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데살로니가 후서

데살로니가후서3:6~18,종말론적 믿음

호리홀리 2015. 6. 26. 11:09

6-18절, 종말론적 믿음

[6] 형제들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명하노니 규모없이 행하고 우리에게 받은 유전대로 행하지 아니하는 모든 형제에게서 떠나라.

‘명한다’는 말은 ‘권면한다’는 말보다 강한 뜻이 있어 보인다. 주의 권면도 우리가 순종해야 하지만, 명령은 더욱 순종해야 할 것이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명하노니’라는 말씀은 이 명령이 인간 바울의 권위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의 권위로 주어지는 것임을 보인다. 바울 사도는 성령의 감동 가운데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곧 그의 권위로 명한다.

‘규모 없이’라는 원어(아탁토스)는 ‘무질서하게’라는 뜻이다. 그것은 그 다음에 언급한 대로 ‘사도들에게 받은 유전대로 행하지 아니하는 것’을 가리킨다. ‘유전’(遺傳)이라는 말(파라도시스)은 ‘전통’이라는 뜻으로 그들이 받은 교훈을 가리킨다. 그것은 교리적 내용과 윤리적 내용을 포함한다. 바울은 앞에서도 그들이 받은 교훈을 지키라고 말씀했다. 2:15, “이러므로 형제들아 굳게서서 말로나 우리 편지로 가르침을 받은 유전을 지키라.” 사도적 교훈이란 오늘날 성경 말씀을 가리킨다. 성경적 교훈을 순종치 않는 것이 규모 없이, 무질서하게 행동하는 것이다.

이렇게 규모 없이 행하는 자들은 ‘형제들’이었다. 그들은 세상 밖에 있는 자들이 아니고, 같은 신앙을 고백하는 교회 안에 있는 형제들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믿는 내용 즉 교리적, 사상적 문제에 있어서는 이상이 없는 자들이다. 단지 윤리적 행위에 있어서 불순종하고 있는 자들이다. 이들은 성경의 명백한 교훈을 순종하지 않고 무질서하게 행동을 하고 있다.

사도는 교인들에게 그러한 자들로부터 ‘떠나라’고 명령했다. ‘떠나라’는 말은 교제의 단절을 의미한다. 그것이 물론 일차적으로 교회 분립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교회가 전체적으로 배교하고 변질되는 일은 쉽게 일어나는 일이 아니다. 교회가 타락해도, 그 속에 있는 많은 진실한 신자들 때문에 그렇게 쉽게 타락하는 것이 아니고 서서히 한다. 진실한 성도들이 좀 깨어 있기만 하면 교회의 타락을 상당히 막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교회가 전체적으로 배교적일 때도 있다. 16세기 종교개혁이 있기 직전에 교회는 전체적으로 배교적이었고 진리를 붙드는 자들은 매우 소수이었다. 새 천년을 바라보는 오늘날 기독교계는 16세기 종교개혁 때와 비슷하게 전체적으로 매우 해이해져 있고, 자유주의 신학을 포용하는 넓어진 교회가 되어 있고, 다 하나님 앞에 불성실한 교회가 되어 있다.

교회 안의 어떤 형제가 잘못되었다고 해서 교회가 그 한 두 명 때문에 분리되거나 분립되어서는 안된다. 교회 헌법이 규정하듯이, 교회는 잘못을 행하는 자를 첫째로 권면, 책망하고 둘째로 성찬 교제에서 제외하고 마지막으로 제명, 출교시켜야 할 것이다. 이것이 신앙의 선배들이 성경적이라고 바로 깨닫는 교회의 권징의 순서이다. 칼빈은 권징은 교회의 힘줄이라고 말했다. 교회가 권징을 성실히 행할 때 교회는 튼튼한 교회가 될 것이다. 그러나 권징을 포기하는 교회는 기력을 잃게 될 것이다. 권징을 포기한 교회가 비록 숫적으로나 물질적으로는 여전히 부유할지 몰라도, 정신적으로, 영적으로, 신앙적으로는 힘이 없는 교회가 되고 말 것이다.

