리야는 지금 하나님을 아주 난처하게 하고 있다. 만약 주님께서 엘리야의 기도를 들으시고 그가 죽도록 허락하신다면, 이것은 결국 하나님께서 엘리야에게 요구한 것이 지나쳤음을 스스로 인정하는 것이 된다. 이와 반대로 주님께서 엘리야의 기도를 듣지 않는다면, 주님은 무책임하고 무정한 주인이 되는 것이다. 즉, 현재 모든 문제의 책임은 자신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있다고 그는 떠벌리고 있다.
자신의 딜레마를 주님께 던진 후, 엘리야는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는다. 그는 그냥 "로뎀나무 아래 누워 잔다." 그는 "내 배를 째세요"라며 누워 있다. 저자가 "로뎀나무 아래"를 반복한 것은 다시 한번 엘리야의 고독과 외로움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자기 연민에 빠진 엘리야는 자신의 고통을 과장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2) 공급하시는 하나님의 손길(5-7절)

"천사가 어루만지며 이르되"는 "보라 사자가 그를 어루만지도다"로 번역되어야 한다. 여기에서 "이것을 보라"(hinne zeh)는 표현은 엘리야의 관점에서 상황을 생생하게 그려준다. 아무도 없는 광야에서 외로운 로뎀 나무 아래에 기진 맥진하게 쓰러져 있는 엘리야에게 천사가 찾아오고 있다. 어루만지는 천사의 손길은 엘리야를 버리지 않고 위로하시는 신실하신 하나님의 손길을 보여준다.
천사는 "내 배 째라"고 누워 있는 엘리야에게 죽음이 아니라 생명을 가져다 준다. 그는 엘리야에게 "일어나서 먹으라"고 한다. 이 장면은 17장을 상기시켜 준다. 옛날 사렙다 과부의 집에서 그는 "떡"('uga; 17:13)을 먹었고 과부는 기름 "병"을 갖고 있었다(tsappachat). 여기에서 엘리야는 "병"(tsappachat)에서 "물"을 마신다. 이 "병"은 대단히 희소한 단어이다(여기와 삼상 26:11). 즉, 신비로운 주의 사자가 사르밧의 과부처럼 엘리야를 먹이고 있다. 주님은 엘리야가 계속 일하길 원한다.
또한 이 장면은 과부의 집에 있었던 마지막 사건을 연상시켜 준다. 엘리야는 과부 아들의 "생명"(네페쉬)이 돌아와 살도록 구했으며, 주님은 그의 기도를 응답하셨다(17:21). 여기에서 엘리야는 죽기를 원한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의 생명을 취하기 보다 오히려 먹을 것을 공급해 주신다. 주님의 사자가 친히 그에게 양식과 물을 주고 있다. 여기에서 "일어나 먹으라"와 "먹고 마시다"가 명령과 응답으로 반복된다.

5 천사가 어루만지며 이르되 일어나서 먹으라 하는지라
6 이에 먹고 마시고 다시 누웠더니
7 여호와의 사자가 또 다시 와서 어루만지며 이르되
일어나서 먹으라 네가 길을 이기지 못할까 하노라 하는지라
8 이에 일어나 먹고 마시고 그 식물의 힘을 의지하여 갔다

여기에 두 개의 장면이 제시된다. 먼저 천사는 엘리야에게 "일어나서 먹으라"고 명하였다(5절). 그러자 엘리야는 "이에 먹고 마시고 다시 누웠다"고 한다. 여기에는 엘리야의 행동 외에 아무 것도 나타나지 않는다. 천사와 엘리야 사이에 아무런 대화가 없다. 엘리야는 이 사자가 어디에서 왔는지 묻지도 않는다. 그는 그저 먹으라니까 먹기만 한다. 또한 엘리야는 아무 것도 더 이상 요구하지 않는다. 먹고 배불러도 그의 마음은 바뀌지 않았다. 그냥 "누웠다." 그러나 자는 것 같지는 않다('다시 잠이 들었다' [공동, 표준] 참조).
그러자 주의 사자는 엘리야에게 "또 다시 와서 어루만지며 이르되 일어나서 먹으라"고 한다(7절). 이리하여 5절이 반복된다. 그러나 그는 바로 "여호와의 사자"로 소개되면서 그의 정체가 분명해진다. 또한 6절에서 엘리야가 먹고 "다시 누웠을 때," 주의 사자는 "다시 와서 어루만진다"(7절). "돌아오다"(shub shenit)는 동사가 의도적이다. 즉, 주님도 엘리야처럼 집요하다. 선지자는 잘 먹고 잠자리로 "돌아가나", 주님은 다시 "돌아와" 그를 깨운다.
7절 하반절에서 " 네가 길을 이기지 못할까 하노라 하는지라"는 동기를 부여하는 절이다. "너의 길이 멀다"(ki-rab mimmeka hadareq). 이것은 4절에 있는 엘리야의 기도와 이어진다. 엘리야의 기도에 주님의 응답이 주어진다. 그러나 여기에서 "너의 길"은 무엇을 가리키는가? 주님은 엘리야가 어디로 가기를 원하시는가?

