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요한계시록

요한계시록1:1~4,요한계시록의 신론

호리홀리 2015. 7. 2. 13:19

1:4-7
요한은 일곱 교회에 편지하노니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시고 장차 오실 이와 그 보좌 앞에 일곱 영과 또 충성된 증인으로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시고 땅의 임금들의 머리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기를 원하노라 우리를 사랑하사 그의 피로 우리의 죄에서 우리를 해방하시고 그 아버지 하나님을 위하여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신 그에게 영광과 능력이 세세토록 있기를 원하노라

1>알파와 오메가
the first and last, the beginning and ending과 같은 의미로서 이름이 7번(참고/ 7은 완전한 숫자를 의미) 기록되어 있다.(1:3, 2:8, 14:13, 16:15, 19:9, 21:6, 22:13) /처움과 나중'이란 말의 용도는 사44:6, 48:12, 41:4을 참조해 볼 때 창조자로서의 절대 주권자 이심을 강조할 때 사용되었음을 보게 된다.
우상숭배에 대항해서, 거짓신들에 대항해서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강조할 때 사용한 것이다.
천지창조의 처음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루어 졌다. 이제 마지막 때의 재창조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루어지게 된다(계21:6절/"이루었도다")

2>계시고, 계셨고, 오실 이( one who is, who was and who is coming)
이 이름은 출3:14절("나는 스스로 있는 자")에서 나온 이름을 발전시킨 것으로 자존하신 하나님, 역사의 주인, 세상의 심판자 그리고 동시에 구원자이심을 설명하는 이름이다.

3> 전능자(the Lord God Almight)
이 이름 역시 계시록에 7번(1:8, 4:8, 11:17, 15:3, 16:14, 19:15, 21:22) 등장한다. 이는 "만군의 야훼"란 말의 번역으로 하나님께서 만유위에 군림하시는 막강한 힘을 소유하셨고, 그것으로 적대세력을 쳐 부시는 분이심을 강조하는 이름이다.

4> 보좌에 앉으신 이
이 이름 역시 7회 등장한다.(4:9, 5:1, 5:7, 5:13, 6:16, 7:15, 21:5)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상징하는 말로서 보좌를 하나님의 이름으로 대용해서 사용한 것이다.

4장에서는 주로 보좌에 앉아 계신 하나님을 일컫고 있고, 5장에서는 그 보좌에 같이 앉아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명명하고 있다.
이미 4-5장에서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는 하늘의 보좌에 앉아 계시고, 이미 그의 주권이 가득했음을 강조하고 계신다. 이것은 하늘의 실재이다. 그러나 아직까지 땅에서는 로마 황제가 주인으로 주장하고 있다. 이제 하늘의 실재가 곧 땅의 모든 것을 다스리시며, 결국에는 땅의 거짓 실재들은 멸망당하고 하나님의 역사가 온 땅을 지배하는 시기가 도래할 것을 요한이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이름에서 보는  특징
1> 1:4절 이하의 이름이 요한계시록의 결론 부분이라 할 수 있는 21:6절에서 다시 한번 등장하는데 재미있는 특징은 결론 부분에서는 "계시고, 계셨고, 오실 이"라는 이름은 다시 쓰이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계시록의 결론 부분에서는 이미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셨기 때문이다.

2>하나님의 이름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짝을 이루고 있다는 점이다.
. 1:8절(주 하나님이 가라사대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과 1:17절(죽었다가 산 자가 "나
는 처음이요 나중이니...)이 짝을 이루고 있다.
. 21:6절(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나는 저의 하나님이 되고)과 22:13절(나는 알파와 오
메가요...)와 짝을 이루고 있다.
이런 점에 대해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이름을 가진 분"으로 설명했
다. 이런 차원에서는 바울의 신학과 매우 유사함을 볼 수있다.

3. 보좌에 앉으신 이와 그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4장과 5장을 중심으로)
1>계시록 4-5장이 다른 묵시문학 일테면 겔1장이나 사6장에 비해 특이한 점
에스겔이나, 이사야는 보좌에 하나님께서 앉아계심을 주로 기사와 했으나 계시록에서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보좌에 같이 앉아 계시는 것으로 기록했다. 이는 점진적인 계시에 의한 하나님에 대한 더 풍부한 이해및 해석이다.

2>4:3절에 나타난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의 모습
보좌에 앉으신 이의 모양이 벽옥과 홍보석같고 또 무지개가 있어 보좌에 둘렸는데 그 모양이 녹보석 같더라 이 모습은 겔1:이나 단7장에 나오는 하나님의 모습에 비교해서 볼 때 매우 간단하다. 구약에서의 표현은 하나님을 인간의 모습으로 표현하다 보니까 여러가지 수식어로 사용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인간처럼 인간의 수준으로만 표현하면 하나님과 인간의 구분이 안갈테니까...

