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누가복음

누가복음24:13~35,눈이 열릴때

호리홀리 2015. 6. 16. 12:34

< 13절 >
누가복음에서는 부활하신 예수께서 맨 먼저 무덤을 찾아간 여인들에게도  그리고 빈 무덤에 대한 보고를 받고 달려간  베드로에게도 자신을 나타내지 않으셨다.  13절 이하의 이야기에서 엠마오로 내려가던 두 제자에게 먼저 자신을 나타내신 것을 보여 준다. 
그 날에 (엔 아우테 테 헤메라 in the day itself). 는 예수가 부활하시고 여인들과 베드로가 무덤을 찾아갔던 바로 그 날임을  밝히는 것이다. 
두 사람.  열 두 사도 중의 둘이 아니고 예수를 가까이 따르던 사람이 많이 있었고 그 외곽 그룹 중의 둘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한글개역에  이십 오리라고 했지만 원문에는 60스타디온으로 나온다.  한 스타디온이 약 606 feet이니까 60스타디온은 36.360피트이고 그것을 미터법으로 환산하면  약 11.000m니까 이십 오리가 조금 남짓한 거리이다. 
가룟 유다를 제외한 열 한 제자만이 뭉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밖에도 많은 사람들이 있었던 것이다.  예수가 죽으시고 그를 매장하자마자 안식일이 되었으니 안식일 법에 걸려서 여행을 할 도리가 없었다.  유월절 축제를 위해서 모였던 군중들이기에 명절을 다 지내고야 집으로 돌아가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번 유월절에는 큰 거사가 있을 것이라는 소문이 파다하고 그것을 기대하던 군중들이었기에 예수의 죽음은 큰 충격을 주었고 실망을 안겨 주었을 것이 분명하다.  예루살렘의 분위기는 어수선하고 썰렁하고 침울하기만 했을 것이다.  일요일 아침 예수의 무덤이 비어있다는 여인들의 보고와 베드로의 확인 보고는 사람들에게 더욱 혼란을 가져왔을 것이다.  안식일도 지나고 더이상 발이 묶일 필요가 없는 시간인지라  당혹과 실망을 가진 채 허탈한 마음으로 집으로 내려가고 있었다. 
< 14-15 >
 예수를 따르던 사람들은 앞으로 어떻게 될까, 앞으로 어떻게 전개될 것인가, 나라와 민족에 대한 염려, 그들 자신의 장래, 그리고 앞으로의 계획등 할 말이 태산 같았을 것이다. 
문의할 때 엔 토 … 쉬제테인. 서로 묻고 대답하고 토론했다는 것이다. 그때 부활하신 예수는 가까이 오셔서 그들과 같이 걸으셨다.  그 두 제자의 눈에는 어떤 낯선 사람 하나가 다가오는 줄 알았고 또 하나의 사람이 자기들과 동행한다고만 보였다.
< 16절 >
저희의 눈이 가리어져서 그인줄 알아보지 못하거늘.  여기의 '가리어져서는' [이크라툰토]           의 번역으로서 문자적으로 말한다면 어떤 힘에 의해서 붙들렸다는 뜻이다.  자의에 의해서가 아니라 밖으로부터의 어떤 힘이 그들의 눈에 작용을 해서 동행하는 예수를 알아보지 못하게 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미완료직설법 동사로서 그들이 길을 가는 긴 시간동안 벌어진 사건을 말한다.  누가 그들의 눈에게 작용을 했을까?  사람의 자연적인 지능으로써는 초자연적 사건이나 실재를 인식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여기서 알 수 있다.  하나님의 초자연적 간섭이나 힘을 통해야만 초자연을 간파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 17절 >
두 제자가 길을 가면서 서로 주고받는 대화 속에 예수가 끼어들며 그 내용이 도대체 뭐냐고 묻는 것이었다.  그들이 예수 자신의 이야기를 주고받고 하는데 그 사건을 몰라서 묻는 것은 아닐 것이다.  아마도 그 사건의 의미를 아는가라는 질문일 것이다. 
