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누가복음

누가복음5:1-11,죄인의식

호리홀리 2015. 6. 16. 12:11

눅 5:1-11

 

  어부였던 베드로가 게네사렛, 즉 갈릴리 호수에서 물고기를 잡다 예수를 만나는 장면입니다. 이 장면이야말로 베드로 신앙의 기초석이 된 사건입니다. 첫 번째 예수님과의 만남 장면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찾아간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갈릴리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가운데 베드로에게 예수님이 다가간 것입니다. 베드로와의 첫 만남은 예수님이 베드로의 배를 잠시 빌려 쓴 것에서 시작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러 사람들이 너무 많이 몰려와 예수님은 사람들을 육지에 앉히고 배에서 말씀을 전한 것입니다. 아마도 이것이 말씀하시는데 매우 효과적이었을 것입니다. 바다같이 큰 갈릴리 호수에서 바람이 대개 호수 안에서 육지로 불기 때문에 마이크가 없던 당시에는 그렇게 하는 것이 사람들에게 잘 들렸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말씀을 마치시고,  베드로에게 고기를 많이 잡게 해 줍니다. 그런데 이것이 참 이상한 것입니다.  베드로는 이 호수에서 잔뼈가 굵은 어부인데 예수님이 말씀 이야기가 아니라 물고기 잡는 법을 베드로에게 가르치신 것입니다. 이것이 단순한 사람 대 사람의 일이라면 예수님은 결례를 행한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전공을 무시하고 끼어들은 것입니다. 대개 자기 일에 전문적이지 않은 사람이 다른 분야의 전문가를 무시하는 경향성이 있듯이 예수님도 그런 형국입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4절) 이것이야 말로 비전문가가 전문가에게 한 수 코치하는 것인데 이 세상에서는 그렇게 바람직한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더 이상한 것은 베드로가 이 예수님의 말씀을 무시하지 않고 그대로 따랐다는 것입니다. “선생님, 우리들이 밤이 새도록 수고하였으되 잡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저는 이것을 참 이상하게 생각했습니다. 베드로가 미쳤었나? 왜 어부도 아닌 사람의 말을 듣고 그물을 내렸을까? 여기서 “선생님”이라는 말은 8절에 나오는 “주님”이라는 말과는 다른 말입니다. 거기에서는 신앙고백적으로 예수님께 신성이 있다는 것을 고백하는 말이지만 여기서는 그냥 상대방을 존중하는 뜻으로 쓰는 “선생님”입니다. “또 말씀에 의지하여”라는 말도 우리가 흔히 쓰는 “하나님의 말씀을 절대적으로 의지하여”라는 말은 아닙니다. 상대방을 존중해서 그냥 그렇게 해 보겠다는 것입니다.

 

 저는 베드로가 특별히 순종적인 사람이고 좋은 사람이라서 이렇게 했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어차피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에게 순종하는 것이 신앙적으로 보았을 때에도 그렇게 중요한 것도 아닙니다. 베드로는 보통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예수님의 말씀을 그렇게 따를 수 있었을까요? 여기에는 두 가지 요소가 있습니다. 한 가지는 어차피 밤새도록 고기를 잡으려고 노력했지만 수확이 없었는데 누군지는 모르지만 이 사람의 이야기를 그냥 들어보자 하는 것입니다. 밎져 보았자 본전이기 때문입니다. 또 한 가지는 자신이 배를 빌려주는 동안 베드로도 예수님의 말씀을 경청한 것입니다. 그 말씀을 들으면서 예수님에 대한 신뢰가 생긴 것입니다. 이런 말씀을 하시는 분이면 내가 그분의 말대로 할 수 있겠다. 아마도 베드로의 마음 속에는 위의 감정이 병존했을 것입니다. 여기까지는 베드로가 아직 신앙에 이른 것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베드로는 예수님께 호의적으로 대하고 그 말대로 그냥 따라 해 본 것입니다.

 

 백 퍼센트 순도의 믿음은 아니었지만 베드로의 이런 행동에 예수님은 놀라운 일을 일으키셨습니다. “그렇게 하니 고기를 잡은 것이 심히 많아 그물이 찢어지는 지라.”(6절) 아마도 베드로는 지난 밤에 예수님이 그물을 던지라고 한 쪽으로도 그물을 내려 보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말대로 했더니 고기 한 마리도 잡히지 않던 것이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많이 잡힌 것입니다. 얼마나 많이 잡혔든지 자기 배와 동료의 배에 고기를 다 채우자 배가 가라 않을 정도가 되었던 것입니다.

