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빌립보서

빌립보서1:20-26절, 그리스도를 위하여

호리홀리 2015. 6. 23. 14:22

20-26절, 그리스도를 위하여

[20-21절]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 . . .

 “[나는]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럽지 아니하고 오직 전과 같이 이제도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의 내용은 그가 아무 일에든지 부끄럽지 않고 항상 그리스도만을 위해 살고자 하는 간절한 기대와 소망이다. ‘아무 일에든지 부끄럽지 않다’는 것은 범사에 양심적으로 산다는 것을 말한다. 성도는 진실과 의를 생명으로 여기며 범사에 양심적으로 살아야 한다. 바울은 살든지 죽든지 그의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기를 항상 아주 담대히 원하였다. 그것이 사도 바울의 생활 신조이었다.

바울이 살든지 죽든지 그리스도만 존귀케 하기를 원한 까닭은 그가 사는 것이 그 자신이 사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께서 그 안에서, 그를 통해 사시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는 갈라디아서 2:20에서도 비슷하게 말하였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그러므로 바울은 본문에서 자신이 그리스도만 위한다면 사는 것뿐 아니라 죽는 것도 유익하다고 말한다.

[22-24절] 그러나 만일 육신으로 사는 이것이 내 일의 . . . .

 “그러나 만일 육신으로 사는 이것이 내 일의 열매일진대 무엇을 가릴는지 나는 알지 못하노라. 내가 그 두 사이에 끼였으니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망을 가진 이것이 더욱 좋으나 그러나 내가 육신에 거하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리라.” ‘육신으로 사는 것’은 육신의 생명의 연장을 의미하며, ‘내 일의 열매’라는 말은 그가 살면 주님과 복음 사역을 위해 더 많은 열매를 맺을 것을 의미했을 것이다. 바울은 사는 것과 죽는 것, 그 두 사이에 끼어 있다고 말하며 또 증거하기를 그 둘 중에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 즉 죽는 것이 더 좋다고 말한다. 이것은 하나님을 알고 영생과 천국의 진리를 아는 모든 성도들이 다 동감할 말이다. 이 세상은 수고로운 세상이요 광야와 눈물의 골짜기와 같고 죽음의 그늘진 땅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계신 천국은 참된 안식과 기쁨과 생명의 충만이 있는 곳이다.

바울은 죽어 주와 함께 거하는 것을 더 좋아하고 더 사모하지만, 교회를 위하여, 성도들을 위하여 살아야 할 필요성이 있다고 말한다. ‘유익하다’는 원어(아낭카이오스)는 ‘필요하다’는 뜻이다. ‘그러나 내가 육신에 거하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필요하리라.’ 이것은 오늘날 모든 사역자들과 성도들의 인생관이 되어야 한다. 우리가 이 세상에 살아야 할 이유가 무엇인가? 우리가 하나님의 뜻 가운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고 그의 교회 곧 성도들을 위하여 살지 않는다면 우리가 반드시 살아야 할 이유는 없다.

[25-26절] 내가 살 것과 너희 믿음의 진보와 기쁨을 위하여 . . . .

 “내가 살 것과 너희 믿음의 진보와 기쁨을 위하여 너희 무리와 함께 거할 이것을 확실히 아노니 내가 다시 너희와 같이 있음으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자랑이 나를 인하여 풍성하게 하려 함이라.” ‘너희 믿음의 진보와 기쁨을 위하여’--이것이 바울이 살아야 할 이유이다. 그것 외에 다른 이유가 없었다. 만일 그가 해야 할 사명을 다해서 더 이상 성도들의 믿음의 유익과 기쁨을 위할 것이 없다면, 그는 더 이상 살기를 원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성도들의 유익을 위해 살 필요성이 있다는 확신이 생겼을 때, 그는 자신이 죽지 않고 살아서 그들의 믿음의 유익과 기쁨을 위해 그들과 함께 거할 것임을 알았다. 26절의 ‘자랑’이라는 원어(카우케마)는 ‘기쁨’으로 번역할 수 있다(KJV). 문맥상 그것이 더 좋아 보인다. 바울은 자신이 감옥에서 풀려나서 빌립보교회에 가서 그들과 함께 교제를 나눔으로써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들의 기쁨이 바울로 인해 풍성하게 되리라고 믿고 있다.

20절부터 26절까지의 말씀은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 삶에 대해 교훈한다. 우리는 살든지 죽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살아야 한다. 우리가 살면, 성도들의 믿음의 유익과 기쁨을 위해 살 것이며, 우리가 죽으면,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거하는 더 좋은 복을 누릴 것이다. 우리에게는 사는 것과 죽는 것이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 고린도후서 5:8-9,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그것이라. 그런즉 우리는 거하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기를 힘쓰노라.” 우리는 살든지 죽든지 오직 하나님을 위해서만 산다. 로마서 14:7-8,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 고린도후서 5:14-15,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참으로 믿는 자들이며 확실히 구원받은 자라면, 우리는 오늘 우리의 인생관을 점검하자. 우리는 오직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살며 살든지 죽든지 우리 몸에서 예수 그리스도만 존귀케 되기를 소원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