3) "그 식물의 힘을 의지하여 40주야를" 걷는 엘리야(8절)

엘리야의 행적을 소개하는 열왕기 저자는 엘리야가 "일어나 먹고 마시고 그 식물의 힘을 의지하여 사십 주 사십 야를 행하여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니라"고 한다(8절). 아무도 엘리야가 호렙으로 갈 줄은 몰랐다. 왜 엘리야는 호렙으로 향하는가? 엘리야가 호렙 산에 가는 것은 주님께서 원하셨던 길인가? 주의 사자는 "네 길"이라고 했다. 엘리야가 걸어야 할 "My Way"는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그가 버린 사역지로 돌아가는 것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엘리야는 "그 길"(haddereq)로 가지 않고 단지 "호렙으로 갔다"고 한다. 즉, 엘리야는 여기에서 "명령"과 "순종"의 형식을 따르고 있지 않다. 다시 말하자면, 엘리야는 하나님의 기대를 저버리고 자신의 뜻을 관철시키기 위해 "호렙"으로 가고 있다. 그가 호렙으로 간 목적은 무엇이었을까?
물론 호렙으로 가는 엘리야의 모습에는 모세의 영상이 배경을 이루고 있다. "호렙산"은 모세가 하나님을 처음 만난 곳이었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엘리야 선지자에게 물과 양식을 주어 40일간 걷게 한다(왕상 19:8). 40일은 긴 시간을 가리키지만 모세가 시내산에서 보낸 40일간의 시간과 이어진다(출 24:18; 34:28; 신 9:9, 11, 18; 10:10). 어쩌면 엘리야는 옛날 모세처럼 하나님을 만나고 싶어 호렙을 향하여 발을 옮긴 것 같다. 그러나 그의 마음 속에 감추어진 더 깊은 동기는 무엇이었을까?

3. 호렙 산에서 세미한 음성을 듣는 엘리야(9-18절)

엘리야가 호렙산에서 하나님을 만난 사건은 구약성경 중에서 가장 많이 다루어지는 설교 본문이다. 우리는 이곳에서 엘리야가 체험한 "세미한 음성"에 심취해 있다. 그렇지만 여기에서 하나님과 엘리야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A. 굴 속으로 들어가는 엘리야의 행동 묘사(19상)
B. 주께서 엘리야에게 질문하심(9하)
C. 엘리야의 대답(10절)
D. 굴 밖으로 나오라는 주님의 명령(11상)
E. 주님의 신현에 대한 묘사(11하-12)
A'. 굴 밖으로 나오는 엘리야의 행동 묘사(13하)
B'. 주께서 엘리야에게 질문하심(13하)
C'. 엘리야의 대답(14절)
D'. 주님의 명령(15-17절)
E'. 야웨의 승리 묘사에 대한 묘사(18절)

위의 구조를 보면, 이 이야기는 하나님과 엘리야가 서로 다투고 있으며, 이 "의지의 대결"에서 하나님이 승리하심을 알 수 있다
1) 모세의 동굴에 들어간 엘리야(9-10절)