그러나 요한계시록은 인간의 의인화 용법을 가능한 줄였다. 그리고 하나님의 모습을 보석과 보좌로 표현했다. 이것은 하나님에 대한 그림을 자제하면서 하나님의 영광의 찬란함을 의미하는 것이다. 어떤 귀한 존재에 대해서는 표현하면 할수록 그 귀중한 존재 자체는 제한 당하는 것이다.

3> 거룩하신 하나님에 대한 성도들의 자세
거룩하신 하나님에 대한 예배드림과 그를 영원히 의존하는 것이다. 이 모습이 이미 천국에서는 이루어 지고있다. 4장과 5장의 주된 내용이 바로 영광과 찬양과 경배를 하나님께 돌려 드리는 것으로 표현되고 있다. 네생물의 경배/ 이사야6장, 에스겔1:5-14를 참조하면 네생물의 실재는 스랍, 그룹들인 천사들임을 알게 된다. 네 생물은 언약궤에 새겨진 천사들의 원형이다. 24장로의 경배/ 성도들의 대표를 의미. 이렇듯이 천상에서는 이미 하나님을 향한 예배가 이미 시작되었다. 이제 그 천상의 예배가 이 땅에서 실현되어야 하는 숙제가 남아 있다. 물론 이 땅에서까지 드려지는 완성된 예배는 곧 실현될 것이다. 다음의 구절이 이를 뒷받침한다.

네 생물과 24장로들의 경배 --> 천군천사들의 참여(5:11) --> 온 세상의 참여(5:13) 천상의 예배는 지상까지 확대될 것이다. 그러나 아직 세상에서는 하나님의 주권보다는 로마의 황제가 자기 권력의 절대화를 만들고 있다. 이 절대 권력에 대항해서 죽기까지 신앙을 지킨 사람들에게는 하나님께서 주신 면류관이 씌워진다. 24장로들이 천상의 예배에서 그들이 쓰고 있던 면류관(4:10)을 하나님께 던져 드리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러나 세상의 많은 사람들은 신앙을 지키기 보다는 로마의 황제로 변장한 사단의 권세앞에 무릎을 꿇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세상에서는 사탄이 예배를 드리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접근해서는 많은 방해를 가할 것이기 때문이다.

4> 하나님께 경배하고자 하는 사람들을 방해하는 사탄의 세력들.
요한계시록의 기록 당시에 사탄은 하나님을 믿고자 하는 사람들을 방해하기 위해서 당시의 절대 군주제를 내세우고 있던 로마와 결탁했다.

계13장에 무시한 짐승이 등장한다. 로마의 포악한 정치를 의미한다. 강압적으로 하나님을 향한 신앙을 포기하게 하고 로마의 황제를 섬기게 하고자 하는 전략이다.
반면에 계17장에는 음녀가 등장한다. 경제적인 풍요와 세속적인 쾌락을 추구하도록 하여 사람들로 그것에 빠지게 하기 위함이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 '포악한 짐승'과 '달콤한 음녀'가 사실은 서로 상호 보완적이라는 것이다. 계17:3절을 보시라
곧 성령으로 나를 데리고 광야로 가니라 내가 보니 여자가 붉은 빛 짐승을 탔는데 그 짐승의 몸에 참람된 이름들이 가득하고 일곱머리와 열 뿔이 있으며 여기서 붉은 빛은 왕을 상징하는 것이요, 따라서 짐승이라 함은 정치적 폭군으로서 로마의 황제를 의미한다.
그런데 "음녀가 짐승을 탔다"는 말은 세속적인 쾌락을 이용하거나, 경제적인 풍요로움을 제공함으로서 하나님을 멀리하는 방식과 그리고 포악한 정치력으로 신앙인들을 방해하는 이 모든 것은 단 하나의 공작, 즉 사탄의 공작이라는 말씀이다.
그렇게 함으로서 다음과 같은 반응을 불러 일으키고자 한다. "로마의 능력에 불가항 력적이다"라는 생각을 불러 일으켜서 짙은 패배감을 안겨다 주며, "로마와 타협하여 살길을 마련하자"고 하는 사람들에게 경제적으로 풍요로움을 보장하며 짐승의 표를 받게 하는 것이다. 이런 결과를 얻어내기 위하여 갖는 그들의 술수가 아주 다양하고 치밀하다. 13장을 중심으로 살펴보자. 로마의 황제가 용으로 부터 권세를 받는다. 3절/ 네로의 죽음으로 로마가 붕괴된 줄 알았는데(그의 세력이 약화 된 줄 알았는데) 네로(폭군)가 다시 살아나 막강하게 재기한다는 사실이다. 여기서 말하는 네로는 바로 네로 이후의 막강한 권력을 휘둘렀던 Flavius Vespasianus를 가리킨다. 4절/ 하나님께서 받으셔야 하는 경배와 찬양을 짐승이 받고 있다.
11절/ 짐승의 주위에 몰려들어 황제 숭배를 환영하는 무리들이 많았다. "짐승에게 예배하라" "짐승의 표를 받으라"