그러자 슬픈 빛을 띠고 머물러서더라.  길을 가던 사람들이 예수의 예상 밖의 질문을 받고 주춤하고 걸음을 멈춘 것인지 아니면 때마침 휴식이 필요해서 가던 길을 멈추었는지 알 수 없다.  그러나 슬픈 기색을 했다는 수식어를 감안한다면 전자의 경우가 아닐까 싶다.  즉 그 두 제자의 마음은 지난 며칠간의 사건으로 가득 차 있고 생각하면 할수록 마음이 우울하고 슬픈 것이었다.  예수의 질문을 받는 순간 그들은 걸음을 멈추었고 얼굴은 수심으로 가득했었다는 것이 있을법한 일이다.
< 18절 >
그 두 제자 중 한 사람의 이름만 여기에 소개되었다.   그들이 가고 있는 같은 방향으로 예수도 가고 계시니 출발점도 같으리라는 추측을 했을 것이며, 유월절을 지키러 예루살렘에 올라갔던 사람 중의 하나라는 판단을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래서 '당신이 예루살렘에 우거하면서 근일 거기서 된 일을 홀로 알지 못하느뇨'하고 핀잔 섞인 질문을 하게 되었을 것이다.  우거하면서 [파로이케이스]           는 임시로 와서 나그네로 산다는 말이다.  그러니까 명절에 와서 며칠간 유한 것을 가리킨다.  예루살렘에서 일어난 예수 사건을 아무도 모를 수가 없는 큰 사건이어서 정신 있는 사람치고 그 사건을 모른다면 참으로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 19절 >
그러나 예수는 모르는 척하고  "무슨 일이요?" 하고 물었다. 그래서 그 두 제자는 그 동행하는 나그네가 정말로 모르는 줄 알고 설명하는 것이었다.  예수의 입장에서는 그들의 인식과 판단을 들어보고 그들에게 진리를 가르치기 위해서 대화의 장을 마련하신 것이다. 
나사렛 예수의 일이니.  한 마디로 말해서 나사렛 사람 예수에 관한 일들([타 페리 예수 투 나자레누]                            )이라는 것이다. 

그는 하나님과 모든 백성 앞에서 말과 일에 능하신 선지자여늘.  예수에 대한 일반의 견해와 인식을 요약한 것이다.  사람들은 예수를 하나의 선지자로 보았다.  결국 예수는 사람 중의 하나로서 특이하다면 하나님의 영감을 받아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사람이라는 점이다.  선지자 중에도 말과 일에 있어서 능력이 있는 선지자라는 판단을 받으신 분이다.  말씀에 권위가 있고 많은 기적을 행하심으로써 이러한 평가를 받기에 넉넉한 분이셨다.  하나님과 모든 사람 앞에라는 말은 예수가 하나님을 위해서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서 일하는 사역자라는 뜻으로 말한 것이다.  엄격히 말하자면 예수는 하나님으로서 사람을 향하여 역사하시는 분으로 보아야 할 것인데 여기서 사람들의 인식은, 예수가 일개의 사람으로서 하나님을 위해서 그리고 사람을 위해서 활약하신 것으로 인식하고 있다는 말이다.
< 20절 >
우리 대제사장들과 관원들이 사형 판결에 넘겨주어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19절의 "무슨 일들 말이냐?"라는 예수의 물음에 대해서 첫째 대답은 "나사렛 예수에 관한 일들입니다"이고 이제 둘째 대답이 20절에 나온다.  문자적으로 번역한다면 "그리고 어떻게([호포스]     ) 대제사장들과 우리의 관원들([아르콘테스]         , 산헤드린 회원들)이 그를 넘겨주어 사형 판결을 받게 하고 십자가형을 받게 했는가 하는 것입니다"가 될 것이다.  19절에서는 예수가 누구냐 하는 설명이었고, 20절에는 예수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를 말하는 것이다.  많은 일이 있는 중에 가장 뚜렷이 집약되는 것은 대제사장들과 관원들이 예수를 빌라도에게 넘겨주어 사형판결을 받게 하고 결국 십자가형에 처하게 했다는 사실이다. 
