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열왕기상(구속사)

열왕기상21장,생명으로 바꾼 언약의 사람

호리홀리 2015. 4. 9. 15:15

1.아합의 탐욕(1-4)



아합과 나봇의 이야기는 어느 날 아합 왕이 나봇을 찾아가는 것으로 시작한다. 이스라엘의 왕이 행차하여 일개 평민을  찾아가 만나고 있다. 나봇 입장에서는 황공한 방문이었다. 아합이 누구인가? 아합은 아람 왕 벤하닷을 두 번이나 물리친 구국 영웅이었다(왕상 20장). 나봇을 찾아 온 아합은 한 가지 그럴듯한 제안을 한다. "너의 포도원을 나에게 줄 수 있겠느냐? 그 대신에 나는 너에게 이보다 더 아름다운 포도원을 주겠다. 혹은 너의 포도원 값을 돈으로 보상해 줄 수도 있다". 아합의 제안은 대단히 공평하고 너그럽기까지 하다. 무엇보다도, 왕이 일개 농부에게 직접 찾아와 미소 지으며 거래를 요청하고 있다.

나봇으로 볼 때 이것은 너무나 좋은 거래였다. 아합이 "이스르엘" 평원에 자신의 왕궁을 확장하려고 하자 주위의 땅 값은 천정부지로 올랐다. . 나봇은 현재 포도원 보다 훨씬  더 좋은 것을 가질 수 있었고, 높은 가격을 요구할 수도 있었다. 또한 자기 자신과 가족을 위해 왕의 총애를 얻을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누가 이런 거래를 싫어할까? 그는 얻을 것은 너무 많았고, 잃을 것은 별로 없었다. 그는 마땅히 뛸 듯이 기뻐해야 했다. 그러나 나봇은 너무나 단호한 거절을 하고 있다. "나봇이 아합에게 말하되 내 열조의 유업을 왕에게 주기를 여호와께서 금하실지로다"(3절). 이것은 <표준새번역>에서는 "제가 조상의 유산을 임금님께 드리는 일은, 주께서 금하시는 불경한 일입니다"로 번역한다. <공동번역>은 어조가 좀 더 강하다. "선조들에게서 물려받은 이 포도원을 임금님께 드릴 수는 없습니다. 천벌을 받을 짓입니다." 원래의 구문에 의하면, "여호와께서 금하실지로다"로 문장이 시작된다.  

나봇의 대답을 다시 한번  보자. 그는 여기에서 두 가지를 말하고 있다.

(1) 이 거래를 "여호와께서 금하신다"라고 말한다. 이것은 맹세의 형식이다. "결코 이런 일이 있을 수 없습니다"는 뜻이다. 즉 "내 목숨을 걸고 이런 일을 할 수 없다"는 뜻이다(창 44:7, 17; 수 22:29 등). 그 당시의 어법으로 볼 때 이것 보다 더 강한 부정적 표현이 있을 수 없다. 이것은 "군신 간의 윤리와 이웃 간의 체면을 넘어서, 결코 있을 수 없습니다"는 뜻이다. (2) "내 조상의 유업을 줄 수 없습니다." 즉, 이것은 경제 논리와 수익사업의 모델로 생각해서는 안 되는 것이라고 말한다. "저의 포도원은 단지 제가 투자를 잘해서 이익을 남겨 재산을 증식하는 도구가 아닙니다. 저의 조상이 물려준 땅을 파는 것은 신성모독이며, 이스라엘 사회를 형성하는 기본법을 어기는 것입니다. 저의 개인적인 선호도를 떠나 이런 거래를 할 수가 없습니다." 그는 왕의 "청원"을 단호하게 거절하고 있다.

