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에베소서

에베소서4:1-16,교회의 비젼

호리홀리 2015. 6. 17. 11:58

4:1-16

 

교회가 영적인 건물로 그리스도를 머리로 둔, 유기체라는 깨달음은,  당시의 초대교회의 성도들에겐 여간 충격적인 선언이 아니었습니다. 가장 충격적인 선언은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은혜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겁니다.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장벽이 허물어졌다는 겁니다.  길거리에서 노예를 판매하고 죄인을 공개적으로 참수하는 세상을 떠올려보십시오. 그러한 세계에 복음이 들어가서, 높은자와 낮은자를 하나되게하며, 남자와 여자를 하나되게하며, 주인과 종을 하나되게하며, 적군과 아군을 하나되게 하는 겁니다. 그러므로 복음은 은혜요, 또한 복음은 능력입니다. 하나님의 아들됨은 우리의 노력이 아닌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또한 원수되었던 자들이 서로 영적인 형제가 되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를 변화시키기 때문입니다.

   이제 바울은 ‘한 몸이 된 새사람’으로서의 교회를 보다 자세하게 말합니다. 즉, 교회 안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말하며, 그러한 능력이 교회의 각 구성원에게 역사하여 그리스도의 몸을 온전히 세우게 되는 것이라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4:1-16).  

 

   바울은 4장을 3:1절과 조금 다르게 시작합니다: 4:1절,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입은 부르에 합당하게 행하여,” 여기에서 가장 큰 차이는 3:1에는 자신을 그냥 ‘갇힌 자’라고 말하지만, 다시 마음을 가다듬은 바울은 자신을 ‘주 안에서’ 갇힌 자라고 말합니다. 그동안 바울이 주로 사용했던 말은 ‘그리스도 안에서(엔 크리스토스)’이었음을 기억하시고, 이 ‘주(퀴리오스)’라는 말이 당시엔 로마황제의 전용어(각하)였음을 다시 떠올려보시기 바랍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안에 갇혀’있다라고 말하지 않았고, ‘주 안에’ 갇혔다고 말했습니다. 자신을 가두어 둔 것은 로마의 황제의 권력이 아니라, 진정한 주님(퀴리오스)이신 예수님의 뜻 안에서 이루어진 것입니다(그러므로 앞에서 3:13이 믿음의 확증입니다: “그러므로 너희에게 구하노니, 너희를 위한 나의 여러 환난에 대하여 낙심치 말라. 이는 너희의 영광이니라.”). 정리하면, 이 ‘주’가 로마 황제가 아닌, 예수님이라는 믿음의 고백이며, 반대로 말하면 체제를 부정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자신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 것이지, 로마에 있지 않는 것입니다. 

 

   바울은 우리가 부르심을 입은 사람들이라고 말합니다. 우리의 과거가 소망이 없었고 하나님도 없는 삶이었다(2:12). 그런데 소망이 생겼다. 그 소망이 교회. 이제 바울은 그 소망을 보다 확실하게 말합니다. 바로 부르심의 소망입니다. 그런데 이 부르심은 각자의 개인적인 차원, 다시 말해서 수직적인 차원의 구원을 말하는 소망이 아니라, 수평적인 차원에서 온전히 하나되는 부르심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이제 바울은 이러한 진리를 요약합니다. 전에는 우리가 소망이 없고, 신이 누구인지도 몰랐지만, 그러나 이제는 더 이상 그렇지 않다! 우리야말로 진정한 소망의 사람들이며, 진정으로 성화된 삶(신적 세계)을 누리는 사람이다. 그 소망이란 무엇이냐? 바로 ‘부르심’이다! 이 부르심은 개인적 부르심이 아니라 철저히 공동체적 부르심으로, 온전히 하나를 이루는 부르심이다! 온전히 하나를 이룬다는 것은 신적 세계를 누리는 것과 같은 말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도 하나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이신 하나님 안에서, 구원받은 우리들이 역시 한 몸을 이루며 그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아가는 것, 이것이 바로 성화된(신성한) 삶의 완성인 것입니다.

