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빌립보서

빌립보서1:12-19절, 기쁨의 간증

호리홀리 2015. 6. 23. 14:19

12-19절, 기쁨의 간증

[12절] 형제들아, 나의 당한 일이 도리어 복음의 진보가 된 . . . .

 “형제들아, 나의 당한 일이 도리어 복음의 진보가 된 줄을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라.” ‘나의 당한 일’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다가 옥에 갇히게 된 일이다. 그것이 도리어 복음의 진보가 되었다는 말은 바울이 옥에 갇힘으로 복음 전파의 일이 도리어 전진하고 확장되었다는 뜻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사랑하는 종들에게 닥친 어려운 일들까지도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섭리하신다(롬 8:28). 개인적으로, 고난은 성도들의 인격을 깨끗하고 거룩하게 만들며 하나님을 더 의지하게 만들며 온유하고 겸손하게 만든다. 복음사역에 있어서도, 만일 우리가 바울처럼 하나님 앞에 충성하기만 한다면, 고난과 핍박이 그 일을 중단시키지 못하며 오히려 복음의 진보와 확장을 가져올 것이다.

[13-14절] 이러므로 나의 매임이 그리스도 안에서 온 시위대 . . . .

“이러므로 나의 매임이 그리스도 안에서 온 시위대 안과 기타 모든 사람에게 나타났으니 형제 중 다수가 나의 매임을 인하여 주 안에서 신뢰하므로 겁 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담대히 말하게 되었느니라.” ‘시위대’(프라이토리온)라는 말은 로마 황제의 시위대 뜰을 가리키는 것 같다(BDAG). 그의 매임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에게 나타났다는 말은 그가 옥에 갇힌 것이 어떤 잘못이 있어서가 아니고 오직 그리스도와 그의 복음을 전하는 것 때문이라는 사실이 모든 사람에게 알려졌다는 뜻이다.

바울이 감옥에 갇혔으나 ‘형제 중 다수’가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담대히 말하게 되었다. ‘주 안에서’라는 말은 ‘형제 중 다수’에 연결되는 말이라고 본다(KJV, NIV). 담대히 전도한 자들은 주 안에 있는 형제들이었다. 그들은 주님을 믿음으로 주님과 연합된 자들이다. ‘나의 매임을 인하여 . . . 신뢰하므로’라는 말은 바울의 매임 때문에 복음에 대한 확신을 갖게 되었다는 뜻일 것이다. 바울의 전한 복음의 진실성은 그의 옥에 갇힘을 통해 확인되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겁 없이 더욱 담대히 말하게 되었다. 복음에 대한 신뢰와 확신은 담력 있는 증거를 낳았다. 이와 같이 한 사람의 고난은 많은 사람의 마음을 감동했다. 이것은 하나님의 하신 일이었다.

[15-17절] 어떤 이들은 투기와 분쟁으로, 어떤 이들은 착한 . . . .

“어떤 이들은 투기와 분쟁으로[질투와 경쟁으로], 어떤 이들은 착한 뜻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나니 이들은 내가 복음을 변명하기 위하여 세우심을 받은 줄 알고 사랑으로 하나 저들은 나의 매임에 괴로움을  더하게 할 줄로 생각하여 순전치 못하게 다툼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느니라.” 두 부류의 전도자들이 있었다. 어떤 이들은 질투와 경쟁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였다. 그들은 바울을 질투하며 그와 경쟁하는 마음으로 일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착한 뜻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였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명령에 순종함으로 또 영혼들을 불쌍히 여김으로 전도하였다. 전통본문은 16절과 17절의 순서가 반대이다(Byz, KJV).

전자의 사람들은 바울에 대해 반감을 가지고 있었던 자들이었다. 그들은 옥에 갇힌 바울에게 괴로움을 더하게 할 줄로 생각하여 순전치 못하게 다툼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였다. 교회 안에 어떻게 이런 자들이 있을 수 있는지 의아스럽지만, 여하튼 그런 자들이 있었다. 그들이 복음을 전한 것은 순수한 동기에서가 아니었다. 그들의 동기는 경쟁심과 이기적 야망이었다. 그들에게는 그리스도가 중요하거나 구원할 영혼들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단지 자기들의 이름과 명예가 중요했다. 이런 자들이 진실한 신자일지 우리는 잘 모르겠다.

