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열왕기상(구속사)

열왕기상 21:17-29,연기된 심판

호리홀리 2015. 4. 9. 13:20

 "아합의 회개와 지연된 심판" 
        왕상 21:17-29

        
아합은 왕으로서 자신의 왕궁을 확장하기 위하여 한 시골 농부였던 나봇의 포도원을 통째로 삼키고 싶었다. 그는 자신의 아내였던 이세벨을 통하여 나봇이 "하나님과 왕을 저주하였다"는 위증을 꾸며, 나봇을 "돌에 맞아" 죽게 하였다. 그러나 과연 아합은 "나봇의 포도원을 먹을 수 있을까?" 하나님께서 살아계시는데?(왕상 17:1). 이제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선지자 엘리야를 보내셔서, "개들이 나봇의 피를 핥은 곳에서, 개들이 네 피 곧 네 몸의 피도 핥을 것이라"고 선언하신다(왕상 21:19). 또한 "개들이 이스르엘 성 곁에서 이세벨을 먹을 것이라"고 선언하신다(23절). 즉 왕과 왕후가 나봇의 포도원을 "먹으려고" 하였지만, 오히려 개들이 "아합의 피를 핥고", "이세벨의 살을 뜯어 먹을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본 장은 다음과 같이 구성되어 있다.

        1. 여호와의 말씀이 엘리야에게 임함(17-19절; A)
        2. 엘리야가 아합에 주님의 심판을 전함(20-24절; B)
        3. 이세벨과 아합의 죄악에 대한 열왕기자의 평가(25-26절; X)
        4. 주님의 심판 선언에 대한 아합의 응답(27절; B')
        5. 여호와의 말씀이 다시 엘리야에게 임함(28-29절; A')

        이 이야기는 "여호와의 말씀이 디셉 사람 엘리야에게 임하시는 것"으로 수미일치를 이룬다(17, 28절). 이야기의 전체적인 흐름을 살펴보면, 처음 주님은 "아합에게 정죄의 말씀"을 주신다(A). 엘리야는 "주님의 심판"을 아합에게 전한다(B). 이 때 아합은 "이 모든 말씀을 듣고 극도로 자신을 비하시키는 행동"을 취한다(B'). 그러자 다시 주님의 말씀이 엘리야에게 임하셔서, "심판이 연기될 것"이라고 하신다(A'). 이 단락의 중심을 이루는 부분인 25-26절(X)은 이세벨과 아합에 대한 열왕기 저자의 평가를 담고 있다. 따라서 이 부분은 이야기의 흐름에서 벗어나 신학적인 관점을 제시해 주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1. 여호와의 말씀이 엘리야에게 임함(17-19절; A)

        "여호와의 말씀이 디셉 사람 엘리야에게 임하여 가라사대"(17절)는 선지자 이야기의 전형적인 형식이다.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역사가 새롭게 움직인다. 나봇은 죽었고 역사는 침묵하는 것 같았지만, 새로운 소리가 들려진다. 그 소리는 "디셉 사람 엘리야"에게 임한다. 저자는 마치 엘리야를 처음 소개하는 것처럼 말한다.
        주님은 먼저 엘리야에게 명령하신다(18절). "너는 일어나 내려가서 사마리아에 거하는 이스라엘 왕 아합을 만나라 그가 나봇의 포도원을 취하러 그리로 내려 갔나니"(18절)라는 주님의 명령은 바로 앞에서 이세벨이 아합에게 한 말을 상기시켜 준다(15절).
그녀는 아합에게 "일어나 취하라"(qum resh)고 말했다. 이에 대응하여 주님은 엘리야에게 "일어나 내려가라"(qum red)고 말씀하신다. 아합과 엘리야는 둘 다 "일어나라"(qum)는 명령을 받는다.
        이어서 "아합이 나봇의 포도원을 취하러 그리로 내려갔다"(yarad + yarash)고 한다. 여기에서 다시 "취하다"와 "내려가다"가 짝을 이루면서, 분주하게 움직이는 왕과 선지자의 모습을 대조해 준다.
        하나님은 아합을 "사마리아에 거하는 이스라엘 왕"이라고 부르신다. 지금 아합은 이스르엘에 있는데 "사마리아"를 언급하는 것은 앞에서 아합을 "사마리아의 왕"이라고 부르는 것을 상기시킨다(왕상 21:1). 즉, 아합은 혈통으로는 이스라엘 사람이지만, 믿음과 삶의 관점에서는 이방인이다.
        여기에서 주님은 엘리야를 통하여 아합에게 두개의 신탁을 주시며, 이것들은 한 쌍을 이룬다(19절).
        