< 21절 >
여기서는 예수의 추종자들이 그에 대해서 가졌던 기대와 견해가 소개된다.  우리는 이 사람이 이스라엘을 구속할 자라고 바랐노라.  민중과 특히 예수의 측근자들은 예수의 기적과 권위 있는 말씀을 보고 들으면서 언젠가부터 그에게 희망을 걸기 시작했다.  예수는 이스라엘 민족을 로마의 질곡에서 풀어 자유케 하실 것이라는 희망을 가지고 있었다.  [엘피조멘]           은 미완료 직설법 동사로서 과거 진행적 행동을 말한다.  그들은 희망을 계속 가지고 있었다는 말이다.  '구속할' ([루트루스타이]           ) 은 본디 속전을 주고 노예를 속량한다는 뜻이지만  여기서는 NRSV의 각주에 있는 대로 단순히 해방시킨다는 뜻으로 보는 것이 어울릴 것 같다.  그런 희망을 가지고 있었는데 뜻밖에 예수가 잡히고, 죽는 등 사건들이 일어났고, 그런 일이 있은 지도 벌써 사흘이라는 것이다.
< 22-23 >
게다가 더욱 이상한 것은 예수를 따르던 사람들 중 여자 몇 사람이 이른 아침에 예수의 무덤에 갔다가, 그의 시체는 보지 못하고 돌아와서 한다는 말이, 자기들은 천사들의 환상을 보았고, 천사들은 예수가 살아 계신다고 하더라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예수의 제자들이 놀랬다는 것이다.  여기의 놀라게 하였으니 ([엑스에스테이산 헤마스]               )는 아마도 "어리둥절하게 만들었다"고 표현하는 것이 나을 것이다.  [에크]   와 [이스테미]      가 합한 단어로서 "밖에 선다"는 뜻이다.  즉 "전신(얼)이 나간다"는 말이어서 좋은 의미로는 황홀하게 만들었다는 말이다.
< 24절 >
제자들 중 몇이 그 여자들의 말 듣고는 무덤으로 달려갔지만,여자들의 말이 사실인 것을 알게 됐을 뿐 예수의 시체는 보지 못했다는 것이다.  요한복음에서 말하는 베드로와 다른 한 무명의 제자가 무덤을 찾아갔던 이야기와 맞먹는 내용이다.  여기까지 이 두 제자는 예루살렘에서 일어난 일들을 차근차근 순서대로 예수에게 주워 섬겼다.  그들은 인간의 감각을 통하여 듣고 보고 경험한 것을 솔직하게 그대로 털어놓은 것이다.  인간의 감각을 초월한 것에 대해서는 감지(感知)할 도리가 없었다.  부활이라든가 부활한 존재에 대해서 인식한다는 것은 그들에게 있어서 능력 밖의 일이다. 