   

  “부르심을 입은/입다”입니다. 1절과 4절에 나오는 ‘부르심을 입은/입다’. 이 말은 수동태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누가 나를 부르다는 겁니다. 이 ‘부르심을 입다’라는 말이 원어로 에클레세테로, 이 말을 명사형으로 쓰면 여러분들이 한 번이라도 들어본 적이 있는 바로 ‘에클레시아’가 됩니다. ‘에클레시아’가 바로 ‘교회’입니다 본래 이 말은 어떠한 일(회의)을 위해서 시민권을 가진 사람들을 특정한 장소로 불러 모은다는 뜻이었습니다. 그런데, 초대 기독교인들은, 이 단어를 자신들의 모임을 두고 쓰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한자어로 생각하면, 교회(敎會) 곧 (교리/말씀) 가르치는 모임이라고 하겠지만, 본래적인 의미는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인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사단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죄의 지배를 받으며 죽음이라는 피할 수 없는 결과만을 기다리며 살았던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던 우리를, 십자가의 보혈로 말미암아 죄씻음을 얻고 죽음이 아닌 영원한 생명을 받아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드리는 축복된 양자가 되도록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이 바로, 에클레시아, 곧 교회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부르심, 이 에클레시아가 그 자체로 ‘소망’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4절에, “우리는 부르심의 소망 안에 있다”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두 번째는 “하나”입니다. 앞서 말씀 드린 바와 같이, 이 부르심은 개인적인 면에 무게를 두지 않고, 철저하게 공동체적인 면에 무게를 둡니다(개인구원이 없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개인구원은 다른 말씀에서 찾아야 한다는 겁니다). 바울은 이를 위해서 ‘하나’라는 단어를 굉장히 많이 사용합니다. 4절에 (몸이) “하나” (성령이) “하나” ... (부르심의) “한” (소망) 5절에 (주도) “하나” (믿음도) “하나” (침례도) “하나” 6절에 (하나님도) “하나”. 이렇게 “하나”라는 말만 7번을 사용합니다. 혹시 3절에 “하나되게 하신 것”도 ‘하나’가 아닌가요? 아닙니다. 이 말은 “연합”입니다(united;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USA: united state of America). 하나를 7번 사용하고 있습니다. 완전수이지요. 그런데, 우리가  ‘일/하나’라고 말하듯이, 바울도 하나를 서로 다른 단어들로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를 바울은 몇 가지 말로 표현했을까요? 세 가지 단어였습니다(남성형εν; 여성형μια; 중성형εις). 왜일까요? 바울은 깨달은 겁니다. 놀라운 깨달음이지요. 하나님이 한 분 이신데, 구원을 위해서 성부/성자/성령이 함께 역사하신다는 놀랍고도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신적인 신비를 바울은 깨달은 겁니다. 주안에서 우리가 서로 다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하나될 수 있다는 진리가 놀라운 깨달음인 것입니다. 그렇기에 바울은 이 ‘하나’를 7번 즉 완전수로 표현했고, 이 ‘하나’를 마치 삼위일체의 하나님을 말하는 것인양 세가지 단어로 표현하고 있던 것입니다.  교회의 목표는 한 소망입니다. 아까 ‘부르심’이 에클레시아 곧 교회라고 했지요. 그러므로 4:4이 이렇게 이해됩니다: “너희가 교회(부르심)라는 하나됨의 소망 안에서 교회가 되었느니라”)

 

   교회의 비젼은 무엇입니까? 바로 성도를 온전케 하는 것입니다(12절: “성도를 온전케 하며”). 우리말 성경은 번역을 너무 매끄럽게 하려다보니깐, 원어가 말하고 있는 명확한 의도를 잘 보여주지 못하고 있습니다(쉬운성경/NIV이 여기에서는 너무 의역하고 있다; 반대로 직역인 NRS는 좋다). 우리말 성경을 보면, 성도를 온전케도 하고, 봉사의 일을 하게 하고, 그리고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것이구나! 이렇게 세가지가 있구나라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물론 넓게 생각하면 맞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원래 의도한 것은 단 한가지입니다. 그렇습니다. 교회의 목표는 성도를 온전케 하는 것입니다. 원어를 보면, 봉사의 일과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것은 성도를 온전케하는 것의 결과/반응으로 나옵니다(εις).  바울은 철저하게 에베소의 성도들에게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사람이 그 무엇보다 최우선순위입니다.