엘리야는 호렙에 도착하자 말자 "그 곳 굴에 들어가 거기에서 머물렀다"에서 "그곳" 혹은 "거기서"(sham)가 두 번이나 반복된다. 즉, "그 동굴"은 유명한 곳이 분명하며 이곳은 아마 출애굽기 33장에서 모세가 하나님의 신현을 경험했던 동굴 같다. 모세는 이곳의 "바위 틈"에서 주님의 영광을 보았다(출 33:22). 또한 이 동굴은 오바댜가 야웨의 종을 숨겨준 "그 동굴"을 연상시켜준다(18:4, 13).
바로 그 때,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엘리야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이 절에서도 "여기"가 강조된다. 즉, "엘리야야 너는 도대체 여기에서 무엇을 하고 있느냐?"라고 물으신다. 엘리야가 여기에 있는 것은 주님께서 기대한 바가 아니다. 이곳은 엘리야가 있을 곳이 아니다. 그는 자신의 사역의 현장에 있어야 하는 데, 근무지(혹은 사역지)를 이탈하고 있다.
엘리야는 자신이 왜 여기로 왔는지에 대해서 직접적으로 대답하지 않고, 자신이 인식하는 현재의 상황에 대해 불평을 길게 나열한다(10절). 그는 이스라엘의 범죄와 자신의 의를 대조하고 있다. 엘리야는 자신이 "여호와를 위하여 열심이 유별나다"라고 말한다. 사실 엘리야는 하나님과 그의 영광에 열심을 품었다(왕상 19:10, 14). 주님도 열심이 특심이신 분이시다(출 20:5; 34:14; 신 4:24; 5:9; 6:15).
여기에서 엘리야는 "만군의 여호와"라는 군사적 칭호를 사용한다. 즉, 그는 "주의 날"이 속히 임하여, 거룩한 용사이신 하나님께서 자신의 원수들을 심판하시고 의의 나라를 세우시기를 간절히 바랐던 것 같다. 그러나 그의 꿈은 쉽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리하여 엘리야는 깊은 실망과 좌절과 패배감 가운데 우울증에 빠졌다. "주여, 갈멜 산 승리 후에, 왜 일을 그만 두시나이까?"
엘리야는 이스라엘의 범죄를 세 가지로 말하는 것 같다. 즉, "(1)이스라엘 자손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2)주의 제단을 헐며 (3)칼로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주의 언약을 버렸다"는 가장 근본적인 문제이며 그 예와 결과로서 그들은 "당신의 제단을 헐고 당신의 선지자들을 죽였다"라고 말한다. 즉, 이스라엘 백성들은 18장에서 본 바와 같이 갈멜산에 있던 주의 제단을 "무너뜨렸으며"(18:30) 이세벨은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다(18:4, 13).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범죄에 가담하였다.
엘리야는 여기에서 18장에 있었던 큰 승리와 백성들의 회심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는다. 아마 그는 그들의 회심을 진정한 것으로 인정하지 않는 듯 하다. 그는 싸늘한 냉소주의에 빠져 있고, 자신의 의(self-righteousness)로 가득 차 있다. 그는 자신이 절망할 수 밖에 없는 이유만을 말하고 있다. 그는 "나, 오직 나만 남았다"고 한다. 그의 아집(egoism)이 심하다. 마치 자신만이 잘못 대접받고 있는 듯이 말한다. 나아가 엘리야는 자기만이 남아 있는 유일한 선지자라고 한다. 그러나 주님은 엘리야에게 남은 자가 7000명이나 있다고 대답하신다(18절). 엘리야는 오바댜가 숨긴 백명의 선지자도 빠뜨리고 있다.
그리고 엘리야는 "저희가 내 생명을 찾아 취하려 하나이다"고 말한다. 이 절은 현재로 번역되는 것 보다 바로 앞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범죄와 함께 과거로 처리해야 한다. 현재 그의 목숨을 노리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없는 데도 그는 실제 상황 보다 과장하고 있는 듯 하다.
엘리야의 긴 불평은 그의 의도를 간접적으로 드러내어 준다. 즉, "엘리야야 너는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9절)는 질문에 대한 그의 짜증스러운 대답은 그가 "선지자직을 그만두고 싶어 여기까지 왔음"을 보여준다. 그는 사표를 제출하기 위해 선지자직의 기원을 이루는 모세의 산, 모세의 동굴로 온 것이다. 하나님은 이런 엘리야에게 어떻게 하셔야 하는가? 엘리야의 사표를 받아버리실까? 그렇다면 바알의 승리를 인정하신 셈이 된다. 또한 엘리야로 죽도록 허락하실 수는 없었다. 실제 상황은 엘리야가 생각한 것 보다는 훨씬 좋기 때문이다.

