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고린도전서

고린도전서5장,교회의 순결

호리홀리 2015. 6. 9. 11:40

 

 

바울은 저들의 교만에 대비되는 사도의 고난을 열거함으로써 저들이 부끄러움을 느끼게 만들었다.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가 말에 있지 않고 능력에 있음을 분명하게 천명했다. 이제 바울은 그렇게 잘났다고 하는 사람들의 영적 상태와 행실을 조명함으로써 그들의 실상이 무엇인지 확인해 준다. 물론 실상을 확인하여 기를 죽이려는 것이 목적은 아니다.  고린도 교회가 안고 있는 문제들을 점검하며 처방을 내리는 것이다(5-15장).

 

교회의 순결(5:1-13)

   

“너희가 그렇게 잘난 것처럼 말만 잘 하더니 입에 담기에도 남사스러운 음행이 너희 중에 있다는 말을 들었다. 이게 말이 되는가!” 자세한 실상은 기록되지 않아 알 수가 없다. 그러나 그들 중의 혹자가 저지른 일은 신앙을 갖지 않은 바깥세계에서도 들어본 일이 없는 성격의 것이라 했다. 그들 중 누군가가 자신의 아버지의 아내와 동거를 했다. 물론 친모(親母)와 이런 일이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마도 아버지의 처첩이었는데 돌아가신 후 취하여 동거하게 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참고: “계모와 구합[苟合]하는 자는 그 아비의 하체를 드러내었으니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지니라”[신 27:20]).

이런 사람이 공동체에 있었으나 그냥 용납하면서 오히려 ‘자랑’을 했다고 한다(6절). 아마 이 자랑은 앞서 언급한 ‘지혜론자’들의 자유에 대한 궤변이었을 것이다. 지혜자에게는 “모든 것이 가하다[허락되었다]”는 슬로건이 고린도전서에 자주 암시되어있다(6:12, 10:23, 참고, 8:1-2).

 

권징(5:3-5, 9-13절)

 

 3-5절에서 바울이 말하고 있는 바는 무엇일까? 특히 5절은 무슨 뜻일까? ‘사단에게 내어준다’는 것은 5:13의 뜻으로 이해할 수 있다. ‘육신을 멸한다’는 것은 죄악된 성품의 제거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바울이 여기서 사용한 단어 ‘사륵스’(sa,rx)는 고전 3:3, 롬 7:5, 18, 25, 8:3-8, 갈 5:13, 19, 24 등에서 하나님을 대항하는 반역적인 인간 본성을 가리킨다. 따라서 ‘육신을 멸한다’는 의미는 갈라디아서 5:24의 맥락에서 이해하는 것이 좋다(“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sa,rx]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그렇다면 3-5절에서 바울이 주장하고 있는 일은 9-13절에서 구체적으로 설명되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9-13절에서 바울은 이런 음행을 한 자와 성도의 교제를 중지할 것을 강력하게 주장한다. 세상에 있는 이런 사람들과의 관계를 단절하라는 말은 아니다(10절). 우리는 세상 속으로 보냄을 받았고 세상 속에서 살도록 부름을 입었다. 세상과 단절할 수는 없다. 그러나 믿음의 공동체의 일원임을 자처하는 형제나 자매가 이런 중죄를 범할 경우 “너희 중에서 내어 쫓으라”고 명령한다. 현대의 교회가 이 명령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것인가?

이 명령은 개인보다 신앙의 공동체의 순결을 염두에 둔 것임을 명심해야 된다. 개인적 배려는 분명하다. 정죄하여 멸망시키기 위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진정한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함이다(5절). 그러나 이런 행위가 용납됨으로써 교회의 양심이 화인 맞아 규범이 와해되고(참고, 롬 1:32) 그리스도의 몸이 더럽혀져서는 안 된다. 교회는 순결하게 보전되어야 한다(6-8절).

그렇다면 이런 범죄를 저질러 교회에 물의를 일으킨 사람들을 향한 치리는 어떻게 진행되어야 할까? 이러한 모든 사안들을 다 까발려서 공개적으로 문제화해야 된다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 않은 사안들이 많음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모든 것은 교회의 덕을 세우는 차원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당사자의 가족들도 고려해야 된다. 모든 것을 너무 단순하게 취급하는 것은 위험하다. 그러나 표출되어 공개된 사건의 경우 교회는 분명한 입장을 취해야 된다. 개인적인 차원에서 처리될 수 있는 비밀스러운 일들을 고의적으로 끄집어내어 불필요하게 사건을 확대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그러나 공론화 된 것에 대한 교회의 입장은 분명해야 된다.

바울은 여기서 이런 사람들과 일체의 교제를 중단할 것을 강권한다(11-13절). 그렇다면 이것으로 그 사람과의 관계는 완전히 끝나는 것인가? 마태복음 18:15-20에 나온 예수의 가르침을 참고하여 어떤 과정이 필요한 것인지 숙고해 보아야 할 것이다. 권징(勸懲)은 그 영혼을 위한 것이 되어야 한다. 그(녀)를 고쳐주고 교회를 순결케 하기 위한 사랑에서 나와야 한다. 사랑의 마음이 없으면 권징은 증오의 복수나 공격성의 출로가 될 뿐이다. 이것은 한 마리 어린양을 찾는 목자의 마음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마 18:12-14). 그리고 회개하여 돌아오는 사람을 우리 주님처럼 깨끗하게 용서하는 자비심을 가져야 한다(마 18:21-35). 마태복음 18:15-20은 더 큰 단락 18:12-35의 한 부분으로 읽도록 되어있다. 우리는 모두 용서받은 죄인이지 태생적 의인이 아니다. 우리는 모두 탕감받은 채무자이지 채권자는 더욱 아니다. 율법주의적인 정죄와 단절이 주목적이 아니다. 회개를 구하고 있으며 진정한 회개가 있을 때는 한없이 자비로운 용서와 화목이 있어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바울의 진정한 관심은 6-8절에 표현되어 있다. 누룩없는 떡, 즉 유월절의 무교병과 같이 순결한 교회가 되자는 말씀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실제로 거룩하게 만들고자 부르셨다. 교회의 아이덴터티는 분명하다. 거룩하신 하나님의 거룩한 공동체가 교회이다. (1) 묵은 누룩을 내어 버리라. 옳지 못한 옛 습관들을 과감하게 끊어버려야 한다. 여기에는 아픔이 있다. 단절의 고통도 있다. 그러나 단절해야 할 것을 단절했을 때 하나님께서 크신 축복을 주신다. (2)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을 생각하라. 죄의 대가는 크고도 무섭다. 우리의 죄가 가볍게 용서받은 것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라는 엄청난 고통의 대가를 치른 것이다. 절대로 값싼 은혜(cheap grace)가 아니다. 비용을 크게 치른 costly grace임을 기억하라. (3) 순결을 가꾸어 나가자. 하나님 우리를 정결케 하시옵소서. 죄 용서의 정결케 하심이 있었다.  삶의 성화(聖化)가 이루어져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