왜 나봇이 왕의 부탁과 제안을 거절했을까? 고대사회에서 왕의 청(부탁)을 거절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스라엘에서의 땅의 의미를 알 필요가 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들에게 땅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하나님이 주실 기업의 땅을 향하여 나아갔다고 말한다(히 11:8).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이집트에서 구속하실 때, 그들을 종살이에서 이끌어냈을 뿐 아니라(창 15:14, 16), 영원히 먹고 살 수 있는 터전과 기업까지 함께 주셨다. 그것은 약속의 땅이었다(창 15:8). 구원이란 단지 바로의 권세 아래에서 종살이 하는 삶에서 벗어나는 것 뿐이 아니라, 현실과 미래를 위한 삶과 자유의 대책까지 마련하는 것이다. 마치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죄에서 사함받고 하나님의 아들이 될 뿐 아니라, 부활과 새 하늘과 새 땅까지도 기업으로 약속을 받는 것과 같다.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 "땅"이란 단순한 소유물(부동산)이 아니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종 되었던 집에서 구원해 주신 구속의 열매를 대표해 준다.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 각 집안 별로 땅을 주셨고, 각 집안의 땅은 이후에도 그들의 후손들이 사용해야 한다. 땅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주신 은혜의 일부이다. 아무도 땅을 남에게 팔 수 없고, 또 아무도 빼앗을 수 없다. 땅은 일정기간 동안 빌려줄 수는 있지만 완전히 팔 수는 없다.

"토지를 영영히 팔지 말 것은 토지는 다 내 것 임이라 너희는 나그네요 우거하는 자로서 나와 함께 있느니라"(레 25:23). 언약이며 언약법이다.

"그리하면 이스라엘 자손의 기업이 이 지파에서 저 지파로 옮기지 않고 이스라엘 자손이 다 각기 조상 지파의 기업을 지킬 것이니라 하셨나니"(민 36:7).

따라서 아무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구속하실 때 각 지파와 가문을 따라 주신 기업을 영원히 매도할 수 없다. 땅은 하나님의 구속행동의 결과로 이스라엘에게 주어졌기 때문에, 땅은 하나님의 것이며, 이스라엘은 단지 관리자에 불과하다. 만약에 흉년이 와서 땅을 팔 수 밖에 없었다면, 이후에 친족들이 다시 구매해 줄 수 있었고, 그렇지 않을 경우에도 매 50년 째 희년이 오면 원 소유주에게 돌려줘야 한다(레 25:23-24). 나봇이 아합에게 대답할 때 그는 진실을 말했다. 나봇의 거절은 경제적인 차원이 아니라, 언약적인 근거에 따른 것이었다.

"이스르엘 사람 나봇이 아합에게 대답하여 이르기를 내 조상의 유업을 왕께 줄 수 없다 함을 인하여 아합이 근심하고 답답하여 궁으로 돌아온다"(4절). 아합은 나봇의 대답 속에 타협의 여지가 전혀 없는 것을 느끼고 심한 좌절감과 모욕감을 느낀다. 아합은 나봇의 포도원을 너무나 갖고 싶었다. 오죽하면, 자신이 직접 나봇의 포도원까지 가서 말했겠는가? 그러나 단칼에 거절 당하자 분노하고 좌절한다.

아합은 나봇의 말을 곱씹으면서 집으로 돌아간다. 그러나 그의 마음 속에 맴돌고 있는 나봇의 말은 나봇이 원래 말한 것과 약간 다르다. "나는 내 조상의 유업을 당신에게 줄 수 없습니다"(4절). 여기에는 미묘한 변화가 있다. 아합은 그가 제안한 매매가 하나님의 율법으로 금지된 것이라는 점을 깨닫고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일개 평신도가 "내가 당신에게 줄 수 없다"는 점만 기억한다. 그는 종교적이고 법적인 차원 보다 개인적이고 감정적인 차원을 되씹고 있다.



2.  이세벨의 음모(4 -7절)



나봇의 거절에 아합은 깊이 분노하며 심한 우울증에 빠진다. "아합이 근심하고 답답하여 궁으로 돌아와서 침상에 누워 얼굴을 돌이키고 식사를 아니하니"(4절)에서 "얼굴을 돌이키고"는 절망감을 표현해 준다(왕하 20:2). 이것은 새 번역에서 "누워 이불을 얼굴까지 뒤집어 쓰고"로 번역된다(<공동>).

아합은 화가나 먹는 것도 거부한다. 마치 삐친 아이와 같다. 그는 아름다운 집과 멋있는 수레와 품위 있는 옷과 맛있는 식사, 모든 것을 최고급으로 누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인격은 자라지 않은 아이 같다. 여기에서 "근심하다"(sar)는 "완고하다, 원망하다, 의기소침하다"는 뜻이다. "답답하다"(za'ep)는 속에 분이 끓고 있는 모습이다(아람어, "폭풍"). 삐친 왕의 모습이 보기에도 딱하다.  

