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에베소서

에베소서6:10~20,영적전쟁의 승리자

호리홀리 2015. 6. 18. 12:51

본문은  세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10절부터 13절이 교회가 상대해야할 세계를 말해줍니다. 눈을 열고 보니, 이 세상은 마귀의 궤술이 넘쳐나고 악한 시대입니다. 이어서 14-17절은 그러한 세계에서 승리를 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자세하게 나열합니다. 마지막으로 18-20절에서, 바울은  전신갑주를 가지고 복음의 비밀, 곧 교회의 영역을 계속적으로 확장시킬 수 있도록 기도합니다.

 

   우선 10절, 제일 처음에 나오는 “종말로”(종말론이 아닙니다. 단어 그대로 종말의 시대라고 이해하시면 안 됩니다). 이 말(헬: 투 로이푸)의 본래 의미는 ‘마지막으로 남은 것이 있다’라는 뜻입니다. 어떤 일을 처리할 때 제일 마지막으로 남은 것, 바로 그 나머지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이것을 해결하지 않으면 전체 일이 뒤틀어질 수 있는, 매우 중요한 사항인 거지요. 우리는 교회가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고, 또 교회의 영역을 확장함에 있어서 필수적인 많은 사항을 배우고 깨달았지만, 중요한 그 무엇인가가 부족하다는 말입니다. 그것은 바로 ‘지금 우리는 전쟁터에 있다’는 인식입니다. 가장 중요하면서 무엇보다도 가장 긴급한 상황의 인식이 필요합니다. 영적 전쟁을 하고 있다는 인식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 사역 속에서 보여주신 모습이 바로 영적 전쟁이었으며(막 1:23-24), 이를 따라서 사도들도 눈에 보이지 않지만 우리들을 지배하는 악의 세력에 대항한다는 생각을 분명히 가지고 있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베드로가 우리를 경고한 이 말씀이 오늘도 동일하게 역사하고 있는 것입니다(벧전 5:8):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그러므로 바울은 ‘지피지기(知彼知己)면 백전백승(百戰百勝)’이라는 원칙으로, 말씀을 전개합니다. 바로 12절과 13절에서 바울은 ‘지피’, 먼저 적이 무엇인지 규정합니다. 교회의 적은 전적으로 영적인 존재들입니다. 교회가 상대하는 대상은 피와 살이 있는 사람도 아니요 지도체제도 아니며 우리의 경제 시스템도 아닙니다. 이러한 것들은 껍데기일 뿐입니다. 그 배후에 손을 뻗치고 있는 영적 세력이 타겟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12절의 마지막에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이라고 말합니다. 이 악의 영들 때문에, 속아 넘어지는 겁니다. 정말로 말 그대로 넘어뜨리는 힘이 마귀이며, 이 시대는 이러한 악령이 판을 치는 악한 시대입니다.

  

사실 바울이 이렇게까지 강력하게 악의 영들을 가리켰던 데에는, 에베소라는 장소 특유의 상황이 있었습니다.  사도행전에 의하면(19장), 에베소는 바울의 3차 전도여행의 시작점이었습니다. 사도행전을 긴밀하게 읽어보면 에베소의 특징이 나오는데, 바로 그곳엔 성령이 없는 곳입니다. 바울이 에베소에서 선교를 시작하기 전에, 이미 그곳은 다른 제자들이 선교하던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성령을 몰랐습니다. 말씀을 보면, “우리는 성령이 있음도 듣지 못하였노라”고 되어있습니다(19:2). 이것이 에베소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말씀인 것입니다. 에베소에서 발생했던 여러 가지 일들 역시 그곳엔 성령이 역사하기 보다는 악의 영이 활동하는 곳임을 보여줍니다. 바울을 흉내 내어 악귀를 쫓아내려던 어리숙한 사람이 오히려 악귀에 쫓깁니다. 악귀가 사람들을 가지고 노는 곳이 에베소라는 거지요. 어찌나 영적 세력이 강했는지, 그곳에 마술을 행하던 사람들이 부지기수로 많았고, 또한 그들이 마술하는데 보았던 책들이 수천권이나 되었습니다. 에베소엔 대표적인 여신이 있었는데, 다산의 상징으로 유방이 12개나 달린 엄청나게 큰 신상을 섬겼습니다. 이 여신 때문에 경제가 돌아가고 문화가 움직이는 곳이었지요. 우리가 축구 응원 할 때보다 더한 목소리로, 에베소의 사람들이 전부 모여 두 시간동안이나 목이 터지도록 외쳤다고 합니다(19:34): “크도다! 에베소 사람의 아데미(여신)이여!” 그렇습니다. 에베소는 바울을 통해 성령의 역사가 강력하게 일어나기 전까지, 악의 영이 활개를 치며 사람들을 지배했던 세계였습니다.