더 나아가 16:13절을 보면, 개구리 같은 세 더러운 영이 등장한다. 이들은 거짓선지자들로서 종교적인 기능을 지녔고, 로마의 황제숭배를 조장하는 신전의 사제들을 말한다.
더군다나 17-18장에서는 음녀가 등장하여  사람들을 유혹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하나님의 심판
이제 이런 상황을 하나님께서는 과연 어떻게 처리해 나가실까?
절대 초월자로서 세상의 피조물이 절대 주권을 빼앗을 수없는 하나님!
그 하나님께서 오히려 짐승들을 심판하실 심판자로 등장하실 것이다. 그 분은 거룩하신 하나님이시다.

이미 4장에서는 하나님께서 절대 주권을 지니신 분이심이 선포되었다. 그것은 하늘의 상황이었다. 지금 잠시 동안은 그 하나님의 주권이 짐승들의 횡포로 땅에서는 실현되지 못하고 있지만, 그러나 이제 그 하늘의 상황이 이 땅에서 실현되어질 때가 오는데 그때에 하나님을 섬긴 사람들은 구원을 받게 되지만, 짐승의 경배자들은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
구원받을 하나님의 자녀들은 구원의 승리를 얻기까지 짐승의 경배자들과 싸워야 하는 고난의 세월을 보낼 수밖에 없다. 그 고난이 때로는 순교로 이어지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결국은 하늘의 실재가 땅에 이루어질 때 하늘의 보좌에 앉는 영광을 얻게 될 것이다. 반면에 짐승의 경배자들에게는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가? 드디어 하나님의 심판이 나타난다. 그 심판의 강도가 매우 무시무시하다. 심판의 확실성을 들어내기 위하여 성경은 세차례에 거쳐 확대 설명 해 나간다. 그것이 바로 세개의 series로 구성된 '일곱 인' '일곱 나팔' '일곱 대접'이야기다.

일곱째 인을 떼실 때마다, 일곱째 나팔이 울릴 때마다, 일곱째 대접이 쏟아질 때마다 재앙은 심하게 나타났다.
그런데 그때마다의 특징을 보면 그 재앙의 출처가 바로 "하늘의 보좌"라는 것이다. (일곱인/ 8:1-2 일곱째 인을 떼실 때에 하늘이 반시 동안쯤 고요하더니 내가 보매 하 나님앞에 시위한 일곱 천사가 있어... 일곱나팔/ 11:15 일곱째 천사가 나팔을 불매...하나님 앞에 자기 보좌에 앉은.. 일곱대접/ 16:17 일곱째가 그 대접을 공기 가운데 쏟으매 큰 음성이 성전에서 보좌 로부터 나서 가로되...)

이것은 계시록 4-5장의 하늘의 비밀이(뮈스테리온) 이제 땅에서도 실현되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는 것을 의미한다.

또 다른 특징은 인에서 나팔로, 나팔에서 대접으로 옮겨 갈수록 그 진노의 재앙의 더 커진다는 것이다.

인의 재앙시( 6:8절) 사람의 1/4이 멸망하게 될 것임. 나팔의 재앙시(9:18절) 사람의 13이 멸망을 당하게 될 것임. 대접의 재앙시(16:19이하) 만국의 성들이 다 무너짐. 그러나 이런 재앙시에도 어린양의 피를 믿는 자들은 반드시 제외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 경고에는 지금까지 짐승에게 경배한 사람들이라 할지라도 돌아오면 기회가 있다는 것을 강조하시므로 회개를 유도하고 있다. 이것은 계시록의 구조를 봐서도 알 수 있다. 인의 경고를 보자.

첫째 인부터 여섯째 인까지의 봉인을 떼었다.(6장)
그리고 일곱째 봉인을 떼실 때 재앙이 일어나는데 그 일곱째 인을 떼시기 전에(8장) 회개의 요청을 위한 간격을 두신다.(7장/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의 경배와 찬양... 짐승을 따르던 사람도 돌아오면 이런 자리에 참여하게 될 것이다)

나팔의 경고에서도 같은 양상이 나타난다.
8-10장에 이르기까지 여섯째 나팔이 등장한다. 이제 일곱째 나팔이 울리면 재앙이 쏟아지는데 11장에서 바로 일곱째 나팔이 울리는 것이 아니라, 두 증인의 순교어린 회개를 위한 증거가 등장한다. 회개의 기회를 다시 한번 허락하시는 오래 참으신 하나님의 모습을 보게 된다. 그러나 결국에 회개치 않을 경우 재앙은 불가피한 것이다. 