이 때 이세벨이 등장한다. 그의 아내 이세벨이 들어 와서 물었다. "무슨 일로 이렇게 상심이 되시어 음식까지 물리치십니까?"(5절, <공동>).  "Why are you so depressed?"(NRSV) 그녀는 아합을 어루만지며 위로해 준다.

"왕이 이르되 내가 이스르엘 사람 나봇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네 포도원을 내게 주되 돈으로 바꾸거나 만일 네가 좋아하면 내가 그 대신에 포도원을 네게 주리라 한즉 저가 대답하기를 내가 내 포도원을 네게 주지 않겠노라 함을 인함이로라"(6절).

여기에서 아합은 자신의 제안과 나봇의 대답을 제시하고 있다. 본문을 살펴보면 아합은 여러 점에서 원래 나봇의 말을 바꾸고 있다.

(1) 그는 왜 자신이 나봇의 포도원을 갖고 싶어했는 지 말하지 않는다.

(2) 그는 돈을 주겠다는 제안을 포도원을 대신 주겠다는 말 앞에 둔다.

(3) 그는 나봇의 포도원 보다 더 "좋은 것"으로 주겠다는 제안도 빠뜨린다.

아마 아합은 나봇에게는 달콤하게 말했지만, 실은 적당한 값을 주고 차지하고 싶었던 것 같다. 어쨌든 그는 이세벨에게 자신의 제안은 합리적이었는데 나봇은 완고하게 거절한 사람으로 비추고 있다. 말이 한마디 달라질 때 얼마나 큰 변화가 오는가?

(4) 그는 "내 조상의 기업을 왕에게 주기를 여호와께서 금하실찌로다"란 핵심적인 말을 빠뜨리고 있다. 그 대신에 "내가 당신에게 내 포도원을 팔지 않을 것입니다"라고만 전한다. 나봇의 말과 아합의 말은 하늘과 땅의 차이처럼 의미가 다르다. 아합은 나봇이 말한 종교적, 법적, 윤리적 이유를 전혀 제시하지 않는다. "그 아내 이세벨이 저에게 이르되 왕이 이제 이스라엘 나라를 다스리시나이까 일어나 식사를 하시고 마음을 즐겁게 하소서 내가 이스르엘 사람 나봇의 포도원을 왕께 드리리이다 하고"(7절). "왕이 이제 이스라엘 나라를 다스리시나이까"라는 이세벨의 질문은 강한 수사 의문이다.  누가 이스라엘의 왕입니까? 나봇입니까, 당신입니까? 도대체 당신은 무엇하고 있는가? 어떻게 이스라엘의 대왕이 한낱 평민에게 거절받고 상처받고 살 수 있는가?  

이세벨이 아합에게 한 말, "내가 이스르엘 사람 나봇의 포도원을 왕께 드리리이다"는 풍자이다(7절 하). 그동안 아합과 나봇 사이에는 일인칭과 이인칭의 대화가 오고 갔다. "내게 너의 포도원을 다오"(2절 중), "내가 주는 것을 여호와께서 금하십니다"(3절), "내가 당신에게 줄 수 없습니다"(4절), "내가 내 포도원을 당신에게 주지 않겠다"(6절)라는 대화가 나왔다. 이제 비로소 이세벨이 아합에게 "내가 그것을 당신에게 드리겠나이다"라고 말한다(7절 하). 마치 이세벨이 왕인 것 같다. 아합이 왕권을 갖고 있지만, 이세벨이 왕으로 행세한다. 아합은 그는 이상하게도 그의 아내 이세벨 앞에서는 늘 약해진다. 아합은 당대 최고의 용사였다. 그렇지만, 아내 앞에서는 늘 고양이 앞의 쥐다. 마치 우리 노래에서처럼, "그대 앞에 서면 자꾸만 작아진다." 사실 이스라엘의 왕권은 아합 보다 이세벨이 쥐고 있다. 여호와의 선지자들을 수백 명 죽인 자도 아합이 아니라 이세벨이다(왕상 18:13).  