   그렇다면, 온전케하다라는 말의 뜻은 무엇일까요? 우리말로 잘 이해가 안됩니다. 사실 이 말은 신약성서에서 단 한 번 나오는 단어입니다(καταρτισμον). 뜻은, “갖추게 하다”입니다. ‘훈련시키다/준비시키다’라고도 할 수 있겠지요. 가장 좋은 예는, 에베소서 자체에 나옵니다. 바울이 그리스도인을 영적전쟁을 하는 군사로 비유하면서, 군사로 전쟁터에 나가기 위해서 반드시 갖추어야 할 것들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전신갑주지요(6:11). 그렇습니다. 바울이 유념하고 있는 바가 바로 이것입니다. 교회의 목표는 성도를 정말 성도로써 갖추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일종의 훈련소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하나님의 사람으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능히 해낼 수 있도록, 다시 말해서 그 모든 요소들을 갖추도록 훈련시키고 준비시키는 곳이 바로 교회인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도를 정말 성도로 온전케하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이러한 깨달음을 다른 말로 바꾸어서 반복적으로 가르쳐줍니다. 교회의 목표는 12절에, “성도를 온전케하는(갖추게 하는) 것”입니다. 이 말은 사람이 나이를 먹고 자라면서 얻게되는/갖추게 되는 과정으로 비유하며 설명할 수 있습니다: 13절에, “온전한(성숙한) 사람”으로 “장성한(다 자란) 분량”을 이루는 것입니다. 14절에, “어린아이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15절에 “범사에 그(그리스도)에게까지 자라는” 겁니다.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들어 내는 것, 15절에 의하면, 예수님을 재연하는 삶/ 예수님을 copy하는 삶! 이것입니다. 그렇게 될 때, 교회는 자연적으로 성장하는 것입니다(16절):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 교회는 인위적인 처방으로 성장하는 기계가 아닙니다. 교회는 인격과 신격이 함께 역사하면서, 유기체적인 생명력이 있는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성도가 온전케 세워지면, 교회는 “스스로 세워집니다”. 그러므로 12절이 그것입니다: 성도를 온전케 하면, 그 결과로(εις) 봉사의 일을 한다. 또한 그 결과로(εις) 그리스도의 몸이 세워진다!

   그런데 여기에서 잠깐 잘 생각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어떻게 하는 것이 성도를 온전케하는 거냐? 어떤 것이 성도를 성도로써 갖추는 것이냐? 놀라지 마십시오. 바울은 입을 모아서 강조합니다(11절):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 (12절!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기 위함이다!) 하나님은 교회에게 지도자를 주셨습니다. 성도가 온전케 되는 것은 철저하게 지도자에게 순종함으로 온전케 됩니다.  우리는 이 11절의 말씀을 교회에게 각 부분이 있다/ 각 파트가 있다라고 이해하지만, 그건 잘못된 것입니다(그것은 고전 12장에서 생각할 문제). 바울이 11절에서 언급하고 있는 것은 교회의 조직이 아닙니다. 이들은 모두가 지도자를 뜻하는 말입니다(초대교회에 활동했던 지도자들을 나열하고 있던 것입니다). 그 단적인 예가 ‘목사와 교사’입니다. 우리는 교회에 목사가 있고 교사가 있구나라고 생각하겠지만, 원어로는 ‘목사와 교사’는 한사람입니다. 목사가 곧 교사라는 겁니다. 교사가 곧 목사라는 겁니다. 다시 말합니다. 교회의 여러 조직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교회에 지도자/리더를 주셨다는 겁니다. 그리고 이 리더에게 복종하게 될 때, 성도는 온전케 된다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