비록 그가 형제라 하더라도, 비록 그의 신앙 사상이 정통적이라 하더라도, 그의 행위에 고의적 불순종의 잘못이 있는 자들, 즉 성경의 명백한 교훈을 저버리고 무질서하게 행하는 자들에 대해, 성경은 우리에게 ‘교제를 단절하라’고 엄히 명령을 하는 것이다. 이것은 지켜도 좋고 안지켜도 좋은 권면 사항이 아니고 반드시 지켜야 할 명령이다.

 

[7-9] 어떻게 우리를 본받아야 할 것을 너희가 스스로 아나니 우리가 너희 가운데서 규모 없이 행하지 아니하며 누구에게서든지 양식을 값없이 먹지 않고 오직 수고하고 애써 주야로 일함은 너희 아무에게도 누를 끼치지 아니하려 함이니 우리에게 권리가 없는 것이 아니요 오직 스스로 너희에게 본을 주어 우리를 본받게 하려 함이니라.

원문에 본문 초두에 ‘왜냐하면’이라는 말(가르)이 있다. 바울은 이러한 엄숙한 명령의 근거 혹은 이유로 자신의 모범을 들고 있다. 그것은 양식을 값없이 먹지 않고 수고하고 주야로 일하면서 사역한 모범이었다. 우리가 아는 대로 바울은 천막을 만드는 기술자이었기 때문에 친히 그 일을 하면서 복음을 전파했다. 그는 교회의 생활비 지원을 웬만하면 받지 않으려 했다. 그것은 그가 물질적 여유가 있어서가 아니고, 연약한 교인들의 믿음에 시험을 주지 않기 위해서이었다.

바울의 모범이 목사가 세상의 일을 하고 교회의 도움을 받지 말라는 것을 가르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구약 시대에 성전의 봉사자들인 레위 사람들이 이스라엘 백성의 십일조로 생활하도록 규정하셨다. 또 레위인들은 그들이 받은 예물들 중의 십일조를 제사장들에게 드려야 했다. 십일조 헌금은 하나님이 쓰신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종들의 생활비로 쓰였다. 그것이 하나님의 법이었다. 이렇게 하나님의 종들은 성전에서 그들의 생활비를 얻도록 하신 것이었다.

신약 시대에도 복음 전파자들, 말씀의 전임(專任) 사역자들, 즉 말씀의 일꾼된 목사와 전도사들은 복음으로 말미암아 살도록 되어 있다. 고린도전서 9:14, “이와 같이 주께서도 복음 전하는 자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명하셨느니라.” 디모데전서 5:17, 18, “잘 다스리는 장로들을 배나 존경할 자로 알되 말씀과 가르치는 일을 하는 자들을 더할 것이니라. 성경에 일렀으되 곡식을 밟아 떠는 소의 입에 망을 씌우지 말라 하였고 또 일군이 그 삯을 받는 것이 마땅하다 하였느니라.”

하나님의 이치가 이러하기 때문에, 목사가 되고자 하는 자는 자존심 상하게 생각하지 말고 하나님 바라보고 일하는 것이고 교인들에게 매여 있는 종이 아니고 하나님의 종이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일하고, 또 교회는 주의 사역자들에게 생활비를 지급해야 할 것이다. 그들이 먹고 살만큼 지불하고 그들의 자녀들이 정당하게 공부할 수 있도록 지불해야 할 것이다. 그것이 원리이다.