  

 교회가 상대해야하는 세계가 바로 이러한 세계입니다. 비록 지금 우리 앞에 거대한 우상은 없지만, 비록 지금 우리 앞에는 악귀에 들려 뛰어다니며 괴롭히는 사람이 없지만, 여전히 사람들을 지배하고 있는 악한 영은 현존하고 있습니다. 그 모양이 바뀔 뿐입니다. 우리가 접하는 뉴스가 바로 이러한 세계를 보여주지 않겠습니까! 우리들이 계속해서 접하는 연쇄살인범의 잔혹한 범행과 어린이 성폭행범의 추악한 범죄가, 여전히 우리의 세계에 악한 영이 활개치고 있음을 반증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법의 정신으로 공평과 정의를 실천해야할 검사들이 오히려 거짓의 영에 홀려 접대를 받고 판결을 굽게 하는 우리의 현실이, 악한 영의 궤휼을 잘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요?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긍하며, 교만하며, 훼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치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참소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 아니하며, 배반하여 팔며, 조급하며, 자고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이러한 현실이(딤후 3:2-5), 여전히 그때나 지금이나 악한 영이 지배하는 어두움의 세계를 보여주지 않는가요! 그렇습니다. 교회는 이러한 악의 영을 상대하는 유일한 존재인 것입니다.

 

   이제 바울은 ‘지피지기’에서 ‘지기’, 곧 우리 자신을 알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혈과 육에 대한, 다시 말해서 우리 인간의 육체와 정신의 싸움이 아니기에, 우리가 준비할 것이 본질상 전무합니다. 우리의 힘으로는 이 세계를 변화시킬 수 없는 것입니다. 인류 역사가 그것을 반증합니다. 19세기 그러니까 한창 과학이 발달해서 자신들의 이성으로 세계에 유토피아를 이룰 수 있다고 선언했던 인간의 자신감이 20세기에 들어와 두 번에 걸친 세계대전과 계속된 인종말살 정책으로 완전히 무너지게 됩니다. 가장 과학이 발달했으며, 가장 철학이 심오했던 이 시기가, 인류 역사상 가장 많은 사람의 목숨을 빼앗았던 시대였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인간의 힘과 정신으로 악한 영을 대적할 수 없습니다.

  

오직 영적으로 무장되어야 싸울 수 있게 됩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다음의 여섯 가지로 이루어진 갑옷을 입으라고 명령합니다(11절). 이 갑옷은 하나님의 전신갑주입니다. 전적으로 영적인 갑옷입니다. 바울은 이 갑옷을 입으면 승리할 수 있다고, “일어서다”라는 매우 중요한 단어를 세 번이나 강조하면서 강력히 말씀합니다(11절의 “대적하다”, 13절에 “서기”, 14절에 “서서”[원문은, 서라 그런 다음에]). 사단에게 지면 넘어집니다. 이 말은 곧 마음의 소망을 빼앗겨 버리는 것이요, 영적으로 죽음을 당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전투를 마친 전장에서 오직 승리자만이 굳건하게 서있을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바울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최후 승리를 얻기 위해서, 다시 말해서 끝까지 “일어서있을 수 있기 위해서” 궁극적으로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전신갑주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여섯 개의 전신갑주는 첫째로, 진리의 허리띠입니다. 둘째로는 의의 흉배입니다. 셋째는 평화의 복음으로 준비된 신발입니다. 넷째는 믿음의 방패입니다. 이 방패만 있으면 불화살이 날아와도 능히 막아낼 수 있습니다. 다섯째는 구원의 투구입니다. 여섯째는 성령의 검인데, 이는 곧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우리는 이 여섯 개로 구성된 갑옷을 쉽게 그려볼 수 있습니다. 사실 이것은 로마 시대에 보편적인 완전무장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누구라도 들으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바울은 비유를 든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허리띠가 아니라, 흉배가 아니라, 신발이 아니라, 진리이고 의이며 평화의 복음입니다. 믿음이 중요한 것이고 구원의 확신이 필수적인 것이며, 하나님의 말씀으로 충만해진 성령이 핵심이라는 겁니다.

