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장 1-10절.
세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구원받기 전의 상태(1-3절), 구원을 어떻게 받았는가?(4-7절), 마지막으로 구원받은 후의 새사람(8-10절).
1. “전에는”(1-3절)
구원받기 전의 상태, 3절의 “전에는”입니다 바울이 “전에는/이제는”이란 표현을 상당히 많이 사용하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예를 들면, 골로새서 1장 21-22절에, “전에 악한 행실로 멀리 떠나 마음으로 원수가 되었던 너희를, 이제는 그의 육체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화목케 하사 너희를 거룩하고 흠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그 앞에 세우고자 하셨도다.”
에베소서에서 바울은 다른 서신서와 다르게 철저하게 구원 받기 전의 상태가 얼마나 끔찍한 것인지를 강조합니다. 다른 말씀들이 비교적 짧게 원론적으로 과거와 현재를 비교하고 있다면, 에베소서에서 강력하게 전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비록 우리가 이미 구원을 받은 후의 삶을 살고 있지만, 그래서 과거와 이미 단절된 삶을 살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다시금 사모하는 마음으로 우리의 과거를 되돌아보는 시간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과연 우리는, 구원받기 ‘전/그때는’ 어떤 상태였을까요? 단 한가지 형용사로 구원받기 전의 상태를 정리합니다: 바로 “죽음”입니다(1절). 사실 1절의 우리말(개정/개역개정) 성경의 번역은 조금 미숙합니다. 왜냐하면 원문에는 ‘살리셨도다’라는 단어가 없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1절을 번역한다면,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입니다. 전혀 의미와 효과가 다르죠? (쉬운성경[표준새번역]의 번역을 읽어볼까요? “불순종과 죄로 인하여 여러분은 영적으로 죽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어떻습니까? 확실히 의미와 효과가 다릅니다. 사실 1-7절까지가 한 문장인데, 동사가 5절에 ‘함께 살리다’로 나왔기 때문에, 미리 예측하여 1절에 동사를 집어넣은 것입니다. 그랬더니 본래의 의미가 잘 살지 못합니다. 사실 그래요. 바울은 일부러 조금 어렵게 편지를 쓰고 있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바울은 여기에서 어려운 언어기술을 사용했던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은 우리를 살리셨지만, 그 “살리다”라는 단어 자체를 뒤쪽에 배치시킴으로써, 다시 살기전의 상태 곧 죽음의 상태가 얼마나 심각하고 무서운 것인지를 느껴보도록 했던 것입니다.앞서 3-14절에서 ‘그리스도 안에서’가 많다고 했는데, 사실 원문을 보면 각 절에서 처음과 마지막에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단어를 배치시킵니다. 정말 글자 그대로 그리스도 안에 있도록 한 것이지요. 그리고 2:1도 눈에 보이도록 합니다. 즉 우리의 과거의 상태가 죽음이라는 것인데, ‘너희’라는 단어가 처음에 나오고 ‘너희’라는 단어가 제일 마지막에 나옵니다. 우리의 시작과 끝, 곧 우리의 전부가 바로 ‘허물과 죄로 인한 죽음’으로 꽉 차있음을, 눈에 보이도록 만든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바울이 자신이 배운 철학과 학문을 배설물로 여겼다고 해서, 그것 자체를 버린 것은 아닙니다. 철저하게 바울은 철학과 학문을 사용합니다. 대신 전에는 자신을 위해서 사용했는데, 이제는 하나님을 위해서 사용했던 것입니다.)
죽음의 상태는 정말로 심각하고 무서운 것입니다. 바울은 우리의 과거를 죽음과 관련해서, 실제로 어떻게 나타났었는지를 말합니다. 일단 죽었기 때문에, 죽음 안에서 행동했습니다(2절의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는 바로 죽음 가운데입니다). 구원받기 이전에 우리의 모든 행동은 죽음의 움직임이었다는 겁니다. 왜일까요? 죽음의 영, 곧 사탄을 추종하는 삶을 살았기 때문입니다: 2절에,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참고: 엡 5:6; 속이는 자[사탄]//불순종의 아들이 하나님의 진노를 받게 될 것). 우리말로는 잘 느껴지지 않지만, 원어의 본뜻은, 여기에서 ‘안에(in)’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즉 바울은 우리에게는 두 개의 세계가 있음을 말합니다. in christ vs. in satan. 왜 죽음이었냐? 바로 사탄 안에서 행동하였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믿기 전에 나의 삶이 ‘사탄적’이었다는 겁니다. 정말로 심각했고 무서웠던 과거입니다.
