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데살로니가 후서

데살로니가후서1:1~2,은혜와 평강

호리홀리 2015. 6. 26. 10:08

 바울과 실루아노와 디모데는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데살로니가인의 교회에 편지하노니.

‘실루아노’는 성경의 다른 곳에도 언급된 인물이며(고후 1:19; 살전 1:1; 벧전 5:12)  바울의 전도 여행의 동반자로 언급된 ‘실라’와 동일 인물이다(행 15:22). ‘디모데’는 바울의 2차 전도 여행시 더베와 루스드라에서 만난 제자로서 그 후 실라와 함께 바울의 동역자가 되었다(행 17:14; 18:5; 19:22; 20:4).

‘데살로니가 교회’는 바울의 2차 전도 여행시 설립되었다. 사도행전 17장에 보면, 바울 일행은 그 곳에서 세 안식일에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가서 성경을 가지고 강론하며 뜻을 풀어 그리스도께서 해를 받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셔야 할 것을 증명하고 예수님이 바로 그리스도이심을 증거하였다(2, 3절). 그들의 전도로 경건한 헬라인의 큰 무리와 적지 않은 귀부인들이 권함을 받고 바울과 실라를 따랐다(4절). 그것이 데살로니가 교회의 시작이었다.

바울 사도는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데살로니가인의 교회”라고 표현하였다. 그는 하나님을 ‘하나님 우리 아버지’라고 표현하였다. 예수께서도 마태복음 6장에서 하나님을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9절) 또는 ‘너희 천부(天父)’(26, 32절)라고 표현하셨다. ‘아버지’라는 말은 몇 가지의 의미를 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첫째로, 아버지는 창조자라는 의미를 가진다. 이사야 64:8, “여호와여 주는 우리 아버지시니이다. 우리는 진흙이요 주는 토기장이시니 우리는 다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이라.”

둘째로, 아버지는 구속자, 구원자라는 의미를 가진다. 신명기 32:6, “우매무지한 백성아 여호와께 이같이 보답하느냐? 그는 너를 얻으신[사신] 너의 아버지가 아니시냐?” 이사야 63:16, “주는 우리 아버지시라. 아브라함은 우리를 모르고 이스라엘은 우리를 인정치 아니할지라도 여호와여 주는 우리의 아버지시라. 상고부터 주의 이름을 우리의 구속자(救贖者)라 하셨거늘.” 야고보서 1:18, “그가 그 조물(造物) 중에 우리로 한 첫열매가 되게 하시려고 자기의 뜻을 좇아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느니라.”

셋째로, 아버지는 보호자, 양육자, 공급자라는 의미를 가진다. 마태복음 6:26, 32,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 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천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우리의’ 아버지라는 표현은 하나님과 나의 개인적 관계뿐 아니라 또한 하나님과 우리의 공동적 관계를 보인다.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은 내게만 독점적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고, 그가 만세 전에 택하신 우리 모두에게 공통적으로 주어진 것이다. 여기에 성도 상호간의 친밀한 관계성이 나타난다. 구원받은 모든 성도들은 하나님의 공통적 사랑과 구원을 받은 한 가족이며 형제들, 식구들인 것이다.

바울 사도는 예수님을 ‘주 예수 그리스도’라고 표현하였다. ‘주’라는 말은 신약성경에서 예수님께 약 667회 사용되었다고 한다. 본서신에도 22번(전통사본에는 21번) 나온다(1장에 7번, 2장에 6번[전통사본에는 5번], 3장에 9번). 여기의 ‘주’(퀴리오스)는 단순한 존칭어가 아니고 하나님께 대한 명칭이다. 구약의 ‘여호와’라는 말(예호와)은 헬라어 70인역에서 ‘주’(퀴리오스)라고 번역되었다. ‘주’라는 단어는 온 세상의 주인, 왕, 통치자, 주관자라는 뜻이다. 그것은 곧 하나님이라는 뜻이다. 예수님은 아버지께로부터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받으신 분이시며(마 28:18).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이시다(계 17:14; 19:16). 그는 하나님의 영원하신 아들이시요(요 17:5) ‘참 하나님’이시다(요일 5:20).

바울 사도는 데살로니가 교회를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데살로니가인의 교회’라고 표현하였다.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표현은, 구원이 연합의 관계임을 나타낸다. 죄는 사람들을 하나님의 생명에서 끊어지게 하였다. 죄인은 영적으로 죽었고 또 영원히 하나님과 분리되어야 한다. 죄인은 본성적으로 하나님을 멀리 피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싫어한다.

그러나 구원은 사람들을 하나님의 생명 안으로 들어가게 한다. 구원은 사람들을 하나님의 품 안으로 들어가게 한다. 그것은 하나님과의 교제를 회복시킨다. 그것은 하나님께로 가까이 나아오게 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좋아하게 만든다. 그것은 하나님의 약속 안으로 들어오게 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소망 안으로 들어오게 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기쁨 안으로, 평강 안으로, 사랑 안으로, 의 안으로 들어오게 만든다. 이것이 구원받은 성도들의 정상적 상태이다. 구원받은 성도들은 하나님을 인정하고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을 꼭 붙잡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순종하고 섬기고자 한다.

그러므로 ‘안에 있느냐, 밖에 있느냐?’가 큰 문제이며 큰 차이점이다.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 밖에는 구원이 없고, 영원한 생명이 없고, 의가 없고, 참 기쁨과 평강이 없고, 소망이 없고, 이 세상에서의 보장도 없다. 그러나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는 이런 것들이 다 있는 것이다. 교회는 구원받은 성도들의 모임으로서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다. 이것이 교회의 놀라운 행복이며 특권이다. 그러므로 참된 교회는 존귀하며 행복하다. 왜냐하면 교회는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고 그 안에서 모든 충만한 은혜를 누리기 때문이다.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바울 서신에서 거의 매번 나오는 인사말이지만, 이 인사말은 의미심장한 것이다. 바울 사도는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있기를 기원하였다. ‘은혜’는 값없이 주시는 호의와 사랑을 가리킨다. 우리에게는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필요하다. 우리는 죄사함의 은혜, 중생(重生)과 칭의(稱義)의 구원의 은혜 뿐만 아니라, 계속적 용서와 위로와 격려와 새 힘을 주시는 은혜가 필요하다. ‘평강’도 변화무쌍한 세상적, 환경적 평안이 아니고 하나님과 주 예수께서 주시는 참되고 영속적인 평안이다. 이 평강은 하나님의 은혜의 결과이다. 천국은 평강의 나라이다(롬 14:17).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지상에서도 평안을 누리기를 원하신다. 빌립보서 4:6, 7,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결론적으로, 1절과 2절은 우리에게 몇 가지 진리를 계시한다. 첫째로, 하나님은 우리 아버지가 되시고 예수님은 주님이 되신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 곧 우리의 창조자시요 구속자시며 보호자, 양육자이시다. 또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주님, 곧 우리의 왕, 통치자, 우리의 하나님이시다. 이것은 놀라운 지식이며 하나님의 크신 은혜와 특권이다. 여러분은 구원을 받아 하나님을 아버지로,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셨는가?

둘째로, 교회는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연합의 관계를 가리킨다. 이것은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과 의와 참 기쁨과 평강과 소망과 현실 보장을 포함한다. 이것이 참 교회가 누리는 특권과 복이다.

셋째로, 우리는 계속적으로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오는 은혜와 평강이 필요하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우리도 이 문안 인사로써 서로 문안하자. 우리도 서로를 위하여 이렇게 기원하자.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