2) "여호와의 산 앞에" 선 엘리야(11-12절)

주님은 엘리야에게 이중 명령을 내리신다. "너는(동굴에서) 나가라" 그리고 "여호와의 앞에서 산 위에 서라"(11상; 출 33:21참조). 여기에서 장소의 변화가 있다. 엘리야는 어두운 동굴 안에서 "여호와 앞으로" 나오라는 명령을 받는다. "여호와의 앞에서"(lipney yhwh)는 엘리야가 스스로를 소개한 형식이다(17:1; 18:15). 그는 하나님의 "어전"에 선 선지자였다. 따라서 이 형식은 엘리야에게 곧 임할 신현을 체험하라는 말이 아니라 "성실한 선지자"가 되라는 당부의 말씀이다. 즉, "다시 선지자로서 책임을 다하라"고 말씀하신다.
이어서 구약성경 가운데 가장 종합적이고 장엄한 신현의 묘사가 나타난다. "여호와께서 지나가시는데 여호와의 앞에 크고 강한 바람이 산을 가르고 바위를 부수나 바람 가운데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며 바람 후에 지진이 있으나 지진 가운데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며 또 지진 후에 불이 있으나 불 가운데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 하더니 불 후에 세미한 소리가 있는지라"(11하-12절).
신현에 대한 묘사는 주님께서 "지나가신다"로 이어진다(출 33:22; 34:6). 지진, 폭풍, 불(왕상 19:11-12)은 구약에서 하나님의 신현에 동반되는 주제이며 모세의 시내산 체험과 밀접한 연관을 갖고 있다. 모세는 처음 하나님을 "불타는 가시떨기"에서 만났으며(출 3:2) 이스라엘 백성들이 시내산에서 하나님과 언약을 맺을 때 "천둥, 번개, 구름, 연기, 불, 지진"의 현상이 함께 나타났다(출 19:16-18). 이 신현 현상은 거룩한 용사이신 하나님께서 악의 세력과 거룩한 전쟁을 하실 때 주로 나타난다. 이스라엘의 주 하나님은 구름으로 자신의 전차를 만드시고 원수를 무찌르신다(신 33:26; 시 68:4; 104:3 등).
여기에서는 전통적인 신현 현상에서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더라"가 반복되고 있는 점이 특이하다.
"바람 가운데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며
지진 가운데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며
불 가운데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더라"(11절 하).
여기에 제시된 삼중적인 부정어는 바람과 지진과 불의 현상들이 주님의 신현임을 부인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직접적인 임재를 담고 있음을 부인하는 것이다. 즉, 이것은 히브리적인 어법으로서, 대조를 통하여 강조하는 기법이라고 말할 수 있다. 마치 "네 부모와 처자를 버리고 나를 따르라"라고 말할 때 정말 부모를 버리는 것이 아니라 마치 부모를 버리는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야 할 것을 말하는 것이다. 즉, 주님은 바람, 지진, 불과 같은 자연의 격변을 통해 자신의 오심을 간접적으로 미리 알리고 있지만 주님의 음성을 통하여 자신의 거룩한 임재를 직접적으로 표현하신다.
이리하여 강렬한 자연의 격변으로 나타난 신현 현상은 주님의 "세미한 음성"(qol demama daqqa)과 대조된다. 이 표현은 신구약 성경에서 오직 여기에만 나타나므로 번역과 해석이 까다롭다. 대부분의 번역은 "부드럽고 조용한 소리"(표준), "조용하고 여린 소리"(공동), "부드러운 속삭임"(NIV), "완전한 침묵의 소리"(NRSV)로 제시된다. 이 소리는 너무나 신비롭게 역설로 가득 찼다. 이 소리는 가루나 먼지처럼 미세한(daqqa) 소리이지만 침묵(demama)의 소리이다. 즉, 지진과 불을 동반한 폭풍우의 소리와 대조되는 착 가라앉은 소리이며 침묵을 느낄 정도로 부드럽고 섬세한 소리이다. 이 소리가 무엇을 상징하느냐에 대해 학자들은 다양한 견해들을 제시하였다.
(1) 이것은 "양심의 소리"로서 엘리야로 하여금 원래의 마음으로 돌아가게 하는 내면의 소리이다.
(2) 이것은 "조용한 명상 기도"를 상징한다(탈굼의 Pseudo-요나단). "지진의 천사 대군 후에 불의 천사 대군이 온다. 불의 천사 대군에는 주님의 영광이 없었다. 불의 천사 대군 후에 부드럽게 찬양하는 소리가 온다."
(3) 이것은 "하나님께서 팡파레와 함께 오시지 않는다"는 은유이다.
(4) 이것은 "어르렁 거리는 천둥소리"이다(qol hamon; 그레고리). 그렇다면 이 "천둥 소리"는 엘리야가 갈멜산에서 들은 것(18:41)과 모세가 호렙산에서 들은 소리와 같은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 시내산에서 자신을 계시할 때처럼 크고 무서운 소리와 음성으로 엘리야에게 임하신 것이다

