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빌립보서

빌립보서2:12-18절, 너희 구원을 이루라

호리홀리 2015. 6. 23. 14:32

12-18절, 너희 구원을 이루라

[12절]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 . . .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항상 복종하여’라는 원어(카도스 판토테 휘페쿠사테)는 ‘너희가 항상 복종했던 바와 같이’라는 뜻이다. 원문대로 다시 읽어보면,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항상 복종했던 바와 같이,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빌립보 교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진실히 믿었고 항상 복종하였다. 바울은 그들의 복종이 지금 그가 떠나 있는 때에도 계속되기를 원하고 있다. 우리는 사람들이 우리를 보든지 안 보든지 하나님께 항상 복종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께 복종하되 두렵고 떨림으로 해야 한다. 하나님은 두려우신 하나님이시다. 그는 거룩하시고 공의로우신 심판자이시다. 하나님의 율법을 어기는 자들에게는 무서운 저주가 선언되어 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큰 구원을 받았지만, 죄 가운데 떨어지지 않기 위해 항상 두렵고 떨리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죄는 하나님께서 가장 미워하시는 바이기 때문이다.

성경에서 ‘구원’은 죄 씻음과 의롭다 하심을 받는 것을 가리킨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자들은 이미 구원을 받았다. 믿는 이들은 의(義)와 거룩함을 얻었다(롬 3:24; 히 10:10, 14). 그 의와 거룩함은 완전하다. 그것은 법적인 의미이다. 그러므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는 말씀은 어떤 이들이 주장하듯이 우리의 선행이 구원의 공로가 됨을 암시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죗값을 다 지불하셨고 의를 이루셨고 그 의는 완전하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구원을 위해 무엇을 행하여 얻거나 무슨 공로를 쌓을 필요도 없고 쌓을 수도 없다. 오직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의를 감사히 받고 그 의를 우리의 삶 속에서 나타내어야 할 뿐이다.

성경은 우리의 구원이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임을 밝히 증거한다. 로마서 3:24,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救贖)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로마서 4:4-5,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을 은혜로 여기지 아니하고 빚으로 여기거니와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에베소서 2:8-9,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그러므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는 말은 성도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받은 구원, 곧 이미 받은 의(義)에 일치하는 인격과 삶을 현실 속에서 이루라는 뜻이라고 본다. 즉 순종의 생활을 가리킨다. 성도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받은 구원을 그들의 삶 속에서 나타내어야 한다. 이것이 성화(聖化)의 과정이다. 성도들의 성화는, 비록 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 불완전할지라도, 하나님의 요구이며 성도들의 마땅한 길이다. 우리는 완전한 성화를 위해 소극적이거나 게으르지 말고 날마다 그 목표를 향해 열심히 달려가야 한다.

[13절]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 . . .

 

 “[이는]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하심이니라].” 바울은 “너희 구원을 이루라”고 말한 후에 즉시 우리의 순종 생활 즉 성화의 노력과 과정이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하시는 일임을 증거한다. 하나님의 영께서 우리 속에 거하시고 계시다. 주의 피로 구속받고 믿는 성도들에게는 성령의 교통하심, 도우심, 인도하심이 있다. 로마서 8:14,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그런데 우리 안에 계신 성령의 활동은 우리의 자발적 소원과 노력으로 나타난다. 하나님은 인간의 자유 의지를 사용하셔서 자신의 뜻을 이루어 가신다. 구원받은 성도들은 하나님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소원을 가지고 그 소원을 따라 행한다. 경건해지려는 소원, 거룩해지려는 소원, 의로워지려는 소원, 선해지려는 소원, 그것들은 하나님이 주시는 소원이며 성령의 감동이다. 구원받은 성도에게도 남은 죄악성이 있지만, 하나님께서 주시는 경건하고 선한 소원을 따라 행함으로 하나님께서 주신 구원이 그의 인격과 삶 속에서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14절]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라.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라.” 구원을 실제 삶 속에서 나타낸다고 하는 말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가리키는가? 그것은, 예를 들어,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는 것을 말한다. 교회에서 주의 일을 할 때 우리는 원망과 시비 즉 불평과 다툼을 삼가야 한다. 주께서는 일보다 우리의 성화된 인격을 더 원하신다. 원망, 불평, 분쟁, 다툼은 인격의 흠과 결함이다. 그것은 죄악이다. 우리는 그런 것들로부터 구원을 얻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땅히 그런 흠과 결함을 버려야 한다. 우리는 교회에서 주를 위해 봉사할 때 원망, 불평, 분쟁, 다툼을 버리고 항상 사랑과 단결과 하나님께 대한 감사의 마음을 가지고 행해야 한다.

