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장 11-22절, 기본적인 골격은 1-10절과 비슷합니다.
①예수 믿기 전의 상태, ②그분이 하신 일-구원의 은혜, ③구원받은 후의 새사람이라고 하였습니다.
오늘의 말씀도
①예수 믿기 전의 상태(11-12절), ②그분이 하신 일-벽을 허물다(13-17절), ③구원받은 후의 새사람(18-22절) 이렇게 그 기본적인 골격은 같다고 할 수 있지만, 각자의 메시지는 큰 차이를 보입니다. 첫 번째 말씀이 ‘하나님의 말할 수 없는 큰 은혜’에 포인트를 두고 있다면, 이번에는 ‘한 몸이 된 새사람’으로 예수님이 만드신 화평이 강조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의 제목은 “한 몸이 된 새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신 것이 우리의 죄를 대속하기 위함일뿐만 아니라, 서로 화목할 수 없는 우리들을 화목하게 만들기 위해서,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셨다는 사실에 새로운 도전을 받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궁극적으로, 구원받은 우리가, 한 몸 새사람으로써, 만들어야할 진정한 교회의 참된 정신을 가슴에 새기기를 바랍니다.
1. “그때에”(11-12절)
구원받기 전의 상태를 읽어봅시다(11-12절): “그러므로 생각하라. 너희는 그 때에 육체로 이방인이요 손으로 육체에 행한 할례당이라 칭하는 자들에게 무할례당이라 칭함을 받는 자들이라.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역시 바울은 여기에서도 우리의 과거를 먼저 말하고 있습니다. 11절에 나오는 “그때에”에 , 우리말로는 11절과 12절 처음에 모두 ‘그때에’가 나오니까 똑같은 것처럼 보이지만, 원어로는 차이가 있습니다. 11절은 지난 번에 말씀드린 것처럼 “전에는”이라는 말이지만(ποτε; ‘이전/이후’라는 상대적인 의미의 단어), 12절은 말 그대로 ‘그 시간에’(τω καιρω εκεινω; that time)라고 해서, 이전과 이후의 차원이 아니라, 어떤 특정한 과거의 시간을 지칭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11절에 ‘생각하라’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생각하다’라는 말에 있어서, 보다 원어에 가까운 의미는, ‘기억하다(remember)’라고 하겠습니다(이 부분은 쉬운성경이 ‘잊지 말기 바랍니다’라고 했는데, 잘 번역했습니다). 아무튼 이 말을 보다 자세하게 풀어보자면, 우리가 구원받은 후에 새사람이 됐는데, 이제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을 살기 위해서, 구원받기 전의 옛사람의 역기능적인 삶이 과연 어떠했는지를 ‘기억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다시 옛사람으로 돌아가서 역기능적인 삶을 살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이러한 옛사람과 새사람의 실제적인 삶의 비교는 앞으로 4장에서 본격적으로 살펴볼 것입니다. 우리가 읽은 2장은 비교적 앞부분이기 때문에, 약간 총괄적인 차원에서 말하고 있다고 보면 되겠습니다). 11-22절의 두 번째 새사람에 관한 말씀에서, 제일 처음 시작하는 단어가 바로 ‘생각/기억하라’입니다(“그러므로 생각/기억하라”).
그렇다면 무엇을 기억해야 할까요? 무엇이 그들에게 역기능적인 삶이었던 것일까요? 바로 ‘원수됨’입니다(이 단어는 예수님이 하신 일을 말하면서, 우리의 과거를 요약했던 단어입니다; 14,16절에 나오지요). 이 ‘원수됨’이란, 친구로서 갖는 감정이 아닌, 적으로서 갖는 감정입니다. 사랑하는 것이 아닌 미워하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증오하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서, “너와 나는 물과 기름이다. 끝!”입니다. 물과 기름이 섞이면 역기능적인 현상이 발생합니다. 물에 기름이 들어가면, 기름이 물을 덮어버려서 물에 사는 생물은 숨을 못쉬어 죽고 맙니다. 반대로 기름에 물이 들어가면, 자동차는 고장이 나서 멈춰버립니다. 끓고 있는 기름이라면 물이 탁탁 튀면서 요리를 못하게 됩니다. 물과 기름은 절대로 함께 있을 수 없습니다. 이것은 물의 잘못도 아니요, 기름의 잘못도 아닙니다. 본질적으로 서로 다른 겁니다. 본질적으로 함께 할 수 없는 존재들이라는 겁니다. 빛과 어두움이 함께 있을 수 없는 것처럼, 본질적으로 원수된 존재들입니다.