"너는 그에게 말하여 이르기를(A)
                여호와의 말씀이(B)
                        네가 죽이고 또 빼앗았느냐 하셨다 하고(C)
        또 그에게 이르기를(A')
                여호와의 말씀이(B')  
                        개들이 나봇의 피를 핥은 곳에서  
                        개들이 네 피 곧 네 몸의 피도 핥으리라 하셨다 하라"(C')  
        
        첫 신탁의 말씀은 강력한 폭력을 뜻하는 두 개의 단어로 구성된다(ratsach, yarash). 먼저 첫 단어인 "죽이다"(ratsach)는 의도적인 살인이나 비의도적인 살인에 모두 적용되나, 여기의 문맥에서는 법적인 살인을 가리킨다. 둘째 동사는 "빼앗다"(yarash)이다. 이것도 완력으로나 법적으로 남의 것을 탈취하는 행동을 말한다. 즉, "너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 무죄한 자를 죽였느냐?"고 물으신다.
        주님의 두 번째 신탁은 아합이 죄를 범한 장소에서 같은 방식으로 심판이 이루어질 것을 말해준다. 즉, 하나님은 비밀을 드러내시는 분이시다(단 2:28-30). 그는 범죄 현장에 엘리야를 보내어 아합을 만나게 하신다(왕상 21:18). 이세벨이 꾸민 법정은 모든 합법을 가장하였지만, 선지자 엘리야가 아합의 폐부를 드러내며 참된 진실을 드러낸다.        아합은 불법과 폭력으로 얻는 이웃의 포도원을 즐길 시간이 없었다. 이세벨은 나봇의 땅에서 개들의 먹이가 될 것이다(19, 23절). 아합은 "하나님께서 사람의 비밀을 심판하시는" 종말론적인 최후의 심판날을 미리 맛보고 있다(롬 2:16; 히 4:13; 시 94:7, 9).

        2. 엘리야가 아합에  심판을 전함(20-24절; B)
        
장면이 갑자기 변하며 "아합이 엘리야에게 말한다"(20절 상). 그동안 엘리야가 어떻게 이스르엘로 내려갔으며 아합을 만나게 되었는 지에 관한 묘사가 없이 곧 바로 두 사람의 대화가 나온다.
        아합이 엘리야에게 "이 원수야, 네가 또 나를 찾아왔느냐?"라고 물으며, 엘리야가 그에게 "내가 찾아왔다"(20절)라는 대화는 너무나 흥미롭다. 그동안 아합이 엘리야를 죽이려고 온 세상에서 다 찾았는데, 이제 하나님의 선지자가 아합의 죽음을 알리기 위해 그를 찾아온다. 아합은 "나의 대적이여"(혹은 "이 원수야")라고 엘리야를 부른다. 아합은 엘리야를 영원한 적수요 운명적인 대적으로 여긴다. 사실 선지자들은 이스라엘과 유다 왕들의 죄 때문에 자주 온 몸으로 그들과 부딪혔다(삼하 23; 왕상 20:37-43; 왕하 20:16-18).  
        엘리야는 아합에게 긴 정죄의 메시지를 반복한다. "네가 스스로 팔려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으므로"(20절 하)에서 아합이 "누구에게 팔렸는지"가 분명하지 않다. 따라서 "당신은 주님 보시기에 악을 행하는 데만 자신을 팔았습니다"로 번역을 수정할 필요가 있다. 아합은 "악에 자신을 스스로 팔았다." 따라서 그는 "악을 행할 수 밖에 없다." 그는 "선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하였다(롬 7:14-20 참조).  
        이어서 엘리야는 "악에는 악으로" 갚는 보복법(lex talionis)에 따라 하나님의 정의가 아합의 집에 실현될 것을 선언한다(21-22절). (1) 아합의 집안에서 태어난 모든 남자들은 완전히 씨가 마를 것이다. (2) 아합의 집은 북쪽 이스라엘의 첫 두 왕조였던 여로보암의 집과 바아사의 집처럼 될 것이다.
        여기의 심판 말씀은 실로의 아히야가 여로보암의 왕조를 정죄한 것과(14:10-11), 하나니의 아들 예후가 바아사 왕조를 정죄한 것(16:2하-4)과 동일한 형식으로 나타난다. 이런 반복을 통해 열왕기 저자는 이스라엘 왕조들의 비극적인 패턴을 제시한다. 첫 왕조의 창설자였던 여로보암의 집은 그 아들이 계승했으나 그는 2년 만 다스린다. 둘째 왕조의 창립자인 바아사도 아들이 계승하나 2년만 다스린다. 둘째 왕조도 아들이 시해되는 것으로 끝난다. 셋째 왕조인 아합의 집안은 약간 나을 뿐이다. 아합의 아버지 오므리는 삼대를 이어가나 아합의 아들 아하시야도 오직 2년 만 다스리며(왕하 1장), 아하시야의 아들 여호람은 살해되고 오므리 왕조는 결국 끝난다(왕하 9장).
              