바울의 모범은 바울이 모든 목사들이 그렇게 스스로 일하면서 생활하라고 행한 것이 아니고 그는 복음에 누를 끼치지 않으려 했다. “너희나 아무에게도 누를 끼치지 않으려 함이라.” 목사는 물질 문제 때문에 교인들에게 누를 끼쳐서는 안될 것이다. 그것을 초월하고 초연해야 된다. 하나님 앞에서 떳떳하고 당당하게 살아가야 한다. 또 고린도전서 9:12에 보면 복음에 지장이 안되게 하기 위해야 한다. 전하는 이 복음이 귀하지 물질과 복음이 비교할 수 없다. 하나님의 복음 전하는 것이 귀하고 가치있기 때문에 목사도 되고 전도사도 되고 복음 위해 사는 것이지 물질에 팔린 자라면 안되는 것이다. 주의 귀한 복음을 전하는 일을 위하여 물질 때문에 복음을 전하는데 지장을 주어서는 안된다.

 

[10] 우리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도 너희에게 명하기를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 하였더니.

일과 먹는 것이 같이 간다. 우리는 일하지 않고 먹으려고 하지 말아야 하겠다. 젊은이도 나이 드신 이도 그렇다. 나이가 드신 이들은 큰 일은 못하더라도 방이라도 닦는 시늉을 해야 며느리들 한테 인정을 받는다. 젊은 사람들도 일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말고 아무 일이든지 해야 한다. 일하는데 귀천은 없다. 무슨 일이든지 해서 성공하고 처자를 먹여 살리는 일이 떳떳한 것이다. 우리는 무슨 일이든지 하려고 해야 한다. 노동은 좋은 것이다. 게으르면 안된다. 게으르게 사는 자는 먹을 자격이 없다.

 

[11-13] 우리가 들은즉 너희 가운데 규모 없이 행하여 도무지 일하지 아니하고 일만 만드는 자들이 있다고 하니 이런 자들에게 우리가 명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권하기를 종용히 일하고 자기 양식을 먹으라. 너희는 선을 행하다가 낙심치 말라.

데살로니가 교회 안에는 무질서하게 행하면서 일하지 않고 일만 만드는 자들이 있었다. ‘일만 만드는 자들’이라는 원어(페리에르가조메노이)는 ‘남의 일 참견하기를 좋아하는 자들’이라는 뜻이다. 이 말은 자기의 일을 성실히 안하고 남의 일만 참견하기 좋아하는 자들을 가리킨다. 우리는 자기 일을 성실히 해야 한다. 남의 집도 자주 방문하지 말아야 한다. 남의 집에 쓸데 없이 자주 전화도 하지 말아야 한다.

종용히[조용히] 일하라는 말은 남의 일 참견하거나 야단스럽게 돌아 다니지 말고, 약방의 감초처럼 여기저기 자꾸 나타나지 말고 또 자기 일에 성실하게 해서 주위 사람들이 볼 때 인정 받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조용히 일하고 자기 양식을 먹으라’는 말은 자기 손으로 열심히 노동을 해서 양식을 먹으라는 말씀이다. ‘너희는 선을 행하다가 낙심치 말라’는 말은 교회 안에서 열심히 일하는 자들, 정상적으로 생활하는 자들, 성실히 사는 자들이 그렇지 못한 자들 때문에 ‘우리는 성실히 일하고 저 사람들은 놀면서 산다’고 비교하면서 낙심하지 말라는 말씀이다.

 

[14] 누가 이 편지에 한 우리 말을 순종치 아니하거든 그 사람을 지목하여 사귀지 말고 저로 하여금 부끄럽게 하라. 그러나 원수와 같이 생각지 말고 형제와 같이 권하라.