그렇다면 바울이 말하는 예수 믿기 전, 과거의 존재: 11절에 “이방인”(εθνη), “무할례당”(ακροβυστια), 12절에 그리스도 “밖에”(χωρις),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απηλλοτριωμενοι), “외인”(ξενοι)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이 다섯 개 단어의 정확한 뜻을 공부하지 않아도, 뭔가 선을 긋고 있다는 느낌이 들 것입니다. 그리스도 ‘밖에’/이스라엘 나라 ‘밖의’/‘외’인, 이렇게 안과 밖에 선이 그어 있는 겁니다. 그런데 그 기준으로, ‘이방인’ 또 ‘무할례당’이 나오기 때문에, 유대인과 유대인이 아닌 민족으로 나뉘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지금 바울은 이방인의 사도로 활동하다가 감옥에 갖혔고, 지금 에베소 교회는 이방인 그리스도인의 교회입니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이라면 의당 가졌을 기본적인 의식이 없었습니다. 유대인이라면 가졌을 약속의 언약(하나님의 회복에 대한 약속)이 없었기 때문에, 그들은 당연히 “소망이 없었”습니다. 또한 그들은 이 세상에서만 살아갈 뿐, 그 이상의 세계를 바라보지 못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그들은 철저하게 인간적인 삶이 전부라고 알았을 뿐이며, 진정한 신의 세계에 대해서는 무지했던 것입니다(“하나님이 없는”[αθεοι]).
바울의 이러한 지적은 매우 중요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어찌 되었건 영적 이스라엘의 삶과 그렇지 못한 삶, 이렇게 이분법적인 존재로 생각할 수 있는데, 영적 이스라엘이 되지 못한 삶은 ‘소망이 없으며,’ 이 썩어질 세계가 전부이기에 ‘신의 세계/신성함’과는 무관하게 살아가고 있다고 말합니다. 정말 그런가요? 정말로 불신자들에게는 소망이 없나요? 그리고 정말로 불신자들에게는 신성함이 없나요? 그렇다면 반대로 물어봅시다: 우리 신자들은 소망이 있으며, 또한 신의 세계를 누리고 있나요? 그렇다면 더 깊이 물어봅시다: 과연 무엇이 소망이 있는 삶인가? 과연 무엇이 신의 세계를 살아가는 삶인가? 우리 영적 이스라엘에게는 소망과 신의 세계가 있다는, 이 바울의 주장은 매우 위대한 선포입니다. 신앙인의 참 가치가 바로 여기에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아무튼, 바울의 이러한 지적은 단순하게 묻고 넘어가는 차원이 아닙니다. 바울이 의도하고 있는 ‘소망의 대상’이 무엇인지, 그리고 바울이 말하고 있는 ‘신의 세계’가 과연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우리가 말씀 속에서 발견하고 깨달아야만하기 때문입니다.
2. “이제는, 한 (몸) 새 사람”(13-17절)
바울은 신앙인의 진정한 가치를 결론에서 말해줍니다. 그런데 그 답을 바로 알려주기 이전에, 그 답을 풀어가는 과정을 먼저 말합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 그 분이 하신 일’을 설명해주면서 말입니다. 과연 예수님은 우리의 과거, 곧 ‘하나님 밖에 있어서 원수된’ 우리를 위해서 무엇을 하신 걸까요?