[15절] 이는 너희가 흠이 없고 순전하여 어그러지고 . . . .

“이는 너희가 흠이 없고 순전하여 어그러지고 거스리는[거스르는] 세대 가운데서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로 세상에서 그들 가운데 빛들로 나타내며.” 성화의 목표는 한마디로 ‘흠 없는 인격과 삶’이다. 이 세상은 항상 ‘어그러지고 거스르는 세대’이다. 이 세상은 하나님의 바른 표준에서 볼 때 언제나 비뚤어져 있고 하나님의 뜻에 대항한다. 경건 대신 불경건을 좋아하고, 거룩 대신 더러움을 구하며, 의(義) 대신 불의를, 선(善) 대신 악을 따르며, 진실 대신 거짓을 택하는 세상이다. 하나님 없는 이 세상에 부패되지 않은 곳이 어디 있는가? 사람들은 사회개혁을 부르짖지만, 그것이 가능하리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누구일까? 성도들은 이런 ‘어그러지고 거스르는’ 세상에서 구원받은 자들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불경건하고 부도덕한 이 세상에서 구원받은 자들답게 경건하고 도덕적인 삶을 살아야 한다. 성화는 바로 실제적인 경건과 거룩을 의미한다. 구원받은 성도들에게 기대되는 삶은 이렇게 흠 없고 순전한 삶, 즉 종교적으로, 도덕적으로 책망할 것이 없는 삶이다. 그런 삶이 바로 세상에서 ‘빛’이 된다. 성경은 하나님을 모르고 부도덕한 세상을 어두운 세상이라고 부른다(요 1:5; 벧전 2:9). 어두움은 무지와 부도덕을 가리킨다. 그러나 구원은 빛이다. 그것은 지식과 도덕성의 회복이다. 그것은 하나님을 알고 그의 뜻대로 의롭고 선하게 사는 것이다. 예수께서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성도들의 구원받은 삶, 성화의 삶, 흠 없는 삶을 가리키신 것이다.

[16절] 생명의 말씀을 밝혀 나의 달음질도 헛되지 아니하고 . . . .

“생명의 말씀을 밝혀 나의 달음질도 헛되지 아니하고 수고도 헛되지 아니함으로 그리스도의 날에 나로 자랑할 것이 있게 하려 함이라.” ‘밝힌다’는 원어(에페코)는 ‘드러낸다, 나타낸다’(Thayer, KJV, NIV) 혹은 ‘붙든다’(BDAG, NASB)는 뜻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생명의 말씀’이다. 그것은 죽은 영혼을 살리는 말씀이다. 그것은 불경건하고 부도덕했던 영혼들을 새롭게 하는 말씀이다. 구원은 새 생명이며 새 생활이다. 그러므로 구원받았다고 하면서도 새 생활을 하지 않고 옛 생활에 계속하여 머물러 있다면, 그런 구원은 구원이 아닐 것이다. 구원받은 성도가 흠 없는 생활을 할 때, 생명의 말씀의 참됨이 드러난다.

뿐만 아니라, 만일 성도들이 구원에 합당한 삶을 살지 않는다면, 복음 전도자들의 수고는 헛되고 그들의 사역은 결실 없는 사역이 될 것이다. 그러나 성도들이 빛의 생활을 하게 될 때, 복음 전도자들의 수고는 헛되지 않으며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셔서 온 세상을 심판하시는 날 그 성도들은 전도자들의 기쁨과 자랑이 될 것이다. 바울은 본서신의 끝부분에서 성도들을 “나의 기쁨이요 면류관인 사랑하는 자들”이라고 불렀다(4:1). 데살로니가전서 2:19-20에서도 그는, “우리의 소망이나 기쁨이나 자랑의 면류관이 무엇이냐? 그의 강림하실 때 우리 주 예수 앞에 너희가 아니냐? 너희는 우리의 영광이요 기쁨이니라”고 말했다. 참된 성도들은 목사의 기쁨과 자랑이다.

