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7-5:20
바울은 하나님이 주신 비밀의 깨달음으로, 소망 없고 하나님 없는 영적 이방인이었던 에베소의 사람들에게 교회라는 비전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교회’(에클레시아)야 말로, 말 그대로 ‘부르심’(에클레세테)이고, 그 부르심에 참 된 소망이 있으며, 이를 통해서 하나님을 닮아가는 변화가 일어난다고 말합니다. 이제 건강한 교회는 스스로 자라가며, 공중의 새들이 깃들며 값진 열매를 맺는, 하나님의 나라의 현현이 될 것입니다. / 이제 바울은 그러한 교회를 이루어가는 성도의 합당한 삶을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교회로 부르심을 입은 새사람으로써, 마땅히 살아가야할 삶의 구체적인 내용들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삶의 내용은 에베소서의 상당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습니다(4:17-5:20). 간단히 정리해보면,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새 사람을 입자!”입니다(4:22,24).
보다 적극적으로 새사람의 실제적인 삶을 말합니다. 우리말로 17절에 “그러므로 내가 이것을 말하며 주 안에서 증거하노니”라고 되어있습니다. 그 원뜻은 “내가 강력하게 말하겠다”입니다. (말하고 증거한다 식의 두가지 의미가 아니라, 두 단어가 합해져서 강조한다는 것입니다.) , 교회의 목표는 성도를 온전케하는 것이고(4:12), 그것을 위해서 하나님은 영적인 지도자를 주셨습니다(4:11). 이제 바울은 에베소를 장성한 분량의 교회, 범사에 그리스도에게까지 자라는 교회로 만들기 위해서, 부드러운 어투가 아닌 강력한 어투로 새사람이 살아가는 법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 메시지의 요약은 이것입니다: “옛 사람을 벗고, 새 사람을 입자"
바울이 에베소의 성도들에게 강력하게 주장하는 내용이 바로 이것입니다: “사랑하는 에베소의 성도들이여! 혹시나 옛 사람으로 되돌아가려는 유혹이 생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꿈에도 그런 생각 마세요. 여러분들이 그동안 그리스도를 어떻게 배웠습니까! 그러니 이제는 새 사람을 입읍시다! 그리고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됩시다! 그러기 위해서 성령의 충만함을 받읍시다!”
신앙은 생활입니다. 신앙은 이론이 아니라 생활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신앙생활이라고 하지, 신앙이론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다시 말하면 신앙은 우리의 구체적인 삶의 내용들에 관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을 가지게 된 사람들은 한결 같이 조금씩 살아가는 모습이 달라지게 됩니다. 아마 여러분 스스로는 느끼지 못할지 모르지만, 여러분을 알아왔던 사람들이라면 여러분이 변한 것을 보고 놀랄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눈빛이 달라졌기 때문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사람이 달라졌기 때문입니다. 행위구원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믿고 나면 우리들의 행위가 조금씩 착해지고, 조금씩 의로워지며, 조금씩 진실해진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옛 사람으로 되돌아가려는 유혹이 생기기도 합니다. 신앙을 저버리는 참으로 안타까운 일들이 종종 목격되기도 하지요. 여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세상을 더 사랑해서 신앙을 버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딤후 4:10에서 바울은 데마가 세상을 사랑해서 자신을 버렸다고 말합니다. 신앙을 지키다가 고난을 당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바로 히브리서가 그렇습니다. 히브리서도 신앙을 저버리는 사람들을 향한 회유의 메시지입니다. 당시에 기독교는 핍박의 대상이었지만 유대교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많은 기독교인들이 다시 유대교로 돌아가곤 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여러 가지 이유들 중에서, 에베소 성도들의 신앙을 빼앗는, 다시 말해서 옛사람으로 돌아가게 만드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요?