< 25절 >
지금까지 인내심을 가지고 끝까지 그 두 사람의 말을 들은 예수는 . 미련하고 선지자들의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인간은 어디까지나 인간이고 제한된 지능을 가진 존재이기에 초자연적인 것을 감지할 수 없는 것이 당연하다.  그러기에 하나님은 보통 사람에게 당신의 영을 부어 초월한 능력을 주셔서 보지 못할 것을 보게 하시고 듣지 못할 것을 듣게 하시고 알지 못할 것을 알게도 하신다.  이렇게 하나님의 영의 감동을 받은 사람을 선지자라고 한다.  그러므로 참된 선지자가 하나님의 영의 감동으로 한 말은 보통 상식을 초월한 것일지라도 믿어야 하고 믿을만한 것이다.  이런 근거 하에서 예수는 그 두 제자에게 핀잔을 주는 것이다.  선지자의 예언이 있는데도 미련하여 깨닫지 못하고 그 말을 믿는 일에 더디다고 꾸지람을 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선민 이스라엘에게 때때로 선지자들을 보내셔서 신비스러운 계시를 하셨다.  이스라엘 백성은 적어도 초자연적 실재(하나님의 존재와 그의 활동)를 인정하고 시인해야 하는데 마냥 육감적이고 시공(時空)적인 것만을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예수 사건을 표면적으로만 판단한다고 그 진의를 짐작도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 26절 >
유대인은 메시아 대망 사상을 오래 전부터 가지고 있으면서도 참된 이해를 가지지 못하고 있었다.  메시아는 부유하고 권세 있는 귀족 혹은 왕가에 태어 나서 세상의 권력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구출 해방시킬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고 있었다.  특히 주전 2세기 중엽부터는 묵시적 종말론 사상이 가미되면서 메시아가 도발적으로 나타나서 격변을 일으키어 천지가 개벽하는 식으로 새 세상을 만들어 준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예수에게 그러한 기대를 걸었던 것이다. 그러나 예수는 생전에 자주 자신의 수난을 예고했었고(마 16:21;막 8:31; 눅 9:22;17:25), 그 후에 오는 영광을 말씀하시면서 (요7:39; 12:16,23; 13:31 -32; 17:1,5) 유대인들의 그릇된 메시아관을 시정하셨다.  여기서 다시 예수는 그 두 제자에게 그 원칙을 되풀이하셨다.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메시아는 반듯이 고난을 받아야 하고 반듯이 영광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에데이]      라는 무인칭동사는 필수적으로 '…을 해야 한다'는 뜻을 나타내는 [데이]    의 미완료형으로서 메시아이신 예수의 수난과 승귀의 필수성을 말하고 있다. 
< 27절 >
이런 원칙을 말씀하신 후에 예수는 구약성경을 풀어서 당신 자신에 관한 일들을 설명해 주셨다. 예수 시대에는 '율법과 선지자들'([토라 베느비임]             )이라고 말하면 구약성경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여기서 모세라는 말은 율법서를 가리키는 말일 것이다.  그러니까 27절을 문자적으로 풀이한다면 "모세의 글(율법서)로부터 시작하여,그리고 선지자들의 글에서부터 시작하여 모든 성경들을 가지고 자기에 대한 일 들을 자세하게 설명하셨다"가 될 것이다.  율법과 선지자들의 글 외에도 성문서(聖文書, [케투빔]       )에 속하는 책들도 있었기 때문에 그 모든 글들을 가지고 자기자신이 누구이며 자기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 존재인가를 자세히 설명했다는 것이다.  < 28절 >
마침내 그 두 제자는 자기들의 목적지에 가까이 이르렀다. 그러나 예수는 더 멀리 가시려는 듯한 태도를 보이셨다. 
< 29절 >
그 두 제자는 한 두 시간 예수와 동행하며 대화하는 중, 특히 성경을 풀어가면서 메시아론을 설명해줄 때 무언가 압도적인 감동과 깨달음이 자기들에게 오는 것을 경험한지라(24:32) 예수가 지나쳐 가시는 것을 말리고 더 많은 시간 그와 같이 있기를 원했을 것은 틀림없다.  동양적 환대(歡待)의 습관으로 보더라도 저녁이 되어 해가 져가는 시점에, 동행한 나그네를 만류하는 것이 당연한 처사였을 것이다.  예수는 그들의 만류에 응하여 같이 엠마오 마을로 들어갔다.