사도의 교훈, 성경의 교훈을 고의적으로 불순종하는 자에 대해서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본문은 ‘그를 지목하고 교제를 단절하고 그를 부끄럽게 하라’고 말씀했다. 그러한 태도는 미움이 아니고 사랑이다. 그와 교제하고 그를 인정하면 그가 깨닫지 못하겠지만, 그를 지목하여 교제를 끊는다면 그를 깨닫게 할 수 있을 것이다. 다수이든 소수이든 잘못된 행동을 그대로 방관하면, 온 회중의 물이 흐려지지만, 지적하고 책망하면 잘 될 것이며, 만일 그가 그 잘못을 고치지 않으면 그와의 교제를 끊고 그를 책망함으로써 그에게 회개를 촉구하고 회중의 성결성을 지키려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원수같이 생각하지 말고 형제같이 권하라고 본문은 말씀한다. ‘권한다’는 원어는 ‘충고한다, 경고한다’는 뜻이 있다.

 

[16] 주께서 친히 때마다 일마다 너희에게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주는 너희 모든 사람과 함께 하실지어다.

기원의 말씀이다. 바울 사도는 평강의 주, 곧 어떤 형편과 처지에서도 평강을 주실 수 있는 주께서 친히 때마다, 일마다 성도들에게 평강 주시기를 원하였다. ‘일마다’라는 원어(엔 판티 트로포)는 ‘모든 수단으로’ 혹은 ‘모든 상황에서’라고 번역되기도 한다. 어떤 때, 어떤 상황에서는 하나님의 평강이 없을 것 같지만, 그러나 그 때, 그 상황에서도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평강을 주실 수 있으시다. 또 바울 사도는 주께서 그들 모두와 함께 계시기를 기원하였다.

 

[17, 18] 나 바울은 친필로 문안하노니 이는 편지마다 표적이기로 이렇게 쓰노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무리에게 있을지어다.

‘편지마다 표적이기로’라는 말은 편지가 표적이라는 뜻이 아니고 ‘편지마다의 표시’라는 뜻이다. 바울은 다른 이로 하여금 편지를 쓰게 한 후에 편지 끝에 친필로 ‘바울’(파울로스)이라고 썼고 그것이 그가 쓴 편지라는 표시이었다.

 

결론적으로, 6절부터 18절까지에서 중요한 교훈은 ‘규모없이 행하는 모든 형제에게서 떠나라’는 것이다. ‘규모없이 행한다’는 말은 해석한 대로 ‘무질서하게 행하는 것,’ 곧 주께서 사도들을 통하여 주신 교훈 즉 성경적 교훈을 무시하고 고의적으로 그 말씀을 불순종하는 것을 가리킨다. 비록 그런 자들이 교리적으로는 바를지라도, 윤리적으로 문제가 있기 때문에 그런 자들에게서 떠나라고 명령한 것이다. 그러나 그가 형제이기 때문에 원수같이 여기지 말고 형제같이 여기라고 했다.

특별히 이 말씀은 오늘날 신복음주의자들에 대한 우리의 태도에 대해 교훈하는 바가 있다. 신복음주의자들은 이단을 배격하고 교제하지 말라는 성경의 명백한 교훈들을 불순종하는, 규모 없이 행하는, 무질서하게 행하는 자들이다. 오늘 기독교계는 옛날 16세기 종교개혁시대와 같이 다시 어두워진 시대, 배교적인 시대이다. 우리는 배교와 타협하는 신복음주의가 속히 지나가 버리기를 원하지만, 그것은 우리의 바램에 불과하고 신복음주의는 오늘 시대에 가장 유행하고 인기 있는 입장이 되어 있다. 그러나 그들이 비록 우리의 형제들이고 보수적 신앙을 가지고 있고, 인품에 있어서 훌륭한 점들이 많을지라도, 자유주의자들을 포용하는 그들의 잘못에 대하여 우리는 그들을 지적하고 책망해야 하고, 만일 그들이 돌이키지 않는다면, 그들로부터 떠나야 하는 것이다.

오늘 우리는 이 말씀을 이렇게 적용했지만, 또한 우리는 본문의 내용 그대로 ‘일하면서 먹어야 한다’는 교훈도 잊지 말아야 한다. 일하는 것은 귀한 것이다. 우리는 죄가 되지 않는 무슨 일이든지 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