        3. 이세벨과 아합의 죄악에 대한 열왕기 기자의 평가(25-26절; X)
        
여기에서 엘리야가 말하는지, 열왕기서의 저자가 말하는지 분명하지 않다. 그러나 아합의 범죄는 아합 집안의 남자들의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아합의 범죄 배후에는 늘 이세벨이 있었다. 따라서 "왕의 죽음"으로 심판이 끝나지 않고, "왕후도 죽어야 한다. 그러나 그녀는 "더 처참한 심판의 형태로 죽을 것이다."
        23절은 "이세벨에게도"로 시작한다. 주님은 엘리야를 아합에게 보낸 것 같이, 이세벨에게도 보내신다(개역, "이세벨에게 대하여도"). 주님은 이세벨에게도 아합에게와 같은 정죄와 심판의 메시지를 주신다. 물론 여기에 이세벨의 죄는 구체화되지 않는다. 그러나 "개들이 이스르엘 성 곁에서 이세벨을 먹을지라"는 심판의 말씀은 아합이 받을 심판 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아합은 "개들이 그의 피를 핥는 것"으로 끝나겠지만, 이세벨은 "개들에게 먹힐 것이다."                 
"개가 왕을 먹으리라"는 말은 왕조의 멸망에 대한 공식화된 선언이다. "여로보암에게 속한 자가 성에서 죽은즉 개가 먹고 들에서 죽은즉 공중의 새가 먹으리니 이는 여호와가 말하였음이니라 하셨나니"(왕상 14:11). "바아사에게 속한 자가 성읍에서 죽은즉 개가 먹고 들에서 죽은즉 공중의 새가 먹으리라 하셨더라"(왕상16:31, 33). 아합에게 주신 주님의 말씀은 간접적으로 실현된다 "그 병거를 사마리아 못에 씻으매 개들이 그 피를 핥았으니 여호와의 하신 말씀과 같이 되었더라 "(왕상 22:38). 그러나 이세벨에 대한 심판은 문자 그대로 이루어진다(왕하 9:10, 36).
        갑자기 이야기의 흐름이 끊어지면서, 아합과 이세벨에 대한 평가가 나타난다(25-26절). 즉 저자는 회상적인 어조로 아합의 통치에 대해 평가를 내리면서 독자에게 직접 말하고 있다. 그는 여기에서 "~과 같이"라는 말을 두 번 사용한다. 역사상 "아합과 같이 악에게 스스로 팔린 자"는 없었다. 그는 "아모리 사람의 모든 행한 것 같이 우상에게 복종하여 가증하게 행했다."
        이와 같이 아합에 대한 열왕기 저자의 태도는 거의 절대적으로 부정적이다. 아합은 지도자로서 죄를 사소하게 생각했으며, 자기 앞에 있는 모든 왕보다 더 악하였다(왕상 16:31, 33). 그는 가장 악한 형태로 행동하며 자신을 악에게 팔았다(왕상 21:20, 25). 바울은 이것이 죄인의 참된 모습이라고 한다. "우리가 율법은 신령한 줄 알거니와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 팔렸도다"(롬 7:14).
        또한 아합의 죄는 "그 아내 이세벨에게 충동되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충동"은 속임과 잘못된 경향을 말한다. 이세벨이 아합에게 준 잘못된 충동은 우상숭배였다. 이것 때문에 아합은 결국 나봇을 살해하는 데까지 나아간다. 우리에게도 이세벨의 충동이 있다. 죄는 충동질이 없이 행해지지 않는다. 그 충동은 외부적인 것만이 아니다. 우리 속에 충동을 원하고, 충동을 즐기는 성향이 있다.
         열왕기 저자는 아합의 죄를 "우상에게 복종하였다"고 말한다. 여기에서 "우상"(gillulim)은
"변"(dung)을 뜻하는 단어(galal)에서 나온 외설적인 용어이다. 왕상 14:10에서 이 단어는 여로보암에게 적용된다("거름"으로 번역됨). 우상은 배설물이나 거름처럼 무가치한 것이며 추한 것이다. 이리하여 아합은 "심히 가증하게 행하였더라"고 한다. 이 표현은 극악한 종교적 과실이나 윤리적 잘못을 말하는 전문 용어이다. 아합의 "우상숭배"와 "무죄한 나봇의 피를 흘린 폭력" 사이에는 밀접한 연관성이 있다. 왜냐하면, 우상은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진정한 가치를 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쫓아내신 아모리 사람"에서 "쫓아내다"가 흥미롭다. 아합은 나봇의 포도원을 "빼앗았다"(19절). 그러나 이제 아합은 "쫓겨나간다." 마치 아합의 실락원을 보는 것 같다. 그는 남의 땅을 차지하고 싶었지만, 오히려 자신이 쫓겨 나간다.