(5) 이것은 "예언적 말씀"이다. 모세가 시내산에서 폭풍과 구름의 신현 현상을 본 후(출 19:16), 주님의 영광이 그의 앞을 지나가는 것을 본 것처럼(출 33:18-23) 엘리야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다.
(6) 이것은 "자연현상이었으나 이방사상과 논쟁하는 것"이다. 즉, 어떤 부드럽고 세미한 자연현상의 소리를 들려주었으나 그것은 "바알"의 소리가 아니라 주님의 소리였다.
우리는 이 "부드러운 속삭임"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지만, 주님께서 불과 폭풍과 지진의 소리를 넘어, 초월적이고, 신비한 음성으로 나타난다고 볼 수 있다. 욥에 따르면 자연현상은 "그의 행동의 언저리에 불과하다"(욥 26:14). 엘리야는 선지자로서 주님께서 특별한 형태로 자신을 표현한 것을 경험하고 있다. 이 소리의 정체가 무엇이든 간에 그것은 주님의 소리였다. 이리하여 엘리야는 모세가 된다. 하나님은 그를 모세처럼 취급하신다. 모세 역시 출애굽기 19장에서 지진과 화염과 폭풍 같은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였으나 황금송아지 사건 이후에 언약을 갱신하면서 "하나님의 영광의 임재"를 출애굽기 33-34장에서 경험하였다. 이와 같이 엘리야도 갈멜산 전투에서 폭풍과 지진과 불과 같은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했으나 이제 하나님의 부드러운 음성을 듣는다. 이리하여 주님께서는 엘리야에게 모세의 경험을 하게 하며, 그가 계속하여 예언자의 직무를 감당하도록 격려하신다.

3) "엘리야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13-18절)

이 신비로운 소리를 듣자 말자 눈을 가리는 엘리야의 모습은 옛날 모세의 모습을 상기시켜 준다(출 33:20-23을 보라). 그리고 주님께서 주시는 이중적인 명령인 "나가라"와 "내 앞에 서라"에 순종한다(13절상). 그러나 엘리야는 굴 밖으로 나오지 않고, "굴 어귀에 섬으로써" 그의 순종이 불완전함을 보여준다.
주님은 다시 한번 더 "엘리야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고 물으신다(9절하 참조). 즉 엘리야는 주님께서 그에게 "서 있으라"고 말씀하신 자리에 서있지 않다. 이것은 장소적인 관점 보다 엘리야의 정신적인 자세를 꾸짖는 말씀이다. 엘리야는 분명히 선지자로서 사표를 내기 위해 여기까지 왔다. 이것이 그가 호렙산으로 온 목표였다.
주님의 탄식을 들으면서 엘리야는 앞에서 했던 말을 되풀이한다. "저가 대답하되 내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열심이 특심하오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단을 헐며 칼로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음이오며 오직 나만 남았거늘 저희가 내 생명을 찾아 취하려 하나이다"(13절). 그는 영광스러운 주님의 신현을 보고 그의 음성까지도 들었지만 별 변화가 없다.
주님은 엘리야를 꾸짖으시며 또한 타협하신다. 주님은 엘리야를 책망하면서도, 그의 사표를 수리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에게 새 일을 주신다. 엘리야의 사역의 범위는 이스라엘을 넘어간다.
엘리야의 새로운 사역은 세 가지이다. 여기에 놀라운 점이 많다. (1)먼저 엘리야를 시리아로 보내는 것은 예기치 못한 일이다. 이것은 17장에 나타난 엘리야의 첫 사역을 상기시켜준다. 주님께서 다시 한번 자신의 권세를 바알의 땅에서 나타내신다. 주님은 이스라엘 만 다스리는 분이 아니시다. (2)엘리야로 엘리사에게 "기름 붓게 하신다"는 점은 놀랍다. 특히 엘리사에게 기름부어 선지자 직무를 잇게 하는 것은 이스라엘 역사의 문헌에서 처음으로 나타난다. (3)엘리야는 그의 생애에 주님의 명령을 다 이루지 않는다. 사실 하사엘을 보좌에 오르도록 지명한 자는 엘리야가 아니라 엘리사였으며(왕하 8:7-15), 예후를 이스라엘의 왕이 되게 한 것도 엘리사의 사역이었다(왕하 9:1-13). 이 중에서 엘리사를 자기 종으로 선택하여(왕상 19:19-21) 결국 후계자가 되게 한 일만 엘리야가 이룬다(왕하 2:1-14).
"그러나 내가 이스라엘 가운데 칠천인을 남기리니 다 무릎을 바알에게 꿇지 아니하고 다 그 입을 바알에게 맞추지 아니한 자니라"(18절). 여기에서 "칠"과 "천"은 완전수이다. 하나님은 늘 남은 자를 두신다. 우리가 역사를 바라보는 눈과 주님이 이끌어 가시는 방향이 늘 같지 않다. 