[17-18절] 만일 너희 믿음의 제물과 봉사 위에 내가 나를 . . . .

 “만일 너희 믿음의 제물과 봉사 위에 내가 나를 관제로 드릴지라도 나는 기뻐하고 너희 무리와 함께 기뻐하리니 이와 같이 너희도 기뻐하고 나와 함께 기뻐하라.” ‘믿음의 제물과 봉사’란 ‘믿음으로 하는 희생과 봉사’를 가리킨다. 빌립보 교인들은 진실한 믿음을 소유하였고 그 믿음으로 자신을 주께 드리며 주의 일을 위해 즐거이 봉사하였다. 그것은 바울을 기쁘게 한 일이었다. 바울은 그들의 믿음의 희생과 봉사 위에 자신을 쏟아부을지라도 기뻐하겠다고 고백한다. ‘자신을 관제(灌祭, 붓는 제사)로 드린다’는 말은 그의 순교를 의미하는 것 같다. 바울은 주를 위해 모든 것을 다 바쳤다. 그것은 억지로 하는, 불평스런 봉사가 아니었다. 그것은 기쁨의 헌신과 봉사이었다. 옥에 갇혀 있는 그는 죽을 각오를 하며 이렇게 고백하는 것이다. “오, 빌립보교회여, 참된 믿음과 믿음의 삶만 나타내라. 나는 나의 생명을 그대들 위에 부을 준비가 되어 있다.”

구원은 기쁜 사건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기쁨의 원천이시다. 시편 16:11은 “주의 앞에는 기쁨이 충만하다”고 고백한다. 성령의 열매는 기쁨이다(갈 5:22). 천국은 기쁨의 세계이다(롬 14:17). 사람이 행복하지 않고는 기뻐할 수 없다. 구원은 행복한 일이다. 구원의 복음을 전한 사도 바울은 기쁨의 사도이었다. 그는 옥 중에서도 기뻐하였다. 또 그는 성도들에게 기뻐하라고 권면하였다. 이 기쁨은 오늘 우리의 것이다. 어떤 어려운 현실 속에서도, 성도는 하나님으로 인해, 구원으로 인해, 천국 소망으로 인해, 성령 안에서 기뻐할 수 있다. 이것은 구원받지 못한 자들은 느낄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참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의 새 생명을 얻고 구원에 합당하게 주께 순종하며 흠 없는 삶을 위해 성실히 노력하는 모든 진실한 성도들은 이 세상에서 항상 이 기쁨을 체험할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구원을 이루어야 한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이미 우리에게 주신 구원, 곧 완전한 의에 일치하는 인격과 삶을 현실 속에서 이루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이 성화(聖化)이다. 성화란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의를 우리의 흠 없는 삶으로 나타내는 것이다.

우리의 성화는 이 세상에서 불완전하다. 그러나 비록 우리가 미래에 누릴 영화가 우리의 성화의 정도에 의존하지 않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한 의에 의존할지라도, 우리는 이 세상에서 거룩을 이루어야 한다. 그것은 이 어두운 세상에서 빛들로 살기 위해서이다. 그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또 다른 이들의 구원을 위하는 일이 될 것이다.

그러나 성도의 성화의 삶, 곧 순종의 삶은 결코 무겁고 엄숙한 일만이 아니다. 그것은 기쁜 일이다. 참으로 구원에 합당한 삶, 곧 흠 없는 삶을 살고자 순종하며 애쓰는 자들은 이 기쁨을 받아 누리게 될 것이다. 하나님은 기쁨의 하나님이시며 기쁨을 주시는 하나님이시다. 그는 우리가 기뻐하며 또 기뻐하며 기쁨이 넘치는 삶을 살기를 원하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