바울은 교회라는 관점에서 이것을 분석합니다. ( 에베소서에서 바울의 온 초점은 ‘교회’에 있습니다.) 우리는 지난 시간에 교회가 우리의 소망이라고 배웠습니다. 바로 ‘부르심(에클레시아/교회)이 소망’이라는 겁니다.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는 교회, 그리스도가 머리가 되는 한 몸 공동체, 이러한 교회를 통해서 신을 닮아가는 우리의 생활, 바로 이것이 변화된 새사람의 소망인 것입니다. 그런데 반대로 말해서, 이러한 소망이 없어지면 그것이 바로 옛사람으로 돌아가는 원인이 됩니다. 바울은 옛사람의 가장 큰 특징으로 (17절에) ‘마음이 허망해진다’라고 말합니다. 마음에 소망이 사라지게 되니, 모든 것이 헛된 것처럼 여겨진다는 겁니다. 마치 사랑에 실패한 청춘들이 그 마음에 소망이 사라져버리자,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그 마음이 허망해지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문제입니까? 바로 마음이 문제입니다. 우리들의 마음이 허망해진다면, 위기신호가 온 겁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들의 마음에 교회라는 부르심의 소망이 없어지면 옛사람으로 돌아갈 위험이 크다는 겁니다. 물론 우리가 알다시피 옛사람은 전혀 매력적이지 않습니다. 방탕하고 더러운 욕심으로 가득 차 있는, 말 그대로 사탄적인 삶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걸 알아도 어쩔 수가 없는 겁니다. 마음에 부르심의 소망이 없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마음이 문제라는 거구요, 그래서 이 마음을 치료해야만 합니다. 이 마음이란 단어가 헬라어 원어로 누스(νους)인데, 여기에서 두 번 나옵니다. ‘마음이 허망해진다’의 17절과 23절입니다. 23절이 어떤 말씀입니까? 새사람을 입기 위한, 다시 말해서 마음을 치유하기 위한 유일한 방법이 있다는 겁니다. 바로 “심령으로 새롭게 되는” 겁니다. 이 말은 마음을 새롭게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정확한 뜻은 “너희들 마음의 영(성령)이 새롭게 되어져야만 한다”입니다. 그래서 지난 시간 3장에서 바울이 에베소 성도들을 위해서 기도했던 것을 다시 기억해야만 합니다(3:16):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옵시며” 그렇습니다. 우리가 우리 교회의 성도들의 속사람이 성령으로 늘 강건해지도록 기도해야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마음에 교회라는 부르심의 소망을 상실하게 된 것일까요? 바로 공동체의 멤버쉽을 파괴하였기 때문입니다. 새사람의 실제적인 삶을 말하면서 바로 멤버쉽을 강조합니다(4:24): “그런즉 거짓을 버리고 각각 그 이웃으로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하라. 이는 우리가 서로 지체가 됨이니라.”한 몸이 된 교회의 연결체로서 붙어있는 지체들을 말하는 겁니다. 다시 말하면 교회의 성도들을 의미합니다. 여기에서 ‘지체’라는 말이 바로 ‘멤버쉽’입니다. 이 멤버쉽이 파괴되면 교회가 파괴되고, 교회가 파괴되면 마음에 소망이 사라져버려서 옛사람으로 돌이키게 된다는 겁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철저하게 이 멤버쉽을 지켜나가는 것이야말로 새사람의 일차적인 사명이라고 가르치게 됩니다. 25절 이하의 말씀을 읽어보시면, 이 새사람에게 주어진 당부의 말씀이 전적으로 공동체를 위한 가르침인 것을 깨닫게 되실 겁니다. 여기에서 바울이 말하는 새사람은 구원받은 한 개인이, 자신의 개인적인 영성을 고상하게 키워나가는 ‘개인신앙훈련’이 아니라는 겁니다. 철저하게 멤버쉽을 지켜나가게 하도록 훈련시킨 것이 바로 바울의 새사람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30절에 말씀이 이해가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무엇이 성령을 근심하게 합니까? 바로 공동체의 멤버쉽을 깨뜨리는 여러 가지 행위들, 바로 앞 절 ‘듣는 자들이 은혜를 느끼지 못하는 더러운 말을 하는 것’입니다. 무엇이 성령을 근심하지 않게 하는 겁니까? 32절,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이렇게 멤버쉽을 지켜서 하나되는 교회의 소망을 마음에 굳게 지켜라. 이것이 바로 바울이 강조한 가르침이었던 겁니다.
옛사람으로 되돌아가려는 유혹? 그것은, 에베소서에 의하면, 그것은 바로 성도들이 교회라는 부르심의 소망을 상실할 때 찾아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도해야 합니다. 혹시 마음이 허망해진 성도들이 있다면, 성령께서 찾아가셔서 그 마음을 새롭게 하옵소서. 동시에 우리는 우리 자신을 돌아보아, 혹시 우리가 멤버쉽을 깨뜨려서, 우리 스스로가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는 않은가 돌아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제 바울은 그리스도를 배우자고 말합니다. 4:20에,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를 이같이 배우지 아니하였느니라”라고 말씀하면서, 옛사람으로 돌아가려는 성도들에게 우리의 역할 모델을 다시 한 번 확인시키는 것입니다. 우리가 여기에서 바울이 과연 에베소의 성도들을 어떻게 가르쳤는지 확인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사도행전이나 다른 서신서들을 보면, 바울은 유독 에베소에 큰 관심과 열정을 쏟아 부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 20장에 보면 바울은 3차 전도여행을 마치고 마지막으로 예루살렘에 가게 됩니다. 그런데 승리자의 몸이 아니라 ‘죄인의 몸’으로 가게 됩니다. 그러면서 바울은 에베소의 장로들을 부르면서 교회를 위한 당부의 말을 전해줍니다. 그러한 바울의 말 중에서, 교회에 대한 위대한 신앙고백이 나오는데, 바로 20:28에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라고 말합니다. 교회는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것입니다. 이 말을 듣고 장로들이 울며 교회를 위해서 충성하겠다고 약속을 하게 됩니다.
이러한 장면은 우리의 마음을 숙연하게 합니다. 교회에 대한 정신을 엿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교회의 출발은 “하나님의 자기 피”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바울은 이것을 5:2에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생축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 예수님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를 위해서(for us) 자신의 거룩한 몸을 넘겨주었습니다. 그 거룩한 그리스도의 몸이 흠없는 어린양이 되어서 희생제물이 된 것입니다. 살이 찟기고 뼈가 드러나며 창자가 빠지고 모든 것이 바쳐집니다. 바로 이것이 교회의 출발입니다.
바울은 에베소에서 삼년 동안 이것을 눈물로 가르쳤다고 합니다(행 20:31). 우리가 부르심의 소망을 누릴 수 있었던 것은 철저하게 그리스도의 자기 부인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에베소 사람들아,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 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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