모든것이 엘리야의 뜻과는 반대로 움직이고 있었다. 아합과 이제벨은 회개하지 않고 더 광분했고 백성들은 돌아오지 않았다. 갈멜산 승리 후에도 바알종교가 이스라엘에서 여전히 인기를 끌고 있었다. 주님의 제단은 여전히 무너져 있었고 그의 선지자들은 체포되고 살해되었다. 마치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버리신 것 같다. 게다가 이세벨은 이제 악의 화신이 되어 그의 목숨까지 노리고 있다. 갑자기 엘리야는 고독감을 느낀다. 그는 "오직 나 혼자 만 남았다"고 생각한다(왕상 19:10). 그는 오직 자신만이 거룩한 싸움을 싸우며 다른 사람들은 모두 타협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는 분명히 전체적인 그림을 보지 못하고 있다. 하나님은 그에게 아직도 남은 자가 7000명이나 있다고 하신다. 극도의 배도 시기에도, 하나님은 신실한 백성을 보전하시며 그에게 충성을 다하는 "소수이지만 완전한 7000명"이 남아 있다(왕상 19:18). 엘리야만 홀로 악과 싸우고 있지 않다.
또한 엘리야가 이루지 못한 일은 그의 후계자들이나 하나님께서 세우시는 다른 종들이 이룰 것이다. 아합과 이세벨의 악한 통치는 이후에 예후가 제거할 것이다. 또한 엘리사가 엘리야를 도울 것이다(19:16-17). 하나님은 시대마다 남은 자들을 통하여 일하실 것이며 궁극적으로 참된 남은 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새로운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실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참된 이스라엘을 실현하시며 홀로 악을 대항할 것이다. 악한 자들이 엘리야를 죽이려고 한 것 같이(왕상 19:10, 14) 예수를 제거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엘리야는 살아나지만 예수께서는 십자가에 달리신다. 하나님께서는 절망에 빠진 엘리야를 외면하지 않으셨으나 그의 독생하신 아들은 버리신다(시 22:1; 마 27:46). 신약성경의 저자들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만이 자신의 백성의 죄를 위하여 자신의 목숨을 줄 수 있었다고 말한다. 모세나 엘리야는 이스라엘의 죄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줄 수 없었다(출 32:32; 민 11:15; 왕상 19:4). 오직 예수만이 이것을 할 수 있다.
이후에 사도 바울은 "남은 자"에 대해 생각한다(왕상 19:18). 바울은 이 말씀에 근거하여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않았다고 생각하며, 그의 당대에도 남은 자들이 있다고 믿는다. 행위로서가 아니라 은혜로 선택받고 구원받은 남은 자를 주님은 끝까지 지키실 것이다(롬 11:1-6).
예수 그리스도 당대의 유대인들처럼(고전 1:22) 우리시대의 신자들도 표적과 기사를 좋아한다. 우리는 초자연적인 능력과 기적을 찾다가 소원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좌절에 빠진다. 그러나 하나님은 여전히 살아 계시며 엘리야에게 말씀하신 것처럼 부드러운 속삭임으로 찾아오신다. 하나님은 지금도 자신의 살아 움직이는 말씀으로 일하신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이 육신을 입으신 말씀(로고스)이시다. 그리스도는 믿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지혜요 능력"이다(고전 1:18-31). 하나님의 말씀은 좌우에 날선 어떤 검 보다 강하고 예리하다(히 4:12-13). 이 말씀이 우리를 새롭게 하실 것이다. 오직 이 말씀이 우리에게 참된 생명과 능력과 희망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