< 30절 >
저녁 식사 때 예수는 그들과 함께 앉아 식사를 하게 되었고, 빵을 들어 축사하시고 그것을 뜯어 그 둘에게 나누어 주셨다.  각각 자기가 자기의 빵을 뜯어 먹는 것이 상례인데, 그 자리에서 예수가 하시는 행동은 이례적이었고, 따라서 며칠 전에 예루살렘 어떤 다락방에서 예수가 제자들과 함께 앉아 마지막 만찬을 잡수실 때 하던 것과 너무도 같은 것이었기 때문에,그 순간 그들은 충격적인 깨달음의 경험을 하기에 이르른 것이다.
< 31절 >
저희 눈이 밝아져 그인줄 알아보더니.  [디에노이크데이산]             은 [디아노이고]          의 부정과거 수동 직설법 동사로서 피동적으로 완전히 열렸다는 뜻이다.  16절에서는 눈이 무엇엔가에 의해서 붙들려 보지 못하는 상태에 빠졌었는데, 여기서는 그 어떤 힘에 의해서 눈이 아주 열려서 볼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 분이 바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신 예수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는 것이다.  그 순간 예수는 그들의 시각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 32절 >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부활하신 주님이 그들의 시야에서 사라지자 지난 몇 시간 사이에 일어난 사건을 상기해 본다.  길을 걸으면서 오랫동안 예수는 성경 말씀을 종횡무진 여기 저기 끌어다가 숨은 진리를 풀어서 알려주셨다.  풀어 주실 때의 "푼다"는 말은 [디아노이고]          의 변화인 바  31절에 있는 눈이 활짝 열렸다는 동사와 같은 것이다.  성경을 해석하여 그 뜻을 밝히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다.  특히 그 진리를 철저히 남김없이 풀어준다는 일은 인간에게는 불가능한 일인지 모른다.  그러나 하나님이신 예수는 성경 말씀의 본 뜻을 여지없이 밝혀주셨을 것이다.  그 때 그 말씀을 들은 제자들의 마음이 불에 타는듯이 뜨거웠다는 것이다.  [카이오메네 엔]             은 '불타고 있었다'라는 진행적 동작을 의미한다.  예수가 길에서 성경을 풀이하실 때 줄곧 그들의 마음은 뜨겁게 타고 있었다는 것이다.  마음이 스스로 타는 것이 아니라 성경의 진리가 마음을 태웠다는 뜻이다.  덥다든가 뜨겁다는 정도가 아니라 불이 붙는다는 것이니 우리의 표현은 너무도 약하다는 느낌이 든다.
< 33절 >
예수가 시야에서 사라지고, 그들의 영안이 열려 예수는 참으로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알게 된 그들은 정신이 버쩍 들었다.  시간이 늦었다는 것이 문제가 아니었다. 거리가 멀다는 것도 문제가 아니었다. 당장에 자리에서 일어나 예루살렘으로 되돌아갔다.  거기 가 보니 밤은 깊었는데도 열 한 제자와 다른 이들이 이미 모여있었다.
< 34-35 >
모인 사람들의 화제는 예수가 참으로 살아나셨다는 것과 시몬 베드로에게 예수가 나타나셨다는 사실이었다.  예수가 부활하신 날 하루에 여러 가지 사건이 벌어졌다.  부활의 주님은 엠마오 길에 있는 두 제자와 동행하셨고,예루살렘에 있는 사람들에게도 예수는 당신의 사심을 나타내 보이셨고,베드로 개인에게도 자신을 나타내셨다.  즉 동시에 여기도 계시고 저기도 계시는 예수의 초월성을 말해 주는 것이기도 하다.  엠마오 제자들은 그들 나름으로 경험담을 설명하였고 특히 빵을 뗄 때 그들이 예수의 정체를 파악할 수 있었다는 말을 늘어놓았다.