   여섯 개의 전신갑주를 나열하면서, 바울은 왜 진리가 허리띠인가를 설명하지 않았습니다. 왜 구원이 투구가 되는지도 설명하지 않았습니다, 중요한 것은 진리, 의, 평화, 믿음, 구원의 확신,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으로의 성령, 이 여섯 개가 반드시 우리의 삶에 나타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바울은 이 여섯 개의 신앙의 핵심 요소를 앞 장에서 이미 자세히 설명해 놓고 있습니다. 진리는 1:13에, 의로움은 4:24에, 평화는 4:3에, 믿음은 3:17에, 구원은 2:8에,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으로의 성령은 2:22과 5:26에 말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이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전쟁터에 나가려면 반드시 완전무장을 하고 나가지 않느냐, 그러니 우리도 영적 전쟁을 함에 있어서 꼭 무장을 해야만 합니다. 

 

      바울은 기도의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편지는 언제나 기도로 가득차 있습니다. 그는 기도로 하나님의 뜻을 발견했고, 기도로 문제를 해결했으며, 기도로 세상을 변화시켰고, 기도로 영적 전쟁에서 승리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바울은 기도의 사람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바울은 교회의 능력이 기도를 통해서 나타난다는 것을 실제로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아까 말씀을 드린 바와 같이, 사도행전에 의하면, 에베소는 성령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렇지만 바울이 복음을 전하고 안수를 했더니 성령이 에베소의 성도들에게 임하게 되었고, 결국 에베소에서 거룩한 영적 전쟁을 일으킬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에베소의 성도들에게 지속적으로 기도할 것을 요청합니다. 18절을 원어로 보면, “모든”이란 단어가 4번이나 나오면서, 기도의 완전한 차원을 요구하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비록 우리말 성경에서는 잘 드러나지 않지만, 분명히 바울은 기도에 올인하고 있습니다: “모든” 기도와 간구로 하되 무시(“모든” 시간에)로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모든”) 힘쓰며 여러(“모든”) 성도를 위하여 구하고! 그렇습니다. 기도 하면 살고, 기도 없으면 죽습니다.

  

이어서 바울은 자신을 위해서 기도해달라고 부탁합니다. 목회자의 기도가 바로 이것입니다. 설교자의 간구가 바로 이것입니다. 바울은 19절에 말씀을 “받도록” 기도합니다. 우리말로는 ‘말씀을 주사’라고 되어있지요.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야 한다고 고백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목회자는, 우리 설교자는 자신의 마음으로 ‘만들어 낸’ 것을 설교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주시는 말씀을 전달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바울은 “알리게” 하도록 기도합니다. 이 말은 자신이 받은 하나님의 비밀을, 바로 여기에서는 교회의 신비이지요, 자신의 성도들이 전인격적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바르게 이해시키도록 알려주는 것(to make known)을 뜻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무리 하늘의 신비를 허락하셔도, 그 비밀을 사람들에게 정확히 나누지 못하게 된다면, 아무 소용없지 않겠습니까!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바울의 이 기도와 함께, 바울 이전의 또 한 사람의 기도를 가슴에 품어야 하겠습니다(사 50:4): “주 여호와께서 학자의 혀를 내게 주사, 나로 곤핍한 자를 말로 어떻게 도와줄 줄을 알게 하시고, 아침마다 깨우치시되 나의 귀를 깨우치사 학자같이 알아듣게 하시도다.”

    기도는 능력입니다. 성도들이 바울을 위해서 “온전히(모두)” 기도에 올인하였을 때, 바울은 자신의 사역에 그 어느 악한 세력도 막아설 수 없음을 확신하였습니다. 실제로, 사도행전의 마지막 장은 바울의 하나님 나라 전파, 에베소서에 의하면 바로 교회의 확장에 대해서, 그 어느 것도 막을 수 없었다고 말합니다(행 28:31). 말 그대로 ‘담대히’ 선언하고 활동할 수 있었던 것이지요. 정말로 기도는 능력이요 유일한 열쇠입니다.

 

  바울이 힘써 사역하던 에베소에 소요가 일어나게 됩니다. 그래서 바울은 거의 쫓겨나듯이 에베소에서부터 도망을 칠 수밖에 없었습니다(행 19:30-31). 에베소의 영적 세력은 정말로 강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결과보다 과정, 다시 말해서 우리의 존재 이유 자체에 목적을 두어야만 합니다. 선한 싸움의 자리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셨다는, 우리의 존재 이유 말입니다. 바로 교회로 부르심의 소망, 그 자체에 목적을 두어야만 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확장, 다시 말해 교회의 확장을 위해, 본질적으로는 사단과의 영적전쟁의 승리자가 되시기를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