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고린도전서

고린도전서 2장,성령의 감동으로

호리홀리 2015. 6. 8. 13:10

바울의 고린도 전도(2:1-5)

 

(1) 대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할 때 심약하여 두려워하고 떨었다니...

 

바울에게 말의 지혜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는 많이 공부한 학자였으며 열정 가득한 웅변가이기도 했다. 희랍의 철학자들에게 말장이라는 말을 들을 정도였다(행 17:18). 그를 고소하기 위해 대제사장이 고용한 변사(辯士) 더둘로도(행 24:2) 바울을 당하지 못했다. 그런 바울이 말의 지혜에 의존하지 않았다고 했다. 그리고 그런 능변가였던 바울은 십자가의 복음을 전할 때 그 속으로 여전히 떨었다 한다. 바울이 준비가 안 되어서 그랬던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 속에 있는 인간의 연약성 때문이었다. 이것을 이렇게 고백하지 않았으면 다른 이들이 전혀 눈치 채지 못하고 지나갔을 수도 있다.

 

(2) 그러나 성령의 역사에 의지하여 성공을 거두었다.

 

바울의 복음 전도에는 강력한 성령의 역사가 따랐다. 데살로니가전서 1:5, 로마서 15:17-18을 읽고 그의 복음 전도 현장의 모습을 상상해 보라. 바울은 두려워하며 떨었고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준비했을 것이다. 할 수 있는 최선의 표현으로 설명도 하고 설득도 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복음을 듣고 순종하는 믿음이 인간 말의 지혜에 있지 않다는 것은 분명히 알고 있었다. 그의 두려움과 떨림은 하나님을 향한 경외에도 그 이유가 있었다. 그는 준비한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겼다. 듣는 사람들의 심령도 하나님께 맡겼다. 왜냐하면, 듣는 사람이 인간 말의 지혜로 고개를 끄덕일지언정 그 가슴의 결단은 성령의 역사에 달려있기 때문이다. 능력은 하나님께 있다. 내가 힘 다해 무너질 정도로 일하더라도 영혼 속에서 역사하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영감인식론(2:6-16, 靈感認識論, pneumatic epistemology)

 

복음의 핵심인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의 메시지가 인간에게 이해될 수 있는 길을 서술하고 있는 것이 고린도전서 2:6-16이다. 이를 편의상 영감인식론이라 부른다. 성령의 감동이 있어야 하나님의 지혜를 깨닫게 된다는 말이다. 그 전에는 그것은 하나님의 미련함일 뿐이다. 성령께서 역사하여 영혼의 눈이 뜨이는 순간에 스캔들은 하나님의 사랑이 되고 미련해 보이던 것이 하나님의 지혜가 된다. 즉 믿음이 생겨난다.

 

(1) ‘모르는 사람들’과 ‘아는 사람들’

 

본문에는 아는 자와 모르는 자 사이의 구분선이 명확하게 그려져 있다. 이 시대의 관원이나(2:8), 멸망해가고 있는 이 시대의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사랑하는 이들을 위해 준비해 놓은 것이 무엇인지 까맣게 모르고 있다. 인간의 오감(五感, 눈과 귀)이나 지성(마음)으로는 전혀 그것을 알 길이 없다고 한다(2:9). 이들은 “육에 속한 사람”이라 불리며 하나님의 영의 일을 이해할 능력이 없다(2:14).

가장 지혜로운 인간이라도 하나님의 일들을 알 수가 없는데, 그것은 바로 신이 아니고 인간이기 때문이다(1:21, 25). 역설적인 표현을 빌자면, ‘인간 지혜의 무지’가 너무 깊기 때문에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의 메시지가 인간적 지혜를 사용하는 인간에게는 오히려 천치(天痴, moria) 같이, 또는 스캔들로밖에는 들리지 않는다(1:22-23). 그들은 스스로 안다고 생각하지만 하나님의 일에 대해서 사실상 아무 것도 모르고 있다는 말이다. 알고 보면 인간 지혜를 구사하는 자들은 자신이 자신에게 속고 있는 자들이다(3:18). 이러한 혼동의 상황에서 바울은 판별력의 역전(逆轉)을 천명한다. 저들은 자신들의 지혜의 기준으로 십자가의 메시지를 천치 같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의 2:6-16에 따르면, 하나님께서 그들이 자신들의 지혜에 갇힌 천치들이라고 생각하신다. 그들이 부끄러움을 당하는 것이 이상한 일이 아니다(1:27). 하나님의 일을 이해하는데 인간의 지혜는 아무 쓸모가 없다 한다. 그래서 바울은 자신이 고린도에 처음 와서 그들과 복음으로 만났을 때 ‘인간의 지혜’보다는 ‘인간의 무지’를 택했다고 주장한다 - 그는 오히려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을 했었다(2:2). 인간의 지혜는 하나님의 일과 관련해서는 총체적 무지가 된다. 그러나 ‘하나님께 속한 것들’을 아는 사람들이 있다.

바울의 회의적 인식론은 2:10a에서 정지된다. 좀 더 정확한 표현을 쓰자면, 이 시점에서 하나님의 주도적 개입에 의해 인간 무지의 상태가 유보된다고 할 수 있다 - “그러나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하여 우리에게 드러내 주셨습니다”(필자 역). 상태 역전의 분위기가 명백하게 드러나며, 2인칭 복수 인칭 대명사 ‘헤민’(우리에게)은 문장 내 강조의 위치에 배치되어 있다. “우리에게” 저들이 모르는 것을 하나님께서 알도록 해 주셨다. ‘저들’의 무지와 ‘우리’의 앎이 극명하게 대조된다. 반복되어 등장하는 ‘우리’는 하나님께로부터 온 영을 받았고(2:12),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것이 있어서(2:10) ‘알고’ 있으며(2:12), 아는 것을 말할 수 있을 뿐 아니라(2:13) 그리스도의 마음 자체를 소유하고 있는 사람들이다(2:16). 보통 사람들과 구분되어 하나님의 일들을 알 수 있는 사람들이 ‘우리’라는 범주로 분류된 일군(一群)의 사람들이란 말이다.