예수의 부활을 깨닫고 그것을 믿을 수 있는 것은 인간만의 노력이나 사색이나 연구에 의해서 되는 것이 아니다.  물리나 화학 실험실에서 학자들이 실험을 하거나 연구함으로써 예수의 부활을 검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인간의 자연적, 생리적 눈으로는 부활의 주를 발견하지 못한다.  부활은 초자연적 사건이다. 자연인이 초자연적 실재를 보거나 알 수는 없는 것이다.  엠마오 길의 제자들은 부활하신 주님과 동행하면서도 그인 줄을 몰랐다.  눈이 무엇엔가 붙들려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다가 무엇엔가에 의해서 열려졌을 때 비로소 그를 알아보았던 것이다.  초자연의 실재를 보아 알 수 있는 것은 초자연적인 능력과 간섭에 의해서만 이루어지는 것이다.  엡 1:19에 의하면 "하나님의 힘의 강력의 역사하심을 따라서 믿는다"라는 했다. 우리가 하나님의 힘 ([이스퀴스]      )과 강력([크라토스]       )과 역사하심 ([에네르게이아]         )가 아니면 예수를 믿을 수 없다는 말이다.  그와 같이 예수의 부활을 알고 믿는 것도 하나님의 능력이 작용함으로써 이루어진다고 생각된다.  그러므로 예수의 부활을 믿는 자는 행복한 자들이며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은 입은 자들이다.

 엠마오 길의 제자들이 부활의 주님을 알아보게 된 것은 성경말씀의 강해를 들으면서였고 결정적으로는 성찬식이 베풀어질 때였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당신의 뜻을 가르치기 위한 책이요, 성령의 감동이 있는 책이니까, 진실한 마음으로 그리고 복종하는 마음으로 그 책을 상고할 때 성령이 감동을 주실 것이며, 따라서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이스라엘을 고난의 종으로 택한 사실, 피를 흘림으로써만 죄사함을 얻는 다는 진리, 양이나 소가 피를 흘림으로 그 대신 죄인은 사죄를 받고 생명을 얻게 된다는 진리, 예수는 이러한 섭리 속에서 대속의 제물로 오셨고, 그가 대속적 죽음을 죽으시고 부활하시는 그 일로 말미암아 인류가 구속을 받고 생명을 얻는다는 것 등을 예수는 성경을 풀어 설명해 주셨을 것이다.  성경은 확실히 부활을 가르친다.  십자가 뒤에 오는 부활을 가르친다.
엠마오 길의 제자들이 결정적으로 부활의 주님을 볼 수 있었던 것은 예수께서 빵을 떼시는 행동을 하실 때였다.  우리는 성만찬식을 거행할 때마다 부활하신 주님이 그 식전에 영으로 임재하심을 믿고 기쁜 마음으로 그 식전에 참여하게 된다.  성만찬을 [유카리스트] eucharist 라고 하는데 본래 [유카리테오]           라는 말에서 왔고 감사한다는 뜻이다.  성찬식을 행할 때마다 우리는 죽어버리신 예수를 기념하는 것이 아니라, 죽으시고 살아나셔서 그 식전에 임재하시는 사실을 감사한 마음으로 생각하고 기뻐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자주 성찬식을 가지고 부활의 주님을 마음으로 볼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엠마오 길의 제자들은 부활의 주를 만난 후 새로운 활력과 기쁨과 희망을 가지고 새 출발을 했다.  죽으신 예수만 알고 있었다면 그들은 고향으로 돌아가서 옛날의 삶에 파묻히고 말았을 것이다.  실망 중에 돌아가던 사람들이 밤잠도 자지 않고 되돌아와 다른 제자들과 합세하여 예수 부활을 고백하고 전하는 공동체를 이루었다.  이 한 가지 사실만 보아도 예수의 부활이 얼마나 확실한 가를 알 수 있다.  부활의 주를 보지 못했다면 그들이 어째서 뒤로 돌아서 교회를 이루었겠느냐 말이다.  부활이 없었다면 교회는 생겨나지 못했을 것이고 우리들의 삶도 희망이 없을 것이다 <24: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