3. 이세벨의 악행(8-10절)



이세벨은 음모를 꾸미고 편지 한 통으로 자신의 계획을 단숨에 실행한다. 그녀는 "아합의 이름으로 편지들을 쓰고 그 인을 친다." 그리고 "그 성에서 나봇과 함께 사는 장로와 귀인들에게 보낸다"(8절). 여기에서 "장로와 귀인들"은 두 그룹이라기 보다 지도자들에 대한 두 개의 다른 명칭일 것이다. 그들은 "그 성에서 나봇과 함께 사는 자들"이었다. 이들은 나봇을 돌보아야 할 언약적인 연대감과 의무를 가진 자들이었다. 이들은 이스라엘 사회의 연대성을 지키는 자들이었다.

이세벨은, "금식을 선포하고, 나봇을 백성 가운데 높이 앉게 하시오"라고 편지를 보내었다(9절). 여기에서 "금식을 선포하는" 일은 전쟁이나 기근이나 재앙이 임했을 때 온 공동체가 함께 회개하기 위해 모이는 종교적인 행사를 뜻한다. 이것은 거국적인 사건이 있을 때 왕이나 제사장이 시행한다(욜 1:14; 2:15). 그 편지에 따르면 "나봇을 백성 가운데 높이 앉히라"고 한다(9절 하). 편지를 처음 받은 사람들은 어리둥절하였을 것이다. 왜 갑자기 나봇을 이렇게 높이는가? 그러나 그것이 죽음의 자리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세벨은 두 "비류"를 준비시키라고 한다("무뢰배" <공동>, "건달" <표준>, "불량자" <개역개정>). 원어로 이들은 "음부의 자식들"이다. 이세벨은 "비류 두 사람을 그 앞에 마주 앉히라"고 말한다. 여기에서 "마주"(neged)라는 전치사는 강한 "적대적 성격"을 지니며 주로 "법적인 맥락"에서 치명적인 증거를 제시하는 상황에서 나타난다.  

"그에게 대하여 증거하기를 '네가 하나님과 왕을 저주하였다' 하게 하고 곧 저를 끌고 나가서 돌로 쳐 죽이라"고 멸한다(11절). 이세벨은 모든 무대를 준비하게 하고 나봇을 고발하게 하고 죄를 확증하고, 구체적인 판결과 형의 집행까지 빠뜨림 없이 제시한다. 이세벨의 편지에는 두 가지 사항이 특징적이다. (1) 그녀는 합법성을 보전하려고 한다. 이것을 위해 두 비류를 명시한다. 이스라엘 법에는 사형에 처하는 경우 두 증인 이상을 요구하고 있다(신 17:6). (2) 그녀는 나봇의 범죄를 가장 심각한 것으로 만든다. "하나님의 이름을 모독하는 것"은 목숨을 잃을 중죄이다(레 24:10-23). "왕을 저주한 것"도 하나님을 모독한 것에 버금간다(출 22:28). 이세벨은 아합이 생각한 것 보다 이스라엘 법을 훨씬 잘 알고 있었다. 동일한 고발이 예수께서 심문 당할 때 거짓 증인에 의해 제시된다(마 26:59-66; 막 14:55-64).



4. 이세벨의 음모가 성공함(11-14절)



"그 성 사람 곧 그 성에 사는 장로와 귀인들이 이세벨의 분부 곧 저가 자기들에게 보낸 편지에 쓴 대로 하여"(11절)는 이세벨의 음모가 성공적이었음을 놀랍게 말해 준다. 이세벨과 함께 음모를 꾸미는 자들은 "그의 성" 출신들이다. 외풍 밖에 내풍이 있었다. 그들은 나봇의 이웃들이었고, 이세벨의 명을 정확하게 시행하고 있다. 장로들과 귀인들도 이세벨에게 극도의 충성을 바치며, 서로 충성심 경쟁을 하고 있다.

"금식을 선포하고 나봇을 백성 가운데 높이 앉히매"(12절)는 앞에 있는 이세벨의 편지 내용과 모든 점에서 동일하다. 철저하게 그녀의 명을 시행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또한 금식까지 선포하는 외식을 한다. 이스라엘의 장로들과 귀인들은 너무나 무책임한 재판을 한다. 이들은 이세벨의 주구가 되었다. 그만큼 이 당시의 믿음이 형식적이 되었음을 말해준다. 껍데기만 여호와를 믿고 속으로는 세상적인 명예와 이익만을 추구하는 시대였다.