‘아는 사람들’로서의 ‘우리’는 2:15의 “신령한 자들(호이 프뉴마티코이)”로 정의된다. 이들은 성령을 소유한 자들로서 “육에 속한 사람들”과 구분이 되며 후자는 하나님의 영과 아무 상관이 없는 일반인들이다. 그러나 소위 ‘프뉴마티코이’라는 용어가 고린도 신앙 공동체 내에서 특별히 구분된 일부 특수 집단을 가리키고 있는 것은 아니다. ‘프뉴마티코이’가 이 단락에서 “육에 속한 자”와 대조를 이루면서 정의가 되듯이, 1:18-2:16 전체에서 이분법적 인간 구분이 하나의 일관된 흐름으로 이어지고 있다. 이러한 이분법적 구분의 맥락에서 볼 때 1:18의 “구원을 얻는 자들”은 ‘프뉴마티코이’와, “멸망하는 자들”은 “육에 속한 자들”과 동일한 집단이다. 바울은 갈라디아 그리스도인들을 지칭할 때도 이 용어를 사용했고(갈 6:1), 그의 편지들 여러 곳에서 믿는 자들을 성령을 소유한 사람들로 표현하고 있다(롬 8:9, 14-16, 갈 3:2; 4:6, 빌 3:4, 살전 1:6; 5:19). 바울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일들을 알 수 있는 자들은 바로 ‘프뉴마티코이’이고 그래서 진리를 아는 일은 필연적으로 성령(프뉴마)의 역사와 관련을 갖는다.

 

(2) 영감인식론(靈感認識論)의 구성

 

무지에서 인식으로 넘어가는 전환점에 하나님의 영이 개입되어 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일, 즉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하신 일들을(2:9) 성령을 통하여 우리에게 보이셨다 했다(2:10). 성령은 모든 것을 꿰뚫어 찾아낼 수 있고 하나님의 깊숙한 곳까지 알아낸다. 성령께서 하나님의 깊은 마음속을 찾으실 수(에라우나오 = search = 검색) 있기 때문에 성령을 가진 우리가 하나님의 생각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성령을 받은 ‘우리’가 ‘프뉴마티코이’이고 그 성령 때문에 성령이 하나님의 마음을 읽으면서 하나님의 일에 대한 이해가 우리에게 전달된다는 것이 바울이 제시하는 ‘프뉴마티코이’의 내적 인식 과정이다. 이른바 영감인식론(pneumatic epistemology)이라고 명명할 수 있는 개념이다.

바울의 영감인식론은 ‘영감받은 수사학’과 ‘진리의 분변력’으로 확장된다. 우리 안에 있으면서 이러한 내적 관계를 형성하는 성령으로 인해서 깨달음의 인식뿐 아니라, 인식한 것을 전달하는 언어작용까지도 성령의 가르침을 통할 수 있게 된다(2:13). 그래서 앞에서 바울이 선포한 것으로 언급된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의 메시지’가 바로 성령이 가르쳐 준 언어의 표현임을(로고이 디다크토이 프뉴마토스) 암시하고 있다. 육에 속한 사람들은 이 성령이 가르쳐 준 언어적 표현인 복음의 메시지가 어리석은 것으로(1:23) 보이고 인식이 되지 않는데, 그것은 성령에 의해서만 분변(分辨)이 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2:14b). 여기까지 온 바울은 더욱 대담한 발언으로 이행한다. 성령을 가진 자들, 즉 ‘프뉴마티코이’는 모든 것을 분별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단언을 한다(2:15a). 성령을 소유한 ‘우리’는 종국적으로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진 자들이며(2:16b) 그래서 하나님의 일과 관련해서는 올바른 진리 판단을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자들이라는 주장이다. 그래서 바울의 영감인식론은 1) 근본적으로는 성령을 통해 하나님의 복음의 메시지를 깨닫게 되는 ‘마음의 인지적 변형’에서 2) 내재한 성령이 성령을 소유한 자의 언어 표현을 주장하는 ‘수사학적 영감’을 거쳐 3) 성령의 사람은 하나님의 일과 관련해서 올바른 판단을 내릴 수 있다는 ‘진리 주창의 자격’으로까지 발전한다.

 

 

복음은 여전히 스캔들이다. 복음은 여전히 신비이다. 그리스도 밖에 있는 사람들이 복음을 이해 못한다고 해서 그 진리가 비진리가 되는 것은 아니다. “어떤 자들이 믿지 아니 하였으면 어찌하리요. 그 믿지 아니함이 하나님의 미쁘심을 폐하겠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롬 3:3-4a). 믿음은 여전히 참된 지식이다. 우리는 믿기 위하여 아는 것이 아니라 알기 위하여 믿는 것이다. 십자가의 도는 영원한 진리이며 하나님의 능력이다. 복음에 담대하자! 복음을 굳게 잡고 나가자.

 믿음은 성령의 감동으로부터 온다. 믿음 조차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이다. 그분의 선택의 은혜로 우리가 우리 되었다.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으니 오는 그를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요 6:44). 인간으로서의 최선은 다한다. 그러나 최종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하라. 성령에 의존하기 위해 계속 기도하자. 우리가 알려고 노력을 다하고 책도 열심히 읽지만 올바른 판단은 결국 주님께 있다. 사람의 생각에 기대하지 말자. 하나님 의지하시고 신뢰하며 내일 죽어도 오늘 하나님께 붙어 있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