어떤 분은 인정하지 못할지도 모릅니다. ‘내가 예수 믿기전에 사탄적이었다니! 그럼 뿔이라도 달렸단 말이냐! 성인처럼 살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사탄은 아니었다!’라고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렇지 않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겉으로는 살인/도적질을 하지 않았다고 할지라도, 우리의 육체의 욕심, 마음의 소원 자체가 썩었기 때문에, 본질적으로 앞서 언급한 불순종의 아들들(사탄)과 같은 “본질상 진노의 자녀”라는 겁니다(3절). 예수 믿기전에 철저하게 사탄적이었던 겁니다.
우리는 우리의 과거를 잊어버리는 실수를 종종하곤 합니다. 과거가 현재와 미래에 전혀 쓸모 없다는 논리이지요. 혹은 과거 자체가 너무나 치욕적이어서 정말 억지로 잊어버리고자 합니다. 그러나 신앙이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깊은 신앙인은 과거를 더욱 철저하게 기억해냅니다. 이것은 자신을 위축시키기 위해서 기억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의 현재가 얼마나 놀라운 것인지를, 반대로 나의 사탄적인 과거가 반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의 서신서를 읽다보면 바울의 깊은 신앙을 발견하고, 그 겸손함에 고개를 숙이게 됩니다. 다시 말해서, 바울의 초반 서신은 상당히 자신만만한 분위기가 많이 발견됩니다(의로움이 강조된다고 하겠지요). 그러다가 마지막 사역 시점에 쓴 서신서를 보면 바울은 자신을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전에는 훼방자요 핍박자요 포행자였도다”(딤전 1:13). 그 위대한 바울 사도가 햇병아리 제자 디모데에게 자신의 과거를 말하는 겁니다: “그래 죄인 중에 내가 괴수였어!”(딤전 1:15)
50만원 탕감받은 사람과 50억 탕감받은 사람 중에 누가 더 은혜를 느낄까요?(눅 7:47) 예수님의 말씀이 그것입니다: “시몬아 이 여자를 보느냐. 너는 내가 들어올 때 발씻을 물도 주지 않았지만, 이 여자는 눈물로 내 발을 적시고 그 머리털로 닦고 있구나. 너는 내 머리에 그 흔한 감람유도 붓지 않았지만, 이 여자는 값비싼 향유를 내 발에 붓는구나. 이는 이 여자가 나를 더 사랑하기 때문이다. 왜인줄 아느냐?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 바울이 왜 그렇게 뜨겁게 복음을 사랑했는지 여기에서 나옵니다. 그는 자신을 용서해준 하나님의 은혜가 이루 말할 수 없이 컸기 때문입니다. 바꿔말해서, 자신의 과거가 얼마나 사탄적이었는지를 깨달을수록, 십자가의 은혜는 비례하는 것입니다.