그러나 후자의 사람들은 바울이 복음을 변명하기 위하여 세우심을 받은 줄 알고 사랑으로 하였다. 복음을 변명하는 것은 갈라디아서에서 보듯이 율법주의 사상을 가진 유대인들에게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변호하는 것을 가리켰다. 바울은 복음을 전파할 뿐 아니라, 또한 그 복음을 변호해야 했다. 사탄은 때때로 복음을 정면으로 반대했을 뿐 아니라, 때때로 그것을 받아들이는 듯하면서 교묘히 그것을 가감하고 변질시키려 했다. 그러므로 전도자는 전파와 변호의 일을 다 감당해야 한다. 교리적 논쟁을 싫어하는 것은 잘못된 태도이다. 복음의 변호가 실패하면 복음의 전파도 헛되게 될 것이다.

이 일을 사랑으로 한다는 말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므로, 또 옥에 갇힌 바울을 사랑하므로, 또 죄와 멸망의 길에서 방황하는 영혼들을 사랑하므로 복음을 전파한다는 뜻일 것이다.

[18절] 그러면 무엇이뇨? 외모로 하나 참으로 하나 무슨 . . . .

 “그러면 무엇이뇨? 외모로 하나 참으로 하나 무슨 방도로 하든지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이로써 내가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 어떤 이들은 겉모습으로만 전도하였고, 어떤 이들은 진실한 마음으로 전도하였다. 그러나 바울은 어떤 방식으로 그리스도가 전파되든지 간에 그리스도가 전파된다면 그는 기뻐하고 또 기뻐하겠다고 말한다. 감옥이 그의 기쁨을 빼앗을 수 없었고 그것이 그의 슬픔의 이유가 될 수 없었다. 옥에 갇힌 것이 오히려 복음의 확장을 가져왔다. 그리스도만 바르게 전파된다면, 심지어 잘못된 동기로 그렇게 하는 자들이 있다 할지라도, 그는 기뻐할 수 있었다.

물론, 본문의 말씀은 전도의 방식이 중요하지 않다는 뜻으로 오해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주의 종들이 악과 타협하면서 전도해도 되는 것은 아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믿지 않는 자와 부당하게 멍에를 같이하지 말라고 가르쳤다(고후 6:14-17). 단지 본문의 뜻은, 비록 잘못된 동기와 방법으로 그리스도를 전하는 자들이 있을지라도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바르게만 전한다면 우리는 그들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가 전해지는 것 때문에 기뻐할 수 있다는 것이다.

[19절] 이것이 너희 간구와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의 . . . .

“[이는] 이것이 너희 간구와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영]의 도우심으로 내 구원에 이르게 할 줄 아는 고로[앎이니라].” 본문은 앞절에서 말한 그의 기뻐함의 이유를 제시한다. ‘이것이’라는 말은 그리스도께서 시위대 안에서 전파되는 것을 가리킨다. 성령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영’으로도 불리신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의 관계 곧 삼위일체의 신비를 나타낸다. ‘너희 간구와 예수 그리스도의 영의 도우심으로’라는 말은 하나님의 작정된 뜻이 우리의 간구와 성령의 역사로 이루어짐을 보인다. 기도는 하나님의 선한 일을 이루는데 필수적이다. ‘내 구원’은 바울이 로마 감옥에서 풀려나는 것을 가리킬 것이다. 복음이 시위대 안에 전파됨으로 또 빌립보 교인들의 간구와 예수 그리스도의 영의 도우심으로 바울은 그 곳에서 풀려날 것이다. 바울은 그 일을 내다보며 또한 기뻐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구원 사역에 실패가 없다는 것을 깨닫자. 하나님의 사도인 바울은 옥에 갇혔지만, 복음이 시위대 안에서 확장되게 하셨고 그의 갇힘 때문에 많은 형제들이 분발하여 전도하게 하셨다.

우리는 전도할 때 바른 동기로 해야 한다. 우리는 전도할 때 결코 경쟁심이나 외식으로 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께 순종하는 마음으로, 또 멸망하는 영혼들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해야 한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전파되고 영혼들이 구원을 받는 일 때문에 기뻐하자. 바울은 옥 중에서도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파되는 것으로 인하여 기뻐하였다. 이 세상에서 전도보다 더 귀한 일은 없다. 죄책과 온갖 불행의 멍에 아래 살며 영원한 지옥 형벌을 받을 영혼들을 구원해내는 것보다 더 기쁜 일은 없다. 그것이 하나님의 구원의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