창조주이신 하나님
요한계시록의 신론은 첫째로 삼위일체적 표현으로 이루어 졌음을 지금까지 살펴보았다.
이제 14:6-7절을 중심으로 볼 때 하나님에 대한 또 다른 관점이 등장한다.
또 보니 다른 천사가 공중에 날아가는데 땅에 거하는 자들 곧 여러나라와 족속과 방언과 백성에게 전할 영원한 복음을 가졌더라 그가 큰 음성으로 가로되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라 이는 그의 심판하실 시간이 이르렀음이니 하늘과 땅과 바다와 물들의 근원을 만드신 이를 경배하라 하더라

창조주 하나님이다. 그런데 나라와 족속과 방언과 백성에게 전달될 복음이 있었다. 4가지 표현은 온 세상을 의미한다.(숫자 4/ 4방은 세상을 상징. 숫자에 대해서는 추후에 논할 것임) 그 영원한 복음이 무엇인가? 창조주이신 참 하나님을 알고 그에게 예배 하는 것! 그때 사람들에게 진전한 구원이 이루어지는 것! 바로 이것이다.

1. 처음 창조를 하신 그 하나님께서 새 창조를 이루실 것이다.
21:1절/ 새 하늘과 새땅.
이는 구원의 완성을 의미한다. 그런데 처음 창조와 다른 점이 있다. 그것은 "바다가 다시 있지 않다"는 것이다. 바다는 용이 나온 곳이다.
첫 창조 때는 바다를 얽어 매었었다. 지구를 점령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다. 따라서 Chaos는 바다가 지구를 덮치고자 하는 기회를 엿보게 하고 있다.
그러나 새 창조때는 Chaos가 나온 바다가 다시 없다. Chaos의 완전한 전멸을 의미하는 것이다.

2. 만물을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
여기에 아주 중요한 신학이 있다.
만물을 새롭게 한다는 말은 New Creation이 아니라, Renewal(갱신)시킨다는 말이다. 물론 두 가지 개념이 다 들어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 둘을 굳이 구분하자면 이렇다. 새창조/ 세상의 죄악에 대해서는 완전히 사라진 전혀 새로운 세계이다.(discontinuty) 갱신/ 피조물에 대한 하나님의 신실성을 강조.(continuty)

하나님은 이 세상이 죄악으로 가득차 있었어도 그 의 창조물을 붙들고 계셨다. 아무리 포악한 사람이 세계를 지배했어도 여전히 그의 나라를 잡고 계신다. Chaos속에서도 Cosmos가 보존된다. 그러나 하나님의 때에는 이 모든 악의 세력이 사라지고 전혀 새롭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갈 곳은 하늘인가? 땅인가? 가능성이 있는 것은 첫 창조사역이 허무하게 다 깨어지는 것은 아닐 것 이라는 것이다. Chaos의 세력이 다 사라지니까 지금의 땅의 개념은 아니라는 것만은 분명하다. 첫 창조 새 창조 갱신일 가능성에 대해서 조금 더 살펴보자.

창9:11-17
홍수가 끝나고 하나님은 노아에게 무지개를 보여 주시며 "다시 멸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다.
계시록11:18절을 음미해 보라. "...주의 이름을 경외하는 자들에게 상 주시며 또 땅을 망하게 하는 자들을 멸망시키실 때로소이다" 땅을 멸망시키는 자들(사탄의 세력들)을 멸망시킨다는 말은 땅을 멸망시키지 않고 보호하신다는 의미가 아닌가?
더 중요한 것은 땅의 실재가 일어나기 전에 하늘의 실재를 보여 주신 4-5장에서 하나님의 보좌에 무엇이 있었는가? "하나님의 보좌에 무지개가 둘러 있었다."(4:3절)
요한은 노아의 무지개 약속, 그리고 에스겔1:28절의 무지개를 천상회의에서 보았다. 이것은 노아와의 약속의 성취를 강조한 것이다.
그렇다면, 피조세계에 대해서 신실하신 하나님임을 다시 느낄 수 있다.
이사야6:3절의 천상의 모습(서로 창화하여 가로되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
의 여호와여 그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이 계시록21:3절(...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과 21:23절(그 성은 해나 달의 비췸이 쓸데 없으니...)에서 성취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