 

본문의 초점은 예수님의 말씀대로 했더니 고기가 많이 잡혔더라가 아닙니다. 바로 그 다음에 이것을 베드로가 어떻게 해석하고 받아들였는가에 초점이 있습니다. 베드로는 이 때 무엇을 생각했을까요? “ 해 보았더니 그대로 되네. 이 분 점장이가 아닌가?” 이런 생각을 했다면 그 다음 장면이 나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베드로는 어부였지만 다른 유대인들처럼 메시아를 고대하고 살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메시아를 고대했는데, 베드로는 이 장면에서 바로 자기가 만난 분이 메시아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알려줄 수 있는 분으로 생각했을 것입니다. 아마 그 이상이었던 것 같습니다.

 

“시몬 베드로가 이를 보고 예수의 무릎 아래에 엎드려 이르되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8절)라고 한 것입니다. 이 장면은 구약 이사야서 6장에서 거룩한 하나님을 만나 벌벌 떨고 있는 이사야를 생각나게 합니다.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내가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5절) 베드로는 신현 앞에 저절로 무릎이 꿀려졌고 구약에서 하나님 앞에 선 모든 사람이 그렇게 했듯이 하나님 앞에서 떨어지기를 간구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이 죄인임을 자동적으로 알고 고백한 것입니다.

 

이것은 베드로에게 하나님을 만난 사건이었습니다. 10절에 보면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무서워하지 말라”고 하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현현 앞에 무서워 떨고 있었던 것입니다(눅 1:13, 30; 행 18:9; 27:24). 이것이야 말로 베드로 신앙의 가장 기초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베드로는 이것이 있었기 때문에 후에 공식적인 신앙고백도 했고, 잠시 예수님을 부인했다가도 다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이 때 같이 있었던 야고보와 요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하지만 이런 장면이 없이 돈 궤를 맡아 이익을 얻으려고 처음부터 예수를 좇아갔던 가룟 유다는 결국 자살하고 만 것입니다.

 

여기서 예수님을 만났을 때 베드로가 처음으로 고백한 것, “나는 죄인입니다.”라는 의식이 중요합니다. 이것은 베드로의 후예가 되는 우리 각자가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에 앞서 반드시 거쳐 가야 하는 첫 과정이요 단추입니다. 이것이 없으면 예수님의 제자가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 선 사람이 첫 번째로 느끼는 것은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요즘에 사람들은 설교자가 청중을 향해 “당신들은 죄인입니다.”라고 선포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것보다도 예수 믿고 어떤 일이 잘되고, 기분이 좋아지고,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다는 것을 듣기 좋아합니다. 요즘 유명한 설교자 중에 죄에 대한 깊은 터치가 별로 없습니다. 신앙은 죄의 문제에서 시작하는 것입니다. 죄를 느끼지 못하고 자신이 죄인임을 마음 속 깊이 깨닫지 않으면 신앙의 문에 아직 못 들어간 것입니다. 한 마디로 구원받지 못한 것입니다. 죽으면 지옥에 가는 것입니다. 죄의 문제를 느끼고, 깨닫고, 해결한 사람만 천국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우리가 죄인임을 느끼지 못하는 것은 우리의 마음이 무디어진 증거입니다. 1) 알람 시계를 처음에는 들리지만 매일 울리다보면 그냥 알람시계가 울려도 잠이 듭니다. 2) 노동자들이 손을 많이 사용하면 굳은 살이 생겨 감각을 잘 못 느끼는 경우가 있습니다. 3) 남도 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옆에 사람을 보고 위안을 받고 자신이 정당하다고 계속해서 마음 속에 mind-control을 합니다. “너는 죄인이 아니야. 그만하면 훌륭해.”

 

 죄라는 것은 특정한 잘못을 저지른 것에 대한 것만이 아닙니다. 요한복음 16:7에는 성령이 오셔서 하시는 사역 가운데 죄가 무엇인지 깨닫게 해 주신다는 말씀이 있는데, 거기에서 그 죄는 바로 “믿지 않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는 것, 하나님이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것이 죄입니다. 마태복음 25장에 보면 이 세상의 약자들에게 하지 않은 것이 곧 죄라고 합니다. 바울은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으면 저주를 받을지어다라고 말합니다. 이 모든 죄는 무슨 특정한 잘못을 했다기보다 마음 속이 올바르지 않아서 무슨 올바른 일을 하지 않을 것에 대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