13-17절,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원수된 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또 오셔서 먼 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13절에, “이제는(νυνι)”. 그렇습니다. 이제는 구원의 순간이며, 하나님의 자녀됨의 순간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이 구원의 순간을 어떻게 그려내고 있는지 주목하도록 합시다. 왜냐하면 우리가 통상적으로 알고 있던 것과는 조금 달르게 구원의 의미를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에 대해서 마태/마가/누가/요한복음이 각각 자신의 포인트를 두고 소개하고 있는 것처럼, 이 구원의 순간 혹은 구원의 의미에 대해서, 조금 다른 시각에서 그 의미를 찾는 겁니다. 바울은 구원의 의미를, 우리가 그동안 알고 있었던 것과는 조금 다르게 요약합니다. 바로 수평적인 차원에서 구원의 의미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동안 우리는 구원하면, ‘본질상 진노의 자녀’에서 ‘기업을 잊는 아들이 됨’으로, 다시 말해서 하나님과 나와의 수직적인 차원만을 중시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바울은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 곧 수평적인 차원에서 구원의 의미도 있다라고 말하는 겁니다. 그 중요한 단어가 바로 ‘화평/화목/평안’입니다. (14,15,16,17절).
앞에서 구원받기 이전에, 사람들은 상징적인 차원에서 ‘밖’과 ‘안’으로 나뉘어 존재했습니다. 바울은 이것을 단적으로 ‘원수’라고 말하였지요. 이러한 상태는 동전의 앞뒷면이 아니라, 동이 서에서 먼 것과 같이 “멀리 떨어져 있는” 존재를 말합니다. 그런데 십자가는 그러한 먼 존재를 가깝게 만들었다고 합니다(13절). 십자가는 먼 존재들을 가깝게할 뿐만 아니라, 보다 적극적으로 원수 관계에 있는 서로 다른 사람들 사이에 놓여진 담을 부숴버리기까지 합니다(14절: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15절-본래 원어로는 14절] 허시고”, 16절: “원수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14절: “둘로 하나를 만드사”, 16절: “둘을 한 몸으로”; 14절 ). 그렇습니다. 십자가 구원의 결과로 바울은 물과 기름이 하나로 섞이는, 말 그대로 초자연적이며 그 어느 것으로도 가능하게 만들지 못하는 ‘한 몸이 된 새사람’을 창조했다고 가르칩니다. 그렇지요. 이제 우리가 화살이 과녁의 중심부로 날아가듯이, 우리의 눈도 가운데인 15절로 모이게 됩니다. “이는 이 둘로 자기의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십자가의 의미는 범죄한 우리가 거룩한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으로 설명할 수 있지만, 또한 십자가는 서로 연합할 수 없는, 서로 다른 사람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을 이루는 새사람’이 된 것으로도 설명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15절에 “새사람을 지어”라고 되어있는데, 여기에서 ‘지어’는 창조[create]를 말합니다. 새로운 피조물이라는 거지요!). 그리고 바울은 바로 이점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입니다. 수직적인 구원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수평적인 차원에서 구원의 결과를 경험하는 신앙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이 보여준 한결같은 모습을 기억해봅시다. 예수님이 만나신 우물가의 여인을 생각해봅시다. 그 여인은 남편이 다섯이나 있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마을에서 내놓은 여인입니다. 아무도 가까이 하지 못하는 여인입니다. 그래서 그 여인은 남들이 물뜨는 시간을 피해서 가장 뜨거운 정오였던 것입니다(요 4:6). 그 여인에게 세상은 원수였던 거지요. 그러나 그가 예수님을 만나서 복음을 듣고 구원을 받게 된 후, 그가 보인 반응이 무엇입니까? 이웃을 찾아가서 복음을 전한 것입니다. 원수들에게 생명을 전한 것입니다. 왜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서, 이들은 더 이상 원수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또한 삭개오가 수평적인 구원의 의미를 잘 보여주지 않나요? 그렇습니다. 복음은 수직과 수평 모두에게 있어서 전인격적인 관계의 회복을 선포합니다. 바울이 과녁을 만들 듯이, 매우 정교하게 말씀을 구성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지 않을까요? 바로 수직적인 구원에만 매달린 우리에게, 또 하나의 진정한 과녁으로 ‘수평적인’ 구원이 있음을 좀 보라고 말입니다.
3. “함께 지어져 가는 교회”(18-22절)
바울은 이렇게 새로운 차원에서 구원을 요약합니다. 구원은 하나님과 예수님 그리고 성령님께서 합력하시는 은혜 속에서 관계가 회복되는 것입니다. 바로 18절에 보면, 예수님(“저로 말미암아”), 성령님(“성령 안에서”), 그리고 하나님(“아버지께”)이 구원의 사건에 함께 나오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수직적인 구원을 말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우리는 18절에서 또 다른 부분에도 주목해야 합니다. 바로 “우리 둘이”입니다. 즉, 수평적인 사람 간의 회복입니다. 과거에 “밖에 살던” 외인이며 손님이었다고 한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서 구원을 받은 이후, 이제는 “안에 사는” 하나님의 권속이 된 것입니다.