        4. 심판 선언에 대한 아합의 응답(27절; B')

 "아합이 이 모든 말씀을 들을 때에 그 옷을 찢고 굵은 베로 몸을 동이고 금식하고 굵은 베에 누우며 행보도 천천히 한지라"(27절). 옛날 선지자 나단이 다윗에게 하나님의 심판을 전한 것 같이, 여기에서는 엘리야가 아합을 찾아가 하나님의 심판을 전한다. 그리고 그 때, 다윗이 하나님 앞에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참으로 깊은 회개의 시간을 가진 것 같이, 죄인의 괴수 아합도 여기에서 회개한다. 그러나 아합의 회개는 얼마나 진실한 것이었을까?
        "아합이 이 모든 말씀을 들을 때에"는 "듣자 마자"로 번역하는 것이 더 좋다(15, 16절을 시작하는 단어와 동일하다). 아합이 이세벨의 말을 듣자 말자 행동을 취한 것처럼, 여기에서는 엘리야의 말을 듣자 마자 반응을 보인다. 즉, 아합은 충동적인 사람이다.
        아합은 여러가지 충동적인 행동을 취한다. "옷을 찢는 것"은 고대 이스라엘에서 죽음 앞에서 슬픔을 표현하는 관습이었다. "굵은 베로 몸을 동이는" 행동 역시 애곡하는 모습이다. "굵은 베"와 "살"(피부)이 함께 나타나는 이유는 아주 거친 천으로 몸을 불편하게 함을 강조해 준다. 아합은 걸음걸이조차 천천히 한다.
        어쨌던 아합은 하나님의 말씀에 응답하였다. "죄인의 괴수" 아합이 스스로 낮추고 애통하였다. 아합 같은 인간은 결코 자신을 낮출 수 없었다. 그러나 스스로 겸비해진다. 그러자 우리의 모든 예상을 뒤엎고 하나님은 아합의 회개를 기뻐하신다. 이 회개는 그에게 선포된 죽음의 심판을 앞서고 있기 때문이다(왕상 21:28). 에스겔의 말씀은 아합에게 적절하다.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어찌 악인의 죽는 것을 조금인들 기뻐하랴 그가 돌이켜 그 길에서 떠나서 사는 것을 어찌 기뻐하지 아니하겠느냐"(겔18:23).  
        "주 여호와의 말씀에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나는 악인의 죽는 것을 기뻐하지 아니하고 악인이 그 길에서 돌이켜 떠나서 사는 것을 기뻐하노라 이스라엘 족속아 돌이키고 돌이키라 너희 악한 길에서 떠나라 어찌 죽고자 하느냐 하셨다 하라"(33:11).
        하나님께서는 우리도 아합처럼 회개하고 애통하길 원하신다. 회개할 것이 없는 아흔 아홉 명보다 한 명이 회개할 때 천국에 더 큰 기쁨이 있다(눅 15:7-10).

        5. 여호와의 말씀이 다시 엘리야에게 임함(28-29절; A')

        아합의 갑작스런 회개는 이야기의 흐름을 바꾸어 놓았다. 그동안 우리는 아합의 죄와 그가 받을 심판에 대해 들었는 데, 죄인이 회개하므로 하나님의 공의는 어느 정도 만족되었으며, 어떤 전환이 이루어질 수 밖에 없다. 왕은 애통하므로 하나님은 자비를 베푸실 수 밖에 없다.
        이 때, "여호와의 말씀이 디셉 사람 엘리야에게 임하신다." 주님은 아합의 회개를 사소하거나 진실하지 못한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으신다. 그렇지만, 아합의 악은 너무나 크기 때문에 회개로 완전히 해소될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회개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심판은 지체되며, 그의 왕조는 한 세대를 더 이어나갈 수 있었다.
        그렇지만 왜 하나님은 엘리야에게, "너는 아합이 내 앞에서 겸손해진 것을 보았느냐?"라고 물으시는가? 물론 하나님은 아합의 겸손함을 사랑하시나, "그가 내 앞에서 겸손해진 것 때문에"를 두 번이나 말씀하시는 데는 이유가 무엇일까? 물론 주님은 아합의 회개를 기뻐하셨다. 그러나 주님은 아합의 회개를 통하여 엘리야에게 교훈을 주고 있는 것 같다. 죄인에게 심판을 선언했는 데, 죄인이 회개하여 심판이 철회되거나 연장되는 것은 선지자들이 제일 싫어하는 사역의 구도였다. 이후에 요나는 니느웨 사람들이 회개하자 마자 주님께서 자신의 심판을 철회하시자, 스스로 죽겠다고 덤벼들었다. 선지자들은 주님의 자비가 바다처럼, 강처럼 넓은 것을 배워가야 했다. 또한 그들은 끝까지 "겸손함"을 배워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