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고린도전서

고린도전서1:1~17,고린도교회의 시작

호리홀리 2015. 6. 8. 12:51

고린도교회의 시작

 

 

 

고린도는  "부촌"으로 불리었다. 해협에 위치하여 두 항구의 주인이 되었기 때문이다. 하나는 아시아로 향했고 또 하나는 이탈리아로 향해 놓여있었다. 이로 인해 그렇게 멀리 떨어져있는 두 나라 사이의 상품 교환이 쉽게 이루어질 수 있었다... 이탈리아와 아시아 양쪽의 상인들이 여기서 짐을 내려놓는 것이 환영을 받는 선택이었다. 또한 육로를 통해 펠로폰네소스로부터 나가는 수출품과 들어오는 수입품에 대한 관세도 열쇠를 쥐고 있는 저들에게 주어졌다. 후대에도 이점은 마찬가지였다.

 

 기원전 146년 로마에 의해 파괴되면서 고대의 상업적 번영이 일단 중단되었다. 그러나 기원전 44년 줄리어스 씨이저에 의해 로마의 식민지로 재건되었다. 이때 식민지를 건설했던 주 인구는 한 때 노예였다가 자유인이 되었던 사람들이었다. 따라서 바울의 고린도 사람들은 약 1세기 동안에 사회적 경제적으로 상승이동을 한 사람들이었다고 보아야 한다.

 한 때 희극 시인 아리스토파네스가 ‘코린티아조마이’(= 고린도화 하다. 고린도처럼 되다)라는 말을 만들어 ‘문란하다’라는 뜻으로 쓸 정도로 고린도 시는 성도덕이 문란했던 것으로 생각되었다. 고대의 지리학자 스트라보의 보고에 따르면 고린도 광장에 있는 아프로디테의 신전에는 1000명가량의 신전 매춘부들이 있었다고 할 정도였다. 물론 이것은 로마의 식민지 이전 고대의 희랍 도시로 있을 때의 일이고 또한 과장이었다고 평가되고 있다. 그러나 교역이 활발한 항구도시들이 그렇듯이 단정한 장소로 여겨지지는 않았다.

 당시 그레코-로마 세계의 도시들이 대부분 그랬듯이(행 17:16) 많은 이방 신전들이 있었다. 특히 광장 한 가운데에는 큰 아테나의 동상이 서 있었다(고전 8:5를 참고할 것).

 

바울의 고린도 전도 - 사도행전 18:1-17

 

(1) 주후 51년 경 바울이 고린도를 떠났다(행 18:12-17).

(2) 바울이 고린도에 편지를 써 보낸 적이 있었다(고전 5:9).

(3) 글로에의 사람들로부터 고린도 교회 내의 분쟁에 대해 들었다(고전 1:11, 11:8). 이때 전해들은 다른 교회 문제에는 성적인 부도덕(5:1-8, 6:12-20), 교인들 간의 소송 문제(6:1-11), 성찬식의 혼란(11:17-34), 신자들의 부활에 대한 논란(15:1-58) 등이 있었다.

(4) 고린도 교인들이 바울에게 몇 가지 문제들에 대해 묻는 편지를 보냈다(7:1). 기혼자들의 성관계(7:1-40), 우상의 제물(8:1-11:1), 영적인 은사 활용(12:1-14:40), 예루살렘 교회를 위한 헌금(16:1-4) 등에 대한 질문들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5) 바울은 에베소에서 이 편지를 썼다(고전 16:5-9).

 

고전 1:1-9

 

 고린도 교회는 골치 덩어리들이 모여 있는 곳이었다. 이런 모든 문제들 가운데서도 바울은 이들을 ‘성도’(聖徒, 하기오이 = 거룩한 사람들)라 불렀다. 어떻게 성도(saints)가 되는가? 여기에 있는 우리도 성도인가? 다름 아닌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은혜와 평강 때문이다(3절).

 

이렇게 문제투성이인 사람들을 놓고도 바울은 하나님께 감사했다(4절). 그것도 항상 감사한다고 했다(4). 그가 감사한 이유로 들고 있는 구변(口辯)과 지식(5절)은 사실 여러 가지 문제를 일으킨 원인이었다. 그러나 구변과 지식 자체가 지닌 긍정적 측면을 생각하여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고 있다. 나는 우리 교회 교인들로 인해 하나님께 감사하고 있는가? 감사할 조건들을 찾아보자. 이렇게 감사할 때 우리는 함께 이런 소망을 표할 수 있다.

 

너희가 모든 은사에 부족함이 없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기다림이라. 주께서 너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에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끝까지 견고케 하시리라(1:7~8).

 

 

고린도 교회의 분열(1:10-17)

 

(1) 바울이 인사말과 감사의 말을 마치자마자 돌격하다시피 처리하려고 달려든 문제는 공동체 내의 ‘분열’이었다. 바울이 고린도교회에 제일 우선으로 원하는 것은 일치였다. 그래서 편지의 본론에 들어가자마자 이렇게 권한다. “다 같은 말을 하고 너희 가운데 분쟁이 없이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라”(1:10b). 여기서 ‘온전히 합하다’라는 의미로 사용된 헬라 동사 ‘카타리조’는 마가 1:19(마태 4:21)에서도 쓰였다. 이것이 함의하고 있는 바가 무엇일까?

 

(2) 어떤 성격의 분열이었을까? 노골적으로 교회가 완전히 갈라져 있었던 것은 아니었던 것 같다. 그러나 분명히 특정 인물들의 이름을 걸고 나뉘어져 있었다. 여기 등장하는 인물들 중에 현재 이 편지가 쓰일 때 그들과 함께 고린도에 있던 사람은 누구인가?

 

(3) 12절에서 언급하는 다음 인물들.

 

아볼로(행 18:24-28)

게바(고전 15:5, 갈 2:8-9)

 

 

(4) 바울과 아볼로 사이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3:4-7, 4:5, 16:12 등을 읽어보고 바울과 아볼로의 관계가 어떠했는지 추리해 보라. 이들이 언급하는 지도자들은 서로 대립관계에 있지 않았다. 그렇다면 이들을 빙자한 자칭 추종자들이 스스로 분쟁을 일으키는 명분으로 지도자들의 이름을 사용했다는 것을 쉽게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이에 대해서 바울은 자기를 추종한다고 나서는 사람들을 꾸짖음으로써 문제의 본질에 접근한다(13-17절). 세례자가 있는 세례조차도 분열의 명목이 될 수 없다(13-17절).

 

 절대로 그리스도가 나뉘게 해서는 안 된다(13절). 누구도 자기 편 만드는 일을 그리스도의 일과 혼동해서는 안 된다. 바울이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못 박히신 것이다. 누구든지 그리스도보다 더 중요하게 부각되는 지도자가 있다면 그는 그리스도를 욕되게 하는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향기이며 편지로서 그분을 드러나게 하는 모범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가리고 내가 앞에 나서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 이상의 위치를 차지하는 존재들이라면 칼빈도 웨슬레도 루터도 위험하다.

 

분열은 항상 존재하는 위험이다. 잘못 건드리면 교회가 쪼개지기도 한다. 가장 모범적인 교회라고 하는 곳에서도 사람들 사이에 균열은 존재한다. 그렇기 때문에 일치와 하나됨을 위한 노력은 그리스도인의 영원한 사명이다.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라”(10b).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몸이 하나이요 성령이 하나이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입었느니라. 주도 하나이요 믿음도 하나이요 세례도 하나이요. 하나님도 하나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엡4:3~6).