2. “그 큰 사랑을 인하여”(4-6절)
그렇습니다. 이제 십자가의 은혜를 생각하도록 합시다. 바울은 오직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구원을 받았냐고요? 내가 어떻게 예수님을 믿을 수 있었던 것일까요? 답은 하나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사랑 때문입니다.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바울은 우리가 구원을 어떻게 받을 수 있었는지에 대해서 자세한 설명을 하지는 않습니다. 단지 하나님의 그 큰 사랑 때문입니다. 이를 달리 말하면, 오직 은혜이지요. 대신에 바울은 구원의 신학적 의미를 완전히 새롭게 제시합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은 것이, 그리스도와 함께 한 것이라는 메시지입니다. 아까 구원받기 전의 상태를 ‘죽음’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구원이란 죽음에서 생명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여기에서 우리의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생명이라고 말씀합니다(이것이 구원입니다): 5절의 “함께 살리셨고”(한단어입니다; 헬라어 ‘조에’로 영원한 삶을 의미하지요). 그것으로 그치지 않고, 6절에 “함께 일으키사”, “함께 앉히시니”( 역시 한단어)라고 합니다. 그런데 6절을 잘보면, 이 말은 앞선 1:20의 말씀과 같은 단어임을 알게 됩니다(‘함께’라는 접두어가 붙은 겁니다). 우리가 그리스도가 얼마나 위대한 분인가를 살펴보면서 읽었던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바울은 우리가 구원을 받는 사건이, 바로 그리스도와 완전하게 연합되는 사건이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나의 구원은 단지 내가 죄사함을 받고 내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으로 설명될 수 없던 겁니다. 나의 구원은 내가 그리스도와 온전히 하나되는 경험인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완전히 새로운 탄생이며, 새로운 피조물인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바울의 독특한 구원관입니다. 다시 말해서 바울에게 예수님의 형상이 나타나는 근본적인 생각의 출발이 바로 여기에서 나오는 겁니다. “나의 구원은 예수님과 하나되는 새사람을 입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음의 말씀을 온전하게 깨닫게 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갈 2:20) 내 안에 예수님이 사는 것, 이것이 바로 구원입니다. 이것이 은혜이고 이것이 바로 새생명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은혜로 된 새사람’입니다.
3. 새사람의 사명(7-10절)
이제 바울은 새사람의 사명을 세가지로 가르쳐줍니다. 원어로, ‘무엇무엇 하기 위해서(히나)’라는 표현이 세 번 나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와 완전히 연합된 새생명으로 구원을 경험한 이유가 있다는 겁니다. 우리에게 구원의 감격 이상으로, 거룩한 하나님의 요구를 듣도록 합시다.
7절에 “나타내려 하심”. 이 말 뜻은, 우리를 구원하신 이유는, 하나님의 은혜가 풍성하다는 것을 이 세상에 보여주고 싶었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세상에 보여주는 삶을 살아야 함을 뜻하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이 세상에 필요한 것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세상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무엇인지를 보여주어야 합니다.
9절에 “자랑치 못하게 함”. 이것은 따로 설명하지 않아도 될 정도입니다. 고전 1:31에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했습니다. 우리의 자랑은 주님을 자랑하는 것이어야만 합니다. 나의 행위나 나의 공로를 자랑해서는 절대로 안됩니다. (그러므로 8-9절을 은혜구원이냐/행위구원이냐라는 이분법적인 이론적 관점에서 보지마시고, 바울이 의도한 대로, 정말 실천적인 측면에서, 교회 안에서 겸손한 삶을 살려는 실천적 메시지로 접근했으면 좋겠습니다.) 제가 개인적으로 생각할 때, 우리의 입술에 해서는 안되는 몇가지 말이 있습니다: 원래 “내가 왕년에” “그거 내가 한 거였어” “나 같으면 더 잘하겠다”
10절에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 여기에서 ‘그 가운데서’란 ‘in Christ’입니다. 10절에서 바울은 우리가 새사람이라고 확언합니다.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해서 지으심을 받았다.” 새로운 피조물이라는 겁니다. 이제 우리의 삶 속에서, 예수님이 나타나시도록 새로운 행동이 요구되는 것입니다. 바울은 2절에서 그때에 너희가 죽음 안에서 ‘행했다’고 했습니다. 그렇지만, 이제는 구원받아 새생명을 소유했기 때문에, “이제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행하여야’ 한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2절의 ‘그 가운데서 행하여’에서 10절의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으로 연결시켜 보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바로 옛사람과 새사람의 근본적인 차이입니다. 한글로는 똑같은 ‘그 가운데서’이지만, 처음 것은 사탄(죽음)이고, 나중 것은 그리스도(생명)인 것입니다. 이 세상의 사람들은 이 둘 중 하나를 살아갑니다. 우리는 처음 것을 살다가, 하나님의 그 큰 사랑을 인하여, 두 번째 새생명을 따라 살게 되었습니다. (이 새생명에 합당한 삶은 4-6장까지 아주 구체적으로 나와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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