이제 바울은 가장 심오한 진리를 말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수평적인 구원을 ‘창조하신’ 이유가 과연 무엇이란 말인가? 그냥 평화스러운 모습이 보기에 좋아서일까요? 전쟁보다 평화가 좋기 때문일까요? 모든 나라가 평화를 누리는 것이 진정으로 우리의 소망이며, 신적인 세계를 만드는 것일까요? 어떤 이들은 그렇다고 말합니다. 휴머니스트들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그러나 바울은 수평적인 구원의 궁극적인 목적으로, 다시 말해서 앞서, 우리 구원받은 이들이 가져야할 진정한 소망, 더 나아가 신적인 세계의 완성은 휴머니스트들의 주장과 다르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진정한 소망, 우리의 진정한 신적 세계가 무엇인줄 아십니까? 바로 교회입니다.
그렇습니다. 바울이 말한 가장 심오한 진리가 바로 이것입니다. 교회입니다. 교회는 완전체입니다. 다시 말해서 수직적인 구원이 있어야 하며, 수평적인 구원의 열매가 있어야 존재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수직적으로 볼 때, 그리스도를 머리로 둔 그의 몸입니다(1:23). 그런데 바울은 이 몸에 대해서 보다 실제적인 비유를 들어서 제시해줍니다. 즉, 우리 하나 하나가 벽돌이라는 겁니다. 건물을 세우려면, 출발이 되는 돌을 제일 먼저 놓습니다. 이 돌을 모퉁이돌이라고 합니다. 영어로는 코너스톤(corner stone), 한 쪽 끝에 놓아서 그 돌을 기준으로 돌을 붙여 이어가는 겁니다(20-22절):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이 돌이 되셨느니라.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서로 물과 기름이었던, 그래서 절대로 연결될 수 없던 우리들을 그리스도의 피로 하나로 만들어 주셨습니다. 더 나아가 우리가 서로 연결되어서, 우리 자신이 성전이 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들 안에 하나님이 거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지금 세워나가고 있는 예배당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예배당을 세워나가는 것은 중요합니다. 그러나 이와 함께, 하나님이 진정으로 원하시는 영적 예배당으로써, 온전히 연합한 성도들에 의한 교회 역시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물질적인 건물만 멋지게 세운다면, 그것은 바로 예수님이 비판한 헤롯 성전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나 물질적인 건물과 함께 우리들 스스로의 연합된 영적인 교회가 세워나간다면, 그것은 학개서가 말하듯이 비록 화려한 대리석에 황금과 값진 보석으로 치장하지 않았더라도, 그곳은 바로 주의 영이 임재하며 만민이 기도하는 주의 전이 되는 것입니다.
바울은 에베소 교회에게, 그리고 21세기의 우리에게 동일하게 도전합니다. 이러한 영적인 교회는 주님의 구원의 완성이라고 말입니다. 아까 저는 18절에서 수직적인 구원과 수평적인 구원이 있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이제 바울 메시지의 정리인 22절에서도 똑같이 수직적인 구원이 나옵니다(성령, 하나님, 예수). 또한 수평적인 구원이 나옵니다(바로 “함께”입니다). 오늘 제목을 ‘한 몸이 된 새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이 제목은 제가 만든 것이 아니라, 바울이 아니 하나님이 만드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15절, κτιση) 새사람은 여러분 개인 한 사람이 아니라, 모든 신앙공동체입니다. 십자가가 아니었다면, 단지 돈을 주고 받는 경제적 관계로 끝낼 우리들이었습니다. 십자가가 아니었다면, 무관심하거나 혹은 평생 원수로 지낼 우리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십자가가 있었기에, 우리는 겸손하게 되며, 오래 참게 되며,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수평적 구원의 완성이며, 이것이야 말로 진정한 소망의 완성이며 성령이 역사하는 신적 세계의 삶인 것입니다(4:4): “몸이 하나이요 성령이 하나이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입었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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