"때에 비류 두 사람이 들어와서 그 앞에 앉고 백성 앞에서 나봇에게 대하여 증거를 지어 이르기를 나봇이 하나님과 왕을 저주하였다 하매 무리가 저를 성 밖으로 끌고 나가서 돌로 쳐 죽이고"(13절)에는 변화가 생긴다. 여기에서 우리말 성경번역은 마치 백성들이 나봇을 죽인 것처럼 말하고 있지만, "무리"(원어, '그들')는 "두 비류"를 가리킨다. 즉, 비류 두 사람이 "백성들 앞에서" 나봇을 고발하였고, "그들이 돌로 그를 쳐죽였다". 이것은 히브리 법에 일치하는 의식이었다(신 17:7).

여기에서 "돌로 쳐죽이는 모습"은 끔직하다. 선한 농부 나봇의 피가 성문에 튄다. 백성들이 돌을 던지지 않았다. 비류들이 던졌다. 그들은 전문적으로 살인을 하는 자들이다. 냉혹하고 잔인하게 의인을 죽이고도 당당한 자들이다. 너무나 철저하고 조직적이며, 구조적인 죄를 합법을 가장하여 저지르는 자들이다.

이 비류들은 "이세벨에게 나봇이 돌에 맞아 죽었나이다"고 "통보한다"(14절). 왜 장로들이 보고하지 않고 이들이 하는가? 또 원래 편지는 "아합의 이름"으로 쓰여졌는데 왜 이세벨에게 보고하는가? 아마 이들은 이세벨의 밀사들이었을 것이다. 단순한 비류들 같지 않다. 이들은 이세벨과 아주 가까운 사이이다. 그들은 비밀 첩보원들이었다. 아마 바알 선지자들이었을 것이다. 따라서 아무런 양심의 가책도 못 느꼈을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비류들"은 저자의 용어일 것이다. 마치 명성황후를 시해한 일본의 자객들과 같다. 이들은 당대 최고의 사무라이들이었고 법률가들이었다. 이들은 왕궁에서 직접 관리하는 자들이었다. 이세벨이 이들을 "비류들"이라고 말한 것은 이들에 대한 풍자이다.



5. 이세벨이 아합에게 보고함(15절)



이세벨은 아합에게 자신이 약속을 지켰다고 말한다. "그 이스르엘 사람 나봇이 돈으로 바꾸어 주기를 싫어하던 포도원을 취하소서 나봇이 살아 있지 아니하고 죽었나이다"(15절)는 이세벨의 시각을 보여준다. 이세벨은 아합이 나봇의 포도원을 취할 수 있는 근거로서 "나봇이 살아 있지 아니하고 죽었나이다"라고 말한다. 아마 왕에게 범죄한 자의 재산은 왕실에서 취할 수 있었다는 것이 법적 근거가 되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여기에서 "침묵되고 있는 점"을 보라. 이세벨은 나봇이 어떻게 죽게 되었는지에 대해 아합에게 말하지 않는다. 단지 죽었다고만 말한다. 아합도 이세벨에게 묻지 않는다. 다시 한번 아합의 수동성이 강조된다. 혹은 아합은 이세벨이 한 일을 다 알고 있으면서도, 자신이 모르고 있는듯 가장할 수 있다.



6. 아합이 나봇의 포도원을 취함(16절)



"아합이 나봇의 죽었다 함을 듣고 곧 일어나 이스르엘 사람 나봇의 포도원을 취하러 그리로 내려 갔더라"(16절)는 15절과 같은 말로 시작한다. 이세벨은 나봇이 "돌에 맞아 죽었다"는 것을 들었으나, 아합은 나봇이 죽었다는 이야기만 듣는다. 다시 한번 아합의 무지를 드러낸다. 이 무지도 의도적일 수 있다. 아합은 이세벨이 하는 말을 너무나 잘 듣는다. "가라" 하면 가고, "취하라" 하면 취한다. 과연 아합이 나봇의 포도원을 취할 수 있을까? 이후의 이야기를 보면, 하나님께서 선지자 엘리야를 보내셔서 아합과 이세벨과 그들의 집에 대해 심판을 선언하게 하신다. 즉, 그의 왕조는 끝날 것이다.



7.순교자 나봇

 


우리는 나봇의 포도원 이야기를 보면서, 나봇은 정말 올바른 선택을 한 것인가?에 대해 의문을 던지게 된다. 그가 조상의 포도원을 지키기 위해 왕의 제안을 거절할 때 이런 위기까지도 고려하였을까? 조상의 포도원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잃어도 좋은가? 왜 그는 더 큰 재물을 모으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을 선택하지 않았을까? 그는 어리석은 사람이 아니었는가?
그러나 나봇의 포도원은 구약의 믿음에 있어서 특별한 자리를 차지한다. 솔로몬의 등극으로부터 예루살렘의 멸망까지 이스라엘의 역사를 신앙의 관점에서 기술하는 열왕기 기자는 나봇 이야기를 한 장에 걸쳐 다룬다. 그리고 바로 나봇의 이야기는 아합 왕조가 무너지는 근거가 된다. 아합 왕조는 엘리야가 바알 선지자 수 백명을 갈멜산에서 죽인 후에도 무너지지 않았다. 한 의인의 죽음이 왕조의 멸망의 근거가 된다. 고대 사회에서 왕이 평민의 포도원 하나 빼앗는 것이 뭐 그렇게 딴지일보에 나올 가십거리가 되며, 역사적인 기록에 남을 정도가 될까?

그렇지만 이 이야기는 아합과 이세벨의 악함을 증거하기 보다 나봇의 의와 믿음을 증거해 준다. 이 이야기에서 아합이 아니라 나봇이 주인공이다. 나봇은 구약에서 가장 악한 왕 아합의 제안을 거스리면서도 이스라엘의 법과 종교적 기초를 증거해 준 자이다. 그는 진정한 언약백성이며 하나님의 참된 백성이요 진실한 종이다. 그는 구약의 순교자 중 한 사람이다. 언약을 지키기위해 희생제물이 된 그는 참으로 남은 자이다.

나봇에게 있어서 포도원이란 단지 평수나 가격으로 측정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단순한 부동산이 아니었다. 그것은 그가 받은 구원의 선물이요, 언약적축복이었다.. 그의 포도원이 버려지거나 황폐하게 되는 것은 그가 하나님 앞에 냉랭하고 영적으로 식었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었다. 포도원에 열매가 가득한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뜨겁게 타오르고 있다는 것을 증거해 주는 것이었다. 포도원은 그와 하나님과의 만남과 관계가 이루어지는 삶의 공간이었다. 이것은 그가 예배드리는 "성전" 만큼 중요한 것이었고, 그가 받은 구원의 확실한 징표요 열매였다. "나봇의 포도원"은 바로 "믿는 자에게 주신 땅에서의 기업"이며, "영원한 기업"을 상징해 준다.

신약에도 기업의 이야기가 많다. 신약은 이스라엘의 경험을 그리스도께서 교회에 주시는 구속을 반영하는 것으로 사용한다. 예수께서는 죄의 권세에서 우리를 구속하셨다. 그는 사단의 권세와 죄에 종노릇하는 데서 우리를 구속하셨다(히 2:14-15). 그러나 그리스도가 주시는 구속은 단지 종살이에서의 자유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구속의 열매로 기업을 주시는 것을 포함한다. 신약은 구약 보다 훨씬 뚜렷하고 좋은 기업을 약속하고 있다.

신약은 우리에게  영생(마 19:29)과  창세로부터 우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마 25:34; 벧전 1:4-5 상)를 약속하고 있다. 구약에서는 모세의 중보로 이스라엘과 하나님이 언약을 맺고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며 약속의 땅을 기업을 얻었다. 신약에서는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중보자가 되신다(히 9:15). 또한 성령께서 우리 기업의 보증이 되신다(엡 1:14). 또한 우리는 "오직 믿음, 오직 은혜"로 기업을 얻는다(갈 3:18; 롬 4:13).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를 든든히 세워 기업을 얻게 하실 것이다(행 20: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